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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돌을 내려놓은 사람들 (요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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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내려놓은 사람들 (요 8:1-11) 
 
 
존 오트버그가 쓴 "우리는 만나면 힘이 납니다."란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당신은 너무 오랫동안 돌을 든 채 살아왔다. 과연 돌이 없이 살았던 적이 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돌을 내려놓으라. 돌은 내려놓고 이렇게 해보라.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린 일이 있거든 당사자를 찾아가 사과하고 소문을 바로 잡으라.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거든 그를 섬기라.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 하나님께 마음을 바꿔달라고 기도하라. 못되게 굴었던 사람이 있으면 당장 그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양손에 무거운 돌덩이를 들고 힘들게 살아왔었습니다. 이것이 역사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바로 그 역사의 한 현장을 소개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발각되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손에 붙들려 온 여인이 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이 여인을 돌로 쳐 죽일 태세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여도 할 말이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그들이 이 여인을 당장 돌로 쳐죽이지 아니하고 이 여인을 예수님께로 데려와서 예수님의 의견을 물었다는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당신은 어떻게 하라고 하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려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고 하고 싶었습니다. 아니 더 나아가서 지금 들고 있는 이 돌을 가지고 결정적인 찬스에 예수님께 던지고자 했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율법에 쓰인데로 돌로 치라고 하신다면 그 동안 사랑과 용서를 가르치심에 위배가 됩니다. 아마 그러면 이중인격자라고 위선자라고 공격을 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돌로 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 스스로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이단자라고 고소할 단초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도 걸리고 저래도 걸리도록 양수겹장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함정이고 덫이었고 시험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모함하거나 정죄하거나, 심판하는데 사용하면 안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자신의 행동이나 생각이 타당하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사용하면 않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을 살리는데 사용해야 합니다. 성령받은 하나님의 사람은 성령을 쫓아 영혼을 살리고, 자유케 하고, 회복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야 합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대답을 강요받은 예수님께서는 즉답을 하지 않으시고 땅위에 뭔가를 쓰시고 계셨습니다. 
때때로 즉답보다 더 예수님처럼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즉답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즉답이 더 큰 문제를 몰고 올 때가 많습니다. 억울하다는 것에만 메달리고 집착하여 상대방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먼저 자기 말만 하다보면 문제가 더 커지고 맙니다. 즉흥적으로 대답하기보다는 잠시라도 숨을 돌리고, 기도한후 대답을 하면 즉흥적으로 대답하다가 저지르는 실수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건은 순간에 일어납니다. 그 순간을 달리 생각하고 달리 처신했다면 훨씬 좋은 결과가 되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일일수록 흥분되었을 때 무슨 결정을 내리지 않기를 부탁합니다. 

예수님이야 즉답을 하셨어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도대로 말려들지는 않으셨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즉답을 피하신채 땅위에 뭔가를 쓰시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 있으셨습니다.
악의 지혜보다 더 높은 지혜를 보여주시는 장면입니다. 
악에게 이용당하거나 악에게 지지 말고 악의 지혜보다 더 높은 지혜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어떤 내용의 글을 쓰셨을까 하는 문제에 매달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영적 상상력으로 무수히 많은 것을 지어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정확한 진실이 아닙니다. 성경이 노코멘트이기 때문입니다. 상상은 자유이지만 누구도 자기가 상상한 것을 정답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은 땅위에 글을 쓰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심은 뭔가를 기다리고 계신것은 아닐까? 저는 생각해보았습니다. 
혹시 간음한 여인을 변호하고 나서는 사람을 기다리고 계시지는 않았을까요? 나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저 여인을 가로막고 서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도무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무런 변호자가 없었습니다.
죽이자는데는 열심을내고 마음이 하나가 되었지만 여인을 살려보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은 돌을 던질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대신 돌을 맞아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지는 못할망정 변호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도 되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이 꿈꾸는 교회, 예수님이 세우고 싶은 교회는 앞장서서 누군가를 위해서 변호해주신 사람이 있는 교회입니다. 대신 돌을 맞아줄 사람이 있는 교회입니다. 
돌던질 생각만하고, 모함할 생각만 하는 사람은 주님의 교회에 합당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정말 불쌍하기 짝이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진리를 다시 깨닫게 됩니다.
이 여인의 경우와 같이 아무도 우리를 위해서 변호해주지 않고, 대신 돌 맞아 주지 않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변호해 주시고, 대신 돌 맞아 주시는 분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오직 한분 예수님께서 용서할 가치가 없다고 느껴지는 간음한 여인을 위해서 변호를 하십니다. 
우리는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 오더라도 우리를 위해서 끝까지 사랑으로 변호해주시는 예수님을 믿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무서운 것은 우리에게 돌을 든 수많은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나 한 사람을 위해서 돌팔매질을 대신 맞아 주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지 않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마28:20)

