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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 없이 예수님과 함께 (시 116:1~8, 벧전 1:17~23, 눅 24:2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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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없이 예수님과 함께 (시 116:1~8, 벧전 1:17~23, 눅 24:28~35 )

1. 누가복음에는 기쁨이라는 단어와 함께 그런 내용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먼저 세례 요한의 출생에 관하여 천사가 사가랴에게 말하기를 “너도 기뻐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라.”고 했습니다. 임신한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 인사를 듣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 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라고 했습니다. 

  베들레헴 들판에서 목자들이 밤에 양떼들을 지키고 있을 때 천사들이 그들에게 전하기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천군천사들이 함께 찬송하기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30세가 되셨을 때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와 같이 누가복음은 그 시작부터 엄청난 기쁨으로 막을 열게 됩니다. 그 기쁨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일컬어 “기쁜 소식” 즉 복음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들 중심에 주님이 오시면 이 기쁨이 넘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옥에서 편지를 써 보내면서도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노라”고 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 교회에 임재 해 계시면 우리 교회는 이런 기쁨이 충만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나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되면 이 땅 곳곳에 이런 기쁨의 바이러스가 전염병처럼 퍼져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이 사람들은 온 세상에 마치 전염병과도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누가복음15:에서 3가지 유명한 비유를 통해서 또 한 가지 기쁨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잃은 양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 비유입니다. 

  100마리 양을 기르는 목자가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았을 때 즐거워하며 잔치 베푼 것을 말씀하시면서 주님은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고 하셨습니다. 

  10개의 드라크마 가운데 잃은 한 개의 드라크마를 찾고 나서 즐거워하는 것을 말씀하신 우리 주님은 역시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잃었던 아들이 돌아온 소위 “탕자의 귀향”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고서 결론적으로 탕자의 아버지 입을 빌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여기 기쁨의 쌍 방향적 성격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이 땅에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갈 때 하늘나라에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이런 쌍 방향적 기쁨이 우리에게와 하나님의 나라에 충만한 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또 확장하게 될 줄 믿습니다. 


2. 그런데 오늘 복음서 본문에 보면 예수님 부활 이후에 두 제자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17절에 보면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었다.”고 했다.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을 말합니다. 기쁨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는 이 누가복음서에 그것도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되어진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하필이면 다른 복음서에 없는 “슬픈 빛을 띤 두 제자”에 관한 내용이 기록된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우리의 현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고, 삶에 슬픔이 있고 낙심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 안에도 역시 기뻐해야하는 일과는 반대되는 일들이 숱하게 도사리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토록 왕성한데도 불구하고 하늘나라에도 역시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 얼굴에 수심을 드리우는 일들이 비일비재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여인들로부터 무덤이 비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의 이 불신앙은 매우 심각할 지경이었습니다. 여인들의 말을 들은 제자들은 그 소식을 전하는 여인들이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것으로 알았습니다. 도마는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감람산에서 승천하시기 직전 마지막 분부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서도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들도 없이 믿음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책망조로 말씀하시기를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버나움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서 매우 기뻐하시면서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믿음 겨자 씨 한 알만 해도 태산을 옮긴다고도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문제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믿음 없는 것입니다. 믿음 없으면 기쁨이 없습니다. 믿음 없으면 낙심합니다. 믿음 없으면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간절하게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2) 말씀에 대한 무관심 즉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인들이 전한 우리 주님의 부활소식은 그것이 바로 복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허탄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즉 정신 나간 소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십자가 이전에 우리 주님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누누이 말씀을 하셨었지 만 제자들은 주님의 그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아니 구약 성경에는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었지만 제자들은 그 성경말씀들에 대하여 무관하거나, 무지하거나, 무시했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도 이런 제자들을 책망하실 때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로마서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 믿음이 있으려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에 무지하고 무관심한 두 제자에게 주님은 길을 가시면서 말씀을 강론하셨습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성경 공부는 이와 같이 길 위에서 시행되었습니다. 이것을 엠마오 도상의 성경공부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 신앙 실패의 원인 대부분은 우리에게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영성가 토머스 머튼은 이런 의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타나신다는 것은 바로 말씀하심에 있다. 그리고 나의 구원은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데 있다.” 

