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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자 없는 양 (마 9: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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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 없는 양 (마 9:35~38)

I. 본문의 배경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일까요? 
성경에 있는 모든 일을 했다 그럴 수도 없는 일이고, 착한 일을 많이 했다 그럴 수도 없을 것입니다. 4장 23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지? 무슨 일을 하러 오셨는지 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서 , 천국복음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병들고 상한 자를 고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권세있는 가르침, 소위 산상보훈의 말씀입니다. 산상보훈의 말씀이 끝나고 나면 권세를 직접행하신 열 가지 이적사역이 나옵니다. 권세있는 가르침과 권세를 직접 행하신 이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9장 35절에서 또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가?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기 위해서, 천국복음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병들고 상한 자를 고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6장 7장 8장 9장을 가운데 두고 4장 23절의 말씀과 9장 35절의 말씀이 호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마태는 천국을 가르치신 사역 Teaching사역을 대단히 강조합니다. 마태복음은 5편의 예수님의 위대한 설교, 가르침으로 구성되어져 있습니다. 

베이컨(B.W. Bacon)은 마태복음은 오경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구약이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5권의 책으로 시작했듯이 신약의 말씀은 마태의 5편의 설교로 시작되어지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1. 첫 번째 설교는 산상보훈입니다. 산에 올라가서 말씀하신 위대한 교훈이라고 하여 산상보훈이라고 하지요. 마태5장 6장 7장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면서 7장 28절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라고 얘기합니다. 

2. 마태복음 10장은 파송설교 혹은 사도설교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선택하셔서 그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면서 하신 말씀 설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0장 전체는 파송설교입니다. 파송설교가 마쳐지고 11장 1절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신 후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세 번째 설교는 13장 천국 비유설교입니다. 다양한 천국에 관한 비유가 나옵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마치면서 13장 53절에 예수님께서 이 모든 비유설교를 마치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4. 18장은 교리설교입니다. 18장 전체를 교리설교로 채운 다음에 19장 1절에 예수님께서 설교를 마치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5. 마지막 23장 24장 25장은 종말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군천사들과 함께 나팔불며 이 땅에 임하실 때에 어떤 일이 임하시며 우리는 어떻게 준비해야 될 것인가?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25장까지 종말설교를 마치고 26장 1절에 예수께서 이 모든 말씀을 설교를 마치셨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마태가 권세 있는 가르침, 산상보훈을 설교하신 다음에 친히 권세를 행하신 열가지의 놀라운 이적 사역을 배치한 것은 마태의 의도적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신 것도 많은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도 바로 천국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우리가 공부한 풍랑 사건을 두고 제자들이 뭐라고 반응합니까?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어떤 병에 걸렸든지 예수만 만나면 고침을 받는가? 하는 것이지요. 예수 그가 누구이기에? 죽은 자도 그를 만나면 살아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창조주라는 것입니다. 자연도 그분께 순종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들도 그분의 말씀 앞에 순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갈 때에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것이 천국복음을 가르치신 목적이었고 천국복음을 가르친 다음에 이적사역을 배치한 목적이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10장에서는 이 삼중사역을 제자들에게 위임합니다. 열 두 제자를 선택하여 세상에 보냅니다. 세상으로 파송하시며 보냄받은 자 사도들에게 다시 설교합니다. 그것이 사도설교 제 10장의 말씀입니다. 10장을 펼쳐보면 12제자가 나오는데 이름이 다르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에서는 12제자라고 얘기하다가, 2절에 12사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2사도란 말이 본문 10장 2절 마태는 유일하게 한번 씁니다. 금방 제자라 그랬으면 제자라 그러면 될 터인데 왜 1절에서는 12제자라 그랬다가 2절에 와서는 12사도라 그랬을까요? 제자는 선생님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선생님을 배우고 선생님으로부터 그분이 가졌던 권세와 권세있는 가르침, 권세 있는 능력을 다 위임받아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제자들이지만 권세를 위임받아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자들이란 뜻에서 사도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지요. 

