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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악과가 주는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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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가 주는 교훈”

창세기 2:8-9; 16-17; 3:5-6


[시작하는 말]

성경공부시간에 교사가 학생들에게 물었다. “만약 에덴동산에 초청되어 하고 싶은 것 한 가지 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진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학생은 사자의 잔등을 타고 싶다.

또 어떤 학생은 에덴동산을 한 바퀴 완주하고 싶다

먹성이 좋은 한 친구는 에덴동산의 과실을 한 번씩 다 맛보고 싶다.

그때 한 학생이 “선악과를 한 번 맛보고 싶다..”


그래서 그 학생이 가장 아담과 이브의 후예다운 대답을 한 것으로 인정..


한창 호기심이 많던 중고등부 시절에 상당한 기간 동안,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왜 만드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많은 궁금증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선악과가 없었더라면 따먹지도 않았을 것이고 죄짓지도 않았을텐데.. 하나님께서는 왜 그러셨을까? 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을 줄 아시면서 그 나무를 두셨을까?


선악과는 흔히:

1)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신 이유가 인간에게 자유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는 것: 자유의지론

2)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일방적 복종을 요구하는 의미: 선악과는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인간의 무조건적인 복종을 위하여 단순히 설정된 것

3) 선악과 자체의 의미보다는 원죄론으로 빠지는 경우

그렇다면 과연 선악과는 그 이상의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단순히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혹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시기 위하여 선악과를 두셨다면 우리는 달리 선악과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


선악과에 대한 논의가 현대에 와서 별로 언급되지 않는 이유

1. 신학적 자유주의자: 에덴동산의 이야기를 비역사적이고 전과학적인 설화로 치부; 논의를 회피하기 시작

2. 신학적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의 논리에 대항하여 선악과문제를 사실성 여부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 의미에 대해서는 관심 밖


선악과 자체가 주는 교훈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

-기독교인 이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논할 때


선악과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교훈을 가르쳐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선악과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 섭리, 임재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최초의 인간들이 선악과를 범한 일은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한 사건이고, 하나님의 섭리를 무시한 사건이며, 하나님의 임재를 외면한 사건이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또 서로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섭리,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는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개념들..


선악과의 의미는 뒤집어보면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범한 사건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종류의 죄를 범한 것인가를 말해준다. 이 이야기는 오래 전에 에덴동산에서만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일어나는 사건이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범한 사건은 그 이후의 인간들이 반복해서 빠졌던 죄의 원형되었고 우리 인간이 어떻게 죄에 빠지는가를 보여주는 타락의 원형이 되었다. 이 사건은 인간의 모든 죄악의 근본적인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타락의 근본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창세기의 타락 이야기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인간 자신의 범죄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과거에 일어난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살아있는 이야기이다.


선악과의 몇 가지 의미


1. 선악과는 (가장 먼저) 누가 창조주이고 누가 피조물인지의 경계선을 긋는 의미


창 2:16-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동산의 과실을 다 임의로 먹어도 되지만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은 먹지 말 것을 요구하셨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의 유일한 금지 규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모든 자유를 주셨지만 단 한 가지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설정하셨는데 그것이 선악과였다. 그 경계선이란 피조물로서 창조주의 자리를 차지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에덴동산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분명히 하는 의미를 가진다. 주인이 자기의 모든 소유물을 알아서 사용하고 관리하도록 종에게 맡겼다 하더라도 그 소유물에 대한 소유주는 여전히 주인일 수밖에 없다. 선악과는 가장 먼저 우리에게 누가 에덴동산의 주인이며 누가 창조의 주인인가를 표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주권을 의미하는 것


주인이 종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사용하도록 허락했지만 종이 그것들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은 원하지 않는다. 에덴동산에서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해도 좋지만 선악과만은 먹지 말고 내버려두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피조물이 침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지은 첫 번째 죄는 바로 종이 주인의 영역을 침범한 일이고 피조물이 창조주의 영역을 넘나든 것이었다.

그들이 저지른 일은 곧 하나님의 주권을 범한 사건이었다.


인간이 선악과를 취함으로써 하나님의 주권을 범한 일은 보다 구체적인 의미를 동반하고 있다. 성경은 선악과를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고 말하고 있다. 뱀은 이브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이 선악과를 범한 것은 무엇보다도 선과 악에 대한 주권을 범한 사건이었다. 선과 악의 주권이라는 것은 선과 악의 기준을 누가 정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또 동시에 누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는가의 문제이다. 창조 안에서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가를 결정하는 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선이라고 할 때 선이 되는 것이고 악이라고 할 때 악이 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시고 판단하시는 분이시라면 우리 피조물은 이러한 창조주의 기준에 의하여 판단을 받는 입장에 있다. 그것이 피조물의 본분이고 위치이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취했던 행위에는 선과 악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고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역할을 차지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이것이 선악과를 범한 그들의 구체적인 죄의 내용이다.


선악과를 범한 행위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지식에 의지하여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서려고 한 일이다.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땅에서 우리 인간의 피조물로서의 위치와 주제를 잘 파악하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다.


2. 선악과는 하나님의 통치윤리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에덴동상에서는 선악과를 먹는 것을 금하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윤리였다. 그것을 지키고 따르는 것이 곧 선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는 것이다. 에덴동산에 사는 자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통치윤리에 따라서 살도록 되어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어떤 질서 하에서 창조하셨다. 이러한 창조의 질서가 곧 우리가 피조물에게는 존재의 양식이 된다.


