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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 월평 월평
  •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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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로마서 1:17 제목: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설교: 피영민 목사 여러분께 먼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죄인이십니까? 의인이십니까? 이 질문은 “이것이다??라고 정답을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어떤 이단은 자신들의 전도방법으로 사용하여 성도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우리가 어느 정도 의인이 되어야 천국 갈 수 있습니까? 지난 주에는 세 번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항상 장례식을 인도 할 때에는 그분의 재산이나, 지위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그분이 과연 천국에 가셨는가?, 못가셨는가?하는 것이 더 궁금합니다. 마5:2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의가 서기관들보다 의의 수준이 더 높아야 하며, 바리새인보다 더 의의 수준이 높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으며, 정확한 십일조를 드렸으며, 회당에서 성경을 강해하는 랍비들이었습니다. 서기관들도 성경을 암송하고 필사하던 사람들입니다. 헤롯대왕이 유대인의 왕이 어디에서 나겠는가? 물어보았을때 즉석에서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고 대답할 정도로 성경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혁가인 마르틴 루터는 자기의 노력으로 이 의를 이루어보려고 바리새인보다 더 금식을 해서 위장병으로 평생을 고생했고, 바리새인보다 더 죄를 깨끗이 하려고 수없는 고해를 하여 고해를 담당하는 신부가 귀찮아서 화를 냈을 정도였습니다. 루터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라는 단어를 가장 무서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이 될까?,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이루는 사람이 될까?라고 고민하였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엄한 기준을 세워놓고, 호리의 죄도 가차 없이 처벌하시는 분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의 질문은 Is God good?, 하나님은 정말 좋은 분일까?였습니다. 그가 신학박사가 되고 독일의 비텐베르크에서 로마서를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1장 17절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는 말씀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인데, 어떻게 무서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가? 또 시편71:2절에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말씀을 보고 아니, 어떻게 그렇게 무서운 공의가 나를 구원할 수 있다는 말씀인가?고민하며, 스스로 풀 수없는 갈등에 빠졌습니다. 그러던 그가 드디어 1515년에 성령의 조명을 받아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처벌하는 무서운 공의(Justice of God)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셨다가 죄인들에게 나누어주시는 공의(Righteousness of God),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발견합니다. 그래서 1517년에 위대한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 교리는 이신득의라 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된다는 개신교의 기본 교리가 됩니다. 성경의 교리서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인데, 그 중에서 로마서는 가장 중요한 교리서이며 사도바울의 설교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인 롬1:17절은 로마서를 낳은 설교의 본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사도바울이 이 구절을 본문으로 로마서를 설교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설교의 주제는 죄인에게 나누어 주시는 하나님의 의이며 로마서 전체는 하나님이 손수 마련하셨다가 죄인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공의(Righteousness of God)를 말씀합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왜?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의가 필요합니까?, 이 공의는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이 공의는 누가 얻을 수 있습니까? 유대인만 얻을 수 있습니까? 이방인만 얻을 수 있습니까? 유대인 전체만 얻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유대인과 이방인 중에 하나님이 택한 자들만 얻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은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요한 칼빈은 로마서를 이해하는 것이 바른 성서이해의 출발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로마서를 아는 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의 단어 하나 하나는 어느 하나도 무시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는 장기간의 묵상을 필요로 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로마서가 다루는 첫 번째 질문처럼 왜? 인간은 하나님의 의가 필요합니까? 1. 왜? 인간에게 하나님의 의가 필요합니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로마서 1장은 이방인들은 죄인이며, 로마서 2장은 유대인들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인간의 문제는 “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땅을 통치하시는데, 어째서 슬픔, 이별, 죽음, 재앙이 있습니까?질문합니다. 그 대답은 죄입니다. 사람이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과학이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경제가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롬3:9-10절에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라고 우리가 죄 아래 있기 때문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의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죄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의입니다. 바리새인보다 높은 의, 서기관보다 높은 의가 필요합니다. 이 ??의??가 ??하나님의 의??입니다. 2. 하나님의 의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의입니다. 예수 믿는 자에게 차별 없이 나누어 주시는 의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100% 만족시키는 완전한 의입니다. 