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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 7: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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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마 7:7-11)

오늘 여러분은 이 자리에 무엇을 구하고, 찾으려고 나오셨습니까? 또 여러분의 인생은 무엇을 구하여 받기 위해 살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설교 제목이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이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여러분에게 먼저 드려보았습니다. 

이 질문을 따라 오늘 성경본문을 보기 전에 에스겔 33:30-33절을 먼저 보시겠습니다. “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에 대하여 말하며 각각 그 형제와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 보자 하고 백성이 모이는 것 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 그대로 행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으로는 이익을 따름이라 그들은 네가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며 음악을 잘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에 있었음을 알리라.”

여기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왔는데 그대로 행하려는 생각은 없다고 합니다. 입으로는 사랑을 외쳐도 마음으로는 자기 이익을 구하려고 나왔다고 합니다. 더 재미가 있는 것은 에스겔이 여호와의 말씀을 증거하면 ‘음악을 잘하는 자’처럼 여겼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즐거운 음악 프로그램을 보는 것처럼 여겼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제가 오늘 성경말씀으로 설교를 하면 무슨 개그프로그램이나 쇼프로그램을 보는 것처럼 여기시지는 않습니까? 목사의 음성이 좋네, 외모가 성직자답네, 설교를 연설처럼 잘하네 등등.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와서 감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듣기는 하되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행할 의무는 생각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오락 프로그램은 부담을 주지 않습니다. 그저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하여 편안한 웃음만 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목사가 설교를 잘하나 못하나 심사를 하거나, 저 목사 성경말씀을 잘 풀고 있구나는 식으로 감상만 하면 됩니다. 

이렇게 회중들이 추구하는 이익에 맞추어 설교도 개그처럼 웃기려고 노력하게 되고, 감동을 주는 연설가처럼 화려하고 멋있게 꾸미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드라마처럼 극으로 설교를 짜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게 됩니다. 

그럴 때 과연 여러분들이 예배에 참여하여 설교 말씀을 들으려고 할 때 무엇을 구하려고 하는지를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예배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나온 것은 그 말씀을 듣고 행하려 함입니다. 그래서 2013년의 교회 표어는 ‘더욱 많이 힘쓰라’로 정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하여 어떻게 더욱 많이 힘쓸 것인가를 목표로 정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듣고 전하는 이 복음이 우리가 정말 살 길이라고 여러분이 이렇게 함께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디도서를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의 사도된 것이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사도된 것을 높이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 곧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했는데 사도는 그들의 무엇을 위하여 사도가 되었습니까? 그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도가 된 목적은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지식과 영생을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가르침과 조금 다릅니다. 믿었으면 영생의 구원이 보장된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이제 믿었다면 경건한 백성이 되었습니다. 믿었으면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 섬김에는 진리의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생함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목적을 얻을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신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믿기만 하고 진리를 아는 지식은 구하지를 않습니다. 예배에는 잘 참석하는데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쁘신 뜻은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 마음에 자기 이익을 따라 즐겁거나 좋아하면 그만입니다. 

이런 것은 서로 사랑하여 결혼식을 올리고는 그 결혼의 삶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와 같습니다. 결혼에 대한 지식이 없어요. 결혼식만 올리고는 자기 마음대로 살기만 하려 합니다. 그래서 한 번 부부싸움이 일어나거나, 배우자에게 실망을 하게 되면 이런 위기를 어떻게 이겨나가야 하는 것은 모릅니다. 그리하여 결국 결혼이 파행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디도서를 보십시다. 2:11-14절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14절부터 거꾸로 살펴 보십시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속하심은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친 백성으로 삼으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구속을 위하여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셨다고 11절에 말합니다. 그 은혜가 무엇인가? 12절에 우리를 양육하심이라고 말했습니다. 양육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성장케 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지식인가? 경건한 것과 경건치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지식입니다. 이 세상에 살 때 무엇이 경건에 속한 것인지, 경건에 속한 것이 아닌지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은 따놓은 당상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다음에는 경건에 속한 것을 분별하는 지식으로 이 세상을 살게 되고 그리하여 복스러운 소망과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서로 사랑한다고 결혼만 덜컥 하고는 그 결혼이 무엇인지 아는 지식이 없어 파괴된다면 결혼의 소망에 이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주님을 다시 만나는 영광에 들어가는 것, 즉 종말의 혼인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성숙한 결혼의 열매를 거두지 못한다는 것과도 같습니다. 

