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눅 2:41-52)

첨부 1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갔다는 기록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모든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매년 세 번씩, 그러니까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이 세 절기를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서 지켜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포로 시대 이후에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에게 매 년 세 번씩 예루살렘까지 와서 절기를 지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적어도 유월절만큼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절기를 지키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본래 율법에는, 남자들에게만 절기를 지키도록 명령하고 있지만, 후에 랍비를 통해서 여자들도 유월절 예식에 참석할 것을 가르치면서 여자들도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자인 요셉만이 아니라, 아내 마리아도 함께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됐습니다.

  41절 말씀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유월절을 지킬 때에 ‘해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는 것을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과 마리아가 율법을 엄격하게 지켰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고, 그들의 경건한 생활을 엿보게 해줍니다. 두 사람은 경건하고 신실하게 해마다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열 두 살이 되었을 때에, 이번에는 예수님도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함께 올라가게 됐습니다. 

  42절 말씀에는 ‘관례를 따라 그렇게 했다’고 강조가 되어 있는데,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관례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엄격하게 자녀 교육을 시키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여섯 살이 되면 쉐마나 시편의 중요한 구절들을 암송하게 했고, 열 살이 되면 율법의 해석이 되는 미쉬나를 배우게 했고, 12살이 되면 ‘율법의 아들’이라고 해서 예루살렘 성전의 정식 회원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율법을 본격적으로 배우면서 지키게 됩니다. 예수님도 바로 이러한 관례를 따라서 나사렛에서 가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됐습니다.

  우리 머리 속에 쉽게 떠올려 본다면, 설이나 중추절 같은 명절에 온 식구들이 함께 자동차 없이 걸어서 명절을 지내러 가는 모습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자동차 같이 빠른 교통수단도 없고 오늘날과 같이 치안이 잘 되어 있지 못했다는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도적이나 강도들도 많았고, 심지어는 들짐승들에게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에는 무리를 지어서 걸어갔고, 여자와 아이들은 앞세워 가고 남자 어른들은 뒤에서 보호해 주면서 따라갔습니다. 안전상의 그런 위협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또 어떻게 생각해 보면 낭만도 있고 추억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는 현대 디지털 문명 아래에서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들도 얼굴을 마주할 기회가 적고 대화가 적은데, 그 때에는 명절을 지키기 위해서 온 가족 친지들이 함께 모여서 정담을 나누면서 유쾌한 웃음 소리도 많이 들렸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인해서 발 디딜 틈조차 없었습니다. 유월절과 같은 대목을 놓칠 수 없는 장사꾼들도 셀 수 없이 몰려들었고, 볼거리며 온갖 먹을거리들이 넘쳐났습니다. 그렇게 일주일간의 유월절 절기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지나갔습니다. 43절 말씀을 보면, ‘그 날들을 마치고’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 날들은 유월절 행사 기간인 니산월 14일부터 21일까지의 날들을 말합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서 일주일 동안의 유월절 절기를 예루살렘에서 머무르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루나 이틀이 지나면 예루살렘을 떠나 생업으로 돌아갔다고 얘기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들을 마쳤다!’ 절기의 모든 기간을 채웠다고 한 것은 요셉과 마리아의 경건한 신앙과 종교적 열심히 어떠했었는지를 다시 한 번 짐작하게 해줍니다.

  일주일간의 절기를 마친 사람들은 뿔뿔이 자기가 사는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고향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습니다. 당시 열 두 살의 나이는 그렇게 어린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으로 내려가야 하는 때가 언제인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모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출발했습니다.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예수님의 가족들은 유월절 동안 있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을 것입니다. 축제 때에 즐겁고 재미있었던 이야기도 나눴을 것이고, 제사와 종교적인 이야기들도 나눴을 것이고, 남자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그때에 어쩌면 정치적인 이야기들도 나눴을 것입니다. 또, 여인들은 예루살렘에서 봤던 옷감 색깔이 고왔네 안 고왔네 하는 얘기도 하고, 그 음식이 맛있었네 없었네 하면서, 시댁 식구 흉도 보면서 이야기 꽃을 피웠을 것입니다. 

