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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서주일]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리라 (시 119:129-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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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리라 (시 119:129-133)

구소련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기차를 타고 가다가, 기차 안에서 무신론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성경을 펴서 읽어 주었지만 그 무신론자는 성경을 빼앗아 창문을 열고 밖으로 내던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난 후, 그 목사님의 서재에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목사님은 문을 열어주면서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묻자, 그 낯선 방문자는 목사님께 ‘세례받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목사님은 그 사람을 서재로 안내하면서 ‘어디서 왔느냐’고,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낯선 방문자는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던 동네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밭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기차가 지나가면서 웬 물건이 하나 날아와 자신의 가슴에 부딪히면서 떨어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이었습니다. 농부는 그 날 그 성경을 집으로 가져와서 읽기 시작했고,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 받기를 원했지만, 그 주변에는 그에게 세례를 베풀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름을 찾아 수소문한 끝에 목사님께 왔다는 것입니다. 그 성경이 바로 오래 전에 목사님이 기차를 타고 가다가 무신론자에게 빼앗겨 기차 차창 밖으로 내던져진 그 성경이었던 것입니다. 무신론자가 화가 나서 내던진 그 성경이 예수를 알지 못하는 한 농부를 구원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1866년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으로 진입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쇄국정책을 펴고 있던 때라, 그 배는 대동강 하류에서 조선 군사들에 의해 불에 타고 말았습니다. 그 배 안에는 27살의 영국인 토마스(R. J. Thomas)라는 젊은 선교사가 타고 있었습니다. 배는 불에 타고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몰살당하거나 참수당하고 말았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도 대동강 모래사장으로 끌려와 27살의 나이에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참수형을 당할 때 여러 권의 성경을 주민들에게 뿌려주었고, 죽임을 당하면서 “야소! 야소!”라고 외치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야소’라는 말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토마스 선교사를 목 베어 죽인 사람이 박춘권(1839-1920)이라는 사람이었는데, 토마스 선교사는 그에게 성경을 한 권 건네주면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성경을 건네받은 그는 30년 후에 그 성경을 읽다가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평양 최초의 널다리교회를 세우고, 자신은 영수(領袖)가 되어 남은 생애를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하게 됩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전해준 성경을 가져간 사람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박영식이라는 사람입니다. 박춘권보다 먼저 토마스 선교사에게 한문성경 3권을 건네받은 사람은 12살의 최치량이었는데, 최치량은 성경이 금서라는 사실을 알고 겁이 나서 그 성경을 박영식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최치량으로부터 성경을 건네받은 박영식은 종이가 너무 좋아서 그걸 불태우기가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가져가 한 장 한 장 뜯어 벽지로 사용했습니다. 방안을 성경으로 온통 도배한 그는 도배한 그 성경을 무심결에 읽다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박영식의 집이 후에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는데, 이 널다리교회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장대현교회입니다.
  