‘믿기만 하면 다 구원이 보장된다.’는 일방적 도식을 따르지 마십시오. 믿은 다음에 구원의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즉 진리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영원한 복된 소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 것인가를 알게 되면 오늘 본문 말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쉽게 이해하실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오늘 마태복음 문맥에서 다시 한 번 펼쳐보겠습니다. 하나님 아들은 구약의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시려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나셨습니다. 구약의 가나안 땅의 하나님 나라를 천국으로 완성시키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남은 자에게 하신 약속을 따라 천하게 여김을 받았던 갈릴리에 가셔서 사시고, 천국의 일을 갈릴리에서 시작하셨습니다. 

갈릴리 지방의 약한 것과 병든 것을 치료하심으로 천국의 생명을 주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러한 약속을 기다렸던, 즉 의에 주리고 목말랐던 자들에게 천국을 주셨습니다. 구약의 나라를 빼앗긴 슬픔으로 애통하던 자들에게 위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천국을 함께 이루는 동행자들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천국의 사명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사명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까? 천국 율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럼 천국 율법은 무엇입니까? 모세와 선지자의 율법을 완전케 한 율법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예전에 삐삐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삐삐에서 핸드폰으로 발전한 것도 아실 것입니다. 구약의 모세와 선지자를 삐삐와 핸드폰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을 완전케 한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은 같은 것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세상을 가져오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완전케 했다는 개념입니다. 

천국 율법은 모세 율법을 가르쳤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의 의와 천국율법의 의를 대조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모세 율법은 가나안 땅의 하나님 나라의 통치법입니다. 그러나 천국 율법은 말 그대로 하늘 나라의 통치법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 속한 백성은 천국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에 속한 사람은 대한민국의 헌법을 따라 살고, 미국에 속한 사람은 미국 헌법을 따라 사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천국제자들의 의를 대조시킨 것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 수가 있어요. 조선이라는 나라는 유교를 근간으로 세워진 나라이고 조선의 선비들은 유교를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나 조선이 망하고 대한민국이 서게 되면 유교를 근간으로 했던 법질서를 버리고 대한민국의 민주공화국의 법질서를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모세의 법질서를 따라 살았던 것과 이제 천국 율법의 질서를 따라 살게 된 것을 대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옛 사람에게 말한 바 너희는 ~ 들었으나’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대조법을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이러한 의로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우선 하나님은 왕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는 관계로 살아야 합니다. 즉 하나님 나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왕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구약의 신명기 율법의 원칙입니다.