  그렇게 나사렛으로 내려가면서도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이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 때처럼, 남녀가 따로 무리를 지어서 가니까 요셉은 ‘어머니 마리아와 같이 앞서서 가고 있겠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마리아는 ‘남자들과 같이 뒤에서 따라오고 있나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하룻길을 걸었습니다. 천막을 치고 하룻밤을 보내려고 하는데,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친족과 아는 자 중에,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예수님의 행방을 알 수 없었습니다. 하룻 길을 간 후에 예수님을 잃어버린 걸 알게 됐습니다. 그때 요셉과 마리아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그때의 심정은 아이를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만 알지,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얼마나 애가 탔겠습니까? 당장에라도 밤길에 찾아나서고 싶었겠지만, 가족 친지들의 만류로 하는 수 없이 하룻밤을 보냅니다. 자녀를 잃어버리고 어느 부모가 편안하게 잠을 자겠습니까? 자는 둥 마는 둥 뜬 눈으로 지새고 예수님을 찾아 나섰습니다. 44절과 45절에는 각각 ‘찾되’라는 말과 ‘찾으면서’라는 말이 나오는데, 짧게 기록된 단어이지만 이 단어를 분석해 보면, 계속해서 찾기 위해 수소문하면서 애써 노력했다는 의미가 그 안에 담겨 있습니다. 찾고 찾으면서 예루살렘까지 되돌아갔습니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성전까지 갔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거기서 선생들 중에 앉아서 듣기도 하시고 묻기도 하시면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화 내용을 듣는 자들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날카로운 지성과 영적인 깊이를 바탕으로 랍비들의 질문들에 차분히 답변을 함으로써 주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여기서 ‘놀랍게 여기더라’라는 말은 ‘살짝 깜짝 놀랐다, 나이에 비해서 똑똑한 것 같아서 대견스럽고 조금 놀랐다’ 정도가 아니라,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라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매우 놀란 상태가 계속적이고 반복적이었음을 나타내 줍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지혜와 대답을 들으면서 놀랍게 여겼지만,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이 성전에 앉아서 랍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원어적인 의미를 보면, 그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놀라움 속에서 마리아가 말합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이렇게 말하는 마리아의 태도에는 예수님에 대한 부모로서의 염려와 약간의 분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비범성을 직접 목격하고 당황하는 모습도 포함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부모님이 자신을 찾아 헤맨 이유에 대한 의아함을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있을만한 유일한 곳은 성전인데, 그것을 모르셨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이 대답에서 주님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고 메시야 되심을 분명하게 증거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어 원어상 ‘내 아버지의 일’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전 생애가 하나님의 뜻대로 운행되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 아들 예수님이 메시야 되심을 불완전한 형태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성전에서 잠시 자신의 참모습을 보이신 후에 주저하지 않고 부모님과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식으로서의 의무와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셨습니다. 51절 후반절에는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니라’라는 말은 ‘철저히 지키다’. ‘엄격히 지키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이전에 천사와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 들었던 예언을 생각하고, 동시에 예수님의 언행을 계속해서 주의 깊게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라고 마지막 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장이 육체적으로, 지적으로, 영적으로, 균형 잡힌 성장을 했다는 것을 나타내고, 특히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갔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이셨으면서도 인간의 도리를 다하는 완전한 인자이셨음을 본문은 우리들에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님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사건이 기록된 이 본문 말씀을 볼 때에 늘 칠칠맞은 요셉과 마리아를 생각하면서, ‘어떻게 예수님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라고 비판을 하면서 그들에게 손가락질을 하게 됩니다. 그때의 상황을 생각하면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그럴 수 있었겠다고 편을 들어주려고 해도 요셉과 마리아의 잘못은 피해갈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요셉과 마리아의 잘못을 기록하고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칠칠치 못한 부모의 표본을 보여주면서 자식 잃어버리는 부모가 되지 말고 잘 챙기는 부모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과 믿음 가운데 경종을 울려주는 말씀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잃어버려도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잃어버려도 되고 안 되고를 판별하는 기준은 그 중요성에 있습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잃어버려도 되지만, 중요한 것은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볼펜 하나, 우산 하나, 돈 몇 푼 정도는 우리의 인생을 좌우할 만큼 중요하지 않습니다. 잃어버려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반면에, 중요한 것들, 건강이나 많은 재산, 직장, 가정과 같은 것들은 잃어버려서는 안 될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 가운데서 정말 우리가 잃어버려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분이 계시다면,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예수님만큼은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혹시 예수님을 잃어버린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루길을 갔던 요셉과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잃어버렸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고 계신 줄로만 착각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우리는 심각하게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나는 예수님을 잃어버린 사람 같다고 생각하는 분 계십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는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고 예수님을 꼭 붙들고 신앙생활을 문제없이 해나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그것은 요셉과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결코 예수님을 잃어버릴 거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고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 예수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고,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았고, 앞으로도 나는 절대로 예수님은 잃어버리지 않을 거라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자부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자부심이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와 동행하고 있다고 하는 안일한 생각 때문에 예수님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나와 함께 하실 거라고 방심하다가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요셉과 마리아가 우리에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잃어버려서 비판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은 우리에게 우리가 바로 그와 같은 실수를 오늘날에 재현시킬 수 있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실제적인 경험을 통해서 증명하고 우리들에게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예수님을 잃어버리기에 안성맞춤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당시에 그 원인 가운데 하나는 번잡함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았고, 번잡해서 다른 일에 정신을 빼앗겼습니다. 분주하고 복잡함 때문에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가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살이에 얼마나 바쁩니까? 얼마나 번잡하고 할 일이 많습니까? 티비만 틀면 재밌는 볼거리들이 넘쳐나고, 인터넷을 통해서 스마트폰을 통해서 이것저것 하느라 분주하기만 합니다. 무엇 때문에 바쁜 지도 모른 채로 말씀보다 현대 문명의 이기들을 더 가까이 하고, 모임에 참석하고 다른 할 일은 많아도 기도할 시간은 없습니다. 경건생활에 힘쓰려고 해도 바빠서 못합니다.

