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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은 누구신가(5) :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요 2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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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신가(5) :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요 20:24~29) 
 
나와 우리

미국이나 유럽에서 살다 온 분들을 보면 참 재미있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서양 사회가 워낙 개인주의가 발달하다 보니 남들이 뭐라던, 남이 어떻게 보든 별로 신경을 안 쓰고 나 좋은 대로 합니다. 옷차림도 남들이 내 옷을 어떻게 보느냐에 신경 안 쓰고 나 입고 싶은 대로 입습니다. 그래서 긴 옷을 입든, 짧은 옷을 입든, 찢어진 옷을 입든 내 입고 싶은 대로 입지 남들이 어떻게 보는지 신경 안 씁니다. 

우리나라도 최근에는 겨울에 반팔 입은 사람도 있고, 특히 한여름에 부츠 신은 사람도 있습니다. 민소매는 물론이고 배꼽티가 유행한 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머리를 노란색이나 형형색색으로 물들여도 그런가보다 합니다. 그만큼 우리나라도 많이 달라진 것입니다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나라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몹시 신경을 쓰고 또 남의 옷차림에도 관심이 참 많습니다. 

며칠 전 길거리를 가다가 옷을 좀 야하게 입은 아가씨들을 보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눈이 갑니다. 저를 음흉한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그냥 눈이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만 아니라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흘끔흘끔 쳐다보는데 심지어 나이 지긋한 어른들은 "어휴, 미친 것들" 하고 손가락질을 하더군요. 하지만 서양에서는 안 그럽니다. 서로 신경 안 씁니다.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꽤 오래 전 일입니다만 미국에 유학 간 아들이 어느 날 찢어진 청바지에 머리를 노란 물 들이고 귀국한 것입니다. 게다가 남자 녀석이 목걸이에 귀걸이까지 하고 나타난 것입니다. 부모는 공항에서 그 모습을 보고 기절을 합니다. 집에 와서도 제발 옷 좀 바꿔 입고 귀걸이 좀 빼라고 사정을 하는데 유학 간지 오래 된 아들 녀석은 미국 사람이 다 돼서 "나 입고 싶은 대로 입는데 누가 뭐래나?"며 말을 안 들어서 한국에 있는 내내 싸움만 하다 갔답니다. 지금 들으면 웃을 얘기지요. 

지금 그런 사내 녀석이 한둘입니까? 하지만 미니스커트 입었다고 길거리에서 경찰관이 자를 들고 다니며 치마 길이를 재고, 장발 단속하던 때가 그리 오래 전이 아닙니다. 교회에 슬리퍼 신고 반바지 입고 왔다고, 여자들이 '나시'라고 하나요? 민소매 입고 왔다고 교회당에도 못 들어오게 하던 때가 엊그제입니다. 그만큼 세상이 많이 바뀐 것입니다. 

옷차림 이야기만 했지만 이것은 '우리'를 우선시하는 한국문화와 '나'를 우선하는 서양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많은 현상 중에 일부분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둘 중에 어떤 사고방식이 더 좋을까요? 어느 쪽이 더 좋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를 중시하는 우리나라는 공동체성이 좋고 남을 배려하는 것은 좋지만 자칫 개인의 개성이나 의지를 무시할 위험이 있습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이런 문제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는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며 개인을 무시하는 일들이 너무 많지요. 반대로 서양은 개인의 개성이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개인주의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느 한 쪽이 무조건 좋다고는 못 하고 다 장단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영적인 세계에서는 좀 다릅니다. 영적인 세계, 신앙세계에서는 철저하게 '내'가 먼저입니다. 믿어도 내가 믿고 구원 받아도 내가 받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세계에도 공동체나 우리가 없는 게 아닙니다. 교회에 모여 함께 신앙생활 하고, 같은 성경과 찬송을 보고, 다같이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믿은 후에나 있는 일이지 반드시 '내'가 먼저 있고 나서야 공동체도 있고 교회도 있는 것이 신앙세계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분명히 알아 두십시오. 하나님은 '내가'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내가'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는 것이 아닙니다. 단체로 받는 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 집 대표로 엄마가 잘 믿으면 온 집안 식구가 다 천국 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엄마가 믿어 엄마는 천국 가는 것이고, 나는 내가 믿어야 천국 가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안 믿는 남편 분을 만나 "교회 좀 나오세요" 했더니 뭐라는지 아십니까? "아, 저야 마누라 예수 잘 믿으니까 나중에 마누라 천국 갈 때 치맛자락 붙잡고 같이 가면 되지요, 뭐" 합니다. 