이런 원칙이 현대에는 많이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백성이 투표해서 뽑은 대통령을 너무 값없이 낮추어요. 그게 민주주의라고 착각하는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자기들의 손으로 뽑아놓고 마음에 안든다고 마구 무시합니다. 저는 이런 것이 바른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백성이 자기 얼굴에 침을 뱉는 격입니다. 그런 점에서는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이 청빙하고 서명해서 모셔 와서 위임을 하게 해놓고 뒤에서 낮추거나 수군대요. 장로교 정치를 몰라도 한참 모르는 자들입니다. 자기 얼굴에 침을 뱉고 있는 것을 몰라요.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어느 나라이든 구약과 신약은 의롭게 사는 것을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왕에 대한 경건의 삶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왕의 법과 규례를 지키어 사는 것입니다. 그래야 마음을 다해 왕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명기의 흐름입니다. 그리고 산상수훈의 6장과 7장의 흐름입니다. 6장은 경건의 삶을, 7장은 12절에 말한 것처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는 말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면 경건의 삶의 목표, 경건함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건과 법도는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왕을 섬기는 것은 그 나라의 법도를 잘 지키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민주주의 대통령을 섬긴다면 자유 민주주의를 따르는 것은 매우 당연합니다. 만약 우리가 조선이라는 나라의 왕을 섬긴다면 유교를 따르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7장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것을 마태의 산상수훈에서는 7:1-6절에서 모세의 법도를 구하지 말라 하고, 7:7-12절에서는 천국의 율법을 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구도는 역시 앞에서 계속 말해온 일정한 것입니다. 즉. ‘옛 사람에게 말한 바’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의 대조법, ‘사람에게 보이려고’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보이려고’의 대조법과 같습니다. 물론 이러한 대조법은 5:17절의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라’는 말씀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7:1절의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가 세상에 살아갈 때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처세술을 가르치려 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세의 율법의 판단을 끝내라는 말입니다. 그런 판단으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조선 시대에는 여인들에게 칠거지악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면 쫓겨나야 했습니다. 유교의 법도로 판단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에 와서는 어떻게 법도를 이야기하겠습니까? 7:1절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서 말한다면, 칠거지악으로 여인을 비판하는 것으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즉 유교의 법도로 판단하는 것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모세의 율법의 판단으로 살지 않는다면 천국백성은 어떤 율법을 구하며 살아야 하는 것인가? 바로 이것을 7:7-12절에 말씀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구하며 살았었는가? 그리 살지 말아라. 천국 율법을 구하고 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합니다. 

왜 비슷한 말을 세 번 반복하는가? 그래서 신명기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던 것입니다. 신명기의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과 병행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의미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첫째 계명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 7:7-11절에 대하여 WBC 주석은 이 본문이 앞뒤 문맥과 관련이 없는 독립된 것이라고 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 부분을 7:1-6절과 7:12절 사이에 있는 괄호 부분으로 보았습니다. 기도의 내용이라고 본 것이죠. 그래서 누가복음을 가져와서 끈덕진 기도를 드리는 것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이는 모두 신명기의 문맥을 이해하지 못한 탓입니다.

구약의 신명기에서 모세는 가나안 땅을 요단 건너편 모압 땅에서 바라보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설교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며 사랑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단지 교훈이 아니라 언약의 말씀으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축복과 저주의 경고문이 신명기 마지막 부분에 배치가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신명기 전체의 흐름이 6장으로부터 11장에 요약이 되어 있습니다. 6:4-5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어떻게 여호와를 사랑합니까? 신명기 10:20절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의지하고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 경건의 삶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경외해야 합니까? 11:1절입니다.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그가 주신 책무와 법도와 규례와 명령을 항상 지키라.” 여호와의 법도를 지키라고 합니다. 

그런 다음에 신명기 11:26-28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으리라.” 이는 마태복음 7:13-14절의 좁은 문과 넓은 문의 생명과 멸망의 문을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구조가 다시 신명기 12장에서 28장까지 자세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약과 신약의 성취 관점을 붙들지 못하기 때문에 산상수훈의 해석이 세상의 교훈이나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왜 신명기 언어를 이해해야 하는지 여러분이 아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명기 언어를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이 산상수훈이 귀에 쏙쏙 들어왔을 것입니다.

신명기의 법을 알고 있으되 그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천국 율법을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신명기 법의 최고 우등생은 부자 청년입니다. 그는 모세 율법을 가장 최고로 잘 지킨 자입니다. 니고데모도 그와 같습니다. 신명기의 법을 완전케 했다는 말은 신명기의 법을 30배, 60배, 100배로 확대시킨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 청년은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리스도의 천국 율법을 따르는 자로는 합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감이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자기 곳간을 늘리고 그 곳에 많은 곡식을 쌓아놓고는 ‘내 영혼아 평안하라’는 자입니다. 하지만 신명기의 복으로는 가장 축복을 받은 자입니다. 그런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가 세상의 부와 권력으로 자기를 높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교회, 강남의 교회들이 이런 짓을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가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는지’를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7-8절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사십니까? 신명기의 구약 모세 율법입니까? 아니면 우리 주님의 천국 율법입니까? 여러분이 믿으셨다면 이제 무엇을 구해야 합니까? 또한 제대로 구하고 있습니까? 단지 기도를 열심히 해야 하겠다는 결심이 서는 얘기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을 힘을 다해, 정성을 다해, 목숨을 다해 사랑하십니까? 이렇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이는 요한복음의 마지막에 부활하신 주님이 디베랴 바닷가의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베드로에게 물으신 것과 일치합니다. 세 번 물으셨습니다. 이것은 헬라어 낱말 풀이하려고 물은 것이 아닙니다. 결혼식 때 세 번 사랑의 맹세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것은 남편이 아내만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 아내가 남편만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아내의 경우 남편의 법도를 사랑하고 구하게 됩니다. 남편의 경우 아내의 법도를 사랑하고 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 남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남편을 구하는 것입니다. 

