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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8, 눅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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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8,  눅 5:1~11)

     부활절 후 첫 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부활 후 일어난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의 믿음을 새롭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놀라기는 했지만, 삶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지는 못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그들의 심령을 바꾸어 주셨을 때, 비로소 변화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1. 헛그물질 하는 베드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도 제자들은 분명한 사명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삶의 방향을 잡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서처럼 베드로를 비롯한 도마와 나다나엘 요한 야고보 또 다른 제자 둘 등 일곱명이 다시 어부로서 고기를 잡으러 나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잡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장면입니다(누가복음5:1-11). 

     그 때도 밤새도록 헛 그물질을 하고 돌아온 베드로의 배를 빌려 말씀을 하신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몹시 피곤하였지만 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더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혔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놀라며 예수님께 엎드리어 '나는 죄인입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네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사명을 주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후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3년동안 계속해서 예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아주 충실하고, 믿음직스런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초대교회의 기둥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그 사명을 잊은 채, 다시 바다로 돌아가 또다시 헛 그물질을 하고 있습니다. 일곱명이 갈릴리 바다로 나아가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처음 예수님을 만나던 그때처럼 그 밤도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고기를 잡았느냐?" 없습니다. "배 오른 편에 던져라" 예수님은 어부가 아닙니다. 그물질을 해 본적도 없는 분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했을 때, 순종하여 고기를 건졌듯이, 지금은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더니 그물을 들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성경의 방법은 오늘 세상에 안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회에서만 쓰는 책이요, 듣기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원리나 세상의 방법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고기 잡는 기술이나 방법은 베드로가 더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술이 좋다고 다 고기를 잡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 대해서 잘 안다고 인생을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교육학자의 집에 자녀교육이 엉망이고, 윤리학자의 도덕성이 더 형편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꼭 그런 것도 아니고, 약간은 비틀어진 말이기 때문에 근거가 희박하기는 하지만 그럴 수 있을 가능성도 있는 말입니다. 인생에 전문가는 없습니다. 전문가는 같은 일을 반복적으로 시행해 보아서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면서 그 일에 익숙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전문가는 없습니다. 누가 인생의 전문가라고 나설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인생을 여러 번 살아보았습니까? 누가 자신의 삶 속에서 20대를 30대를 50대를 70대를 80대를 여러 번 경험할 수 있습니까? 인생은 항상 한번의 기회밖에 없는 낯선 시간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전문가는 없습니다. 음식의 달인, 물건 쌓기의 달인은 있는지 몰라도 인생의 달인은 없습니다. 인생의 전문가는 오직 인생을 창조하신 하나님 뿐이시요, 예수님 뿐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 지식이나, 내 경험이나, 내 생각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의지해서 나의 인생의 푯대를 삼고, 하나님 말씀 중심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으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러나 헛그물질 할 때가 많았습니다. 인생이 내 생각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는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더니 두 배에 가득 고기를 잡았고, 오늘,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을 때도 순종하여 그물을 들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나중에 고기의 숫자를 세어보니 153마리였습니다.

     153이라는 숫자가 낯익지 않으신가요? 사실은 성경에 있는 숫자인데 성경보다 다른데서 더 익숙한 글자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안 써본 사람이 없는 볼펜 모나미 볼펜의 이름이 153입니다. 왜 볼펜이름이 153일까? 이런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볼펜의 대명사로 알려진 모나미 153볼펜은 1963년 5월 1일에 탄생했습니다. 볼펜을 생산할 수 있는 공장도 기술도 없었던 상태에서 도산의 위기에서 송삼석 회장이 기도하면서 직접 붙인 이름입니다. 회사가 가장 어려웠을 때 제조업체 사장이었던 송삼석 사장이 기도원에 올라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면서 생각해보니 그간 사업을 하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게 너무 많더라는 것입니다. 

   첫째, 주일성수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철저히 회개했습니다.“이제부터 주일성수하겠습니다.” 

   둘째, 돈을 많이 벌고도 십일조를 안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것을 떼어먹었습니다. 이제부터 십일조를 하겠습니다.” 

