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갈라디아서

  • 월평 월평
  • 2209
  • 1

첨부 1


갈라디아서 서론 갈라디아서는 일명 ‘소로마서’ 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 서신에서 인간은 본질적으로 전적인 부패한 존재이기 때문에 스스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성화에 이를 수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써만 의롭게 됨을 말씀합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의롭다고 인정해 준다는 것이지 우리의 죄악된 성품이 의로운 성품으로 변화한다는 것은 의미하지 않습니다. 1. 기록 동기 :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의 제 1 차 전도 여행을 통해 개척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대 율법주의를 고수하는 거짓 교사들이 출현하여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부정하고, 그가 전한 복음까지 부정하여 할례와 율법을 행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며 그들을 미혹했습니다. 이제 갈라디아 교회는 복음이 변질되고 파괴당하는 긴급한 위기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강조하고, 또 그리스도의 계시의 복음인 십자가의 복음, 부활의 복음을 통해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R.A. Cole은 ‘갈라디아서는 영적인 다이나마이트와 같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 William Neil은 ‘진리를 사수하는 데 있어서 조금도 두려워할 줄 모르는 용사와 같은 서신이다’ 고 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기의 아내 ‘캐더린 폰 보라’ 라는 별명을 붙이면서 ‘나는 이 책과 결혼했다’ 고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자유의 대헌장이다’ 라 불렀습니다. 2. 수신자 :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 1 차 전도 여행을 통해 세워진 교회입니다(행14:21-23).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의 안디옥을 포함합니다. 3. 기록 연대 및 장소 : 학자들의 견해가 각기 다르지만, 많은 학자들이 제 3차 전도여행 중인 A.D. 53-58에 기록했다는 설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4. 기록 목적 : 갈라디아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여 교회 내에 큰 혼란이 생겼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이 서신을 기록했습니다. 5. 갈라디아 지역의 역사적인 배경 : 갈라디아 지역은 소아시아 중앙 부분에 위치한 고원지대로 예로부터 민족들의 대이동과 강대국의 각축에 의해 많은 혼란을 겪었던 곳입니다. B.C. 3000년 대에는 힛타이족에게, B.C. 2000년 대에는 헬라 사람들과 브르기아 사람들에게, B.C. 1000년 대에는 바벨론과 페르시아에게 지배를 받았습니다. B.C. 189년 대에는 로마의 장군 만리우스에게 정복되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까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갈라디아는 전쟁, 노예, 빈곤, 질병, 기근 등으로 점철되어 있었던 곳입니다. 6. 갈라디아 교회의 설립 : 제 1 차 전도 여행시에 수리아 안디옥을 떠나 바울과 바나바 일행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행13:16-41).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방해로 이고니온으로 가서 전도했습니다(행13:50-14:5).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다시 루스드라로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행14:1-7). 그러나 유대인들이 돌로 쳐 죽이려 했기 때문에 더베로 가게 되었습니다(행14:8-21). 그는 죽음을 무릎 쓰고 다시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의 순으로 온 길을 가면서 그 곳에 각각 장로들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므로 제 1 차 전도 여행을 마쳤습니다(1:2,행14:21-25). 바로 이 때에 세워진 교회들이 갈라디아 교회들입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제 1 차 전도 여행의 결실이요, 핍박 중에 세운 교회입니다. 7. 갈라디아서의 특징 : 갈라디아서의 특징은 믿음으로 구원과 성화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된 진리를 강하게 반박하고(1:1,3:1,6,6:17), 율법과 복음의 의미를 명쾌하게 규명해 주고 있습니다(2:16,3:1-4:31). 그리고 구원의 교리와 신앙의 실천에 대해 말함으로 올바른 기독교 윤리를 전하고 있습니다(5:1-6:10). 8. 내용 : 1,2장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 3,4장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설명 5,6장 :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적용 1996년 갈라디아서 제 1 강 다른 복음은 없나니 말씀 : 갈라디아서 1:1-24 요절 : 갈라디아서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1. 사도 바울은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1)? 그가 어떻게 사도가 되었습니까? 사도란 어떤 사람을 일컸습니까? 처음부터 그의 사도권을 강하게 주장하는 뜻이 무엇일까요? 2. 이 편지의 수신자가 누구입니까(2)? 갈라디아 교회들에 대해 말해 보시오(참조:행13,14장). 3.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어떻게 문안합니까(3)? 은혜와 평강에 대해 말해 보시오. 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이며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4,5)? ‘악한 세대’ 의 모습이 어떠한 세대이며, 그리스도로 인해 건짐을 받은 자들의 삶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5. 사도 바울은 어떤 점을 이상히 여깁니까(6)? 6.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목적이 무엇입니까(7)? 다른 복음이란 어떤 것을 말합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란 뜻이 무엇입니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어떤 형벌을 받게 됩니까(8,9)? 7.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어떤 자세를 가졌습니까(10)? 이를 볼 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8.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누구로부터 온 것입니까(11,12)? 복음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 보시오. 10. 사도 바울이 유대교에 있을 때 복음에 대한 자세가 어떠했습니까(13,14)? 이런 그가 어떻게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까(15,16)? 11. 사도 바울은 왜 혈육이나 사도들과 의논치 않고 아라비아로 갔습니까(17)? 사도 바울은 3년 만에 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까(18)? 그는 거기에서 누구를 만났습니까(19,20)?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12. 사도 바울로 인해 교회에 받은 바 은혜가 무엇입니까(21-24)? *이상에서 사도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에 대한 자세를 말해 보시오. 1996년 갈라디아서 제 2 강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씀 : 갈라디아서 2:1-21 요절 : 갈라디아서 2:16 1. 바울이 언제 누구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까(1)? 바나바, 디도에 대해 말해 보시오.(참조:행4:26,11:28-30,15:37-40,고전9:6,갈2:3,고후7:6) 2 바울은 왜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까(2a)? 그목적이 무엇입니까(2b, 참조행15:1-12)? 3. 