여러분, 가능합니까? 세상에는 부부동반 티켓도 있고, 보험에도 부부동반 보험이 있어서 아내가 든 보험 남편도 혜택 받을 수 있지만 천국 가는 티켓에는 부부동반표가 없습니다. 부부동반 혜택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아내는 아내의 믿음으로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것이고, 남편은 남편의 믿음으로 천국 가는 것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따라 하십시오. "믿음은 일대일이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 나와 하나님의 1:1 관계가 먼저입니다. 교회도 내가 믿는 사람들의 모임일 뿐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우리'가 없고 '내'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오늘 본문에도 여기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십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의 19절부터 보면 안식 후 첫날 저녁 제자들이 모인 곳에 예수님이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이 유대인들이 자기네도 붙잡으러 올까봐 겁나서 문도 꼭꼭 걸어 잠그고 있는데 놀랍게도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 방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슨 초능력자냐? 벽도 뚫고 들어오게...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미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 분이기 때문에 문을 걸어 잠그고 어떻게 해도 상관없이 그 방에 들어오실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깜짝 놀라는데 예수님은 못 박히신 손과 창에 찔리신 옆구리를 보이시면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는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이 있은 다음에 예수님의 제자 중에 도마라는 사람이 그 자리에 나타납니다. 마침 그는 무슨 볼 일이 있었는지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실 때 그 자리에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다음에 거기 나타난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아무리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해도 도무지 믿지를 않습니다. 

25절에 나온 것처럼 다른 제자들이 아무리 전부 부활하신 주님을 봤다고 해도 '내가' 예수님을 만나봐야 믿겠고,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 그 허리 창 자국에 넣어보지 않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도마 같은 성격을 가진 분들이 있습니다. 안 보면 못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도마를 '의심 많은 제자'라고 부르는데 도마는 의심 많은 사람이라기보다 내가 봐야 믿고, 내가 만져봐야 믿고, 내가 경험해야 믿는다는 아주 자기중심적인 사람입니다. 이런 분들은 남들이 아무리 뭐라고 한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내 생각, 내 판단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참 개인적인 신앙입니다. 

아마 이런 도마를 보며 다른 제자들이 정말 피곤해 했을 것 같습니다. 짜증도 좀 났을 겁니다. "아니, 우리가 그렇다면 좀 그런 줄 알지, 왜 남들 말을 저렇게 안 믿나? 자기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저러냐?" 손가락질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사람 하나 있으면 참 피곤해요. 자기 생각이 좀 있더라도 남들이 좋다면 좀 따라주고, 남들이 다 그렇다면 그런가보다 하면 되는데 이런 사람들은 꼭 "내가 봐야 한다, 남들이 뭐라던 내가 중요하다"고 하니 정말 왕따 당하기 딱 알맞은 사람이지요.

그런데 이런 도마를 만나기 위해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십니다. 26절을 보면 그로부터 여드레가 지나서 이번에는 다른 제자들뿐 아니라 도마도 있는 자리에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십니다. 왜 예수님이 왜 그 자리에 또 나타나셨을까요? 시간이 많아서 그러셨나? 여유가 많으신가? 주님은 다른 제자들보다 특별히 도마를 만나기 위해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증거가 27절부터 나오는데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하고는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단 한 마디만 하시고 그 다음에는 오직 도마하고만 대화를 나누고 계십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예수님이 도마 한 사람만 위해 그 자리에 다시 나타나신 것인가? 그 이유는 예수님과 도마 사이에 오간 대화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27절을 보세요. 예수님이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도마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봐라." 아마 그 순간 다른 제자들은 참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 예수님도 참 되게 할 일 없으신가보다. 왜 저런 개인적이고 자기주장밖에 안 하는 도마 같은 친구에게 나타나서 만져보라고, 손을 넣어보라고 하실까? 우리가 그토록 충분히 알아듣게 설명했는데도 끝까지 안 믿는 저런 제자에게 왜 저렇게 친절하게 하실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도마가 하도 의심이 많으니까 "정 그러면 한 번 만져보고 넣어봐라, 그럼 믿겠지" 하신 것일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도마는 분명히 개인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자기 눈으로 보고 자기 손으로 안 만져보고는 안 믿는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굳이 이런 도마 한 사람을 위해 다시 나타나셔서 또 굳이 그로 하여금 보게 하고 만져보게 하고 손을 상처에 넣어보게 하신 것은 그의 믿음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남들이 아무리 뭐래든 네가 경험하고 네가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지. 네 소원대로 날 직접 보고 한 번 만져보고 손도 여기 넣어봐라."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자 정말 소원대로 예수님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못 자국과 옆구리 창 자국 만져보더니 도마는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28절에 그 도마의 고백이 나오는데 참 중요한 고백입니다. 함께 읽지요.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보세요. "우리 주님이시오 우리 하나님이시니이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분명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내 개인적인 자기 체험이 있으니 개인적인 고백이 나온 것입니다. 내가 보고 내가 만져보고 내가 체험해서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은 앞서 그 어떤 제자도 하지 않은 고백입니다. 그들도 분명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한 사람도 이 도마 같은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를 못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지금 내 눈앞에 계신데 뭐, 지금까지는 못 믿었지만 이제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에 굳이 내 손으로 상처를 만져보거나 내 손을 못 자국, 창 자국에 넣어볼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그들의 눈으로 볼 때 도마는 지나치게 의심이 많은 사람으로 비쳤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도마의 신앙은 의심과는 전혀 다릅니다.