  그러니까 결국 예수님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평소에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 같은 질문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지난 한 주간의 우리의 삶을 한 번 머리에 떠올려 보겠습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에 우리의 대화 내용 가운데 예수님의 이야기는 얼마나 등장했습니까? 지난 일주일 동안 우리의 생각 속에 예수님이 과연 몇 번이나 등장을 하셨습니까? 우리 삶의 현장, 그 무대에 예수님은 과연 주인공으로 수없이 등장하는 주연배우였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저 식사기도할 때 주문 같이 외우는 기도 속에 엑스트라로 등장하셨던 분입니까? 우리의 관심 속에 과연 예수님이 있기는 했습니까?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께 조금만 더 관심을 갖고 중간에 한 번만 살폈어도 사흘이나 잃어버리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관심이 있었다면 잃어버리지 않았을텐데, 무관심이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어떻게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 한 주간 동안 세상 가운데 살면서 세상일에만 관심을 가졌지, 주님께 관심 가져 본 적도 없는 우리들이 과연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지도 모르고 착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주여 주여 부른다고 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세례 교인이라고, 신앙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성경지식이 많다고 해서, 직분을 받았다고 해서 주님을 잃어버리지 않았다고 절대로 자신할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난 줄을 알지 못하고 머리카락이 잘린 채로 힘을 쓰려고 했던 사사 삼손처럼, 우리는 결코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우리는 대강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대림절은 날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구원주로 오셨던 주님의 나심을 기다리고, 재림주로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오늘은 대강절 둘째 주일입니다. 대강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관심 가운데 주님이 계셔야 하는 때입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주님을 더욱 생각하고, 주님이 이 땅에 왜 오셔야 했는지를 기억하고, 나 같은 죄인 때문에 인간의 몸을 입고 마굿간 말밥통에 나신 주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해야 하는 때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대강절 둘째 주일인데, 벌써 주님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오래 전에 성탄절에 본 예배 영상이 기억납니다. 영상에는 사탄들이 등장합니다. 사탄들이 나와서 어떻게 하면 크리스마스를 망쳐 놓을지를 회의합니다. 그러면서 회의 결과는, “성탄의 주인공이 예수님이 되지 못하도록 산타를 주인공으로 세우자. 이날은 예수님의 나심을 축하하는 날이 아니라 연인들끼리 선물 주고 받는 날로 만들어 버리자. 반짝이는 트리 장식에 관심을 갖게 만들고, 분위기에 취하게 만들고, 흥청거리면서 인간들이 즐기고 노는 공휴일로 만들어 버리자.” 이런 얘기들을 하면서 끝이 납니다. 그 영상에 나온 사탄들이 말한 대로 지금 우리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성탄이 다가오고 있지만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예수님에 대해 무관심하고, 예수님은 언제 잃어버렸는지도 모르게 벌써 잃어버렸고, 예수님을 잃어버리고도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찾지도 않고, 찾는다는 것이 엉뚱한 곳에 가서 찾고 있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를 우리는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으레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으려니 하고 영적으로 자만하거나 방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 방심하는 자는 예수님을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은 이미 예수님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또한, 예수님을 잃어버린 상황에서도 어떻게 예수님을 잃어버렸는지를 생각하고 부지런히 예수님을 찾을 때에는 다시 예수님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줍니다. 예수님을 잠시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우리가 간절히 주님을 찾으면 다시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부터 자신을 살펴서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결코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대강절기를 지키고 있는 이 때에, 우리가 주님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지를 돌아보면서, 잃어버렸다면 이 기회에 다시 찾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그 무엇보다, 그 누구보다도 중요한 예수님을 잃어버리지 말고 주님과 늘 동행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