유대인들은 왜 디도를 억지로 할례를 받도록 했습니까(3-5)? 그들이 노리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 대한 태도가 어떠합니까? 복음 진리란 무엇을 말하며 이를 수호하려는 바울의 자세에 대해 말해 보시오. 4. 하나님은 무엇을 보십니까(6)? 그리고 바울은 당시 유명한 사도들로부터 받은 것은 있습니까? 5. 베드로와 바울과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7-9a)? 하나님은 왜 바울과 베드로에게 유대인,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했을까요? 6. 바울은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과 어떻게 교제를 나누었습니까(9b,10)? 하나님의 역사아 은혜를 알고 서로 합심하는 이들로부터 무엇을 배웁나까? 7. 게바는 안디옥에서 왜 외식을 했습니까(11-12)? 이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까(13)? 바울은 게바를 어떻게 책망했습니까(14)? 이런 바울로부터 배울 점이 무엇이며, 바울의 책망을 받아들인 게바로부터 배울 바가 무엇입니까? 8. 누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까(15,16)? ‘의롭다함을 얻는다’ 는 뜻이 무엇입니까? 행함과 믿음, 율법과 복음 진리에 대해 생각해 보시오. 9. 왜 우리가 헐었던 것을 도로 세울 수 없습니까(17,18)? 율법을 향하여 죽는 이유가 무엇입니까(19)? 10.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20a)? 그의 육체적인 삶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20b)? 11. 신자가 율법을 통해 의롭게 되려 한다면 어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됩니까(21)? 1996년 갈라디아서 제 3 강 율법과 믿음 말씀 : 갈라디아서 3:1-29 요절 :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 바울은 왜 갈라디아 성도들이 어리석다고 한탄합니까(1)? ‘어리석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너희 눈 앞에 보인다’는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2. 우리가 성령을 받은 것은 무엇으로 말미암은 것입니까(2)?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다는 뜻이 무엇입니까(3)? 3. 왜 그들은 많은 괴로움을 당해야 했습니까(4)? 그들이 어떻게 많은 괴로움을 이겼습니까(5)? ‘듣고 믿음’이란 뜻이 무엇입니까? 4. 아브라함은 어떻게 의롭다 여기심을 받았습니까(6,7,참조 창15:6)? 하나님은 왜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했습니까(8)?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의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9)? 5.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왜 저주 아래 있을 수밖에 없습니까(10-12)? 6. 예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했습니까(13)? 왜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속량했습니까(14)? 7. 언약의 특징이 무엇입니까(15)? 하나님의 약속들은 누구를 가리켜 하신 것입니까(16)? 왜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헛되이 할 수 없습니까(17)? 아브라함은 무엇을 근거로 유업을 받았습니까(18)? 8. 왜 율법이 더하게 되었습니까(19a)? 어떤 점에서 율법은 약속보다 못합니까(19b,20)? 9. 바울이 이제부터 말하는 바가 무엇입니까(21a)? 왜 율법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까(21b,22)? 그러나 율법의 역할이 무엇입니까(23,24)? ‘몽학선생’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10. 그러나 이제 믿음이 온 이후로는 우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25-29)?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세례를 받았다’ ‘그리스도로 옷입었다’ ‘아브라함의 저손이다’ 가 주는 뜻을 각각 설명해 보시오. 믿음이 주는 축복이 얼마나 큰가를 생각해 보시오. 1996년 갈라디아서 제 4 강 믿음과 자유 말씀 : 갈라디아서 4:1-31 요절 : 갈라디아서 4: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1. 유업을 이을 자가 어릴 때는 어떤 취급을 받습니까(1,2)? 그에게는 왜 후견인이 필요합니까? 2. 우리가 어렸을 때 무엇에 종 노릇하였습니까(3)? ‘어렸을 때’ 는 언제를 말하며, ‘초등학문’ 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3. 하나님은 때가 차매 누구를 보내셨습니까(4a)? ‘때가 차매’ 란 언제를 말합니까? 이로 인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 무엇입니까(4b,5)? 아들의 명분을 얻은 자들이 누릴 특권이 무엇입니까(6,7)? 4. 갈라디아 성도들의 과거와 현재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8,9a)? 바울이 그들의 어떤 점을 안타까워합니까(9b-11)? 5. 바울은 그들을 얼마나 사랑했습니까(12)? 그들은 바울을 어느 정도 사랑했습니까(13,14)? 6. 그들이 그토록 열심을 내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16-17)? 우리가 무엇에 대해 열심이어야 합니까(18)? 7.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위해 다시 무엇을 하고자 합니까(19,20)? 해산하는 수고를 통해 그들을 돕고자 하는 바울의 마음을 말해 보시오. 8.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의 탄생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21-23)? 하갈과 그 자녀들은 무엇을 비유합니까(24,25)?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누구의 자녀입니까(26-28)? 9. 그 때에는 누가 누구를 핍박했으며, 지금은 누가 누구를 핍박합니까(29)? 그러나 결국 누가 쫓겨나며, 누가 유업을 얻습니까(30,31)? 1996년 갈라디아서 제 5 강 육체와 성령 말씀 : 갈라디아서 5:1-26 요절 :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게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1.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1)? 우리가 이 자유를 어떻게 얻게 되었습니까?(참조:갈4:7)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자유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2. 그들이 할례를 받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2-4)? 할례는 무엇이며, 그들이 왜 할례를 받고자 했습니까? 3.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좇아야 합니까(5)? ‘의의 소망’ 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의의 소망을 이룰 수 있습니까(6)? 4. 그들이 왜 그 믿음을 떠났습니까(7-9)? 그러나 바울은 그들과 미혹자들에 대해 어떤 확신을 가졌습니까(10)? 5. 바울이 할례를 전했다면 생활이 어떠했을까요(11)? 그런데 왜 할례를 전하지 않고 십자가의 복음만 전했습니까? 그는 할례자들이 어떻게 되기를 원했습니까(12)? 6.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13)? 그 자유를 어떻게 써야 합니까? ‘사랑으로 종노릇하라’ 는 뜻이 무엇입니까? 모든 율법은 어떤 말씀으로 요약됩니까(14)? 사람들이 피차 멸망하는 원인이 무엇입니까(15)? 7. 신자는 무엇을 좇아야 합니까(16)? 그때 육체의 욕심은 어떻게 됩니까? 육체의 욕심이 왜 성령의 역사와 병행할 수 없습니까(17)? 성령의 인도함을 받게 될 때 어떻게 됩니까(18)? 8. 육체의 일은 무엇입니까(19-21)? 왜 일이라고 했을까요? 반면에 성령의 열매는 무엇입니까(22-23a)? 왜 열매라고 했을까요? 그리고 각각의 뜻을 말해 보시오. 왜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습니까(23b)? 9.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24)?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10. 사람들이 왜 격동하고 투기하게 됩니까(25)? 1996년 갈라디아서 제 6 강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말씀 : 갈라디아서 6:1-18 요절 : 갈라디아서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1. 