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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 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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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깨우러 가노라 (요 11:1-16)


세 남자가 비슷한 시기에 죽어서 심판대 앞에 서기 전에, 베드로가 그들에 대하여 일단 면담을 했습니다. 첫 남자가 말했습니다. 
“저는 지난 몇 달간 제 마누라를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회사에서 몰래 일찍 나와 집으로 가 보기로 했죠. 역시나, 마누라는 샤워를 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집 안에 어느 놈팡이가 없나 찾아다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웬 놈이 우리 집 베란다 난간에 매달려 있더군요. 베란다 난간에 매달려 있으면, 아마 제가 못 찾으리라 생각했겠죠. 그래서 즉시 망치를 가져와 놈의 손을 후려 쳤습니다. 그리고도 안 죽었을 것 같아서 부엌으로 가 냉장고를 들어다가 던졌죠. 그 후 하도 마누라의 배신이 비관스러워서 권총으로 자살을 했습니다.” 

성 베드로는 두 번째 면담자를 만났습니다. 
“어느 날 아침이었죠. 제 집이 27층인데, 날씨가 좋기에 발코니에 나가서 기지개를 켰습니다. 그러다가 균형을 잃어서 난간에서 떨어져 버렸죠. 근데 운이 좋았는지, 다행히도 아래 층 베란다에 겨우 매달렸습니다. 살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집안에서 웬 남자가 뛰어나오더니 망치로 제 손을 후려치더군요. 자기 집 난간에 매달린 게 싫었었나 봐요. 암튼 그렇게 다시 아래로 떨어졌는데, 중간에 나무에 걸려서 죽지 않았습니다. 기적이라고 생각했죠. 그런데 정신을 차리려는 순간, 저에게 냉장고가 하나 떨어졌습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냉장고에 맞아 죽었습니다.” 

베드로가 마지막 면담자를 만났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들어오면서 한 숨을 크게 내쉬더니 말했다. 
“저는 빨가벗고 냉장고 안에서 달달 떨며 숨어 있다가 그 냉장고를 집어 던지는 바람에 25층 아래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는 이유와 모습은 매우 다양합니다. 
우리나라에 공식적인 3대 거짓말이 있다고 하지요? 여러분들이 다 아는 거짓말입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밑지고 판다는 말, 노처녀가 시집 안가겠다고 하는 말, 그리고 노인이 빨리 죽고 싶다고 하는 말입니다. 노인들이 “내가 빨리 죽어야지.”라고 말하면 자식들이나 주위 사람들이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100살까지는 사셔야지요.”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그런 말씀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죽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한 사람들은 죽어야 된다면,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말이 있지 않습니다. 구구 팔팔 이삼사 무슨 숫자 놀이가 아니라 아흔아홉 살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만 아프다가 죽으면 좋겠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오래 살고도 싶고 건강하게 살고도 싶고 설사 그렇게 살다 죽더라도 아프지 않고 조용히 세상을 떠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아마도 누구라도 바람직한 소망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어떻게 생각해 보면,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오히려 편안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화목한 가정에 닥치는 불행입니다.
예루살렘 성을 마주하고 감람산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감람산 자락에서 보면 예루살렘 성이 한 눈에 다 들어옵니다. 감람산과 예루살렘 성이 있는 성전산 사이에는 유명한 기드론 시내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보자면 감람산 너머 그러니까 산 너머 서쪽 편에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은 소위 말하는 달동네입니다. 그러니까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 삼남매가 사는 이 집은 결코 부유한 가정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만큼 화목한 가정도 없습니다. 

저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예수님을 만나 누구보다도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기 집으로 모셔서 지극 정성으로 식사를 대접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너무 많은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쁜 나머지 자기를 돕지 않고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 말씀만 듣고 있던 마리아 때문에 불평을 하기도 했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누구 못지않았습니다.