사도행전 17장 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라는 도시에 사는 크리스천들은 참 좋은 신앙자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자세는 바로 간절한 마음,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되 사도들이 설교하면 "그런가보다" 하고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라 정말 그런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들여다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목사가 앞에서 설교하면 다 "그런가보다, 목사님이 그렇다니까 맞을 거야" 하고 받아들이십니까? 저는 그런 분도 믿음이 좋지만 제가 앞에서 "사도행전 몇 장 몇 절에 이런 말씀이 나왔습니다" 하면 뒤적뒤적 그 본문을 찾아보던지, 아니면 적어놓았다가 집에 가서 찾아보던지 하는 분이 더 믿음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가보다 하지 말고 베뢰아 사람들처럼 정말 그런가 하고 찾아보고 여러분도 성경을 들여다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의심입니까? "저 목사 말 내가 못 믿겠어. 진짜인가 내가 한 번 찾아봐야지" 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그만큼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과 열심히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라 귀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심이 아니라 내가 말씀을 찾고, 내가 보고, 내가 깨닫고, 내가 말씀의 은혜를 직접 체험하겠다는 마음입니다. 바로 이런 마음을 도마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 절대 의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믿음의 3단계

따라서 예수님이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절)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이냐? 이것을 도마의 믿음에 대한 책망으로 이해하는 분이 많습니다. "보지 못하고도 믿어야 진짜 믿음이지 너는 왜 보아야만 믿겠다고 하느냐? 네 믿음의 수준이 낮다."라고 이해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도마의 믿음이 적다는 책망보다는 다른 의미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오히려 도마의 믿음에 대한 인정입니다. "도마야, 너는 내가 직접 봐야 믿겠다고 하니 그 믿음이 참 귀하다. 다른 제자들은 그 믿음조차 없으니 오히려 네 믿음이 귀하다"고 인정하신 것입니다. 

둘째는, 도마의 믿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믿음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것은 '안 보고도 믿는 믿음'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서야 믿습니다. 가장 낮은 수준의 믿음입니다. 도마는 "내가 봐야 믿겠다"며 자신이 체험하기를 바랐고, 체험하고 나서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보고, 내가 믿고, 예수님을 나의 주로 인정하는 믿음이니 오히려 다른 제자들보다 더 좋은 믿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뭡니까?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습니까? 아닙니다. 도마처럼 직접 만져보고 손을 상처에 넣어보기라도 했습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불가능하지요. 봐야만 믿고 만져야만 믿는 수준의 믿음으로는 오늘 우리가 절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믿을 수 있으려면 제자들보다, 도마보다 더 높은 수준의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보지 않고도 믿는 믿음'입니다.

여러분 한 번 물어봅시다. 여러분은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도 아니고, 도마처럼 그 분을 만지거나 손을 못 자국, 창 자국에 넣어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믿습니까? 이하준 목사가 부활하셨다니까 믿습니까? 아니면 장로님들이나 믿음 좋은 분들이 그렇다고 하니까 믿으십니까? 아니잖아요? 그럼 대체 뭡니까? 오늘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성경을 집어 들면서) 이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또 성령께서 친히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때문 아닙니까? 그러므로 보고 믿는 제자들의 믿음보다, 만져야 믿는 도마의 믿음보다 더 수준 높은 믿음, 성경이 증거하고 성령님이 증거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했으면서도 믿는 우리의 믿음이 더 수준이 높은 믿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이 믿음을 가진 줄 믿습니다. 저는 믿음에 3단계가 있다고 봅니다. 첫 번째 단계는 '남들 따라 믿는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을 따라 믿는 것입니다. 처음 교회 나올 때 두 가지 경로가 있습니다. 첫째 경로는 누군가의 인도를 받아 누군가를 따라 나오는 것입니다. 제가 이 경우에 해당되고 여러분 중에도 여기 해당되는 분들 많을 것입니다. 이런 분들 한 번 저하고 같이 손들어 봅시다. 

