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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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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5:12-17)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라. (요 15:12-17)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지금 대통령 선거가 진행 중입니다. 선거 때마다 정치 선동가들이 만들어 내는 민족적인 범죄가 한 가지 있습니다. 대립과 갈등 조장입니다. 남과 북, 동과 서, 진보와 보수, 청년과 노년이 대립하게 만듭니다. 평소 멀쩡하다가도 선거 때만 되면 정치인들이 선동해서 대립을 부추깁니다. 영남 호남 부추깁니다. 진보 보수 부추깁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는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나라에 속합니다. 우리 대한민국, 꽤 괜찮은 나라입니다. 정말 많은 점에서 자랑스러운 나라입니다. 세계 10 위권의 경제 대국입니다. 대학 진학률이 세계 최고입니다. 인구비례로 한다면 해외 유학생이 가장 많은 나라입니다. 최단 시간에 가장 발전한 나라, 가장 문명화 된 나라, 가장 질서 잡힌 나라!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나라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불행을 느끼는 이유가 뭘까요? 저는 그것이 경제나 정치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원인은 인간관계의 단절에 있습니다. 최근 어떤 재벌 집안이 형제간 소송을 벌이고 있습니다. 또 다른 재벌 집안은 부모 자식 간에, 남매지간에 소송을 벌이고 있습니다. 돈 때문에 인간관계가 다 끊어졌습니다. 이것이 한국 사회의 표상입니다. 

가족 수가 줄었다든지, 핵가족이 됐다는 것은 불행의 본질이 아닙니다. 숫자가 몇 명이든 인간관계가 끊어진 것이 문제입니다. 남을 의식하지 않는 삶! 남은 없고 나만 존재하려는 모습!  타인 없는 나, 이웃 없는 나, 민족 없는 나, 가문 없는 나. 자기 고립화. 그것이 문제입니다. 인간 사회는 ‘관계’ 속에 존재합니다. ‘나’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너와 나’의 관계 속에서 존재합니다. 이러한 관계가 단절된 사회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수평적 관계를 회복해야 됩니다. 그래야만 지금 당면하고 있는 모든 불행의 문제가 해소됩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12) 서로 사랑하라!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앞서 포도나무 비유를 말씀드렸습니다. 앞서서 줄기와 가지 사이의 연결을 말씀드렸습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의 수직적 관계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지와 가지 사이의 연결도 중요합니다. 

본문은 이 수평적 관계에 초점을 맞춥니다. 관계의 중심은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주님과 우리 사이도 사랑이요, 우리와 우리 사이도 사랑입니다.  
  
여기서 ‘너희’란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 날, 주님을 말씀을 듣고 있는 소수의 제자들입니다. 곧 세워질 교회의 핵심 멤버들입니다. 이 소수의 무리 안에서 먼저 사랑의 관계가 맺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으로 맺어진 공동체입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의 수직적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와 성도 사이의 수평적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보면 수직적 관계만 있고 수평적 관계가 부족합니다. 상당수의 교인들은 오직 “주님과 나 사이” 뿐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단절되어 있어도 하나님만 잘 섬기면 복을 받을까요? 줄기와 가지 사이만 연결되어 있고, 가지와 가지는 끊어져 있어도 괜찮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와 나 사이에만 사랑이 오가고, 나와 다른 성도들 사이는 끊어져도 괜찮습니까? 인간관계가 어떻든지 십일조 잘 내고, 기도만 잘 하고, 성경만 잘 읽으면 형통할까요?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도대체 수평적 관계가 없는 수직적 관계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더러 내 안에 거하라 하셨습니다.(15:7)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하셨습니다.(15:10)  

그런데 그 계명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니라 하셨습니다.(15:12) 결과적으로 주의 사랑 안에 거하는 방법은 성도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우리들 사이의 관계로 귀결됩니다. “서로”라는 말이 얼마나 소중한 말입니까? 우리는 모두가 ‘서로’속에 존재합니다. 서로 주고, 서로 나누고,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돕고, 서로 위로하고. 우리는 서로가 없으면 죽습니다. 생존적으로 필요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서로 생존하고 서로를 살리는 길입니다.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요일3:14-16)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하라, 배루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2:14-17) 

주님은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2)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이 말씀의 뜻은 십자가에 죽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만 하지 말고 나처럼 실천하고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어느 때에...어느 때에...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25:34-40)
  
이웃과 단절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을 수직적인 기복 관계로만 생각한다면 참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바울은 교회를 몸이라 했습니다.(고전12장,롬12장) 

주님은 나무의 줄기와 가지들이라 하셨습니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손과 발을 상상할 수 없고, 줄기에서 잘려 나온 가지들의 생존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서로 사랑해야 됩니다. 오늘 이 시간 끊어진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우선 교회 안에서 시작하세요. 성도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모든 수평적 관계를 연결합시다. 나아가서 모든 관계를 회복합시다. 가족 관계, 이웃 관계, 민족적인 관계. 모든 관계가 회복될 때 위에서 내려오는 축복도 시작될 것입니다.


