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려주일] 주께 쓰임 받는 것은 영광이다 (막 11:1-10)

  • 잡초 잡초
  • 351
  • 0

첨부 1


주께 쓰임 받는 것은 영광이다 (막 11:1-10)

지금도 하나님의 기적은 시대와 역사와 장소를 초월하여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믿어야 할 사람들의 믿음이 표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초대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휘몰아쳤던 하나님의 성령의 바람은 지금도 동일하게 불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는 사람들의 돛이 내려져 있기 때문에 그 기적의 바람을 맞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현대 사회가 주는 편리함과 물질적 풍요로움으로 구도의 길을 잃어버리고 환상적 인격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해서 위선의 탈을 쓰고 겉과 속이 다른 거짓된 나로 그려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 없는 영광을 추구하려고 합니다.  헌신이 없는 편리한 예수를 믿으려고 합니다.  좁은 길을 거부한 채 넓은 길로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를 벗어 던지고 편안하게 예수를 믿으려는 교인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헌신을 외면한 채 편리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은 주님의 진정한 제자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도 오늘 이 땅의 교회 안에는 십자가를 벗어버리고 편안하게 예수를 믿으려는 사람들로 주일마다 가득가득 차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현대 교회가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은전을 잃어버린 여인이 그것을 찾기 위해 불을 켜들고 밤새도록 방을 쓸고 또 쓸 듯이 오늘 우리의 잃어버린 신앙을 찾으려고 깊은 곳으로 우리의 발길을 옮겨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정신을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섬김의 자세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때묻은 것을 씻고 성서적 기독교로 돌아가야 합니다.  정말로 주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참된 제자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철학이나 교리를 가르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삶의 정신을 가르쳐 주셨고, 삶의 영적 원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셨습니다.  속옷을 갖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구제할 때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사회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욕심이 판을 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아집과 고집으로 똘똘 뭉친 자기 중심적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아도 그 눈에 욕심이 더덕더덕합니다.  오늘 현대인들은 이렇게 외칩니다.
'떡으로만 살 수 있다.  악으로 선을 이겨야 한다.  구제할 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게 해야 한다.'

오늘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주님의 전을 찾아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귀 있는 자들은 우리들을 향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다같이 속정을 끊어 버리십시다.  우리 다같이 탐욕을 버려 보십시다.  성경은 모든 죄악의 뿌리가 여기에서부터 난다고 했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몸에 주님을 향한 신앙의 거룩한 흔적을 가져보십시다.  내가 예수를 구주로 믿고 고백한다면 그분으로 인한 거룩한 신앙의 아픔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신앙의 정체성을 공격하고 비난하는 많은 유대 교인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칩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갈 6:17)
그렇습니다.  그는 확실히 그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던 주님의 제자였습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몸에도 거룩한 영적 흔적인 스티그마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이 거룩한 영적 흔적을 가지고 있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과연 얼마나 있겠습니까?