범죄한 형제란 어떤 사람을 말하며,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1)? 2. 남의 짐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2)?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3. 신자가 된 줄로 생각하면 어떻게 하는 것이 됩니까(3)? 그러나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4)? 4. 신자는 자기의 짐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5)? 또 가르치는 자에 대해서는 어던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6)? 6. 씨를 뿌리는 자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합니까(9)? 왜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자세로 착한 일을 해야 합니까(10)? 왜 믿음의 가정들에 더 착한 일을 해야 합니까? 7. 억지로 할례 받게 하려는 자들은 어떤 점에서 위선적입니까(11-13)? 바울의 유일한 자랑이 무엇입니까(14,15)? 그가 어떻게 그토록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었을까요? 8. 바울의 마지막 호소가 무엇입니까(16,17)? 그에게는 어떤 예수의 흔적이 있었습니까? 우리들 각자에게는 어떤 흔적이 있습니까? 바울의 마지막 인사가 무엇입니까(18)? ’96년 갈라디아서 제 1 강 다른 복음은 없나니 말씀 : 갈라디아서 1:1-24 요절 : 갈라디아서 1: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기독교 역사가 시작한 이래 많은 異端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달콤하게 유혹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異端들이 곳곳에 散在해 그럴듯한 이론으로 성도들을 미혹하여 가정을 파괴하며 사회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본문에 보면 갈라디아 교회 내에도 이단들이 나타나 성도들을 미혹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使徒職 을 부인하여 그가 전한 복음까지 부인코자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만을 가지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며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그들에게 그의 사도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으며, 그가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계시로 된 것임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얻고 복음에 대해 변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첫째, 사도, 바울(1-4). 1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바울은 이 말씀에서 자신이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使徒’란 헬라어로 ‘아포스톨로스(?ποστολο?)’로, ‘보내심을 받은 자’ 란 뜻입니다. 원래 사도란 세례 요한 때부터 주님과 생활을 같이 한 자, 주님께서 친히 임명하신 자,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12제자들을 말합니다(행1:2,22, 마3:14). 그 후 12제자들에게 국한된 사도직이 광범위하게 넓어져 바울과 바나바, 주의 형제 야고보, 실누아노,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행14:4,14 고전15:7, 갈1:19, 살전2:17, 롬16:7, 살전2:6). 칼빈은 ‘사람들의 판단이나 의지로 말미암아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부르심인 소명을 받은 자만이 참 사도가 된다’ 고 했습니다. 루터는 ‘인간으로 말미암는 것도 아니고, 인간들의 판단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뜻대로 그의 부르심을 받은 자가 사도가 된다’ 했습니다. 제롬은 네 가지 유형을 들어 사도를 설명했습니다. 첫째는 12사도들과 바울처럼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사도들입니다. 이들만이 성경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으로부터이나 사람을 통해 된 사도들입니다. 이들은 사도들의 제자들로 아무리 훌륭한 성자라 할지라도 성경을 기록할 수 없으며, 원사도들이 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어디까지나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변증할 뿐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포함되는 사도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사람들로부터 되었으나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사도입니다. 이는 개인의 인기나 이익상의 배려로 직분을 받은 자들로, 속칭 돈장로들이 여기에 포함됩니다. 넷째는 하나님이나 사람으로부터도 말미암지 않은 거짓 예언자, 거짓 사도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어떻게 사도가 되었습니까? 1절을 다시 보십시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바울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 했습니다. 이는 사도의 근원이 인간이 나 사람들의 추천이나 소개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9:16절을 보면 자기가 원해서 되는 것도 아니라 했습니다.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인간의 추천과 보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취직을 할 때에 연대 보증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는 이런 추천과 보증이 필요치 않습니다. 1b절을 보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께서 그를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그가 사도로 부르심을 받는 극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데에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를 내뿜으며 대제사장에게 다메섹의 여러 회당에 보낼 공문을 청했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으로부터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나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올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홀연히 해보다 빛난 영광의 빛이 그를 둘러 비췄습니다. 그가 땅에 엎드리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거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행9:4,5).”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이처럼 바울은 해보다 빛난 부활하신 예수님, 영광의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 예수님께서 그를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면 사도라고 하면 어떻고, 아니라면 어떻습니까? 그런데 신경을 일일이 쓸 것 없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면 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누가 우리를 하나님의 종이냐, 아니냐 하는 것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사도인 것을 변증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에 대한 변명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변명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함으로 바울이 전한 복음까지 부인코자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그를 살리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을 변증한 것입니다. 