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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 19:25-27) - 가상칠언(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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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 19:25-27)-가상 제3언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세 번째 하신 말씀은 온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온전한 사람이셨던 그분께서 육신의 모친을 위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25절을 보면 예수께서 운명하시기 직전에 그분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좇으면 섬겼던 여인들이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41절을 보면 이 외에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자가 많이 있었지만, 이 네 명의 여인들이 특별히 더 큰 슬픔과 아픔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모친 마리아에게는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이었기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로써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눅 2:35)는 시므온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다. 마리아가 받은 복은 단순히 주와 함께 행복감을 느끼는 그런 종류만이 아니라, 구속 역사에 쓰임 받기 위에 모진 아픔까지도 감내해야 하는 복이었습니다.

가끔 불의의 사고가 났을 때 카메라맨들은 어김없이 자녀를 잃은 부모의 오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통곡하다 못해 까무러쳐서 기절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시청자 역시 그 아픔을 절절히 느낍니다. 그러면서 흉악한 범죄와 그 범인에 대해 함께 분노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십자가 곁에 있는 그녀들이 얼마나 아파했는지, 얼마나 슬퍼했는지에 대해서는 묘사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마리아의 아픔과 고통조차 한 마디 언급이 없습니다. 물론 조용히 흐르는 강이 더 깊은 법입니다만 성경은 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과 함께 ‘십자가 곁에’ 있었다는 ‘사실’만을 기록합니다. 성경은 독자들로 하여금 ‘감성’을 자극하지 않고 ‘사실’을 주목하게 합니다. 

십자가 곁에 있었던 “모친”은 한 때 예수님이 식사할 겨를도 없이 사역하실 때 미쳤다고 생각하여 친속들과 함께 붙들러 온 적이 있었습니다(막 3:21). “이모” 살로메는 한 때 치맛바람을 일으키면서 두 아들을 주님의 나라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했던 인물이었습니다(마 20:21).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야고보와 요셉 혹은 작은 야고보와 요세라고도 불리는 제자들의 어머니입니다(마 27:56, 막 15:40). 작은 야고보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동일 인물이라면 글로바는 알패오입니다(마 10:3).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 낙심하여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글로바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도 있습니다(눅 24:18).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에 사로잡혀 살다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은 여인이었습니다(눅 8:2). 그들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든, 그들이 과거에 얼마나 신앙적이지 못한 모습을 보였든, 마지막 순간에 그들은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살아 계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 분을 따르며 환호했습니다. 그분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때, 그분께서 병자를 고치실 때, 그분께서 능력을 보이실 때,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의 많은 사람들이 그분 곁에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분께서 더 이상 기적을 일으키시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 더 이상 병자들에게 능력을 베풀지 못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 무능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 곁에 남아있는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뭔가를 얻고자 했던 사람들은 모두 실망하고 떠났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손해만 본다는 판단을 했을 때 그들은 달아났습니다. 오직 예수님 자체를 사랑했던 사람들만 남았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좇도록 가르치셨습니다(마 16:24, 막 8:34, 눅 9:23). 그것이 예수님을 좇는 사람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그런데 왜곡된 신앙은 언제나 자기 부인을 가르치기보다 자기를 강화하도록, 자기 십자가의 진리를 가르치기보다 자기 행복을 추구하도록 가르칩니다. 예수님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을 사랑해서 좇도록 미끼를 던지며 유혹합니다. 그 결과로 주께서 나에게 기적과 축복의 통로가 될 때는 환호성을 올리며 따르지만, 십자가를 제시할 때에는 숨어버리는 신자들이 오늘날 적지 않게 생겨났다고 생각됩니다. 객관적 사실보다 주관적 감정에 따라 진리를 판단하는 경향은 몹시도 가슴 아픈 현상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성취와 만족을 통한 행복감을 느낄 수 있음을 최고로 생각하는 신앙이라면 결국 십자가 곁에 남아 있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감정 곁에 머물기보다 참으로 십자가의 진리 곁에 머물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26). 예수님은 가나 혼인 잔치에서 메시아로서 첫 기적을 행하실 때에도 마리아를 보고 ‘여자여’라고 부르셨습니다(2:4). 그리고 이제 메시아로서 사역을 완성하시는 시점에서도 동일하게 ‘여자여’하고 부르셨습니다. 이 외에도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세 번 더 ‘여자여’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4:21)과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던 여인(8:10), 그리고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20:15)에게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은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메시아라는 공인으로서 대하고 계셨음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하시므로 훗날에 마리아가 지나치게 공경을 받고 높아지는 일을 방지하신 것 같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자식 잃은 슬픔으로 마음이 찢긴 한 여인의 아픔을 돌아보셨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울고 있는 한 여인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위로하기 원하셨습니다. 돌봄이 필요한 그녀를 위해서 그분께서 하실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제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최악의 상황에 계실 때조차도 그분을 따르는 자들을 위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그렇다면 하셨다면, 오늘날 천상에 계신 그분은 예수님을 따르느라 슬픔과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더욱 외면치 않으실 것입니다. 모욕과 조롱을 감내하고 손해와 아픔을 감수하면서도 십자가 곁에 머물기 원하는 자들을 반드시 위로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정확하게 순종하기 위해서 항상 때를 살피셨음을 요한복음에서 많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일이면 가족들의 방문도 반기지 않으셨습니다(마 12:48). 제자들에게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6:33). 심지어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고 가르치셨습니다(마 10:37). 이순간도 마리아의 아들로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해두셨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죽고 계심을 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죽음은 또한 마리아를 위한 죽음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메시아로서 한 여인의 아픔을 돌아보셨지만, 그것은 동시에 자식으로서 어머니를 돌아본 것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제자에게 ‘보라 한 불쌍한 여인이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7)하시므로, 그 제자가 어머니로 모실 수 있도록 배려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에 절대적 우선권을 두시면서도, 동시에 육신의 어머니 공경하기를 중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당신께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어머니에게 아픈 상처를 남겨 드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래서 어떤 면에서 죽지 않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뜻에 순종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어머니를 공경하는 마음까지 그만두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습니다(출 20:12, 신 5:16).