   셋째, 새벽기도하지 않은 것을 회개했습니다.“내가 새벽마다 주님 앞에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제 새벽기도를 하겠습니다.”이렇게 결심을 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중에, 요한복음 21장 1-14절의 말씀에 영감을 얻게 되었습니다.‘베드로가 예수님이 지시한 곳에 그물을 던졌더니 153마리의 고기를 잡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하나님, 제가 '모나미 153'이라는 볼펜을 만들겠습니다. 하나님, 이 볼펜이 모든 사람의 손, 아니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의 손에 다 들려지기 원합니다.”기도하고 난 후 그는 목표를 크게 잡고 "50억 자루가 팔리게 해주세요!"라고 기도를 마쳤습니다. 망해가는 회사가 볼펜 50억 자루를 판다는 것은 실현불가능한 꿈같은 생각인데, 결국은 50억 자루이상이 팔려나갔습니다. 

     기도로 만든 모나미 153볼펜의 기적이 모든 성도들에게 함께 하길 축원합니다. 현재는 pluspen 3000 이라는 펜을 아주 많이들 쓰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도 성경에 베드로가 한번 설교에 3000명 회개한 것을 염두에 두고 붙인 이름일 것입니다.

     베드로의 고기잡이 사건은 마치 예수님 없는 삶의 헛된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산 인생은 스스로는 계속해서 무엇인가 노력하고, 힘쓰고, 살아왔지만 아무 것도 건질 것이 없는 인생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인생은, 깊은 데 던졌던지, 오른 쪽에 던졌던지 그 삶에 건져 올리는 것이 풍성함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물질의 축복도 그러하고, 영혼의 열매도 그러합니다. 예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영육간에 늘 풍성한 축복을 받으시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 베드로의 믿음을 물으신 예수님

   153마리의 고기를 건져올린 어부 제자들과 함께 그 고기를 구어 식사를 마치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말씀은 원어상으로 보면 번역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보다'라는 뜻일 수도 있고, '이것들보다'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이것들보다' 더 맞는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세상 것들보다, 이 육신적인 것들보다, 이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것이 주님의 물음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 때, 베드로는 약간 당황하는 모습으로 '주여, 그렇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언가 만족스럽지 않으셨는지, 아니면 강조하시려고 하셨는지, 또 다시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여, 그렇습니다. 제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러나 또 다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물으셨습니다. 원어상으로 보면 주님의 물음과 베드로의 대답에 차이가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희랍어에서 사랑은 세가지 경우로 쓰입니다.  '아가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  '필레이스'는 친구간의 사랑,  '에로스'는 이성간의 사랑,

     예수님께서 처음 두 번은 네가 나를  '아가페' 하느냐? 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필에이스' 합니다.'고 대답하였다. 네가 절대적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 물었더니 베드로는 예수님을 스승님으로서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래서 세 번째는 예수님께서 물음을 바꾸셨습니다. '그럼 네가 나를 '필레이스'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필레이스' 합니다.' '네가 스승으로 나를 사랑하다는 말이구나.' '그렇습니다, 제가 스승님으로서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실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부활이후에도 예수님께 대한 고백이 분명치 못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물으셨고 베드로는 스승 제자간의 인간적인 사랑을 고백한 것입니다. 지금 현재로서는 이러한 베드로의 대답이 예수님의 마음에 시원치가 못하셨을 것이지만, 그것이 솔직한 베드로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베드로의 고백을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성령을 받은 후에는 베드로의 고백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아가페' 합니다.' 바로 이런 베드로의 믿음을 소망 중에 바라보시면서 받아 주신 것입니다.


     3. 베드로에게 다시 사명을 주신 예수님 

   베드로의 대답이 예수님의 기대치에 못미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말씀하셨습니다.

   ① 내 어린양을 먹이라. ② 내 양을 치라. ③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만났을 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이미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고기 낚는 어부로 되돌아간 베드로에게 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다시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지금은 분명하지 못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성령받은 후 그가 어떤 삶을 살게 될 것인지를 아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분명하게 사명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신 후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힘들고 어려워도 십자가 고난을 감당하였던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후, 인간적인 사랑, 스승으로서의 존경으로가 아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서,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로서, 영원하시고 존귀하신 주님으로서 고백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같이 자신의 온 생애를 다 바쳐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세상 것들보다, 이 육신적인 것들보다, 이 눈에 보이는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오늘 우리에게도 진지하게 물으시는 물음입니다. '주여, 제가 주님을 아가페로 사랑합니다. 제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을 절대적으로 사랑합니다. 저의 삶과 생에 있어서 주님이 항상 첫 번째입니다. 그 어떤 것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겠습니다. 주님 주시는 사명 그 무엇이든지 생명을 다해 감당하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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