새 생명이 태어날 때는 고통이 따르는 법입니다.  격심한 이 고통이 이 땅 위에 한 생명이라는 기적의 씨앗을 가지고 옵니다.  영적인 믿음의 사람이 태어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산의 고통을 통해 얻은 생명, 이것이 믿는 사람의 탄생입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이 새 생명의 고통의 흔적이 있는 것을 크게 자랑했습니다.  거룩한 예수의 흔적, 영적 스티그마!  우리에게도 날마다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이 거룩한 흔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은 고기는 흐르는 물과 함께 힘없이 떠내려가고 맙니다.  죽은 물고기에는 어떤 몸부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실 죽어서 떠내려가는 고기에게는 전혀 고통이 없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물고기는 물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물을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은 고통스럽고 힘든 일입니다.  부단한 자기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 고통이 바로 산 자의 증거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의 믿음이 살아있다는 증거는 바로 거짓되고 부패한 이 시대를 거슬러 치고 올라가야 합니다.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서 거대한 맘몬을 섬기는 이 시대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거룩한 자기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바라보며 한 영혼을 구하고자 하나님께 매달렸던 아브라함의 뜨거운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이 길은 눈물 없이 못 가는 길입니다.  피 없이 못 가는 길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그 길이 바로 우리 주님께서 걸어가셨던 골고다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아픔의 상처 속에 나타나십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의 절정은 모리아 산에서 아들을 바쳐야 하는 아픔의 순간이었습니다.  고통과 아픔처럼 사람을 성화시키는 일은 없습니다.  골고다 그 언덕에 인류를 위하여 피와 땀과 눈물과 생명을 주는 그 주님을 쳐다보십시다.  몸부림과 탄식과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심연에서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절규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우리는 아픔이 있는 신앙, 아픔이 있는 예배, 아픔이 있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아픔의 상처가 클수록 영적 성장도 큽니다.  믿음의 여정에 나타나는 상처는 기적의 바람을 맞을 수 있는 신앙의 돛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를 향한, 주를 위한 거룩한 영적 상처인 스티그마는 불행이 아닙니다.  손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는 사람에게 최대의 영광이요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우리 주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마지막 한 주간은 그렇게 예루살렘 입성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여느 왕들의 입성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납니다.

모든 왕들은 말을 타고 개선장군처럼 입성합니다.  또 군마를 타고 수많은 호위병들과 칼을 찬 병사들을 거느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입성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고 길가에 나온 어린이들과 여인들이 호산나라고 외치는 함성을 들으시며 입성하셨습니다.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연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시면서 입성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의 입성은 전쟁에서 승리한 장수의 입성과는 달리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너무나도 초라한 입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장수들은 자신의 업적을 드러내고 자신이 영광을 받기 위하여 입성하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할 어린양으로써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한 번도 사람이 탄 적이 없는 나귀 새끼를 타시고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은 친히 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이루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스가랴 9장 9절에 보면 이 사실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한 마디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둘을 맞은편 마을로 보내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이 가서 보니까 거기에는 어린 나귀 새끼가 매여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제자들이 나귀를 푸니까 주인이 왜 그러느냐고 묻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주께서 쓰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말에 나귀 주인이 그대로 보내 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 한 말씀을 가슴에 꼭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이 말씀은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려고 만왕의 왕으로 등극하시는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이름도 없는 이 초라한 나귀 새끼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이것보다 더한 영광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만왕의 왕이신 주님께서 나를 쓰시기를 원하신다.  이것보다 더 큰 축복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주 앞에서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우리의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주가 쓰시겠다 하라"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이 우레 소리처럼 들려오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주가 쓰시겠다"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 음성을 듣는 자는 역사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이 음성을 듣는 자는 우리 주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나의 생명이요 구원이 되시는 주님, 나를 쓰시옵소서.  나를 드립니다.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마음껏 사용하시옵소서"