구하는 자마다 받습니다. 찾는 자마다 찾아냅니다. 두드리는 자마다 열립니다.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안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것이 가능합니까? 9-11절에서 답변을 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육신의 아버지가 악한 자라도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줍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는가? 되묻고 있습니다. 왜 반드시 받으며, 찾아내며, 열리게 됩니까? 하늘 아버지가 아니시더냐!!! 그렇게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누가복음은 간청하는 끈덕진 기도를 말하고 있고 성령을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태의 문맥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반드시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경험이 있으실 것입니다. 자식이 연필 한 자루를 구하면 한 다스를 사주고 싶으신 것입니다. 다스, 이게 열둘을 의미하는 일본말이군요. 즉 열두 배로 더 주고 싶은 것이 부모 마음입니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아니시더냐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어떻게 우리의 하늘 아버지가 되셨습니까? 로마서 5장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기 아들을 죄인을 위하여 아끼지 아니하고 내어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말했습니다. 아들을 아끼지 않고 의인을 위해서, 친구를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위하여 화목제물로 주심으로 사랑하심으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로마서 8:32절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요한복음의 표현으로 하면 이러합니다. 14:13-14절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은행에서 돈을 대출을 받으려면 어떻게 합니까? 아무나 줍니까? 아닙니다. 신용을 봅니다. 또 담보를 봅니다. 그런 후에 대출을 해줍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 그 이름은 놀라운 보증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받을 것이요, 찾아낼 것이요, 열릴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세의 법도를 구하지 아니하고 예수의 법도를 구하면 그 길은 죄와 죽음을 이기신 승리의 길이니 마땅히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의 길을 구하는데 안주실 아버지가 아니십니다. 천국 율법을 구하는데 안 주실 리가 없습니다. 

그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사는 영을 교회에 부으셨습니다. 진리의 영을 부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진리의 영의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래서 바른 판단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육체의 열매를 맺는 것인지,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인지 분별이 가능합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증거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셨는가를 우리에게 알려주실 것입니다. 죽기까지 십자가에 복종하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 길을 우리에게 인도하시며 알려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세례를 받으신 것은 바로 이 길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세례 받으신 것으로 완성이 아닙니다. 세례교육이나 입교교육할 때 제가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단이 삼키려고 할 것이라고요. 

