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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의 제사, 어떻게? (눅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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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제사, 어떻게? (눅 17:11-19)

감사의 계절을 잘 지내고 계십니까?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하시기 위해서 조금 더 노력하고 계십니까? 병원에서 산소 호흡기를 사용하는 비용이 하루에 약 30만원이라고 합니다. 3일만 있어도 거의 100만원이 듭니다. 한 달이면 천만 원의 비용이 듭니다. 자동 산소 호흡기를 몸에 지닌 여러분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만난 것이 감사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뜻밖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엡2:8). 기적 같은 일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은 사람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 사마리아 사람

나병환자 열 명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고침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제사장에게 가는 도중에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만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하였습니다.”(눅17:15-16) 그런데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의외의 인물이 감사를 표시했습니다. 실제로 감사를 표시하는 사람은 의외의 사람입니다. 
  
누가복음에는 사마리아 사람이 딱 두 번 등장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와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관한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일컬어 선한 이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는 의지적으로 강도 만난 사람을 도운 것이 아닙니다. 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었습니다. 도움을 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이 모두 도움을 받아 본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받은 도움이 감사해서 도움을 베푸는 것입니다. 감사의 삶의 자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황이 발생할 때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여기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두 사람은 자신이 가는 길에서 멈추었다는 점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자신의 길에서 멈추어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아 주고 여관에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감사하는 사마리아 사람은 치유된 줄 알고 멈추어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는 길이 우선이 아닙니다. 더 우선되어야 하는 길이 있습니다. 고통 받는 사람을 돌보는 길입니다.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길입니다. 이 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 나와 내가 필요한 것을 받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길에서 멈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고침에서 끝나지 않고 감사의 단계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고침을 받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큰 소리가 무심코 그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예배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예배자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큰 소리가 나옵니다. 자연스럽게 손이 올라갑니다. 은혜에 대한 반응입니다. 열 명은 동일한 선물을 받았지만 그들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감격이 있었습니다. 예배는 감사를 넘어서 감격으로 가야합니다. 벅찬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뒤범벅된 예배가 최고의 예배입니다. 최고의 예배는 좋은 음악과 정제된 말씀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예배의 핵심은 입에서 저절로 나오는 감탄사입니다. 아! 오! 주님! 
  
사마리아 사람은 뜻밖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감사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자신이 구원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더욱 감사한 것입니다. 가장 감동적인 선물은 뜻밖의 선물입니다. 별로 감동이 없는 선물은 식상한 선물입니다. 

이 시대에는 감동이 별로 없습니다. 집에 필요한 것들이 대부분 다 있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가전제품, 가구, 먹을 것이 냉장고에 들어 있습니다. 몇 발자국만 걸어가면 모든 것이 있습니다. 24시간 운영하는 가게들도 즐비합니다. 그래서 선물을 받아도 그다지 감동이 없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들이 필요한 것들을 다 사주면 아이들은 선물에 감동을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여기고, 심지어는 지루해 합니다. 이 시대의 아이들의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지겹다”(boring)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있는데 어떤 즐거움, 흥분, 감동이 있겠습니까? 실제적인 삶 속의 감동보다는 연출된 감동에 익숙합니다. 영화, 드라마, 오락에서 연출하는 감동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나병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나병만 없어지면 되기 때문에 그 문제가 사라지자 자신의 자리로 원 위치한 것입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자신을 치료해주신 예수님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했습니다. 이방인인 자신을 고쳐주었기 때문에 감사한 것입니다. 당연하지 않기 때문에 감사했습니다. 그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5:3) 감사하는 사람은 천국을 맛보는 사람입니다. 소박한 밥상도 천국의 식탁이 될 수 있습니다. 소박한 여행이 천국으로 가는 순례일 수 있습니다. 
  

󰊲 감사의 제사: 예배 

예수님은 10명의 나병환자를 고치셨는데 한 사람만 돌아왔습니다. 그는 왜 돌아왔을까요? 감사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예배의 자세를 보입니다.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리어 감사했습니다.”(눅17:16) 예배를 뜻하는 히브리어 Shachah 는 ‘엎드린다’ ‘무릎을 꿇는다’ 존경을 표시한다는 뜻입니다. 헬라어 Proskuneo는 (개가 주인의 손을 핥듯이) ‘입 맞춘다’ ‘엎드린다’ ‘경배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왕 앞에서 땅 바닥이나 왕의 발에 입 맞춘다는 뜻에서 유래합니다.  
  
성경은 시종일관 예배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아벨의 제사, 노아의 제사, 그리고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제사까지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의 종살이를 하면서 예배를 금지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그 목적은 백성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면서 이 점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리기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2)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예배 받기 위함입니다. 불쌍하기 때문에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은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경우가 많습니다.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위로 받기 위해서, 혹은 다른 세상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서 예수님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1) 삶의 자리에서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2) 예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3) 발 아래에 엎드려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감사의 제사를 드리십시오. 감격의 제사를 드리십시오. 이것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예배입니다.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시편 50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수소의 고기를 먹으며 염소의 피를 마시겠느냐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를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시50:13-15) 

하나님은 짐승의 피와 고기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제사를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돈을 좋아하시기 때문에 봉헌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헌물에 담겨져 있는 감사의 제사를 원하십니다. 심지어 힘든 환난에서도 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건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건지심을 받은 사건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최고의 감사는 환난에서 건지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당신의 삶 자체입니다. 당신의 스토리입니다. 
  
시편 기자는 계속해서 고백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감사의 제사는 감사 조건이 충분해서 드리는 제사가 아닙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예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 구원받은 삶

아홉 명의 유대인들은 예배의 자리에 있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찾으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로 돌아온 자가 없느냐?”(눅17:17-18) 

하나님은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들은 믿음을 통한 구원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라는 특권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돌이켜 예배하지 못했습니다. 표면적인 변화는 있었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감사하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치유보다도 더 큰 선물을 주셨습니다. 그 선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입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눅17:19) 치유와 구원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아홉 명의 사람들은 치유를 받았지만 구원 받지는 못했습니다. 치유는 부분적인 것입니다. 몸의 병을 낫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온전한 변화입니다. 인생 전체의 변화입니다. 영생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치유를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치유가 구원을 증명하지는 못합니다. 치유 받았지만 아직 구원의 자리에까지 옮겨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 중심성(self-centeredness)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자기애적인 치유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 중심(God-centeredness)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오는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자신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향하는 길로 옮겨야 합니다. 변화의 삶은 예배의 삶입니다. 예배가 삶이 되고, 삶이 예배가 되는 그런 인생입니다. 릭 워렌 목사는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예배를 “삶의 방식”(Life Style)이라고 정의합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만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과 자기 자신을 예배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볼 때 확률은 10대 1입니다. 아홉 명은 자신을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한 명만이 돌아와서 감사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쉽지 않은 경쟁률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부류의 사람에 속하십니까? 하나님을 예배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예배하고 있습니까? 혹시 자신을 예배하고 있는 자리에 머물러 있다면 다시 돌아오십시오. 가는 길을 돌이키십시오. 그리고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감사의 제사를 드리십시오. 그리고 감탄사를 연발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목적은 예배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1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감사의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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