마리아는 또 어땠습니까? 무엇보다 말씀의 소중함을 깨달았던 여인이 바로 마리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예수님과 제자들을 집으로 초청했을 때도 바빠서 어쩔 줄 모르는 언니를 보면서도 오히려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그 말씀 듣기를 더 기뻐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더 좋은 편을 택했다는 칭찬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의 은혜를 받았을 때 어려운 가운데서도 온 힘을 다해서 모았던 향유 한 옥합을 아낌없이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아드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들 삼남매를 어여삐 여기신 것은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어느 모로 보나 사랑받을 만했던 남매들입니다. 저들의 오손도손하면서도 때로는 주님 앞에서 투정도 부릴 정도로 저글 역시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스칠 정도입니다. 아마도 부모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안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삼남매끼리 살아오던 가정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비록 잘 살지는 못해도 형제자매들끼리 화목한 가운데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믿는 좋은 믿음의 가정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들 남매들이야말로 정말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아 누릴 것이라고요. 또 그래야 마땅하다고요. 그러나 현실은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보십시오. 그런 가정에 어두운 그늘이 짙게 드리웁니다. 그것은 그들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이 들었는데 자기들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중병입니다. 아마도 갑자기 사고로 크게 다쳤거나 아니면 역병과 같은 순식간에 죽음에 이르게 하는 어떤 병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오죽하면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고 계시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예수님을 청했겠습니까?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그런데 얼마나 위중한 병이었으면 손을 쓸 수도 없을 정도로 갑작스럽게 나사로가 죽게 됩니다. 
얼마 전 예수님을 모시고 식사 대접을 할 때만 해도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다른 집도 아니고 이토록 화목한 가정에 이런 불행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거기다가 그렇게 믿었던 주님도 결국은 나사로가 죽고 난 다음에 도착하지를 않습니까? 

죽기 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죽고 난 다음이라면 이야기는 좀 달라집니다. 병자로서 예수님을 찾았던 사람들 중에 낫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것과 나인성 과부의 독자가 죽었는데 장사지내러 가던 길에 예수님과 마주칩니다. 그때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섰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명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그랬더니 그가 살아나 말도 하니 그 청년을 어머니에게 주셨던 때가 또 한 번  이렇게 딱 두 번 뿐입니다. 

그러니까 죽어도 다시 살 것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절망입니다. 못된 짓만 일삼던 사람도 아니고 삼남매가 그토록 다정하게 살았는데 그것도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잘 믿고 섬기는 가정이었는데 이런 가정에 복된 일들만 있어야 마땅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가 봐도 그런 집이라면 마땅히 복을 받고도 남음이 있다고 할 만한 그런 집인데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나사로가 갑자기 병에 들어 세상을 달리하니 허망해도 그토록 허망할 수가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도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솟아날 구멍은 보이지를 않습니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무지 감당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헤쳐 나갈 길도 보이지를 않습니다. 어디 하나 빛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뿐이요 절망으로만 가득합니다. 나오느니 한숨뿐입니다. 
물론 우리가 흔히 어려움을 당하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그런데 아무리 부르짖어도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자칫 우리 마음에 낙심으로 가득 차게 되어 나도 모르게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작은 지혜로 어찌 하나님을 다 안다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끊임없는 간구의 기도와 더불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만을 끝까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힘들지 않은 것이 아니라 힘들기에 더욱 참고 기다리며 오히려 모든 일에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면 때가 이르매 거두는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어떠한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과 아들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이미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에게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심으로 그가 가서 씻고 보게 된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님의 대답은 사람들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라도 그 사람의 죄라거나 아니면 부모 탓에 그가 그렇게 되었다고 할만도 한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의 대답은 하나였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런데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나서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나타낸 반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죽을 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라는 것입니다. 저가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기 위해서 저에게 죽을 병이 생긴 것이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은 아닙니다. 때로는 죽음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여기 주님의 영광을 위한 도구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실 수가 없어서 나를 필요로 하시겠습니까? 그렇다고 내가 잘 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좋은 일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좋지 않은 일이 생겼는데 거꾸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기도 한다니 우리는 그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다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일꾼을 세우시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요한만 해도 얼마나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까? 거기다가 성질머리는 또 한 성질 하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요한과 야고보 그 형제들을 예수님께서 우레의 아들이라고 부르셨겠습니까? 그렇게 성질머리 더럽고 급한 성격에 욕심은 또 많아서 어머니를 통해 예수님이 보좌에 앉으실 때 그 좌우편의 자리를 자기들 형제가 차지하게 해 달라고까지 하던 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주님은 정말 귀하게 쓰십니다. 