마가복음에서 주님이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천하를 얻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목숨이 더 중하지 않느냐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스도의 길을 따르는데 목숨을 걸라는 말입니다. 목숨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가정이 파괴되는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돈이 없어서입니까? 지식이 모자라서입니까? 그게 아닙니다. 배우자를 목숨을 다해 사랑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명예와 자기 성공을 추구하기 때문에 가정이 파괴가 되는 것입니다. 가정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자기 취미와 오락을 일삼는다면 어찌 가정이 바로 설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천국의 법도를 구하며 살겠다는 출발입니다. 세상의 법도를 따르지 아니하고 천국의 법도를 지키며 구하겠다는 것입니다. 디도서도 세 가지로 반복하며 말씀합니다. 구하며 찾고 두드리는 것에 대하여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 복스러운 소망에 이른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 점을 강조하지를 않았습니다. 한 번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주권으로 너를 어떻게 해서든지 구원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 나라는 세상에 없습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한 이후로 거의 이십년 동안 토요일마다 밤을 새우지 않은 날이 거의 없습니다. 일주일 내내 본문 말씀으로 고민하면서도 거의 주일 막바지까지 이르러야 겨우 설교의 내용을 정리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제가 여러분 앞에서 인정을 받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착한 설교자로 보여지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것만이 복음이라고, 이 길만이 살 길이라고 여겨서 그리한 것입니다. 제가 이 천국의 법도를 구별하지 못하면 저와 함께 여러분은 도매급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맡은 직분자가 교회에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제가 구하고, 찾고, 두드렸는지 여러분은 이 마태복음 7장의 설교에서도 아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을 처음 대하면서 설교에 이 말씀도 어렵고, 저 말씀도 어렵고, 모두 어렵다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제사 이 7장의 전체적인 의미를 바로 볼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 구조가 바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당당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7:1-6절과 7:7-12절의 관계를 보기 원했고 그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제가 무슨 학위가 있습니까? 외국물 조금이라도 먹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앞에 자랑하며 내어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없잖아요. 그런데 유명 신학교수들이 성경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제가 시비를 겁니다. 우리 왕의 말씀이 그러하지 않다고. 제가 신학박사가 되길 원하였던 것보다 저는 더 많이 얻었습니다. 비록 목회의 열매는 매우 적어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지만, 성경을 보는 눈은 너무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제가 샘플입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렇게 주실 것이고, 열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집사님이 특송을 하신 찬송가 제목처럼 ‘하늘 가는 밝은 길’을 여러분에게 열어 보여주실 것입니다. 제가 구하고, 찾고, 두드린 것은 연필 한 자루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는 한 다스를 주셨습니다. 저와 함께 해오신 여러분이 그 증인들이십니다. 

진리의 길을 구하는 것만이 우리 교회의 자랑이라고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다른 것들은 너무 약하고 형편이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교회가 구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좋아요라고 하면서도 이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습니다. 우리 복음을 무슨 음악프로그램이나 연속극처럼 감상만 해요. 아니면 들으면서 자기 마음에는 이익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정말 이해하기 어렵거나, 동의가 되지 않는다면 이 복음이 무엇인지 스스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그런 자세는 나타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팔짱을 끼고 앉아서 맞나, 안맞나 심사를 하고 있거나, 왜 남의 것을 비판만 하느냐는 식으로 투정을 부립니다. 그러지 말고 이것이 무엇인지 목숨을 걸고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을 비난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더욱 분발하고자 하는 뜻입니다. 2013년 표어처럼, 더욱 많이 힘쓰자는 뜻입니다. 자랑으로 지난 여름 요한계시록 사경회를 기억하시면 됩니다. 다른 교인들이 참석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목사님 두 분이 계셨어요. 안타깝지만 일이 있어 하루 만에 내려가셨습니다. 저는 그 일을 다른 의미로 해석했습니다. 각 조의 조장 집사님들이 말씀을 아는 것이 자기들보다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부끄러워 내려간 것이라고요. 저는 이런 착각을 많이 합니다. 여하튼 우리 안에 복음의 권세가 대단하다는 것은 참여한 분들이 모두 인정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입으로만 사랑을 말하지 말고 말씀을 따라 행해야 합니다. 

그럼 본문에서는 무엇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라는 말은 총 강령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율법의 강령입니다. 율법은 이 한 말씀에 이루었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 강령이 무엇입니까?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입니다. 이 말씀은 다른 말로 하면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다’는 말과 같습니다. 또 ‘뭇 사람의 첫째가 되지 말고 뭇 사람의 끝이 되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그렇기에 강령이라고 하는 것이고 황금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왜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라는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그래서 신명기 언어가 중요하다고 거듭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는 것’이 신명기의 축복이었습니다. 신명기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면 보배로운 백성이 되며 열방 중에 으뜸이 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어쩌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상석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명기의 축복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가 아닙니다. 대접을 받은 것과 똑같이 대접을 하는 법도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추수 때가 되어 밭의 수확을 하게 되면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이삭이 떨어진 것을 다 줍지 않거나 밭모퉁이를 남겨 둡니다. 즉 얻은 수확만큼 나누어 주지 않습니다. 