파송 설교를 하게 되는 배경이 오늘 9장 36절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제자들을 세운 목적이 여기에 나옵니다. 제자들을 세상에 파송하는 이유가 여기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가 나옵니다. 우리가 오늘 은혜 받고 세상으로 나아가 살아가야 되는 삶의 목적이 여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II.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 

36절의 핵심 단어는 "불쌍히 여기다"는 스프랑크니 조마이(splanchnizomai)라는 말입니다. 무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그토록 불쌍히 여기셨나요? 이는 그들이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했다고 했는데 그들의 목자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요? 그들의 목자는 누구였나요? 

그 대답이 바로 앞 구절 34절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고 많은 이적을 행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왈 "예수는 귀신의 왕을 의지하여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자였던 종교지도자들, 무리의 목자였던 바리새인들은 영적으로 무지했습니다. 그 심성은 사악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임하시는 하나님나라의 임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사단의 장난이라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리새인들은 권세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권세있는 가르침과 이적을 부인했습니다. 귀신 놀음이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목자라고 따랐으니 저들을 목자라고 섬겼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불쌍하냐는 것이지요.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야가 임했는데도 불구하고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임하여 병든자가 고쳐지고 귀신이 결박당하는 모습을 보고서도 이것은 귀신의 장난이라고 비판하게 되는 것이지요. 

"불쌍히 여기다"는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 이 말은 신약성경 모든데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오직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공관복음에만 나옵니다. 마태에 5번, 마가에 4번, 누가복음에 3번 나와서 도합 12번 오직 공관복음에만 나오는 말입니다. "불쌍히 여기다"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 

이 말을 교인들에게 단장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제가 썼던 책에서는 하나님의 가슴앓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제가 쓴 책 가운데 하나님의 가슴앓이라는 책이 있지요. 바로 그 하나님의 가슴앓이가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 이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인간을 바라보는 그 마음이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입니다. 

예수님의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가슴속에는 스프랑크니조마이 (splanchnizomai)가 있었기 때문에 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들을 고치신 것입니다. 그분의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 때문에 귀신에 결박된 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불쌍한 무리대신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에게 가지길 원하시는 심성이 바로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을 이 땅에 베풀기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가 누리길 원치 않으십니다. 바로 이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를 가지고 살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성경도처에서 "서로 불쌍히 여기라" 그랬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자식은 부모를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목장 안에서 서로 가족들을 불쌍히 여길 때에 그들을 향하여 중보기도 눈물이 쏟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셀 안에 그들의 아픔을 쏟아놓을 때에 그들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속에 있는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작동되었기 때문입니다. 목사는 성도님들을 불쌍히 여겨야 기도합니다. 성도님들도 저를 교역자들을 불쌍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목회 잘 해 보려고 애쓰는게 안쓰럽지 않습니까? 서로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우리가 품었던 태신자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북녘땅에 양식도 없고 말씀도 없고 예수도 없고 자유도 없는 저들을 바라보며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못난 사람들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장애우들을 바라볼 때 우리가 스프랑크니조마이(splanchnizomai)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III. 목자 없는 양

본문에서 "목자 없는 양"이라고 할때 이 말씀을 듣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금방 알아들었습니다. 응! 그래 맞아. 금방 이해하고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많은 양을 본 적이 없습니다. 목자가 되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목자 잃은 양이 어떤 상태인지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조상때부터 양을 치던 유목민이었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은 농사를 지었습니다. 저희들 어릴 때 부잣집을 천석꾼, 만석꾼 그랬습니다. 이나라 사람들은 양이 몇 마리, 소가 몇 마리, 낙타가 몇 마리, 염소가 몇 마리 이렇게 계산했습니다. 그 중에 가장 많은 가축이 양이었습니다. 양 얘기를 하면 금방 알아듣습니다. 예수님께서 군중들을 바라보시며 목자 없는 양과 같도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그 말이 무슨 얘기인지 알아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천년전 그 당시 상황으로 또 지리적으로 그 나라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서 양이라고 했을 때에 어떤 이미지를 가졌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양하면 양은 매우 약한 동물이란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양은 제 몸 보호할 무기 하나가 없습니다. 날카로운 사자의 이빨도 없습니다. 힘센 황소의 뿔도 없습니다. 말처럼 뒷발질도 할 줄 모릅니다. 독수리처럼 날카로운 발톱도 없습니다. 조그마한 비탈진 길을 가려면 올라가질 못합니다. 뒤에서 목자가 밀어 주어야 됩니다. 어린 새끼 양은 아예 어깨에 매고 올라가야 언덕을 올라가야 했습니다. 양은 겁이 많은 동물입니다. 털이 많기 때문에 시냇물 소리만 들으면 냅다 도망갑니다. 시편23편에 보면 우리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이 말씀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말씀이지요. 