주님은 우리를 쓰시려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쓸모 없는 인간으로 되어버린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구속하시고 값을 지불하여 다시 우리를 바로 세워주셨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지금도 나를 쓰시려고 찾고 계신다는 사실에 귀를 기울여야 됩니다.  여기에서 '쓰시겠다'는 말은 헬라어로 '크레이아'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필요 불가결한 존재다.'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쓰이고 싶다는 욕망은 결국 살고 싶다는 욕망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 데도 쓰이지 못한다고 할 때에 비참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 데도, 아무에게서도 쓰임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버림받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다 중요한 것은 쓰임을 받지만 누구에게서 쓰임을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폭력 조직의 보스에게서 쓰임을 받는다면 그는 뒷골목이나 누비는 폭력배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부터 쓰임을 받는다면 만인이 우러러보고 존경하는 정치 지도자가 될 것입니다.  누구에게로부터 쓰임을 받는가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누구에게 쓰임 받고자 하는가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파악해야 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지 않으면 결국 나는 마귀가 써야 합니다.  내 시간을 하나님께서 쓰지 아니하면 마귀가 빼앗아 갑니다.  내 재능을 하나님께서 쓰지 아니하면 사탄이 침략해갑니다.  나의 물질을 하나님께서 쓰지 않으면 사탄이 빼앗아 세상에 다 탕진하게 합니다.  내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아니하면 사탄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내가 너를 쓰려고 택했노라, 내가 너를 쓰려고 불렀노라, 내가 너를 쓰려고 죄에서 구속했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을 쓰고 있는 주인이 누구입니까?  회사에 들어가서 인정 없고 포악한 주인을 만나면 그의 삶은 힘듭니다.  그러나 주인을 잘 만나면 그 주인을 통해서 큰 위로를 얻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원한 주인이신 주님, 자비와 긍휼과 비전을 가지고 나를 살피시는 주님께서 나를 쓰셔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서 나를 이용합니다.  그리고 쓸모가 없어질 때는 가차없이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영광스러운 존재로, 행복한 존재로, 창조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불러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가장 나약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을 눈으로 보십시오.  예수님은 보잘 것 없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항상 자기 자신을 약한 자로, 쓸모 없는 자로 부정해버리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나는 가진 것도 없고, 재능도 없고, 배운 것도 없다' 하고 자기 자신을 열등화 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왕으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나귀 새끼를 탔다.  그래도 너는 이 나귀 새끼보다는 훨씬 더 나은 존재가 아니냐?  너를 위해서 내가 나의 목숨을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를 새끼 나귀 존재로 생각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작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이 왕으로 택함을 입을 때에 그는 지극히 작은 자였습니다.  그는 이새의 여덟 번째 아들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왕을 세우기 위해서 이새의 집에 갔을 때 큰아들 엘리압을 보고 용모가 준수하니까 그에게 호감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그리고 다윗이 양을 치고 돌아왔을 때 성령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랑하는 여러분, 땅에도 외모가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땅이 기름져서 비옥한 땅은 농사가 잘 되고, 경치가 좋은 곳은 관광지가 됩니다.  그런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황무지 같은 땅은 그 속에 지하자원이 풍부합니다.  외모가 아름다운 땅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면서 관광하지만 외모가 보잘 것 없는 땅은 그 속에 금은보화가 가득 들어있습니다.

미국 본토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큰 땅인 알래스카는 원래 구소련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구소련이 아무 쓸모도 없는 얼음 땅이라고 해서 1967년에 720만 달러를 주고 미국에 팔아버렸습니다.  후에 의회가 조사단을 파견하여 알래스카를 조사해 보았더니 그 땅에는 금과 백금이 가득하고, 풍요한 어장과 산림이 우거져 있고, 석유가 무진장 매장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구소련이 쓸모 없다고 팔아버렸던 그 땅 속에는 엄청난 지하 자원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내 자신을 볼 때 외모가 없습니까?  화려한 학력이 없습니까?  돈이 없어서 가난합니까?  그렇다면 속이라도 채우시기 바랍니다.  인물이 잘 생긴 사람들, 출세한 사람들은 남에게 보이려고 길거리를 헤매니까 사람들이 밟고 다닙니다.  구경거리가 있으니까요.  그리고 문전성시를 이룹니다.  그러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속을 쓰겠노라.  네 속에서 석유 같은 성령의 능력을 솟아오르게 해서 인류의 가슴마다 불길이 타오르게 할 것이다.  네 가슴속에서 믿음, 소망, 사랑을 빼서 인류에게 희망을 줄 것이니 능력 없는 자들아, 이리 모여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

