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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 되신 주님과 함께 (요 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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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되신 주님과 함께 (요 11:1-16)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들어있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 매우 사랑하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마을 베다니에 살던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라 하는 남매 세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중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다가 예수님에 의해 다시 살아난 놀라운 일을 전하는 기록의 앞부분입니다. 어느 날 나사로가 병이 들었는데 무슨 병인지는 알 수 없으나 병세가 위중해 보였는지 그의 누이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서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사랑하시던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접하신 예수님께서 예상 밖의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본문 4절을 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서둘러 베다니 마을로 가실 생각은 않으시고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본문 6절). 이틀이 지나고서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 하셨습니다(본문 7절). “유대로 다시 가자”는 말씀은 곧 베다니로 가자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그때 유대 땅에 계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다니에서 하룻길쯤 되는 곳에 머물러 계셨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셨을 때 나사로는 이미 죽어있었고 죽은 지 나흘이 되었다고 마르다가 말했기 때문입니다(요11:39). 나사로가 위중하다는 소식을 전한 사람이 예수님께 오는 데 걸린 하루와 예수님께서 그 소식을 들으시고도 머물러 계신 이틀과 그리고 베다니로 가시는 데 걸린 하루를 합치면 나흘이 됩니다. 그러고 보면 나사로는 예수님께 알리러 사람이 떠난 후 얼마 안 있어 죽은 것 같습니다.

  이미 늦기는 했으나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베다니로 가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 하셨을 때 제자들은 망설이며 여쭈었습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본문 8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했던 것은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밝히 말하라”요구했을 때 예수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대답하시자 그것을 하나님을 자칭한 신성모독행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요10:24-33). 예수님의 신변뿐 아니라 그와 함께 다니는 자신들의 신변의 위험을 느껴 당장 유대로 다시 가기를 꺼렸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9-10절입니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제자들이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하고 여쭌 것은 유대로 갔다가 적대적인 감정을 가진 유대인들에게 잡히거나 돌에 맞을 것을 염려한 것이지 길을 가다가 어두워 실족할 것을 염려한 것이 아님이 분명한데도 예수님께서는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라고 딴청부리시듯 말씀하신 뜻이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대답이 종종 그렇듯이 동문서답처럼 들리는 이 대답은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유대로 가실지 안 가실지를 제자들과 의논할 생각이 없으심을 분명히 하시고 어차피 갈 것 해가 지면 길 가기 힘드니 해지기 전에 서둘러 그날 중으로 베다니에 들어가자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때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하신 말씀은 낮이 스무 시간이나 서른 시간 되는 것 아니고 열두 시간밖에 없으니 시간을 아껴 빨리 가자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첫 번째 의미는 낮을 예수님께 주어진 삶의 기간으로 보는 것입니다. 빛과 어둠, 낮과 밤을 생명과 죽음을 상징하는 말로 보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사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사명을 수행하실 날이 무한정한 것이 아니고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해야 할 일을 지체 없이 해야겠다는 뜻으로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은 생명을 살리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장 한 죽은 생명 나사로를 살리실 뿐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당신이 모든 인간의 생명을 살리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드러내시고, 그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사역인 당신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준비하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를 표명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일은 당신 자신에게는 죽음의 길을 재촉한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본문과 같은 11장 뒷부분인 47-57절은 그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곧바로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전해졌고 그들은 공회를 모으고는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며 대책을 논의했습니다(47-48절). 그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말하기를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49-50절) 했고, 그날부터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기 시작했습니다(53절).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고 명령하였으며(57절), 유월절이 가까운 때라(55절) 유대인들은 서로 말하기를 “그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며 그를 잡을 궁리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56절).

  예수님께서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하신 말씀의 또 다른 이해는 세상의 빛을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신 말씀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실 기간이 길지 않음을 가리키신 말씀이고,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하신 말씀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살아계시는 동안 제자들이 가야할 길을 가고 해야 할 일을 하기를 촉구하신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초자연적인 놀라운 일들을 많이 보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제 결정적인 일 즉 이미 죽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사람까지도 살리시는 능력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소식을 들으시고도 이틀을 더 기다리셨다가 베다니로 가신 것은 바로 그래서였을 것입니다. 확실하게 죽었고 냄새까지 나는 시체를 다시 살려 일으키심으로써 당신 속에 함께하시며 역사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또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아들의 권능과 영광을 제자들이 분명히 보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대뜸 말씀하시기를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본문 4절) 하신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저 예수님께서 유대로 가셨다가는 잡히시거나 돌에 맞으실 것만을 염려하는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살아계실 동안 그들이 꼭 보고 깨닫고 확신해야 할 일을 위해 함께 유대로 가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더욱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죽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 세상의 빛이시고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그를 믿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으실 죽음의 의미를 확실히 깨달아 아는 것임을 가르치시려 하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뜻을 바로 알아들었는지 어떤지는 모르겠으나 도마가 나서서 한 마디 했습니다. 16절로 내려가서 봅니다: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이 시점에서 도마가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했건 안 했건 그의 그 말은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을 예언한 말이며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까지 따라가야 할 참 제자의 도리를 설파한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는 도마의 말처럼 신변의 위협을 마다하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다니로 간 제자들은 이미 죽어서 냄새나던 나사로가 무덤 밖으로 불러내시는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얼굴은 수건에 싸이고 수족은 베로 동인 채로 살아나오는(요11:43-44) 놀라운 일을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미리 앞당겨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빛 되신 주님의 말씀을 따르며 그와 동행하는 것은 생명의 사건, 구원의 사건을 날마다 체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길이라도 주님과 함께하는 길은 곧 생명의 길이 될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시기를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하셨습니다. 14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밝히 말씀하시기를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확실히 죽은 것을 아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잠들었을 뿐이며 깨어 일어날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죽음이 잠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다시 일어날 수 없는 이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깨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빛 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슬픔과 눈물은 사라지고 기쁨으로 충만해지며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끝까지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둠의 세력들은 한쪽에서 예수님과 그를 사랑하며 그에게서 새 생명을 얻은 나사로까지 다 잡아 죽일 모의를 하고 있었지만(요12:10-11) 빛 되신 주님께서는 생명을 살리는 역사를 이루고 계셨습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오늘날 어둠의 세력에 맞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우리가 됩시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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