이 때 그는 상황과 조건을 넘어서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변증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구원과 부르심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대적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때 목자를 만나지 아니했다면’ 하는 운명적인 생각과 열매 앞에서 구원과 부르심을 생각하려 합니다. 사람이나 단체가 준 것으로 생각하려 합니다. 그러나 구원과 부르심에는 그 어떤 것도 개입할 수 없습니다. 목자가 개입할 수 없고, 양이 개입할 수 없으며, 부모나 어떤 기관이 개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를 살리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영접할 때 어떤 가운데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소개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대해 은혜와 평강을 기원합니다. 은혜와 평강은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서로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덧입는 것입니다. 평강은 유대인들의 일상적인 인사이지만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이 평강은 폭풍우 같은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은 나의 보호자가 되시고 내 편이 되심을 믿는 것입니다. 이 때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런 평강과 은혜를 누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둘째, 우리 죄를 위해 자기 몸을 드리신 예수님(4,5). 4,5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그리스도께서는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려고 자기 몸을 드리셨습니다. 악한 세대는 마귀가 지배하는 악한 세상입니다(고후4:4, 고전2:6, 엡2:2). ‘악한 세대’ 는 말세의 고통하는 때로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고,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모에게 불순종하며, 감사치 않고, 거룩하지 않으며, 무정하고, 화해하지 않으며, 모함하고, 절제하지 못하며, 사납고,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배반하고, 분별이 없고, 자만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해 자기 몸을 드리셨습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피 한 방울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다 드렸습니다. 화목 제물이 되셨습니다(딤전2:6, 딛2:14, 벧전3:18). 이처럼 죄는 무섭고 지독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을 먹듯이 쉽게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죄는 쉽게 지을 것이 아닙니다. 죄란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과 교만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살면 자유와 행복이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죄를 범한 인간들의 결과가 어떠합니까? 로마서 6:23a절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하여 저주스럽게 살다가 결국에는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27절을 보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고 했습니다. 죽는 것도 비참한데 심판까지 받게 된다니 이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거기에다 심판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시록 21:8절을 보면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했습니다. 우리가 목욕탕의 뜨거운 물에 들어갈 때 참으로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지글지글 타는 유황불 못에 영원히 참예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둘째 사망으로 영원한 형벌입니다. 이처럼 죄의 결과는 무섭습니다. 그러므로 죄 짓기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채찍과 조롱과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고 무서운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피와 물을 다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온전한 희생과 죽으심으로 죄인들이 정결케 되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상처 받은 마음들이 치료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음 권세를 파하시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죽음은 사람들을 두렵게 합니다. 죽음의 세력에 사로잡히게 되면 손발이 마비되고 생각도 마비됩니다. 우리를 불안케 하고, 우리를 슬프게 하고, 허무하게 만듭니다. 죽음은 우리의 젊고 탄력 있는 피부를 쇠하고 상하게 합니다. 회의와 절망을 가져다 줍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죽음은 우리를 슬프게 하고 처절하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에 시달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율법의 정죄나 죄의식에 시달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 우리는 구원과 영생과 하나님 나라의 산 소망을 소유케 되었습니다(벧전1:3,4). 병든 내면과 상처가 치유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유일한 구주가 되십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아멘. 셋째, 복음과 다른 복음(6-10). 갈라디아 성도들은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고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6).”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좇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할 그 시초부터 그들을 경계토록 했습니다(9). 그런데 그들은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거짓 교훈에 빠졌습니다. 바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씀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들의 목적은 요란케 하는 것입니다. ‘요란케 한다’ 는 뜻은 파쟁을 일으키고 분규를 가져온다는 뜻입니다. ‘변한다’는 뜻은 비슷한 것 같지만 전혀 다른 것으로 변질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갈라디아 교회 안으로 들어온 유대주의자들은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가지고는 안 되고 할례를 행해야 하고, 절기를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4:10,21,5:2,6:13). 그들은 믿음+α를 강조했습니다. 그러고도 그들은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했습니다. 복음을 충성스럽게 전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1:6). 그러나 복음에는 다른 복음이 있을 리 없습니다.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단 하나의 복음밖에 없습니다. 다른 복음은 인간적인 내용에 기독교의 이름을 도용한 것입니다. 이들은 기독교의 탈을 쓴 악마의 집단들입니다. 여기에는 죄악에 빠지게 하는 무서운 독소가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다른 복음에 쉽게 빠지게 됩니까? 왜 사람들이 미혹되는 것입니까? 참 된 것보다는 가짜가 매력이 있어 보이고, 순수보다는 무엇을 가미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첨가했다 하면 무엇이 있는 줄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복음에 무엇을 가미했다 하면 진전된 복음, 깊고 오묘한 진리가 담겨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미혹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미혹의 영이 있어 그런 것입니다. 