양은 매우 어리석은 동물입니다. 매일 먹는 풀인데도 불구하고 이게 먹을 수 있는 풀인지 못먹는 풀인지 구분할 줄 모릅니다. 독초와 목초를 구분할 줄 모릅니다. 자기가 매일 다니던 길인데 그 길을 못 찾아옵니다. 

제가 어릴 때 산에 가서 소를 먹이다가 그만 소를 잃어버렸습니다. 찾다 찾다 못찾고 엉엉 울고 돌아왔더니 소가 먼저 우리 집에 와서 음메~ 기다리고 있어요. 소는 저 혼자 집에 찾아옵니다. 

제가 어릴 때 좋아하던 개가 한 마리 있었는데 알록달록한 예쁜 개입니다. 아버님이 그 개를 팔았어요. 맨날 울었더니 그 다음날 왈왈 짖고 저를 기다리고 있더라구요. 개는 멀리 갔는데도 눈을 가리고 갔는데도 찾아옵니다. 

개미는 자기가 다니는 길 바깥에 갖다 놓아도 제 집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양이란 동물은 자기가 매일 다니는 길인데 어디로 다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냥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양은 보기에는 깨끗해 보이지만 모든 가축 가운데 가장 지독한 냄새가 나는 어쩌면 가장 더러운 동물 중에 하나가 양이라고 합니다. 이게 인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은 사랑의 대상이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지요. 가까이 가서 보면 냄새가 납니다. 덮어두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후벼파고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류 목사도 가까이 오면 냄새납니다. 절 위해서 기도해 주시면 됩니다. 이게 인간이라는 것이지요. 

팔레스타인 - 물은 급류입니다. 맹수는 많습니다. 산엔 온통 날카로운 가시투성이입니다. 길은 험악하지요. 목자가 없으면 양은 이 땅에 살아갈 길이 없는 것입니다. 

목자의 임무가 무엇일까요? 
안전한 길로 양들을 인도해 가는 것입니다. 이 풀은 못 먹는다. 독초와 목초를 구별해 주는 것입니다. 가파른 언덕을 오를 때 뒤에서 밀어줍니다. 가시덤불 피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맹수들이 덤비면 그들을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풀을 뜯거나 그늘에 쉴 때 피리를 불어 편안하게 안내 해 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 목자로 보냄을 받았다는 얘기는 예수님의 권세있는 가르침과 권세있는 설교와 권세를 직접 행하신 것처럼 우리도 위임받았다는 얘기는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 있는 내 주변의 사람들을 천국길로 안내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말씀을 먹이고 세상의 더러운 유혹과 세상의 가치관을 먹이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험악한 이 세상 혼자 살아갈 수 없을 때 그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엉덩이를 밀어주는 것입니다. 가시덤불 피할 수 있게 도와주듯이 이 세상은 유혹의 지뢰밭입니다. 전신만신 나를 찌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들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우는 사자처럼 택한 자를 삼키려고 덤벼듭니다. 악한 것들로부터 우리를 서로 보호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양들이 목자를 잃는 다는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양을 친다면 아침에 밥 먹고 "양치고 오겠습니다." 양 몇 마리 몰고 산에 가서 양을 치다가 저녁에 "양 치고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렇지 안다는 것입니다. 목자 한 사람이 많은 양떼를 이끌고 산으로 들로 갑니다. 짧으면 3개월 길면 6개월 어간동안 이 산 저 산을 찾아다니며 양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깊은 산속에 갔다가 목자가 병이 들기도 하고 불의의 사고로 목자가 죽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 양들은 목자를 잃어버려요. 맹수가 나타납니다. 도적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자 사자 도망가다가 언덕에 굴러 떨어져서 죽는 놈들, 도망가다가 가시덤불에 걸려서 온몸이 찢겨져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빠져나오지 못해서 매애~ 매애~ 울부짖고 있는 놈들, 맹수가 덤비니까 앞뒤 보지 않고 지칠 때까지 도망갑니다. 더 이상 뛸수도 없고 걸을 수도 없고 서 있을 수도 없어 뒤로 발랑 나자빠져서 네 다리를 하늘로 보고 바들바들 떨다 누가 일으켜 주지 않으면 그대로 내장이 꼬여서 죽는 겁니다. 이게 목자 없는 양입니다. 