십자가보다 더 위대한 사역은 없고, 그 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죽으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모친을 공경하셨습니다. 마땅히 부모님께 드려 공경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린 것이라고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었습니다(막 7:11-13). 그렇다면 오늘날도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을 핑계 삼아 인간관계의 의무와 도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물론 우선권의 문제에 있어서는 결코 타협할 수 없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하며, 하나님께 대한 의무와 순종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간혹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 마음이 아프지만 그분들의 뜻에는 불순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분들을 공경하는 마음까지 잃지는 않아야 합니다.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헤아리고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해 배려해야 합니다. 그 또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교회에서 하는 일은 영적인 일이고 직장이나 가정이나 학교에서 하는 일은 세상적인 일처럼 구별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 구별은 아주 잘못된 구별입니다. 교회에서든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학교에서든 언제나 하나님 백성답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 옳습니다. 반면에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도 세속적인 욕망에 가득차서 기도했다면,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면서도 세속적인 욕망 때문에 했다면 하나님의 일을 한 것이라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불법을 행한 자들이라고 하나님의 책망을 받을 일이지요.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일들에 매우 열성적인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참으로 세속적이었습니다. 

27절 하반절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도 우리 시대 잘못된 관념 하나를 교정해줍니다. 때로 제자의 삶을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무소유의 거지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을 받던 그 제자는 그 모친을 모실 수 있는 “자기 집”이 있었습니다. 아마 집만 덩그러니 있는 것은 아니라 모친을 공양할 수 있는 기본적인 소유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나치게 신령해서, 정확하게 말하자면 신령한 삶을 오해해서 세상의 모든 것을 혐오하거나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은 정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무에 최우선권을 두고 살면서도 이 땅에 있는 동안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의무에 충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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