 (3)  궁극적으로 말한다면 저 제자들의 슬픔의 원인은 예수를 잃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가복음서에는 이미 그 처음에 예수 잃은 사건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님 12살 때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명절 지키러 올라갔다가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예수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때 그 부모들이 겪은 걱정과 고통이란 말로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다시 성전에 가서 예수를 찾았을 때 이 모든 것에서 해방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요 또 상당히 교훈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들처럼 그들이 온갖 정성을 다해서 유월절을 지켰다고 해도 예수 잃고 났을 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한 평생 신앙 생활한다고 온갖 수고 다 한다고 해도 내 중심에 우리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이 과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내가 세상에서는 온갖 것을 다 해보고, 누린다고 해도 주님 앞에 설 때 “내가 너를 알지 못하노니 이 불법을 행한 자야 내게서 물러가라!”고 하신다면 세상에서 누린 그것들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그러므로 지금 이 순간 무엇보다 확인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내게, 우리 가운데 계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지 아니하시기 때문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3.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를 만나겠습니까? 어떻게 그리스도를 모실 수 있습니까? 

 (1) 여기 한 낯선 사람이 접근해 왔습니다. 사실 두 제자에게는 누구와 말하기도 싫은 심정입니다. 그런데 한 낯선 사람이 다가와서 귀찮게 무엇을 자꾸 묻습니다. 제자들은 불신앙과 슬픔으로 눈이 가려져서 그가 주님이신 줄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기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니라.” 우리 주변에 있기는 하지만 전혀 반갑지 않은 사람, 아니 싫기까지 하고, 밉기까지 한 사람, 또는 내가 친절을 베풀지 않아도 내가 전혀 남에게 비난 받을 일 없는 무관한 사람, 아니면 귀찮게끔 찾아와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지극히 작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내치는 것이 주님을 내치는 것이요, 그런 사람을 용납하는 것이 주님을 용납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웃을 향한 내 마음과 삶이 열릴 때 주님은 그 열린 문을 통하여 들어오셔서 나를 만나주십니다. 

 (2) 주님이 그들과 나눈 대화는 물론 나중에는 부활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상대화였습니다. 우리가 누구와 만나면 우리 신변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됩니다. 물가가 어떻다느니, 정치가 어떻다느니, 교인 중에 누가 어디를 갔다느니 하는 아주 사적이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야기 속에도 주님이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 때는 주님이 계시고, 기도할 때는 함께 하시는 줄 알지만 우리 일상 대화 그 속에도 주님이 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그 대화 속에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거기서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 주님을 결코 시간적으로 예배 때나, 공간적으로 예배당 안에 만 가두어둘 것이 아니라 우리 삶속으로 모셔 들여와야 합니다. 주님은 바로 거기서 우리를 만나 주시기 때문입니다. 

 (3) 제자들은 그 낯선 사람을 자기들의 식사자리에 초대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식사자리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이 축복기도를 하셨기 때문에 이것을 성찬 성례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닙니다. 보통 식사자리입니다. 

   우리들 가정마다 식사 내용은 다 다를 것입니다. 잘 먹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또 가난하기 때문에, 아니면 다른 이유로 1식 3찬도 힘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갖는 그 식사 자리에 주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빵 한 덩이를 놓고서도 감사기도 드릴 때 그 식사는 성찬 성례전에 맞먹는 훌륭한 식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록 진수성찬으로 상다리가 부러질 만큼 차려먹는다고 해도 거기 주님이 계시지 않으면 저 홍포 입은 부자의 잔치 상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마지막 만찬에서 주님이 떡을 드셨듯이 주님은 우리를 택하시고, 그 떡을 가지시고 축복 기도하셨듯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그것을 떼어서 나누어주셨듯이 나 같은 사람도 주님이 이 땅에서 복의 근원으로 들어 쓰십니다. 이것이 은총이 아니고 무엇이며 이것이 축복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 제자들은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눈이 열려서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 자리에서 발걸음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주님 만난 사람은 자신이 만난 주님을 증거하고, 받은 은혜를 나누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 모신 사람들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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