진정한 친구로서 사랑하라

우리는 서로 얼마나 진한 사랑을 나누어야 할까요?  주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3-15) 

친구도 친구 나름이지요. 통성명이나 하고 겨우 안면이나 있는 사이면서 친구라고 하기도 하고, 돈 있으면 가깝다가 돈 떨어지면 멀어지는 부류도 친구라고 부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친구는 그런 부류의 친구가 아닙니다. 우리 생애에 단 한 사람 얻기 힘든 존귀한 친구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친구하 하십니다. 주님은 친한 친구로서 우리에게 두 가지 소중한 것을 주셨습니다.
  
첫째로, 주님은 우리에게 깊은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친구라고 사귀면서 서로 깊은 내막을 말하지 않는 친구는 친구가 아닙니다. 친한 친구일수록 시시콜콜한 비밀들을 다 나눕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15) 

종은 단순한 주인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시키는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주인이 하는 일을 전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비밀을 아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의 노예가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을 심판하러 가시던 하나님은 길에서 아브라함을 만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고 단순한 나그네로 알고 집으로 강청하여 대접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신령해서 천사인줄 알아보고 대접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접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에 일어날 일들을 알려주셨습니다.  내가 하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길 필요가 있겠느냐! 그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약2:23,대하20:7) 

이사야서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렇게 부르십니다.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나의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사41:8-9)
  
서로 비밀이 많으면 친구가 아닙니다. 비밀이 많으면 가족이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비밀이 많으면 참 부부가 아닙니다. 부부끼리 비밀을 말할 수 없으면 다른데 가서 걸 프렌드, 보이 프렌드 만듭니다. 부모 자식 사이도 마찬가집니다. 비밀을 알려주는 것이 친밀도의 증표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가장 깊은 구원의 비밀, 천국 비밀을 알려주셨습니다. 진정한 친구이기에!  
  
둘째로, 주님은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물론 원수를 위해서까지 목숨을 버리신 분입니다.(롬5:10) 그러니 친구를 위해서야 얼마나 더 목숨을 아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나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누구를 위해 죽었는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크게 희생했는가?’를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친구를 사랑하기 때문에 적지 않은 희생도 감수합니다. 때로는 돈을 손해 봅니다. 친구 때문에 욕을 먹기도 합니다. 친구 때문에 감옥에 가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한 것이 생명을 대신하는 우정입니다. 다윗과 요나단은 정말 친한 친구였습니다. 요나단은 사울 왕가의 왕자였고 다윗은 사울의 政敵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이런 관계를 상관치 않고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습니다.(삼상18:1,3,20:17) 

그는 다윗에게 우정의 표시로써 자신의 겉옷과, 군복과 칼과 활과 띠를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사울은 기회 있을 때마다 다윗을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왕궁에 엎드린 다윗에게 갑자기 창을 던지기도 하고, 숙소에 자객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요나단은 분명히 다윗이 자신의 왕위 계승에 치명적인 방해자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의 성공을 기꺼이 빌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던지는 창을 자신의 몸으로 막으면서 다윗의 신변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후일 사울 왕과 요나단은 길보아 전투에서 함께 전사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목숨을 살리고 대신 죽으려 했던 요나단의 우정을 결코 잊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요나단을 위해서 이렇게 애통해 했습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삼하1:26) 다윗은 자신이 왕위에 있는 동안에 요나단의 가족과 사울의 아들을 자기 밥상에 앉혀 놓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우정의 증표는 희생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기꺼이 죽으셨습니다. 찬송가 487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1)죄 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고함 없는 고로 복을 얻지 못하네. 사람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2)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 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3)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 진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예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우리는 너무 값싸게 사랑을 하려고 합니다. 모든 것을 내 손에 움켜쥐고 남을 사랑하려 합니다. 나는 털 끝 하나 빼앗기지 않고, 손해 보지 않고 남을 사랑하려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진정한 친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솝 우화에 욕심 많은 개 이야기를 아시지요? 이 개가 푸줏간에서 고기를 훔쳐서 입에 물고 개울 가로 왔습니다. 다리를 건너면서 아래를 보니 물속에 개 한 놈이 또 있어요. 그놈도 입에 고기를 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놈 입에 고깃덩어리가 자기가 물고 있는 것보다 더 큽니다. 그래서 그것을 빼앗으려고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아뿔싸! 이게 웬일입니까? 개는 온데 간 데 없어지고 자신은 물에 빠진 생쥐가 됐습니다. 입에 물었던 고기는 물론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들 얘깁니다. 