예를 들면:

- 물은 섭씨 100도에서 끓고 섭씨 0도에서 얼기 시작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은 온도에 대한 자연의 법칙이지만 다른 말로 온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질서라고 할 수 있다. 피조물인 인간은 이러한 온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질서 속에서 살고 있다.

- 우리 인간은 온도가 올라가면 더위를 느끼고 내려가면 추위를 느끼는 존재

-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시하고 섭씨 100도의 물에 손을 넣었다가는 그 결과는 빤한 것.

- 나는 만유인력의 법칙에 신경 쓰지 않고 살겠다고 마음먹는다고 해서 높은 데서 안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 우리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어야 할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이 외에도 우리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서 지켜져야 할 수많은 창조의 질서와 섭리들이 있다. 여기서 벗어나면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만들어져 있다. 그 섭리를 따라 살도록 되어있는 것이 우리의 존재양식이다. 우리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살아야만 하도록 되어있다.


선악과는 이 모든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로마서 7장의 말씀은 토기는 토기장이가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그 존재 양식이 정해진다고 전해준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양식에 따라 살도록 되어있다. 선악과는 바로 이 존재 양식을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선악과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인간에게 절대로 필요한 존재 양식을 가르쳐 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선악과는 인간이 살기 위하여 지켜야 할 하나님의 섭리를 일깨워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알아야 할 것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우리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이다.


어린 아이가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오르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기구가 있다. 이것은 아이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인가? 아니면 아이를 다치지 않도록 하는 것인가?


선악과는 우리를 죄로 내몰려고 마련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택하는 일을 가르쳐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은 선악과를 범하는 행위는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고 그 분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하나님의 섭리를 일깨워 주는 것이다.


조금 전에 선악과는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하시고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을 표시한 것이라고 했다. 그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자신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사는 것이 우리 피조물의 본분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삶의 테두리를 그어주는 윤리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따라야 할 절대 가치, 절대 윤리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은 그러한 가치와 윤리의 기준이 우리 인간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보편적 진리는 인간의 가치관, 인간의 전통, 인간의 상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사건은 그 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 바벨탑 사건은 인간이 선악과를 범하는 일을 되풀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 11:2-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벽돌과 역청의 발명; 당시로서는 상당한 과학문명의 발전을 말하는 것.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하늘에 닿게 하자는 제안은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처럼 되고자 한 일에 비교된다. 인간이 스스로의 행동방식을 결정하고 스스로 옳고 그름에 대하여 판단하고, 스스로 선과 악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일...곧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생각, 이것이 곧 인간이 반복해서 저지르는 범죄


3. 하나님의 임재


창 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구약의 주제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임재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광야 생활을 할 때 백성들이 거하던 장막들 한 가운데에 법궤를 두었던 성막이 있었다. 그 성막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삶 한 가운데 오셔서 그들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성막의 전통은 나중에 성전의 전통으로 이어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의 중심부에 있게 되었다. 성전은 곧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의미했고 백성들은 그러한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자신들의 생활을 반성하고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그들의 전 생활의 근거였다.


에덴동산의 많은 나무들 한 가운데에 서 있었던 선악과는 하나님의 임재를 표시하고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범하는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첫 질문이 “네가 어디에 있느냐?” 였다. 에덴동산의 선악과가 하나님의 임재를 표시한 것이었다면 선악과를 범한 인간의 죄는 바로 인간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거부한 사건이었다. 구약은 하나님의 임재를 거부하는 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죄라고 설명한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당신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기를 원하셨고 또 당신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기를 원하셨다. 시편 104:5절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로부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잘 말해주고 있다: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표현한 말이다.


결론:

1.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것이 선악과를 통한 하나님의 메시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

- 주일을 지키는 일

- 수입의 일부분을 드리는 일

- 나의 삶의 주인; 그리스도가 곧 나의 주가 되신다는 것: Lordship


2. “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인간으로 죄를 짓게 하셨나?”에 대하여

선악과는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테두리 안에 살게 하고 우리를 보호하는 울타리의 역할을 한다.

예레미야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생각의 결국: 장차의 평안과 소망; 하나님의 길을 가는 것이 지금은 나에게 손해되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그것이 나에게 이로운 일임을 약속하심


신앙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복되게 하는 것이며 우리를 오히려 더 높은 차원의 자유로 인도하는 것


누가복음 11장: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멍에를 메는 일: 참다운 자유의 개념


3. 선악과를 범하지 말라는 것은 성숙을 향한 계명: 성숙하지 않은 자는 자신의 욕구에 종속된 삶을 살고 있다. 자기중심적 신앙,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을 버려야한다;


4. 뱀의 유혹에 대한 경계; 오늘도 사탄은 동일한 범죄를 짓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귓가에서 속삭이고 있다. 매일 매순간.. 누가 우리의 삶의 주인인가?를 질문하게 하고 “나”라고 대답하도록 유혹하고 있다.


죄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선악과의 범죄를 돌이키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결언]

우리의 삶에서 우리 피조물의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분의 섭리에 순응하며 우리 가운데 그 분의 임재에 대하여 경외하는 것은 우리가 이루어가야 할 가장 근본적인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선악과의 의미를 가지신 분이다. 선악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주님으로 따르고(주권, Lordship) 그 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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