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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산 자의 부활 (마 22: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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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의 부활(마 22:31~33 )  
 
  오늘은 고난과 저주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주님이 부활하셔서 우리를 완전히 죄와 저주와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케 하시고 해방시키신 승리의 날 입니다. 롬 4장 25절을 보면 "예수는 우리의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전부 뒤집어쓰시고 우리가 죽을 것을 대신해서 죽고,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사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을 완전히 열어 놓으셨습니다. 부활은 그래서 귀한 것입니다. 십자가로 끝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복음이 아니지요. 십자가로만 끝나면 기쁜소식, 승리의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다시 다셨기 때문에, 부활이 있기 까닭에 복음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가리켜 고난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반의 기독교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고난으로만 그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고난으로만 그치면 복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만을 전하는 종교가 아니라 십자가 뒤의 부활을 함께 증거하는 종교입니다. 잠시 고난을 받게 되나 고난은 고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광으로 갈무리된다는 사실입니다. 롬 8:18에 보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슬퍼하는 자 같으나 기뻐하는 자요, 죽임을 당하는 자 같으나 죽지 않고 가난한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요,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끝났다면 기독교는 분명 고난의 종교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대로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기쁨과 감격이 있고,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고난의 의미가 있고 결국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을 생각하면 언제나 죽음 다음에 올 하나의 현상으로만 생각하려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부활을 성령의 능력으로 산 자가 다시 살고 산 자가 정말 산 자처럼 살아가는 능력으로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에게 맡기라는 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극단적으로는 어떤 제자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따르겠다고 했을 때 예수께서는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마 8:22)하셨습니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장례식과 같은 의식지상주의와 죽은 자의 사후세계에 치중하는 것보다는 산 자의 생명의 영역을 더 소중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장례식 때문에 다툽니다. 의식을 어떻게 치룰 것인가 때문에 분쟁을 합니다. 정작 산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예수님를 믿고 따르는 것은 삶에 중심을 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생명의 영역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죽음의 복음"이 아니라 "생명의 복음" "부활의 복음"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산 자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산 자가 중생하고 거듭나야 하고 신생하는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여 죽고 다시 살아나기를 바란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된 관심은 죽음 후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죽은 자들에 관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2:27절에 보면 실제 바리새인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에 답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하였도다." 이런 말씀은 성경 여러 곳에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20:38에 보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마태복음 22:32에도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한 때 석가모니의 뼈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인도를 위시한 불교국가에서는 한 동안 떠들석한 일이 있었습니다. 석가모니의 이 뼈들은 잘 정돈되어 수 백만 인도사람들의 경의속에서 시가행진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뼈 앞에서 부복하고 경배하는 것을 보고 한 선교사가 그의 친구에게 만약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뼈 한조각만 발견하여도 그리스도교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저들처럼 죽은 자를 하나님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의지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2008년 부활절 아침 하나님께서 우리 산 자들에게 산자의 부활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안식일이 다 지나고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3일째 되는 이른 새벽 무덤으로 달려갔던 여인들은 천사들로부터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자 가운데서 찾느냐?  그는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느니라"는  감격스런 소식을 들었습니다. 

  일곱 명의 남편을 잃게 된 여인에 대한 사두개인의 부활에 관한 질문에 대해서 예수께서 "너희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니 오해를 하였도다"하셨습니다(마 22:29).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부활관에 대해서 바로잡아주셨습니다. 예수께서 걱정하신 것은 '갑자기 일곱 명의 남편을 잃게 된 그 여인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였으며, 그녀의 일곱 남편에 대한 열성적인 내조에 감동하셨으며, 앞으로 그녀가 헤쳐나가야 할 현실을 걱정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묘지에 내려가 모든 죽은 자들을 다 살리시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살았으나 죽은 상태에 있는 인간들의 오늘의 삶의 부활을 중시하신 것입니다. 복음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를 살려주시는 부활기사는 몇 번이었습니까? 야이로의 딸을 살리심 (마 9:18-26, 마 5:21-43, 눅 8:40-56),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심(눅 7:11-17), 나사로를 살리심(요 11:1-44)이 전부입니다. 이것은 극히 소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을 살리는 것을 그의 사역의 종말적인 목표로 하신 것이 아니라 산 인간들을 죽은 상태와 같은 데서 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산 자가 죽은 자의 상태로 전락하고 타락하지 않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를 위하시는 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죽음과 장례의 절차나 사후세계를 논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이 먼데 있는 것이 아니며 사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회칠한 무덤과 같은 곳에서 다시 살아야 하며 비구원적인 상황, 비인간적인 상황에 빠져 있는 상태에서 구원적인 상황으로 인간적인 상황으로 다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서 용서하면서 섬기면서 다시 사는 부활을 예수님은 바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아들의 비유에서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4)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바라시는 부활인 것입니다. 산 자가 이런 부활에 있는 데 죽음 후에 부활은 어떤 형태가 되든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온갖 못된 일만 골라하면서 죽음 후에 부활만을 바라는 것은 이곳에서 못다한 그 못된 일을 그곳에서 또 다시 하겠다는 것입니까?

    산 자가 다시 좀더 나은 삶을 사는 부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죽음 다음에 있을 부활만 언급하는 기독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주님은 부활의 의미를 낡은 세계의 질서와 가치를 무너뜨리고 그 무너진 잿더미 위에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구축해 나가는 출발점이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구축해 나가는 것은 신생아가 자신의 세계를 조금씩 조금씩 세워나가는 것처럼 단계적이고 발전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셨던 것입니다.  산 자의 삶의 지평을 넓히고 생명의 영역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산 자의 다시 사는 부활의 복음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긴다"는  말은 "인정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순간 순간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으로 살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우리의 생활 속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부활의 아침을 통하여 여인들이 맨 먼저 산 자의 부활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산 자의 부활이란 이전의 삶이 죽고 이제는 다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이나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산자의 부활을 체험했습니다. 낙심하던 자들이 용기있는 사람으로 부활했으며 죄만 짓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죄를 멀리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무가치한 삶을 살던 사람들이 갖치 있는 삶으로 생을 전환하는 부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죽음과 죄의 문제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케 살아가게끔 변화하도록 요구하십니다. 

  롬 1:4절 "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했습니다. 부활하심으로 능력의 하나님으로 선포되셨습니다. 부활이 없으면 능력의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활은 최고의 변화
부활은 가장 크고 놀라운 변화

  죽은 자의 부활도 중요하지만 산자의 부활이 더욱 중요합니다. 산자가 부활하시기를 주님은 이 시간 바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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