복음은 다른 것이 필요치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만 의지하고, 예수님의 은혜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소식입니다. 믿고 구원이지 다른 어떤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왜 율법주의자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까? 첫째는 개인적인 야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4:17절을 보면 “그들이 너희에게 열성을 내는 것은 좋은 의도가 아니라 다만 너희를 떼내어 너희로 그들에게 열성을 내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6:13절을 보면 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할례를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이는 할례를 행하게 했다고 자신을 자랑코자 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양을 이용하여 자신의 이름을 냈습니다. 양을 이용하여 사업체를 만들어 돈을 벌고 자기 유익을 챙겼습니다. 이처럼 이단들의 특징은 모두 사업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단들은 모두 사업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통일교가 그러하고 구원파가 그러합니다. 둘째는 갈라디아 성도들의 약점을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6:12절을 보십시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할 뿐이라.” 그들은 갈라디아 성도들의 약점을 잘 알았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를 개척할 때에 많은 아픔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패를 지어 원정하여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악감정을 품어 바울과 그 일행을 핍박토록 했습니다. 그는 돌에 맞아 죽었다가 살아나기도 했습니다(행14:19). 이처럼 갈라디아 교회는 핍박 중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를 통해 볼 때 갈라디아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을까 짐작이 갑니다. 그들은 핍박을 받지 않고 신앙 생활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행하고 절기를 지키면 핍박을 받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한마디로 십자가의 고난을 내려놔 주겠다고 하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보다 더 좋은 소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처럼 그들은 십자가와 고난이 없다고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핵심은 고난입니다. 고난을 통한 부활의 영광입니다. 십자가 없는 복음은 이미 복음이 아닙니다. 이것을 가르치는 집단은 이단의 집단들입니다. ‘이단’이란 끝이 다른 것입니다. 머리는 예수님인데 끝이 다른 것입니다. 사람과 원숭이는 외모로 볼 때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완연히 다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원숭이는 꼬리가 있고, 사람은 꼬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꼬리가 붙는 복음+α, 믿음+α를 붙이는 것은 이단입니다. 복음에는 꼬리가 붙지 않습니다. 믿으면 구원이요, 영생입니다. 오늘날 대표적인 이단은 구원파, 문선명 집단, 여호와의 증인, 애천교, 몰몬교 집단 등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라는 탈을 쓴 악마들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복음+α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은 절대적이고 믿음은 좋지요. 그러나 그런 것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합니다. 요즈음 은사를 강조하는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그들은 복음이나 믿음만을 가지고는 안 되고 은사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은사는 구원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특히 방언의 은사는 구원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은사는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구원의 조건은 결코 아닙니다. 이처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습니다. ‘저주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상을 파괴하듯이 철저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어떤 자세를 가졌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그리스도의 종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기의 영광을 취했습니다. 사람들의 귀를 간지럽게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기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없고 자기 부인을 하지 않는다고 하니 얼마나 귀가 즐거웠겠습니까? 현혹이 안 되겠습니까? 일대일 성경 공부도 필요 없고, 소감을 쓸 필요도 없고, 힘들게 복음을 전할 필요도 없고, 헌금할 필요도 없고, 선교사로 갈 필요도 없고, 오직 축복만 받는다고 해 보십시오? 그러나 이는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은 배부르고 등 따슨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3P(pure, poor, piety)를 가르칩니다. 대개 쓴 약에는 캡슐을 싸는데 이를 oblate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oblate, 사탕발림이 아닙니다. 사탕발림을 하는 사람들의 뒤에는 무서운 독이 서려 있습니다. 이단들은 모두 모든 매임에서 자유케 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자유가 아닌 무서운 죄의 멍에를 씌웁니다. 무서운 악마가 서려 있습니다. 사람을 못쓰게 하고, 가정을 못쓰게 하고, 사회를 병들게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십자가의 고난을 강조하고 사랑하도록 합니다. 이런 교회가 진정으로 복음에 기초한 교회입니다. 많은 예수의 흔적이 있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다가 그 몸에는 많은 예수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상처와 매 맞음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진정한 크리스챤은 많은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야 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분들입니다. 다섯째, 계시로 받은 복음(11-24).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은 누구로부터 온 것입니까? 11,1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바울이 받은 바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계시’란 싸여서 보이지 않던 것을 열어 보여줌을 말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께서는 친히 바울에게 계시하여 주셨습니다. 그는 유대교에 있을 때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적대시했습니다(13,14). 이런 그가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15,16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그가 복음의 계시를 받았을 때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께 가서 예수를 믿어도 되는가 묻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살 터인데 괜찮겠습니까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계시와 부르심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혈육에게 의논치 않고 아라비아로 갔습니다(16b,17). 