사랑하는 여러분, 나의 나됨을 살펴서 세상에서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한다면 주님의 전에 와서 속을 채우십시오.  은혜를 채우십시오.  성령의 충만함으로 채움을 받으십시오.  그래서 성령의 불길이 솟아오르게 하십시오.  그러면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쓰겠다."  이 말은 결국 무슨 뜻입니까?  주님께서는 나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나의 현재 그 모습 그대로를 쓰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주 앞에 서 있는 현재의 나를 사랑하십시오.  내 등에 주님을 태우고 사명을 향해 달려나가는 자신을 존귀하게 생각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원은 다시 태어나서 무슨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170이 넘는 훤칠한 키에 정말 잘 생긴 인물로 태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더 많은 재물과, 더 뛰어난 재능을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비록 가난하지만, 내 비록 배운 것이 없지만, 내 비록 연약하고 보잘 것 없지만 이대로 주님을 내 등에 태우고 이 땅이 진동할 만큼 주께로부터 쓰임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내 등에 타시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인생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더 이상 과거를 묻지 마십시오.  없는 현실을 가슴 아파하거나 절망하지 마십시오.  현재 남은 이대로 주님께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보잘 것 없는 어린 나귀였지만 예수님이 그 위에 타시니 제자들이 겉옷을 벗어 그 위에 얹었습니다.  등에 가마니나 덮고 주인의 채찍에 맞으며 짐이나 나르던 나귀인데 제자들의 부드러운 옷이 그 위에 덮어지고 주님이 그 위에 타십니다.  그리고 나귀가 걸어갈 때 수많은 사람들이 옷을 던지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 호산나" 하고 외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착각하면 안됩니다.  나귀가 잘나서 겉옷을 얹어준 것이 아닙니다.  나귀가 존귀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한 것이 아닙니다.  나귀의 등에 주님께서 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모든 영광을 주님께서 받으시지만, 그러나 나귀는 주님 때문에 자신도 덤으로 영광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쓸모 없는 존재일지라도, 허물 많은 존재일지라도 내 등에 주님만 태운다면, 주님께서 쓰시게 한다면 여러분의 생은 기적적인 영광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내 허물까지도 주님께서 쓰시도록 그 위에 태우십시오.  내 허물, 내 죄악을 나 혼자 가지면 망합니다.  그러나 그 허물까지도 주님이 타시면 그 허물을 들어서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초라한 존재라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내 입을 쓰시고자 할 때 입을 열고 복음을 외치십시오.  내 손을 들어서 쓰시고자 원할 때 내 손을 들어서 섬김으로 일하십시오.  내 발을 필요로 할 때 복음을 들고 평화의 사도로 가십시오.

주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십니다.  주님은 높은 자를 쓰시기도 하시지만 보잘 것 없는 나귀 새끼 같은 존재도 들어서 타시고 영광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한 때 설레이는 꿈들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꿈이 깨졌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큰 꿈을 이루지 못하고 꿈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질지라도 예수님을 모신 구유처럼, 예수님이 타신 나귀 새끼처럼, 예수님이 못 박힌 십자가처럼 주님을 위해 쓰임 받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가치 있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기록된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온 성이 소동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소동했다'는 말은 지진이 일어나듯 천지가 진동했다는 말입니다.  흔들렸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비록 초라한 존재지만 주님을 태우고 천국으로 입성할 때 천군, 천사와 하늘이 진동하는 그 날을 상상하십시오.  영광스러운 그 날을 그리워하십시오.  우리가 천국에 입성하는 날 천국에 소동이 나도록 해야 합니다.  비록 나는 나귀 새끼 같은 존재일지라도 나의 가진 재능, 재산, 시간, 이 몸으로 주님을 모시고 입성할 때 주님을 영화롭게 한 그 일로 인하여 크게 환영하는 소동이 일어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쓰시려면 매어있는 나귀를 풀어서 예수님께로 끌고 와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그렇습니다.  주님께 쓰임 받기를 원한다면 매인 나귀를 풀어서 주님께로 끌고 와야 합니다.  여기 매인 나귀는 세상을 위해 살아야 할 나귀입니다.  주인에게 매여서 주인을 위해 일하고 팔리는 나귀입니다.  이 나귀를 주님께서 쓰시기 위해서 풀어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를 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내 인생 최고의 영광이 아닙니까?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축복이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과 세상 죄악에 매여 있습니다.  세상 마귀에 매여 있습니다.  이 결박을 풀고 오라고 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해도 우리가 전혀 쓰임 받지 못하는 것은 내가 주께로 못 가도록 무엇인가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능력으로 풀어야 합니다.  푸십시오.  무슨 줄로 매여 있습니까?  어디에 결박되어 있습니까?  풀어놓으십시오.  예배를 방해하는 것, 기도를 못하게 하는 것, 전도를 못하게 하는 것을 푸십시오.  그래서 주님께로부터 쓰임을 받는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을 쓰시기 원하십니다.  당신을 쓰시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십시오.  그래서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가정에 들어가면 가정에 거룩한 소동이 일어나야 됩니다.  직장에 거룩한 소동이 일어나야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거룩한 영적 소동이 일어나야 됩니다.