우리 같으면 너희 같은 놈들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하시면서 외면하실 것 같은데 그들의 믿음처럼 한 사람은 제자들 중 첫 순교자로 또한 요한은 마지막까지 살아있는 순교자로 쓰시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그들이 내세울 만한 특별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평범한 갈릴리의 어부였을 뿐입니다. 자기 배에 예수님을 태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진 사람도 아닙니다. 단지 그는 허탕치고 돌아온 아침에 다시 그물을 손봄으로 내일을 준비했을 뿐입니다. 

하기야 그것은 누구라도 어부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베드로가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던져 엄청난 물고기가 잡혔을 때 도와 달라는 말을 듣고 배를 타고 나가 그들을 도와 물고기를 자기 배에 나누어 싣고 돌아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시면서 함께 부르셨습니다. 거기에 순종하였을 뿐입니다. 사랑이 풍성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요한을 통해 하나님은 놀라운 이야기를 우리들에게 전해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를 세우심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는 사실을 우리 역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일꾼으로 부르실 때 우리는 나를 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내게는 그 일을 할 만한 자격도 없고 능력도 안 된다고 하시겠습니까? 오히려 사람들의 웃음거리밖에 안 된다고 생각하시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순종하는 자의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2:3~4은 말씀합니다.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왜 베드로 사도가 이런 권면을 합니까? 자기도 처음에는 시몬이었습니다.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베드로 즉 반석 돌로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마지막까지 흔들립니다.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하지를 않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보고 난 다음에도 차분히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갈릴리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던 저가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저희를 찾아오셨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라” 
그들이 순종하였을 때 153마리나 되는 많은 물고기가 잡힙니다. 주님인 것을 깨닫고 혹은 물로 뛰어들어 헤엄쳐 나오고 혹은 그물을 끌고 배로 주님께로 나온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고는 시몬에게 뭐라고 하십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그렇습니다. 너는 돌이 아니라 시몬이라는 것입니다. 반석이 아니라 갈대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순절 성령을 받고 난 다음 저는 달라집니다. 철저히 주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믿음으로 기도하는 베드로 앞에서 죽은 다비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습니까? 그래 그는 더 힘을 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함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결국 로마까지 가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돌보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하지 않습니까? 

그 베드로가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더욱 건축자가 못 쓰겠다고 버린 그 돌을 가져다가 하나님께서 보배로운 산 돌로 삼으신 것처럼 우리도 산 돌 같이 신련한 집으로 세우실 뿐 아니라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잘 나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못났기에 오히려 그런 우리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뿐 아니라 그렇게 순종하는 자를 세워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시며 순종하는 자에게 하늘 문을 여신다고 주님이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택하시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사랑하셨다면 어째서 나사로가 죽도록 그렇게 버려둘 수가 있었냐고 하시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하심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부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순종 외에는 없습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유대로 다시 가자.”
제자들이 그만 펄쩍 뜁니다.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깨우러 가노라. 깨우러 가노라”
예수님이 나사로를 친구라 하십니다. 내가 깨우러 간다고 하십니다. 그 주님이 또한 오늘 우리를 깨우십니다. 내 친구 아무개가 지금 죽음의 깊은 잠에 취해 있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죽음의 잠에서 깨우십니다. 불신의 잠에서 깨우십니다. 불순종의 잠에서 깨우십니다. 불평과 원망과 좌절의 잠에서 깨우십니다. 