그는 조용한 곳에 가서 구약 성경을 읽고 그 뜻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그 때 그는 복음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3년만에 예루살렘으로 가서 게바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의 형제 야고보 이외에는 만나지 않았음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는 이것이 사실임을 상기시켰습니다. 이는 받은 바 계시에 대한 보충이나 수정을 가하지 않았음을 말해 줍니다. 이는 인정을 받고자 간 것이 아님을 말해 줍니다. 그러면 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까? 이는 사도들과의 교제와 연합을 하고자 함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와 상관 없이 독자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랬다면 그는 기독교의 한 종파의 교주 밖에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 인해 교회에 받은 바 은혜가 무엇입니까? 21-24절을 보면 그는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유대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직접 대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전에 핍박하던 그가 이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소식만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울이 하고 있는 일을 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부르심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으며, 우리가 받은 복음은 사도들이 계시로 받은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힘써서 전하고 변증해야 하겠습니다. 금년 한 해 우리가 십자가의 고난을 사랑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이 각 캠퍼스와 세계 캠퍼스에 편만하게 전파되기를 기도합니다. ’96년 갈라디아서 제 2 강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씀 : 갈라디아서 2:1-21 요절 :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지난 주 우리는 사도직에 대한 자세와 복음의 유일성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본문에는 복음 진리에 대한 자세와 복음 진리의 핵심, 그리고 바울의 신앙 간증이 나오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의 위선적인 신앙을 회개하고, 복음 진리를 깊이 영접하여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복음 진리를 사수하는 바울(1-14). 1절을 보십시오. “십 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1:18절을 보면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14일간 머물면서 사도들과 교제를 가졌습니다. 십 사 년이 지난 후 바울은 바나바와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을 방문했습니다. ‘바나바’는 ‘권위자’란 뜻으로 구브로 섬 태생의 레위인 출신입니다. 그는 재산을 팔아 초대 교회의 유무상통의 아름다운 예를 남겼으며, 바울을 사도들에게 소개하고, 안디옥 교회에 추천하기도 했습니다(행4:26, 11:28-30, 15:37-40, 고전9:6, 고후7:6). 그는 바울과 제 1 차 전도 여행을 함께하여 갈라디아 교회들을 개척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 2 차 전도여행 과정에서 마가 문제로 서로 결별했습니다(15:37-40). 그러나 그는 마가를 수습하여 바울의 좋은 동역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조용히 평신도 선교 사역을 감당하며 모든 사역의 영광을 바울에게 양보했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양보의 미덕은 초대 교회를 아름답게 했습니다. 디도는 그 부모가 모두 이방인입니다. 그는 바울의 좋은 동역자로 고린도 교회를 수습하는데 귀히 쓰임을 받았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주님의 ‘계시’를 받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전한 복음이나 안디옥 교회에서 전한 복음이 서로 상충되지 않음을 입증하여 이방인들에게 증거된 복음이 헛되지 않도록 하고자 함이었습니다. 그의 예루살렘 방문은 기독교 역사적으로 볼 때 매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유대교화 될 것이냐, 아니면 주께서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셔서 세운 복음 진리와 교회가 사수되느냐의 중대한 기로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3-5절을 보면 바울은 왜 헬라인 디도라도 할례 받지 않게 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디도가 이방인이기 때문에 할례를 행해야 된다고 하는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유대 신자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5:5절을 보면 예루살렘 총회 직전에 믿는다고 하는 바리새파 출신들이 가만이 나타나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다 지키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우리는 언뜻 생각하면 형식에 매이지 말고 할례를 행하면 어떨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기도 했습니다(행16:3). 그런데 디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것은 그의 어머니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관습에 따라 한 것입니다. 그러나 4,5절을 보면 그들이 디도에게 할례를 하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자유’ 를 빼앗고자 함이었습니다. “저희가 가만이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는 자유’ 란 예수님을 믿음으로 누리는 자유를 말합니다. 이 자유는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 자유는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위해 행할 수 있는 자유입니다. 그들은 이 자유를 빼앗아 율법의 종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궤계를 알고 복음 진리를 死守하고자 이를 단호히 거절한 것입니다. ‘복음 진리’ 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의 서신 곳곳을 보면 윤리성과 종교성에 대해서는 원만했습니다. 고린도전서 7장을 보면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나 해도 좋다. 우상에 절한 고기는 어지간하면 먹지 말라. 그러나 꼭 안 먹을 것도 없다’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 진리 만큼은 결코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양보할 것은 안 하고, 양보해서는 안 될 것을 양보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水平적인 문제인 윤리성에 대해서는 양보할지라도 垂直적인 복음 진리 만큼은 결코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됩니다. 6절을 보십시오.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유명한 자’ 란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의 사도들을 말합니다. 그는 유명한 사람들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들이라 할지라도 복음에 더해 준 것이 없고, 또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유명하냐, 유명하지 않느냐?’ 타이틀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몇 년 동안 목자 생활을 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라고 크게 보시고, 바울이라고 작게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복음 전하는 사람들을 똑같이 보십니다. 