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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주 보혈 아래 있네! (히 9: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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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 보혈 아래 있네! (히 9:1-28)

예수님을 믿어도 바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서가 긴 것 같아도 핵심은 하나입니다. 당시 배교의 위기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에게 핍박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바로 믿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많아도 주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뜨이면 다 은혜롭게 여겨지고 결국 간증거리가 됩니다.

부흥회 집회를 인도하고 내려오니 장로님이 제 코트를 입고 가셨습니다. 순간 당황했지만 깨달아졌습니다.‘하나님께서 짓궂은 장난을 치신 거구나!’“한번 크게 웃어봐!”
어느 개척교회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신디를 도둑맞았습니다. 불이 임해야지 도둑이 임하나? 그러나 새 신디를 사게 되었다고 감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춘천 어느 교회 부흥회 때는 정말 불이 임했는데, 사찰 집에 불이 난 것입니다. 그러나 새벽기도회 때라 사람이 다치지 않았고 사찰과 교인들의 대 화합, 사랑의 역사가 일어나 오히려 감사했습니다. 

예수님만 바라보다 보니 시험도 다 은혜 간증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환경이 어려울수록 주 예수님을 더욱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9장은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혈의 능력은 우리를 죄에서 완전히 구원해 내는 강력한 십자가 복음 메시지입니다.

보혈의 능력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14절에서 분명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영원한 성령을 힘입어 자기 몸을 흠 없는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야말로, 더욱더 우리들의 양심을 깨끗하게 해서,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  

보혈의 능력은 한 마디로 말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문제가 많고 복잡하지만 근본 뿌리는 하나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거기서 모든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생사화복의 주관자인데, 하나님을 떠난 사람,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믿고 사는 사람의 운명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의 보혈이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죄사함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원인은 죄입니다. 그것을 창세기 3장은 밝혀주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창세기 6장 3절에 보면 인간이 죄를 짓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서 성령을 거두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아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 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복된 삶의 시작입니다. 주목할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할 수 있습니까? 두 가지가 이루어짐으로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첫째, 우리의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둘째,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게 함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기 전에 이미 구약에 짐승의 피를 흘리는 제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죄 문제 해결책이었습니다.
왜 피입니까? 우리가 죄를 지으면 영적 생명을 잃어 버리게 되는데, 생명을 다시 회복하려면 생명의 상징인 피가 있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피로 죄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22절 율법에 따르면, 거의 모든 것이 피로 깨끗해집니다. 그리고 피를 흘림이 없이는, 죄를 사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짐승의 피제사는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9절에 보면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도 짐승의 피 제사로는 양심이 완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9절 ...그 장막 제의를 따라 예물과 제사를 드리지만, 그것이 의식 집례자의 양심을 완전하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았을까? 혹시 용서받지 못한 죄는 없을까?’ 두려운 마음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죄를 범할 때마다 반복해서 짐승을 잡아야 되니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입니다.

10절에 보면 이러한 구약의 짐승 피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시기까지 일시적인 효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10절 이런 것은 ... 개혁의 때까지 육체를 위하여 부과된 규칙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율법의 모든 속죄제사 규례는 다 그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주 보혈의 능력으로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며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가 씻음을 받고 죽은 행실에서 떠나 거룩한 삶을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바로 믿는지는 바로 이것을 점검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은 양심이 깨끗해졌습니까?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에 두려움이 없이 마음이 평안하고 기쁘십니까?

9절에 보면 구약의 짐승의 피 제사로는 양심이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전히 두렵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용서받았을까? 혹시 용서받지 못한 죄는 없을까? 용서받은 후 다시 지은 죄는 없을까? 정말 용서받았을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마음에 기쁨과 벅찬 감동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셨습니까? 혹시 두렵고 답답한 마음으로 예배드리러 오시지는 않으셨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보혈의 능력을 믿는다면서도 여전히 죄로 인하여 두려워하고 괴로워합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구원의 감동과 기쁨이 충만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오늘 구약처럼 짐승의 피 제사를 드린다면 죄 사함받음을 더 실감할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송아지나 양이나 비둘기 등 제물을 가지고 와서 그 머리에 손을 얹고 우리 죄를 고백하고, 제사장이 그 짐승을 잡아 피를 가지고 그 사람에게 뿌리고,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린 후 “이 제물이 당신을 위해 희생되었음으로 이제 성결하여졌고 깨끗하여졌다.” 고 선포하면 집에 갈 때, 속죄받았다는 확신과 평안함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더욱 놀라운 구원을 받았습니다. 짐승의 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예배드리러 올 때나 갈 때 마음에 별 차이가 없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십자가와 보혈과 속죄를 교리로만 알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제사는 눈으로 보는 것이고 예수님의 보혈은 지식일 뿐일 때, 이렇게 됩니다.