그리고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성경 3권을 건네받았던 12살 소년 최치량은 나중에 장대현교회의 장로가 됩니다. 27살의 젊은 선교사가 순교하면서 전해준 몇 권의 성경이 한국기독교 역사를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권세가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의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을 찔러 쪼개기’(히브리서 4:12)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꿰뚫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 앞에 서는 사람은 그 말씀의 권세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좌절에서 일어서게 하고, 우리의 삶의 길을 밝게 비춰줌으로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성경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으로 역사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그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어찌 그 말씀이 능력으로 역사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바로 그런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찬양하는 시입니다. 오늘 본문을 쓴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생애에서 얼마나 큰 능력이 되었는지를 삶의 경험을 통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젊은이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삶의 길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언합니다. 119:9절에서 시인은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바른 가치판단을 하지 않으면 세상의 유혹 앞에 흔들리며, 세상이 주는 쾌락을 좇아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 우리 시대의 문화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문화가 우리와 우리 젊은이들을 유혹하는 가장 무서운 도구는 돈과 성(性)입니다. 돈을 벌 수 있다면 부정과 불법을 저지르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돈이 세상 그 무엇보다 큰 힘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을 따라가다 보면 그 돈이 우리 영혼을 마비시켜 죽음으로 몰아가는 무서운 악마라는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적 쾌락 또한 마귀가 사용하는 무서운 도구입니다. 성적 쾌락에 빠져들면 우리의 양심이 마비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쾌락의 끝에 주어질 엄청난 비극을 보지 못하고 빠져들다가 인생을 망치고 맙니다. 한 때 프랑스에서 계약결혼이라는 말이 나돌기 시작할 때, 우리 사회는 그런 프랑스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말세라고 한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계약결혼은 그래도 양심적이고 윤리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나라 대학가에서 ‘생계형 동거’라는 말은 이제 결코 낯선 단어가 아닙니다. 아니 그 말 자체가 이제는 사회적 이슈가 되지 못합니다. 남녀 대학생이 방을 하나 구해 동거하면 여러 가지 유익이 많다는 것입니다. 생활비도 절약이 되고, 가사 분담을 통해 노동력을 절감할 수 있고, 아울러 시간도 절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녀가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 은밀한 장소를 찾을 필요 없이 자기들만의 은밀한 공간을 만들어 마음껏 성을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같이 살아보다가 맘이 안 맞으면 갈라서는 것도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젊은 남녀가 동거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성을 즐기는 것입니다. 결혼정보회사인 듀오가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전체 응답자의 44%가 성적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 동거한다고 대답했고, 또 다른 인터넷사이트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60% 이상이 사랑 때문에 동거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 동거한다는 사람은 15%였고,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동거한다는 사람은 겨우 10%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노골적으로 성을 즐기기 위해서 동거한다고 대답한 사람도 15%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잘못된 문화에 물들어가면서 무엇인 옳은 삶인지, 무엇이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인지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문화에서 우리 젊은이들을 구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참된 가치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깨달을 때에만 우리 시대에 윤리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살아갈 때 세상이 주는 돈과 성의 쾌락보다 더 큰 기쁨과 즐거움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돈과 성은 인간의 영혼을 빼앗아가는 악마입니다. 그 악마의 무시무시한 손길에서 우리 영혼과 생명을 지키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 그 말씀에 조명을 받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보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33절의 말씀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발걸음을 주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고 어떤 죄악도 나를 주관하지 못하게 하소서.”

시인은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고백합니다. 119:50절에서 시인은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에 위로”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힘든 고난으로 인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깊은 절망 중에서 자신을 위로해 줌으로 살아갈 용기를 준 것이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크나큰 고난으로 인해 쓰러지고 넘어져 다시 일어설 힘조차 없을 때 다시금 일어설 수 있게 힘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109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지금 시인은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인생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살리는 능력이 됨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렇게 고난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9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그렇습니다. 시인은 고난이 극심해질수록 더욱 말씀을 가까이 했습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을 즐거워하는 믿음 때문에 그는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약 말씀을 자신의 즐거움으로 삼지 않았다면 그는 그가 고백한 대로 고난 중에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시인은 말씀을 너무너무 사모했습니다. 본문 131절의 말씀처럼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입을 열고 헐떡일’ 정도였습니다. 제비 새끼가 어미가 물어다주는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서 입을 열고 지저기는 것처럼, 말씀을 먹기 위해서 사모했습니다. 

시인은 그렇게 힘든 고난 가운데 있는 자신의 모습을 83절에서 ‘연기 속에 있는 가죽부대’라고 표현합니다. ‘연기 중에 있는 가죽부대’라는 말은 유목민들의 삶에서 나온 말입니다. 유목민들은 텐트생활을 하는데, 텐트 안에는 목마를 때 마시기 위한 물이나 포도주를 담아놓은 가죽부대를 매달아 놓습니다. 