예수님께서 이제 결심하신듯 허리를 펴시고 일어나 무리들을 바라보시면서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의분으로 가득찼던 마을 사람들이 슬그머니 돌을 내려 놓고 하나둘씩 그자리를 물러난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입니까?
정죄의식으로 가득찬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의 질문을 통해서 자신들도 죄인임을 꺠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의 죄를 들추어내어 정죄하기 전에 자신도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간음한 여인과 똑같은 죄를 지은 죄인은 아닐지라도 역시 다른 유형의 죄를 지어가며 사는 존재임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돌을 든 사람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돌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처럼 우리들도 누가 죄를 지었다고 하면 "그는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강한 분노의 감정을 들어냅니다. 그러나 죄인을 정죄하기 전에 우리도 그와 똑같은 죄인은 아닌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오직 한 종류의 인류만이 존재합니다. 그 인류라는 것은 곧 죄인이이라는 것입니다. 다 죄인인데 들킨 죄인과 들키지 않은 죄인이 있을 뿐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어떤 죄의 사건을 다루게 될 때 그와 같은 죄만을 생각하고 그 죄가 나에게는 없다는 것으로 인해서 교만하고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같지는 않지만 누구나 죄인인 것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돌을 든 사람들에게 돌을 내려놓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과 죄많은 여인 앞에 돌무더기만 가득 쌓여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을 들도록 부추기지 않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나 기분 나쁘다고 다른 사람들까지 돌을 들도록 부추기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절대로 복음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베풀때도 지혜롭게 베풀어야 합니다. 만약의 경우 억지로 돌을 빼앗으려고 했다면 과연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려분!
우리는 돌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 중에 지금 서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지금 돌을 내려놓은 사람들 가운데 서 있습니까?
혹시 돌을 들고 무리들 가운데 서서 누구가를 정죄하거나 판단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 힘들지 않습니까? 그 돌을 내려 놓으십시오. 
누구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십니까? 그것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못하십니까?
손에 든 돌을 내려놓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무력화하고 죄를 덮어버리고자 이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여인을 통해서 우리도 모두가 다 돌을 맞아 죽어도 쌀 죄인인 것을 꺠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돌을 들 사람이 아니라 너는 돌을 맞을 사람이다" 우리는 돌을 들 사람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맙시다.

이 여인을 정죄하던 모든 사람들은 다 물러갔습니다. 그리고 죄를 들킨 여인과 자비로우신 예수님만 그곳에 남았습니다.
그런데 비록 자신을 정죄하던 사람들은 떠났지만 떠나지 않은 것이 이 여인에게 있습니다. 바로 사단이 준 죄책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아무말없이 그냥 보내었다면 이 여인은 평생 죄책감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여인은 들킨 죄인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죄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을 용서해도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자신을 정죄하게 됩니다. 그러니 얼굴을 들고 살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마음에 입은 상처와 수치심을 치료하시려고 하십니다.
"너를 정죄하는 사람들이 없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향하여 돌을 든 사람들에게 돌을 내려놓게 하실뿐만아니라 자신만이 들 수 있는 돌을 주님은 들지 않으셨고 돌을 던지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을 용서해 주심으로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해 주셨습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내세운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죄인을 사랑하심으로 스스로 죄인의 자리로 가서 앉아주신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이 여인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 여인에게 당부하십니다. 전에는 죄의 종이 되어서 죄에 굴복해서 살았지만 이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므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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