가끔은 목자가 삯꾼 목자입니다. 도적떼가 나타난다든지 맹수가 나타나면 저 혼자 살기 위해서 양을 버려두고 도망갑니다. 그러면 목자 없는 양이 되는 것이지요. 이런 상황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여기 고생한다는 얘기는 헬라어 원문적으로 보면 몸이 갈기갈기 찢겨졌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망가다가 나뭇가지에 찢겨지고 날카로운 바위에 걸려 찢겨지고 가시덤불에 찢겨져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상태 이것을 "고생하며" 그랬습니다. 

"기진함이라" - 힘이 다 빠질 때까지 도망가서 발랑 나자빠져있는 상태 그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때 신속하게 목자가 달려가서 양을 일으켜 주지 않으면 양은 그 자리에서 죽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고 기록한 것이지요. 

IV. 제자 비전

"목자 잃은 양"을 돌보는 일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목양 사역! 그러면 좋겠지요. 본문에는 이 상황을 추수사역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추수 때가 가까이 왔느니라. 너무나 오랫동안 로마의 압제에 시달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만들어 놓은 율법에 시달렸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며 메시야를 기다려왔습니다. 이제 충분히 그들의 마음이 무르익었습니다. 가서 거두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너희를 구원한다는 이 소식을 전하는 것 이게 추수사역이라는 것이지요. 그들의 고생이 오히려 천국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 고생이 복된 존재로 바꾸어 주었던 것이지요. 메시야가 왔다. 천국이 임했다. 추수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추수사역의 비전은 12제자를 선택하고 세우는 일입니다.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너희들을 잘 다스릴 왕을 보내어 주소서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힘있는 장군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기업가를 보내 달라고 기도하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정치가를 보내어 달라, 교육가를 보내어 달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추수할 일꾼을 보태어 주소서. 예수님의 비전은 12제자의 비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세계 구원 전략은 제자 삼는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세계 경영 전략은 12제자를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비전에 동참하길 원한다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을 바로 감당하길 원한다면 예수님의 비전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한소망의 가족이 되었으면 소그룹 목장안으로 들어가십시오. 목장 안에 들어가면 나의 아픔을 끄집어 내었을 때 그들이 날 대신해서 울어주실 것입니다. 내 문제를 쏟아내었을 때에 그들이 나처럼 아파하며 함께 위로해 줄 것입니다. 함께 말씀을 나눈 자리에 성령의 임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서로가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서 서로가 서로를 불쌍히 여기며 지켜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목장안에 들어갔을 때 좋은 일만 있어서 들어가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가 함께 느낀다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그들의 문제를 듣고 함께 나눈다는 사실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승리하는 삶에 주님이 디자인하신 방법이 그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승리하며 살 수 있을 것이며 이 땅에 복음을 나누며 살 수 있을 것인가? 너희들이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이 무엇인가? 주님의 설계가 그 안에 있기 때문에 때로는 손해 봐야 합니다. 힘이 듭니다. 차라리 버리고 싶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비전안에 들어가게 되면 나의 스승을 만나는 것입니다. 나의 목자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의 비전안에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목사님들을 영적인 지도자로 목자로 인정하는 것이지요. 이웃집 아저씨 보듯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가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영적인 스승을 모셨으면 나도 제자를 삼는 것입니다. 내 주변의 다만 몇 사람이라도 그들을 구원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양육하고 그들을 도와주고 그들을 길러서 내가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어느덧 나도 모르게 믿음이 성장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문제를 위해서 기도하다 보면 내 문제는 어느새 해결되어 있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예수님의 디자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제자들을 살펴보면 놀라운 결론을 가지게 됩니다. 누구나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조건 - 예수님의 선택을 받으면 되는 것입니다. 아들은 태어나지만 자녀는 태어나지만 제자는 선택되고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모두 탁월한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대단히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어부가 있는가 하면 매국노로 불리던 세리가 있었습니다. 극단적인 국수주의자 열심당원들이 있었습니다. 이 열심당원들과 세리가 다른데서 만났다면 칼부림이라도 일어났을 것입니다. 너무나도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 안에 모여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의 제자들을 대기업 인재등용 프로그램에 정보를 입력해 보았습니다. 과연 이들이 앞으로 세계를 경영할만한 관리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예수님께 컴퓨터가 대답을 보내왔습니다. 