그런데 유목민들은 텐트 안에서 불을 지피며 생황해야 때문에, 매달아놓은 가죽부대 안에는 연기가 자욱하게 담겨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 가죽부대는 그 연기로 인해서 새까맣게 그을리고 맙니다. 그런 새까맣게 그을린 그 가죽부대를 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큰 슬픔이나 고통으로 인해 너무너무 힘들 때 ‘연기 중에 가죽부대’라는 표현을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주 쓰는 말로 ‘마음이 숯덩이처럼 새까맣게 탔다’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지금 시인은 그렇게 힘든 상황 속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힘들고 아플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말씀을 가까이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위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혹 고난 중에 계신 분이 있습니까? 너무너무 힘든 삶, 견디기 힘든 문제들로 인해서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까? 너무너무 힘들어서 마음이 숯덩이처럼 새까맣게 타버린 것 같은 답답한 상황에 있습니까? 그럴 때일수록 말씀을 더욱 가까이 하고, 말씀으로 인생의 즐거움을 삼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의지하면 말씀은 반드시 우리에게 힘이 되어줍니다. 말씀의 즐거움이 내 삶을 고난 중에서도 찬송하게 만들고, 좌절 가운데서도 희망의 빛을 보게 만들어줍니다. 내 마음이 숯덩이처럼 새까맣게 타버린 상황에서 우리의 마음을 회복시켜주시고, 다시금 용기를 내게 만들어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인이 당한 고난 가운데 가장 힘든 것은 사람으로 인한 고난입니다. 157절에서는 핍박하는 자들과 대적자들이 너무 많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습니다. 왜 시인이 그렇게 핍박을 받아야 하는지, 또 왜 사람들이 그를 대적하여 그렇게 힘들게 하는지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추론해볼 수 있습니다. 51절에 의하면 ‘교만한 자들이 시인을 심히 조롱’하고 있습니다. 

78절에 의하면, 교만한 자들이 거짓으로 자신을 엎드러뜨렸다고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백들로 보건대, 시인은 바른 신앙으로 살려하는 것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교만한 자들은 주로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권력이나 돈의 힘을 믿고 뻐기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시인을 향해 이렇게 조롱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산다고 잘난 체 하더니, 그게 뭐야?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면 복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 왜 그렇게 비참해! 왜 그렇게 어려움이 많아? 혹시 겉으로는 신앙생활 잘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서 뒷구멍으로는 엉터리로 사는 것 아냐?’ 열심히 신앙생활하며 말씀을 즐거워하며 사는 시인을 향해 그렇게 조롱했습니다. 그리고는 바르게 살려 하는 시인을 핍박합니다. 
  
시인은 그렇게 조롱하고 핍박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목이 졸리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낍니다. 61절에서 ‘악인들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다’고 고백합니다. 주변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에 줄을 감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조롱하고 박해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함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종종 그런 일들을 겪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하려는 우리를 사람들이 조롱합니다. ‘신앙생활하면 잘 살아야 하는데 왜 그렇게 구차하게 사느냐?’고 놀리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조금만 힘든 일이 일어나면 ‘지 혼자 잘난 체 하더니만 꼴 좋네’ 하고 놀립니다. 때로는 내가 당한 어려운 일보다도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수군거리는 것이 더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신앙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말씀에 붙들린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조롱하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릴수록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더욱 붙잡고 살아야 합니다. 거기에서 하늘의 위로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위로가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때로 자신의 영혼이 고통으로 짓눌리는 것같은 상태에 빠지기도 합니다. 28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는’ 것만 같습니다. 영혼이 눌린다는 것은 마치 가위눌리는 것 같은 상태를 말합니다. 여러분, 가위눌려 보셨습니까? 잠을 자는데 누군가가 자신의 목을 조릅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소리를 지르려 해도 개미만한 목소리도 나오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미칠 지경입니다. 때로 시인이 그런 경험을 하곤 합니다. 

25절에서는 그 때의 상황을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다’고 표현합니다. ‘진토’라는 말은 ‘땅’이라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지하세계, 지옥’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마치 자신의 상황이 지옥에 있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지옥과 같이 힘든 삶에서 자신을 살리는 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너무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에서 자신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자신의 삶에 지옥 같은 고통이 엄습할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그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속에서 생명을 얻었습니다. 