우리는 자기 입에 물고 있는 고깃덩이는 만족해하지 못하고 남의 소유만 탐냅니다. 이기심의 결과는 파멸입니다. 물질적으로 파산합니다. 정신적으로 파산합니다. 논리적으로 그렇잖아요? 모두가 서로 남의 것만 탐낸다면 항상 뺏고 빼앗기는 악순환만 계속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자기만을 위해 바치는 세상은 지옥입니다. 우리 모두 남을 생각하면서 삽시다. 다른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항상 의식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행동은 상당히 달라질 겁니다. 서로 손해 보지 않으려고 아옹다옹 하지 않고, 서로 남에게 주려고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한다면 얼마나 멋진 세상이 되겠습니까? 희생 없는 곳에 진정한 사랑도 없습니다.
  
교회 천국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내 것을 내놓으세요. 가정 천국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나를 바치세요. 오늘 내가 속한 사회가 낙원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내 것을 내 놓으세요. 무엇이든지 손해 보는 것을 아까워하지 마세요. 도대체 우리가 얼마나 사랑해야 천국이 될까요? 천국은 서로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정도의 진한 사랑이 오가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천국 세상을 만들고 싶다면 십자가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리신 주님의 희생처럼 희생을 기꺼이 하셔야 됩니다. 우리가 서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사랑하게 될 때, 내가 속한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가정이 달라지고, 교회가 달라지고, 사회가 달라질 것입니다. 이 달라질 날을 기대하면서 서로 진정한 친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다! “서로 사랑하라!  진정한 친구로서 사랑하라!”는 주제에서 갑자기 선택의 주제로 돌아갑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16) 주님이 선택자시고 우리는 피택자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신앙의 출발점을 자기 자신에게 두어 왔습니다. 내가 종교를 선택했다! 내가 기독교를 선택했다! 우연히 기독교를 알게 됐다! 누가 강권하는 바람에 억지로 시작한 것이 바로 내가 예수를 믿게 된 동기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이런 생각을 정면으로 부정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민이 어디서 시작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 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누군지 여호와가 무엇을 행하신 분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는 다만 우상을 제조하고 섬기던 일개 미신 숭배자에 불과했습니다.(수24:2) 

하나님은 그런 아브람을 부르셔서 자신을 알리시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만드셨습니다. 선택의 개념은 구약에 계속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버리고 이삭을 택하시고,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12지파 중에 유다 지파를 선택하시고, 이새의 아들들 중에 다윗을 선택하시고, 세상 만민 중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택하시고 애굽에서 구출하셨습니다.  
  
신약에도 선택의 사상은 풍부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7)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게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17:24) 

“내가 너희 열 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요6:44) 

사도 바울은 이 선택을 더 풍성히 설명합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갈1:15)
  
그러면 이러한 선택과 사랑하라는 교훈이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요? 주님은 선택을 말씀하심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설명하십니다. 선택이란 곧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의 행위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하든지 말든지 하나님은 강제로 우리를 택하셔서 자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두 가지 목적 때문입니다. 첫째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코자 하심이고, 둘째로, 사명과 직분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순간부터 선민의 특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모든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온 세상 사람들의 복의 근원이 될 책임도 부여받았습니다. 바로 복음 전파자로서의 책임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그 선택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16) 첫째로는, 떨어지지 않는 과실을 많이 맺게 하려는 것이요, 둘째로는, 하나님과 상통하는 사람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본문에서 열매란 좁은 의미에서 복음 전파로 얻는 새로운 영혼들, 다시 말하면 전도의 열매일 수도 있습니다.(4:36-38)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바울이 말한 의의 열매, 성령의 멸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빛의 열매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열매를 맺게 하는 것이 선택의 목적입니다.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한다는 말은 기도 응답 차원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통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완전히 상통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100% 알고, 그럼으로써 정당한 것을 구하고 구하는 것은 거절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영으로 완전히 교통하는 관계를 이룹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이 귀절에는 ‘너희’와 ‘내 이름’ 과 ‘아버지’란 명칭이 등장합니다. 곧 우리와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가 함께 상통되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신앙의 완전한 성숙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완전히 도달해 있음을 의미합니다. 막힘이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 이것은 우리에게 최상의 축복입니다. 바로 이런 최고의 축복에 이르게 하시려고 주님은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제멋대로 살다가 지옥에 떨어지도록 놔두지 않으시고, 강제로 붙잡아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안팎으로 자녀다운 능력과 축복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은 내가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선택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선택하시고 자신을 알려주시고 영원한 생명과 축복을 주셨습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의지적 결단입니다. 그 결단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17절 말씀은 다시 결론으로 돌아갑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함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함이로라.”(17) 

하나님이 우리를 강권적으로 사랑하심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의 의지를 가지고 서로 사랑해야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을 받은 자로서의 피할 수 없는 의무입니다. 정말 사랑하고 싶습니까? 사랑은 의지요 결단입니다. 주님처럼 상대의 형편이 어떻든지, 상대의 반응이 어떻든지, 상관 마세요. 오직 내 의지로 선택하고, 결단하고, 사랑하세요. 사랑의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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