세상에서는 외모를 중히 여기지만 하나님의 왕국에는 이런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7-9a절은 베드로와 바울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말씀합니다. 바울과 베드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바울이나 베드로에게 다 똑같이 복음 전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은혜를 받은 사람은 많지만 은혜를 주신 분은 하나라는 것도 똑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은 베드로를 유대인을 위한 복음의 증거자로 삼으셨다면, 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복음의 증거자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두부 자르듯이 나눈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고,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유대인의 사도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심은 각기 적합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자랐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잘 도울 수 있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헬레니즘의 중심지인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헬라 문화권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고, 또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기 때문에 이방인을 잘 알고 잘 도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신 것입니다. 9b,10절을 보십시오.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썼노라.” 바울은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독선적이고 안하무인격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교회의 지도자들과 교제를 할만큼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을 기둥 같이 여길 정도로 선배 사도들을 귀히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바울의 사도권과 그의 사역에 대해 이의를 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다만 구제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도 이미 하고 있었습니다(행11:30). 11,12절을 보면 게바는 안디옥 교회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이방 교회이기 때문에 이방 성도들이 게바를 초청하여 식사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 몇 사람이 오는 것을 본 베드로는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다가 그들의 눈치를 살피며 슬슬 자리를 떴습니다. 그의 외식으로 인해 13절을 보면 바나바와 또 저희와 함께 했던 사람들도 외식에 유혹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의 중추적인 인물입니다. 그가 외식했다는 것은 안디옥 교회로서는 큰 위기의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도자 한 사람의 외식은 교회 존폐의 위기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면 왜 그가 이처럼 외식했습니까? 유대 크리스챤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을지라도 유대인이 되어야 하고, 유대인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게바는 그들이 두려웠습니다. 그는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그들로부터 오해와 비난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외식을 한 것입니다. 우리도 불신자들 앞에서 식사기도를 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하는 둥 마는 둥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 앞에서는 믿지 않는 자처럼, 믿는 자 앞에서는 믿는 자처럼 행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위선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 하느냐 하였느니라.” 바울은 선배라 할지라도 복음 진리를 위배할 때에는 사정없이 책망했습니다. 그는 복음 진리 앞에서는 선배도 없었습니다. 그가 게바를 책망한 것은 게바가 복음 진리를 위배했기 때문입니다. 복음 진리는 인종과 신분을 초월하여 모두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행15:7-11). 그런데 게바는 이 진리를 違背했습니다. 바울은 복음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게바라도 책망한 것입니다. 이 때 게바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대사도인 게바가 후배인 바울로부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책망을 들었을 때 자존심이 상하고, 수치감으로 인해 바울에 대한 악감정을 갖기 쉽습니다. 그러나 게바는 자기의 지위를 내세워 악감정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울의 책망을 받아 들였습니다. 후에 그는 바울의 사도권을 높이 인정했습니다(벧후3:15). 만일 이 때 베드로가 감정적으로 대했다면 초대 교회는 베드로파, 바울파로 분열되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바울이 복음 진리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힘썼는가를 배웠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선배들로부터 물려 받은 복음 진리를 힘써 지켜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다 양보할지라도 복음 진리 만큼은 결코 타협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둘째, 복음 진리의 원리(15-17). 15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바울의 이 말 속에는 이런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이방인과 식사하지 않았습니까? 그들과 잘 지내지 않았습니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구원을 받은 길은 오직 하나라는 사실을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 지금에 와서 이를 뒤집고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또 율법을 지키도록 하여 다시 율법의 멍에를 메도록 하는 데 타협해서 되겠습니까? 우리는 유대인이지 이방인이 아니잖습니까? 우리가 할례를 받아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바울은 할례를 받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했음을 말씀하고 갈라디아서의 대강령이요, 복음 진리의 핵심이요, 원리를 말씀합니다. 16a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 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객관적인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누가 이 세상에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까? 로마서 3:20절을 보면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율법’이란 하나님의 계명 전부를 말합니다. ‘율법을 행한다’ 는 것은 율법에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 많은 율법을 행할 수 있습니까?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객관적인 진리를 안다 할지라도 나의 사실로 받아 들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객관적인 복음 진리를 나의 복음 진리로 받아 들일 때에 의롭게 됩니다. 16b절을 보십시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예수님의 십자가가 나의 십자가요, 예수님 부활이 나의 부활이 될 때 의롭게 됩니다. 