귀하가 계획하는 새 단체의 간부 사원으로는 모두 다 자격미달입니다. 학력이 너무 낮고 경험이 부족합니다. 그들은 공동체의 개념이 없고 협조 정신이 약하여 경영관리자로서 적합하지 않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정서적으로 안정성이 결여되어 있고 성경이 너무 과격합니다. 안드레는 한마디로 무능력자입니다. 남을 지도할 사람이 못됩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회사의 이익을 제쳐놓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할 사람들입니다. 도마는 매사에 부정적인데다가 질문만 많고 추진력이 없습니다. 마태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사람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다대오 이 두 사람은 사회 혁명을 노리는 과격한 불온사상에 감염되어 있어 귀하가 생각하는 온건한 집단에는 해로울 것입니다. 귀하가 추천한 12명 가운데 긍정적인 대답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 가롯 유다입니다. 그는 능력과 가능성이 있고 사회 지식도 풍부하며 똑똑한 경영자로서의 감각과 판단력이 뛰어납니다. 사교성이 있어 상류 권력층과 접촉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강한 동기와 의욕에 가득찬 사람입니다. 따라서 본 경영 상담 회사는 유다 한 사람만 남기고 나머지 11사람은 다시 찾아 보실 것을 권고하는 바입니다. 어떻습니까? 가롯 유다는 실패했습니다. 약하디 약한 존재, 무능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존재, 버릴 수밖에 없는 존재, 그들을 모아 주님은 세계 경영의 위대한 계획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느끼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당신도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 자신을 무능하다고 생각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히신 분들이 계십니까? 당신도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많아 늘 자학하며 살아오셨습니까? 당신도 예수 안에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당신의 사상이 극단적이십니까? 당신도 교회 안에서 비전의 사람으로 성장될 수 있습니다. 과거의 경력이 좋지 못하여 늘 가슴을 치며 살아오셨습니까? 예수님의 세계 경영 전략에 당신도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V. 추수 사역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사역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역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사역일 것입니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이지요. 한 가지를 더 들라고 한다면 12제자를 만든 사역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제자되라고. 제자를 삼으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에 장로 목사 권사 사장 국장 선생님 교수님....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살아가겠지요. 가장 영광스런 이름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는 성도라는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라는 이름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흘리심 때문에 내가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 백성 성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권세를 우리도 행하게 된 것입니다. 권세 있게 복음을 전하고 권세 있는 가르침, 권세를 나누며 이 땅에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 것이지요. 