때로 우리에게도 삶의 무게로 인해서, 때로는 너무너무 힘든 문제로 인해서 내 목이 가위눌리는 것 같은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아무리 몸부림 쳐봐도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빠져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말씀이 우리에게 빛이 되어줍니다. 말씀을 열면 그 말씀이 빛이 되어 우리의 삶을 밝게 비춰줍니다. 우리의 목을 조르는 어둠의 세력은 빛이 비춰짐으로 사라집니다. 어둠을 이기는 것은 빛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두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그 어떤 고난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려 살면 내 주변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고 핍박할지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내 마음이 숯덩이처럼 새까맣게 타버린 상황에서도, 가위눌리는 것 같이 힘든 삶의 무게로 인해 목이 졸려오는 상황에서도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의지하면 우리는 그 모든 상황을 이기고 승리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 기적 같은 하늘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역사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네 가지 경험을 꼭 해야 합니다. 
  
첫 번째는 말씀을 읽으면서 눈물을 흘려보아야 합니다. 말씀이라는 거울 앞에 비춰진 내 모습이 그렇게 추하고 더러울 수가 없어 부끄러움에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내가 나를 보았을 때에는 ‘이정도면 괜찮아!’라고 생각했는데, 말씀 앞에 서 보니 이렇게 큰 죄인이 없습니다. 그걸 깨닫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그런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 깊숙이에서 느끼며 또 한 번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내 죄를 적나라하게 보고 내 죄를 깊이 깨달을수록 나를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은 더욱 크게 다가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은 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죄인인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말씀이 내 가슴 속에서 살아 역사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말씀을 읽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읽으면서 은혜를 받으면 그 말씀이 살아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다’는 히브리서의 말씀과 같이 말씀이 살아 움직이는데, 내 가슴을 주체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말씀이 살아서 내 마음에 기쁨을 주고, 감동을 줍니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밀려옵니다. 그런 경험을 하면 앞서 말씀드린 시인과 같이 고난으로 인해 힘들지라도, 사람들이 나를 조롱하고 놀릴지라도, 힘든 상황으로 인해 내 목이 조여지는 것만 같을지라도 내 안에서는 하늘의 기쁨이 가득하게 됩니다. 세상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해집니다. 사람들이 그런 나를 볼 때 ‘미친 것 아니야’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들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기쁨이 내 안에 충만하게 됩니다.
  
세 번째는 말씀에 사로잡혀 말씀에 빠져드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말씀이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습니다. 말씀을 읽으면 읽을수록 더 읽고 싶어집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대학 다닐 때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말씀을 읽기 시작하면 새벽 2시고 3시고 읽기를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어떤 날은 날을 꼬박 새기도 하고, 어떤 날은 다음날 학교에 가서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으로 성경을 덮고 새벽녘에야 잠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그 때는 정말 시인의 고백처럼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는 말씀이 정확하게 맞습니다. 늘 그럴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그런 경험을 꼭 해보아야 합니다. 
  
네 번째는 말씀이 깨달아지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을 때 때로는 그 말씀이 무슨 의미인지 모른 채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합니다. 말씀의 깊은 의미가 깨달아집니다. 말씀의 글자만 읽는 것이 아니라, 순간순간 말씀의 의미가 깨달아집니다. 그러면 말씀을 읽는 재미에 더 깊이 빠지게 됩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연애편지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보내주신 편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연애편지를 자꾸만 읽고 싶어 할 것입니다. 결코 구닥다리 책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성경에 영생을 얻는 길이 있습니다. 그 성경에 고난을 이기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성경에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성경에 죄에서 해방된 참 자유를 누리는 삶이 있습니다. 
  
여러분, 행복하게 살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으십시다. 말씀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시는 참된 행복의 있습니다. 고난을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성경을 읽으십시다. 말씀 속에 고난을 이기는 방법, 승리의 삶을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환경에도 굴하지 않는 기쁨을 누리며 살고 싶으십니까? 성경을 읽으십시다. 말씀에는 세상의 모든 환경을 뛰어넘어 우리의 가슴에 가득 임하는 하늘의 기쁨이 있습니다.
  
성경은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열면 우리의 삶을 비치는 밝은 빛이 우리 앞을 환하게 비춰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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