날 때부터 꼽추인 여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17세가 되기까지 집밖에 나가본 적이 없었습니다.  자기 자신이 꼽추라 창피하기도 했고, 부모님이 학교에 보내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17세가 되던 해에 그 집에 수녀님이 찾아와서 그 수녀님 때문에 난생 처음으로 천주교 사경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천주교 사경회는 개신교처럼 찬송을 세게 부르거나 말씀을 강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조용 조용하게 하는 세미나 비슷한 것인데 강사가 그런 말을 했습니다.

"이제 조용히 밖으로 나가서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세상을 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이 어떻게 들려오나 각각 감동을 받으시오.  과연 나는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나를 어떻게 쓰시기를 원하시는가?  감동을 받고 다시 모입시다."

사경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갔습니다.  건강한 사람들은 밖에 나가서 좋은 잔디밭과 벤치에 앉아서 깊은 명상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꼽추 소녀는 더딘 걸음으로 나갔기 때문에 좋은 자리가 없어서 아무도 없는 쓰레기통 옆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러면서 '아, 나는 어디를 가나 쓰레기구나' 하고 한숨을 쉬는데, 그때 한 소년이 오더니 쓰레기통을 뒤지면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곱추 소녀가 용기를 내서 난생 처음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쓰레기통을 왜 뒤집니까?"
"캔이나 종이를 찾고 있어요."
"그걸 찾아서 무엇하려구요."
"이걸 가지고 가면 돈이 되거든요.  팔아서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편찮으신데 약 사드리려구 그래요."

그 순간 곱추 소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 쓰레기도 쓸모가 있구나!  나 같은 쓰레기 인생도 쓸모가 있구나!  저 쓰레기를 팔아서 노인들의 약값을 할 수 있다면 나처럼 쓰레기 같은 곱추도 병들어 누워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약이 될 수 있겠구나!'

그런 감동을 받고 그는 들어가서 신부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나 같은 곱추 쓰레기도 주님께서 쓰신다고 하시니 저 병들고 나약한 양로원으로 보내주세요.  나로 하여금 주께서 쓰시게 해 주세요."

드디어 '내가 너를 쓰겠다' 이 음성을 들은 꼽추 소녀는 양로원에 들어가서 굽은 허리로 수많은 노인들의 병 수발을 들었습니다.  오히려 건강한 사람보다, 키 큰 사람보다 곱추가 노인들을 섬기기에는 더 좋았습니다.  노인들을 섬긴 이후 곱추가 들어가면 병든 할아버지 할머니의 마음에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곱추는 이미 곱추가 아니었습니다.  하늘이 보낸 천사였습니다.  땅이 진동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께서 쓰시겠다'는 음성을 들으십시오.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주님께서 쓰시고자 할 때 쓰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아무 쓸모 없는 고물 인생이요, 폐품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이 고물 같은 것도 써 주시옵소서."

아십니까?
내 삶이, 내 전부가 주님께 쓰임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영광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