그런데 아직도 여전히 잠들어 있습니까? 죽음의 깊은 잠에 들어 있습니까? 불신의 깊은 잠에 좌절의 깊은 잠에 들어 있습니까?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깨우실 때 일어나십시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깨어 일어나는 것입니까? 순종하는 것입니다. 베다니 건너편 벳바게 마을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나귀 새끼를 끌고 오너라. 누가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
그렇습니다. 주께서 쓰시고자 하십니다. 죽은 것과 같은 나를 주께서 쓰시고자 하십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통해 영광 받기를 소원하십니다. 그 주님이 지금 나를 깨우십니다. “깨우러 가노라” 말씀하시니 하나님 앞에 순종함으로 깨어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우리들에게 믿음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옛날 서양 궁궐에는 왕 말상대 역할을 하는 광대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왕이 자신이 쓰던 지팡이를 광대에게 주면서, 일주일 후에 모든 신하들을 불러 모을 테니, 모인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지혜롭지 못한 사람 즉 어리석은 사람을 찾아서 그 지팡이를 주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그러면 그 지팡이를 받게 되는 사람에게 죽음의 벌을 내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주간 동안 광대는 어떤 신하가 가장 어리석은 신하일지를 찾고 또 찾았습니다. 한 주간이 지난 후, 모든 신하들이 왕 앞에 다 모였습니다. 드디어 광대는 지팡이를 들고서 왕 앞에 섰습니다. 광대가 그 지팡이를 한 명의 사람에게 주어야 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오직 지팡이에만 눈이 가 있습니다. 혹시 나에게 그 지팡이가 주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며 초조해 하고 있었습니다. 
광대는 먼저 왕 앞에 큰 절을 올리고서는 그 지팡이를 들어 왕에게 주었습니다. 왕은 광대에게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지팡이를 여기 모인 사람들 중 가장 어리석은 사람에게 주라고 했더니 왜 다시 나에게 주느냐?” 
그랬더니 광대가 왕에게 하는 말이 
“왕이시여, 제가 이 왕궁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지혜롭지 못한 사람을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결과 저는 가장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왕이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왕이 호통을 칩니다. 
“무엄하다! 왕인 내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말이냐? 무슨 근거로 그런 판단을 내렸느냐? 만약 네 판단의 근거가 터무니없다면, 네 놈이 죽음의 벌을 받을 줄 알거라.” 
광대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이시여, 이곳에 모인 모든 신하들은 자신들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 주간 동안 죽을 준비를 하고 여기에 모였지만, 오직 왕께서는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이 자리에 참석하셨기에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판단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산다는 것이 가장 지혜롭지 못하고, 어리석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사는 사람입니다.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그들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주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이시는 부활의 주시오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오히려 당당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는데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해 기뻐한다. 왜냐하면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만약 주님이 나사로가 죽기 전에 가셔서 고쳐 주셨다면 누구도 예수님을 부활의 주로 믿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건성 죽은 것도 아닙니다. 누구 말처럼 나인성 과부의 독자는 죽은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회당장 야이로의 딸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방금 죽었고 그날 죽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혹간 그런 경우가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하지만 나사로는 이야기가 다릅니다. 그는 예수님이 당도하셨을 때는 죽은 지 아미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몸이 썩어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들이 부활의 능력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그 보혈을 우리 심령에 뿌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보혈의 능력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게 가능했던 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새 생명을 누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당당하게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하심이라”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하신 베드로 사도의 고백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난한 농부는 오형제를 두었습니다. 그런데 큰 부자가 금전과 전답과 곡식을 줄 테니 막내아들을 자신의 양자로 삼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농부는 엄청난 재산을 받고 막내아들을 양자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 농부는 밤을 꼬박 샜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받은 모든 전답과 돈과 곡식을 돌려주고 막내아들을 찾아왔습니다. 재물보다는 굶을지언정 자신의 아들이 더욱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이렇듯이 부모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그토록 귀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대가없이 독생자 예수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멸망치 않게 하기 위해서, 멸망치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백성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미국의 코미디언 “조지 번즈”는 100세의 나이에 “늙은 것을 걱정하지 말라. 녹스는 것을 걱정해라. 육체보다 마음에 녹이 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다. 내 이름은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걱정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영생이 있는 우리에게는 죽음도 없고 은퇴도 없습니다.
“주님, 소중한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 저를 멸망치 않게 하시고 영생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주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따라 잠에서 깨어 일어나 “언제나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간구하며 말씀을 따라 “예”하고 “아멘” 하며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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