만약 당신에게 이 땅에 살 시간이 1년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면 무슨 일을 하시다가 하나님 앞에 사시고 싶으십니까? 다만 한 두 달이 여러분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을 보내야 한다면 여러분은 이 땅에 무슨 일을 하시다가 하나님 앞에 서시겠습니까? 아니 백년이 남았다면 여러분은 무슨 일을 하시다가 하나님 앞에 부름받아 서시겠습니까? 결론은 분명합니다. 

주님이 행하셨던 삼중사역을 행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내 주변에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 누가 없는가? 

내 자녀들에게 천국복음 천국 가치를 가르치는 일입니다. 

병든자, 마음상한 자, 귀신에 시달리는 자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모두 병이 들었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아니 나 때문에 속상하고 나 때문에 병든 자는 없는지, 나 때문에 마음상한 사람은 없는지, 그들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용서받았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서기 전에 내가 용서해야 될 사람이 없는지, 용서를 선언해 주어야 될 사람이 없는지, 찾아서 그들에게 용서를 선언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누군가 나에게 목사님 한소망교회 비전채플은 왜 세워야 합니까? 묻는다면 나는 대답이 동일할 것입니다. 천국복음을 권세 있게 전하기 위해서, 천국복음을 권세 있게 가르치기 위해서, 권세 있는 공동체로 바꾸어 드리기 위해서, 우리의 자녀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쓰임받는 권세 있는 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꿈을 주기 위해서. 

첫 번째는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잘 섬기기 위해 비전채플을 세우는 것입니다. 좀 더 능률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더 잘 섬기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잘 준비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이 험악하면 험악할 수록 시대가 험악하면 험악할수록, 시대가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우리는 더 영광스러운 예배를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효과적인 신앙교육을 받아야 됩니다. 이웃을 잘 섬기기 위해서 우리는 이 일을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의 자녀들, 다음 세대에게 꿈을 주기 위해서 비전채플을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 복음을 가르치는 사역입니다. 세상이 점점 더 어둡고 어지러워져만 갑니다. 이단들이 들끓고 있습니다. 천국복음을 제대로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를 바로 누리며 살아야 됩니다. 

세 번째는 가정을 행복하게 하고 아파하는 이 세상을 치유하기 위해서 비전 채플을 세우는 것입니다. 아직도 세상의 유일한 희망은 예수요 교회입니다. 가정도 고침받아야 되고 한국교회도 치유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병들어 신음하고 있습니다. 좀 더 효과적인 치유가 필요합니다. 

네 번째 한민족의 영향력을 온 민족에게 나누기 위해서 이 비전채플을 세우는 것입니다.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세계선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가장 위대한 자원은 누가 뭐라해도 예수요 복음입니다. 이 민족은 예수 안에서 위대한 민족입니다. 바로 이 일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하라고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비전채플은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웃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다음 세대에 꿈을 주기 위해서,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서, 이 민족의 영향력을 세계 모든 민족에게 나누기 위해서, 이것이 목양 사역이요, 추수 사역이요, 제자 사역입니다. 

우리 모두는 양입니다. 약합니다. 어리석습니다. 예수 없는 우리의 삶은 목자 잃은 양과 같아서 이곳 저곳에서 찢겨지고 피흘렸지만 닦아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허둥대며 인생을 달려왔지만 쓰러지고 넘어졌지만 일으켜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예수님 찾아오셔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 권세를 위임하여 주셔서 너도 세상의 권세 있는 제자로 살아갈 수 있다 말씀하십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시간과 물질과 은사와 삶의 환경과 내 생애 모든 것을 투자하여 주님 하셨던 그 일들을 우리가 감당하다가 오늘 밤이라도 주님 날 부르시면 주여 제가 주님께서 내가 명하신 일을 감당하다 왔습니다. 내일이라도 천군천사와 함께 주님 이 땅에 임하시게 되면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제가 주께서 맡겨주신 사역 감당하다가 주님 오심을 기다렸나이다. 영광스런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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