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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기도문(7)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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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죄 사함 받기를 위해 기도하라.

우리 자신을 위한 첫 번째 기도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날마다 육적인 필요를 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날마다 배고프기 때문에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하는 것처럼, 날마다 죄를 범하기 때문에 날마다 죄 사함 받기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 

죄에는 원죄와 자범죄의 2가지가 있다. 원죄는 1회적이므로 단수로 사용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복수로 사용되었다. 원죄가 아니라 일상적인 범죄를 의미한다.
요13장에는 세족식의 장면이 나온다. 10절에서 주님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미 목욕하였다는 것은 원죄가 사함 받고 구원받았다는 것이며, 발을 씻어야 한다는 것은 일상적인 범죄를 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죄 사함을 받았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가 용서함 받고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았다. 
but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는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는 것이다. → 용서받지 못한 죄인, 용서받은 죄인
파스칼 → 죄를 범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 죄를 깨달은 사람. // 전자는 희망 없는 죄인이고, 후자는 희망 있는 죄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는 불신자의 죄가 아니다. 아버지 앞에서 자녀들의 죄이다. 자녀들의 죄는 법정에서 다루어지는 죄 문제와는 다르다. 아버지는 자녀들의 죄를 얼마든지 용서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담대함과 확신과 용기를 갖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이 기도를 자주해야 한다. 
목욕을 해서 깨끗한 사람은 발이 더러워지면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는다. 발을 자주 씻게 된다. 
옛날에는 웬만히 더러워도 잘 안 씻었다. 발에서 냄새나도 그냥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요즈음은 조금만 더러워도 못참는다. 머리를 아침저녁으로 감는 사람은 한번이라도 건너뛰면 견디지를 못한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더러운 죄를 용납하지 못하는 결벽증이 있어야 한다.

2. 이 기도의 전제조건 : 먼저 당신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어거스틴, 마틴 루터는 이 부분을 가리켜 “무서운 기도, 두려운 기도”라고 표현했다. 
만약 나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기도한다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지 말라고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펄전 →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주기도문을 반복하면 당신은 그때마다 당신의 사형판결문을 낭독하는 것과 같다.

(1) 용서를 명령하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용서를 명령하셨다. 
막11: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셨더라
우리가 용서해야만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신다는 것이다. 

용서라는 단어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이며, 가장 위대한 단어 중 하나일 것이다. but 인간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또한 용서라는 단어이다. 

베드로는 주님께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질문한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2번까지 용서하라고 가르쳤다. 랍비들은 3번까지 용서하되 4번째 용서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가르쳤다. 베드로는 후하게 생각해서 7번을 제시했다. but 예수님의 대답은 베드로의 생각을 뛰어넘으셨다. →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마18:21,22) 일곱이라는 숫자나 일흔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숫자적으로 490번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무제한으로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그가 너에게 죄를 짓는 대로 너는 용서하라는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주님은 베드로에게 1만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신다.(마18:23-35) 
당시 이스라엘이 로마에 1년 동안 낸 세금이 800달란트이다. → 1만달란트는 값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비교되지 않는 1만달란트를 용서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여러분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33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용서할 만 해야 용서하지,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용서해...”하지 않는가? 
우리가 누구를 용서하는 것은 그가 변화되거나, 잘못을 뉘우치는 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주님도 우리를 용서하실 때 우리가 용서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기 때문에 용서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얼마나 큰 것을 용서받았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자유롭게 다른 이들을 용서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을 용서하기가 힘들다면, 먼저 당신의 죄와 그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고통을 보여달라고 기도하라.

(2) 본을 보여주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명령만 하시지 않고 직접 본을 보여주셨다. 
엡4:32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3:13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원수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도 자기를 못박은 자들을 용서하셨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을 배운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7:60”라고 기도하였다.

3. 당신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야 할 이유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를 위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한다.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화해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 
오늘날 기독교가 세상사람들에게 지탄받는 가장 큰 이유는 교파분쟁 때문이다. 

우리는 심판의 권한이 하나님께만 있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신32:35 보수는 내 것이라 그들의 실족할 그 때에 갚으리로다 그들의 환난의 날이 가까우니 당할 그 일이 속히 임하리로다. → 보수는 하나님의 것이며, 용서는 우리의 것이다. 
법정에서 검사가 피고에게 엄한 형벌을 주려고 하지만 형을 선고할 수 있는 사람은 판사뿐이다.

내게 죄지은 자를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가? → 용서하셨다. 
요8: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2) 상대방을 위해

나에게 잘못한 사람은 나의 위로와 동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남을 위해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남을 위해 살아야 한다. 나에게 잘못한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에게 필요한 것은 정죄가 아니라 용서이다. 

(3) 나를 위해

A. 남을 용서하지 않고는 나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없다.

본문에 이어 바로 언급 → 14-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B. 용서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용서하면 다른 사람과 화목하게 살게 되고 삶의 행복을 얻게 된다. 
but 용서하지 않는다면 먼저 자신에게 해가 된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는 것은 마치 내 가슴에 불을 품고 있는 것과 같다. 숯덩이를 품고 있으면 그 숯덩이는 상대방을 태우기 전에 먼저 나를 태워버리고 말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 사람은 계속해서 괴로운 기억과 사탄이 주는 압박감 속에서 살게 된다. 아픈 상처는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현명하다. 

누군가를 용서할 때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은 심장마비를 일으킬 위험이 2배, 50대 사망률이 5배

미국의 한 저명한 내과의사 → “나의 병원에서 환자의 50%를 퇴원시킬 방법이 있다. 그것은 환자들의 마음에 용서의 마음을 넣어주는 것이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폴 트루니에에게 불치의 빈혈증에 걸린 소녀가 치료를 받았다. 어떤 정신요법이나 약물요법으로도 낫지 않았다. 마침내 산중의 요양소로 보내어졌는데, 얼마 후 완전히 정상이 되었다. 그래서 그 소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보았더니 평생 지독하게 미워했던 사람을 갑자기 용서했더니 마음이 환해지고 삶에 대해 긍정적이 되고 몸의 병이 점점 나았다고 했다.

부부싸움을 하면 “누가 아쉬운가 보자!”라고 하는데, 그리스도인은 내가 아쉬운 자이기 때문에 먼저 용서해줘야 한다. 

4. 결론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 인간관계 속에서 고통을 경험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누군가 나에게 잘못하고 상처를 줄 때 우리는 참고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의 분노를 극복하지 못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분노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대신 그것을 잘 키운다. 그 상황을 반복하여 생각하며, 심지어는 내가 당한 상처가 좀 더 잘 드러나고 내가 멋지게 보이도록 장면들을 재편집하기도 한다. 이 얼마나 초라한 사람인가? 

윌리암 아더 워드는 “우리가 복수할 때 우리는 짐승과 같다.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할 때 우리는 인간 같다. but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 같다”고 말했다. 당신은 어떤 삶을 살기 원하는가?

우리가 나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잔인할 정도로 철저해야 한다. but 남에 대해서는 관대한 사람이 되자. 일흔번에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사람이 되자. 

그런데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다. 어떻게 용서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내 힘으로는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나에게는 도대체 용서할 능력이 없다. 오직 기도하는 사람만이 용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용서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고 성령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그리고 그 후에 우리의 죄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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