지식은 우리를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모태신앙인 사람은 어려서부터 십자가 복음을 듣고 자랐습니다. 다 압니다. 그런데 감격이 없습니다. 보혈의 능력이 지식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가슴으로 느꼈던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는 너무 감격해서 울었고, 밤새 기도했고, 가슴이 뜨거워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결단도 했었지만 이제는 흘러간 옛 노래가 되어 버리고 덤덤해져 버렸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깨달음에서 그쳤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것으로는 아무리 큰 은혜도 1년 동안 계속 감동적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1만 달라트 탕감받은 종이 100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해주지 못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10년 20년 30년 지나 보세요. 아무리 큰 은혜받은 감동도 세월이 지나면 식어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혈의 능력이 항상 충만하고 항상 능력이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며 사는 자에게 보혈은 항상 새로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청년 시절 노방전도하던 마포삼열 목사님에게 돌을 던져 턱을 깨뜨렸던 사람이었다가 주님을 만나고 회개하여 목사가 된 분입니다. 그가 제주도에 가서 목회를 하였는데, 수 많은 난관에 부딪혔습니다. 너무도 힘이 들고 괴로워서 제주도를 떠나기로 작정하고 편지로 써서 인편에 마포삼열 선교사에게 보냈습니다. 두어 달 후에 답장이 왔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이기풍 목사의 편지를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이기풍 목사는 그 편지를 받고 그 자리에 쓰러져서 대성통곡하며 회개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 이야기입니다. 이기풍 목사에게 마포삼열 선교사가 살아있는 분이라면 우리에게 예수님은 살아계신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받는 자리에 실제로 서 본다면, 실제 지옥을 바라본다면, 거기서 구원받은 것을 실제 경험한다면, 십자가에서 피흘리는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지금 예배가 달라질 것입니다. 하루 종일 감사 감사, “피!” “보혈!” 하면 울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실제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분으로 믿어지면 십자가 사건은 항상 현재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지금 흘리시는 보혈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보혈과 짐승의 피와 다른 것입니다.
짐승의 피는 죽은 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은 살아있는 피입니다.
짐승은 흘리고 죽었으나 예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셔서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라면 십자가도 보혈도 생생한 감동입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되면 십자가의 보혈은 단지 죄 용서뿐 아니라 우리를 죽은 행실을 버리고 새 삶을 살게 만듭니다.

28절에서 예수님은 다시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다시 오실 때는 죄인인 사람의 몸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상관없이” 임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28절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셨고, 두 번째로는 죄와는 상관없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셔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만 ‘죄와 상관없이’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14절  ...우리로 하여금 죽은 행실에서 떠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흘리신 것은 단지 지은 죄만 깨끗케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죄짓게 만드는 죄의 권세로부터의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을 믿는 자는 더 이상 죄를 범하지 않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정말 그런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의심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분명히 그렇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 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에게 죄성이 다 사라진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죄성 때문에 탄식하였습니다. 

롬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도 죄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더 이상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요일 5: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이런 삶은 그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요일 3:6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서커스단의 사자는 야성을 가진 진짜 사자입니다. 그러나 그가 조련사에게 훈련을 받고나면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재주도 부리고 심지어 그 사자를 만지기도 합니다. 그 때 이 사자는 조련사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사자는 여전히 살육의 본성을 가지고 있고 으르렁거릴 수 있지만, 조련사의 발아래 암전히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조련사가 없으면 그 사자에게 다가서면 즉사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진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예수님 안에 거하기를 힘쓰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와 마귀의 역사에서 지켜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도 죄의 종노릇하는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 모르게 더러운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마음이 더러운 생각으로 날마다 들끓고 있습니까? 교회를 다니면서도 못 고칩니까? 
2,000년 전 십자가만 바라보지 말고 지금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 육신 안에 임재하셔서 살아있는 주님과의 교제를 갖게 해주신 것이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이 인정하건 그렇지 않건, 히브리서는 ‘아주 간단한 설교문’입니다. 
마지막에 히브리서 기자가 말합니다.

히 13:22 형제자매 여러분, 부디 이 권면의 말을 받아들이기를 권유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짤막하게 썼습니다.
이 부분에 전혀 동의할 수 없고 오히려 화를 내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서 기자가 한 가지 분명한 주제로 설교하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문제의 답이시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율법에 매어있던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눈을 열어주기기가 만만치 않았던 것입니다.
깊이 뿌리박힌 문제는 고치기가 그렇게 어렵구나! 
우리도 사실 같은 처지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어도 교리로만 믿습니다. 속죄만 받는 복음이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 되어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복음, 너무나 분명한 데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들어 합니다.

254장 '내 주의 보혈은' 찬송, 믿음의 선배들이 일제 때 625 사변 때 밤낮없이 부르면서 승리했던 찬송이었습니다. 

'내 주의 보혈은 정하고 정하다/ 내 죄를 정케 하신 주 날 오라 하신다/ 내가 주께로 지금 왔으니 / 예수님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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