믿지 않으면 그림의 떡에 불과합니다. 이제 바울은 선언합니다.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c).” 그러면 율법의 행위와 믿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율법의 행함은 의식적입니다. 이에 반해 믿음은 내적입니다.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복음 18:10-14절을 보면 율법의 행위와 믿음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부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행위보다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여기십니다. 내가 어떤 죄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이 안일이든지, 정욕이든지, 미움이든지, 이기심이든지, 교만이든지, 감정대로 행하는 죄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의롭다’란 뜻은 법정에서 쓰는 용어로, 定罪의 반대입니다. ‘정죄한다’는 것은 有罪로 선언하는 것이며, ‘의롭다’는 것은 죄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죄가 있지만 죄가 없다고 석방시켜서 자유인으로 삼아 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간 조건이나 우리의 행위를 보고 의롭다 하신다면 누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 중에 돈 몇 천 만원을 내야 되고, 박사학위를 받아야 의롭게 된다고 하면 과연 몇 명이나 의롭게 될 수 있겠습니까? 저부터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저는 박사학위도 없고 돈도 없습니다. 김베드로 선교사는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지만 돈이 없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니 이 얼마나 복된 소식입니까? 그래서 마르틴 루터는 “여기에 모든 경건의 지식이 담겨져 있고, 복음 진리의 핵심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깨달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고, 그들의 뇌리에 박히게 해야 한다” 고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을 때에 매사가 감격스럽고 은혜가 있었습니다. 명랑하고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갈수록 울상이고 죽을상입니다. 불식간에 죄의 소욕에 시달립니다. 정욕에 빠지고 시기심과 이기심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그리고 구원과 부르심에 대해 회의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죄를 짓도록 하는 것입니까? 17절을 보십시오. 이는 내 안에 있는 죄악된 본성이 강하고 끈질기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에 넘어졌을 때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으면 의롭다고 여기십니다. 하루에 몇 번이고 죄를 짓고 염치가 없지만 또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기만 하면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바로 신앙 생활이란 날마다 예수님을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셋째, 바울의 신앙 간증(18-21). 18,19절을 보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자 하면 이는 범법자가 됩니다. 이는 율법을 향하여 완전히 죽었는 데 어떻게 살 수 있단 말입니까? 바울은 ‘우리’란 단어에서 ‘나’란 단어로 바꾸었습니다. 이는 바울의 신앙 간증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과 영원히 끊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려 함입니다(19). 그러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20a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바울은 율법의 행함을 통해 구원을 받고자 피나는 투쟁을 했지만 율법을 지키지 못해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나도 함께 죽었습니다. 죽음으로 율법이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법이란 산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우리 말에 지독한 욕이 있는데 ‘육시랄’입니다. 이는 죽은 시체를 묶어 놓고 때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죽은 시체를 때린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때리는 사람만 아픕니다. 죽으면 석방됩니다. 무기수나 사형수가 감옥에서 나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죽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살아 꿈틀거리면 안 됩니다. 이처럼 바울은 완전히 십자가에 죽음으로 율법의 정죄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완전히 죽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다시금 율법이 나를 지배하여 정죄합니다. 자유함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죄의식으로 괴롭게 됩니다. 바로 신앙 생활이란 철저하게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손톱 만큼이라도 살려고 하면 그 순간에 율법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1절을 보면 ‘날마다 죽는다’ 고 했습니다. 이를 마르틴 루터는 ‘Daily Baptist-baptist는 완전히 잠긴다는 뜻’ 를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죽지 않으면 내가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옛 생활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죄의 낙을 사모하게 됩니다. 자기가 주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완전히 죽게 되면 죄악의 낙을 즐기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 죄악의 달콤한 삶을 즐겼습니다. 과거 우리는 세상의 육체적인 일들을 보았을 때 그것이 나를 지배하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들이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십자가와 함께 못 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나는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가 주된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것들이 나의 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십자가와 함께 못 박혀 죽었기 때문입니다. 과거 세상의 쾌락, 탐욕, 정욕 등이 나를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나를 지배할 수 없고, 이런 것들이 내 안에서 꿈틀거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죽은 내가 다시 옛 생활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과거에 대해 쉽게 잊고, 과거로 회귀하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죽을 지경이여서 기억하고 쉽지 않은 일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그래도 그 시절이 좋았어, 그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운운하며 당시를 좋게 회고합니다. 이처럼 잊었다 싶었던 과거가 잠재의식 속에 그대로 남아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의식 속에는 없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깊은 곳에 숨어 있다가 어느날 위기의 순간의 때, 아니면 자기도 모르게 노출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무서운 생각은 평소에 생각나지 않던 바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1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