이 의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고전1:30절에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것은 사신 것과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죽으심은 우리의 죽음과 달라서 죄 없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죽음입니다. 그래서 2000년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의 현재, 과거,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예수님께로 전가 된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죄에 대한 모든 벌을 받아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면서 죄 때문에 벌 받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법의 용어 중 일사부재리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죄에 대해 한번 대가를 받았다면 그 죄에 대해서 다시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에 대한 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나의 죄에 대해 벌을 주시나봐!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죄에 대해 벌 받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온전한 성도로 살아가도록 연단시키시는 하나님의 훈련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사함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삶은 무엇입니까? 그분의 삶은 죄 없는 삶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은30냥에 팔아넘긴 유다도 죄 없는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이 가책이 되어서 자살을 했습니다. 가롯유다도, 빌라도도 예수님의 삶에서 죄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이 삶에 나타난 의로운 삶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주고자 했던 의입니다. 예수님께 조금이라도 죄가 있다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없습니다. 하나님께 받을 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실 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작게 믿어도 나중에는 크게 믿고, 처음에는 불분명하나, 나중에는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롬3:22절에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의인입니다. 그렇다면 이 의는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3.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받습니까? 첫째는 외래적인 의입니다. (Alien Righteousness) 밖에서 온 것입니다. 내 안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둘째는 전가된 의입니다. (Imputed Righteousness) 이것은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내게로 전가되어서 온 것입니다. 셋째는 법정적인 의입니다. (Forensic Righteousness)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때에 우리를 향해 너는 의로운 존재이다 간주하시는 것이지 실질적으로 의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죄를 안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않은 것만 죄가 아니라, 하라는 것을 하지 않은 것도 죄입니다. 심지어 기도 쉬는 것도 죄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의인이라 말하는 것은 법률적인 의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법률적인 용어로 칭의 (Justification)라 말하고, 실질적으로 내안에 있는 죄를 극복해 나가는 것을 성화 (Sanctification)라 말합니다. 로마 캐도릭의 결정적인 교리적 오류는 여기에서 나타납니다. 칭의와 성화를 섞어놓았기 때문에 시작점을 모릅니다. 마라톤을 뛰는 사람이 어디에서부터 시작했는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해도 상이 없는 것입니다. 칭의 없는 성화의 노력은 롬10:2-3절에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는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천국에 갑니까? 하나님의 의를 받아서 들어갑니다. 구약의 대속죄일이 되면 대제사장이 1년에 한차례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그곳에 들어갈 때 짐승의 피를 가지고 법궤 뚜껑 위에 뿌립니다. 그 뚜껑 밑에는 두 돌비, 만나,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이스라엘 백성의 삼대 죄의 상징입니다.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를 기억하라는 것이며, ??만나??는 불평 죄의 상징이며,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권위에 대한 도전 죄를 상징합니다. 이 죄를 짐승의 피로 덮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도 법궤 속에 들어있는 물건들이 상징하는 것과 같은 죄들이 들어있습니다. 예수의 피를 힘입어 의인되었지만, 죄성으로 인해 끊임없이 갈등합니다. 만약 완전한 교회가 있다면 내가 들어가는 순간 그 교회의 완전은 깨어집니다. 우리는 모두 의인이라 칭함 받았지만 실질적으로 죄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입는 것을 성경은 옷을 입는 것으로 비유합니다. 사61:10절에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의 겉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옷입니다. 갈3:2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입은 옷은 그리스도의 의의 옷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무시하고 자기 의로 살려는 사람은 걸레와 같은 부정한 옷을 입은 사람입니다. 사64:6절에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자기의 의를 가지고 천국에 가려는 사람은 부정한 옷을 입은 사람으로 혼인잔치에서 쫓겨나 이를 갊이 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 탕자가 돼지 냄새나는 옷을 벗어 버리고 아버지가 주시는 제일 좋은 옷을 입었듯이 우리도 하나님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혹 이 자리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 계신다면 불의한 옷을 벗어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옷을 입은 사람들은 그 옷에 어울리는 합당한 열매를 맺고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참 이상한 것은 사람은 그 입은 옷에 따라 행동합니다. 거지 옷 입으면 거지처럼 행동하고, 의사 옷 입으면 의사처럼 행동합니다. 불의한 옷을 입으면 불의한 행동을 하고, 의의 옷을 입으면 의로운 행동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의로운 옷을 입은 우리 성도들은 의로운 옷을 입은 사람으로 합당한 삶을 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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