십일조도 그렇습니다. 십을 얻었으면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십의 일만 나누면 됩니다. 이런 율법은 부자 청년도 다 지켰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이 청년을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재물을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다 내어주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에는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부자들이 연보궤 앞에서 자기 여유분을 드리는 것과 과부가 두 렙돈 전부를 드린 것을 비교하는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또한 사도행전의 성령 강림 공동체는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나누었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율법을 따라 살면 안되고 예수의 천국 율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구하여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내 가족과 내 자신이 성공할 것인가? 앞으로 어떻게 계획을 하면 우리 집이 편안하게 살 것인가? 이런 것을 구하십니까? 이런 것을 구하기 위하여 부지런하며 최선을 다하십니까? 근검절약에 앞장 서십니까? 그런 다음 이웃을 그저 남는 여유분을 따라 동정하듯이 자선사업을 하거나 구제하면 됩니까? 

그런 것은 불의한 것입니다. 왜요? 모세의 율법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네 이웃을 네 이웃으로만 사랑하는 것은 모세 율법입니다. 그러나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천국 율법입니다. 이 차이를 아셔야 합니다. 그래야 거짓 가르침에 속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 생각합니까? 그것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불법입니다. 

여러분이 공부하고 직장에서 일하는 것을 통해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저는 세계 제일의 설교가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은 추호도 없고요, 설사 그런 것을 꿈꾼다고 해도 되지 못합니다. 다만 여러분이 말씀에 바로 서기 위할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목사의 전유물이 아니라 여러분의 것으로 돌려드리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주보에 주일 오후 성경본문을 내면서 그저 이해할 정도로 간단하게 요약만 하면 되지 사서 고생을 하며 문제를 만들어 냅니까? 여러분은 별것이 아니라고 쉽게 주보를 버릴지 몰라도 저는 밤새워 문제를 낸 것들입니다. 적어도 목사에게 예의가 있고 제 고충을 이해한다면 그렇게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됩니다. 대입수능 문제 출제 위원들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들은 한 두 달 정도만 고생하면 되지요. 저는 일년 열 두달 고생하고 앞으로도 더 고생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판단을 구합니다. 과연 기독교의 이 가르침이 그렇게 부끄러운 것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그런 가르침에 불과합니까? 세상은 아무리 위대하고 건전한 나라를 만든다 해도 구약의 모세의 나라를 넘지 못합니다. 그게 세상이 추구하는 땅의 나라의 결론입니다. 왜냐하면 그저 이웃을 이웃으로만 섬기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형제로 여깁니다. 주님의 상에 앉은 이 공동체를 주님의 한 몸으로 여깁니다. 주님의 한 몸이자 내 한 몸으로 받습니다. 이 지극히 작은 형제 중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주님에게 한 것임을 압니다. 주님이 이 죄인을 자기 몸을 주셔서 사랑하심으로 자기 몸에 연합시키신 것을 아는 자들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날 사랑하심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와 같이 이 복음을 온 누리에 모든 교회들이 함께 전하였으면 더 소원이 없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 사명을 가져야 합니다. 이 일에 목숨을 걸고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이해하는 것으로 그치면 그건 자신만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복음을 이해하셨습니까? 그러면 남을 대접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모세의 법에도 미치지 못하는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힘을 다해서, 뜻을 다해서,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불법인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착한 남편이어도, 능력이 있는 남편이어도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은 그저 이웃을 사랑하는 자에 불과합니다. 자기 몸처럼 아내를 목숨을 다해 사랑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오늘처럼 눈이 오고 길이 얼어 있으면 멀리서 오시는 분들에게 전화를 드려서 오지 못하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제가 못해요. 예배에 참여하는 수를 불리려고 함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이곳에 오시려는 목적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무엇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려고 하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여러분들을 제가 존경하기 때문에 저는 밤을 새워 준비를 합니다. 

모세의 법도를 구하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 예수의 법도를 구하며 사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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