그런데 지금 손 든 분들 다 아시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초신자 때, 남들 따라 처음 교회 나왔을 때는 솔직히 믿음이 뭔지나 알고 믿었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고 믿었잖아요? 그저 남들이 좋다니까 따라가 본 것 아닙니까? 교회 가면 복 받는다고, 교회 가면 문제 해결된다고 해서 멋도 모르고 따라 간 것 아닙니까? 그러니 기도도 할 줄 몰라서 남들 기도하는 것 보고 따라 하며 배웁니다. 예배 때 일어서야 하는지 앉아야 하는지, 눈을 감아야 하는지 떠야 하는지도 모르니까 남들 하는 대로 따라 하면서 배웁니다. 그래서 초신자 때는 누군가 옆에서 함께 예배드리며 가르쳐주고, 식당도 함께 가서 식사도 같이 하고, 화장실까지 따라다니며 안내해 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남들 따라다니며 남들 하는 것 보고 배우며 남들이 믿는 것 보고 나도 믿게 되는 것이 신앙의 첫 단계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을 의지하고, 남을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두 번째 경로는 부모 따라 믿는 믿음입니다. 모태신앙으로 어머니 뱃속부터, 아니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교회 나오는 것이지요. 여러분 중에 여기 해당되는 분도 있지요? 한 번 손들어 보세요. 이런 분들은 대개 어려서 멋도 모르고 좋다고 교회 다닙니다. 주일 되면 당연히 교회 가는 줄 알고 가는 것입니다. 또 "우리 부모가 믿으니까 나도 믿자" 하고 믿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를 따라 처음 믿었든, 아니면 부모 따라 처음 믿었든 간에 상관없이 언제까지나 이렇게 믿을 수는 없습니다. 나만의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닌, 저 사람이 아닌, 부모가 아닌 나 자신이 예수님을 만나고, 보고, 만져보고 체험해야만 믿음이 크는 것입니다. 이 체험이 없이 남들만 따라 믿고 남들이 좋다니까 믿기만 하면 믿음이 못 클 뿐 아니라 그 믿음은 쉽게 사라집니다. 

그래서 모태신앙인 사람들이 어려서는 부모 따라 교회 잘 다니다가도 머리 크면 자꾸 믿음을 떠나는 것입니다. 왜? 자기 체험이 없으면 그렇게 되는 것이지요. 어려서는 부모님 따라 교회 다니지만 크면서는 내 나름의 체험이 있어서 내가 직접 예수님을 만나고 만지는 체험을 해야지 언제까지 부모 신앙만 따라갈 겁니까? 이 '나만의' 체험이 있어야 누가 뭐래도 '내가' 예수를 믿고, 어떤 어려움이나 시험이 있어도 '내가' 예수를 계속 잘 믿을 수 있는 법입니다. 

또 처음 믿을 때는 남들이 예수 믿으면 좋다니까, 교회 다니면 좋다니까 나도 따라 다니지만 계속 이런 식으로 믿으면 안 됩니다. 언젠가 '나만의' 체험이 있어서 '내가' 직접 예수님을 보고, 만나고, 만져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믿음을 가질 수 있는 법입니다. 오늘 도마가 부족한 점도 있지만 바로 이 너무도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마가 그 누구도 하지 못한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면 두 번째 단계는 무엇인가? '내 체험을 따라 믿는 믿음'입니다. 즉 남들 보고 믿고, 남들 따라 믿는 믿음에서 한 단계 더 자라서 이번에는 내가 체험하는 믿음입니다. 체험신앙이라고도 하고 일대일 신앙이라고도 한다고 했지요? 1인칭 신앙이라고도 하지요? 도마처럼 내가 보고,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내가 그 분을 만져보는 체험을 한 뒤 내 입으로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요 나의 하나님입니다" 하고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이 체험적 신앙, 일대일 신앙, 1인칭 신앙을 갖지 못하면 내 신앙이 영원히 자라지 못합니다. 남들에게 의존한 신앙이지 내 신앙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마의 신앙이 그래도 수준 높은 신앙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말고 세 번째 단계로 올라가야 합니다. 세 번째는 제일 높은 단계로 '성경 따라 믿는 믿음, 성령 따라 믿는 믿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보지 못하고도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두 번째 단계처럼 내가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한 뒤, 이제는 누가 뭐래서 믿는 것도 아니요, 꼭 내가 보고 만져봐야만 믿는 것도 아닌 성경이 증거하는 대로, 성령님이 친히 증거하는 대로 보지 못하고도 믿는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내 체험도 중요하고, 내 믿음도 중요하지만 성경을 믿고, 성령님을 믿어 그 능력으로 믿는 더 귀한 믿음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믿음이요 주님이 29절에 하신 말씀처럼 참으로 복된 믿음인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초신자 분들, 그리고 다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가 우리교회로 와서 새롭게 시작한 분들 모두와 또한 우리교회에서 오래 신앙생활을 한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런 성숙한 신앙, 복 받는 믿음까지 이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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