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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예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마 1: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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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 (마 1:18-25)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가 쓴 ‘어린 왕자’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린 왕자가 여우에게 묻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뭔지 아니?” 그러자 여우가 대답합니다. “글쎄요. 돈 버는 일? 밥 먹는 일?” 어린 왕자는 이야기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각각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순간에도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 같은 마음이 머물게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거란다.” 

인간관계의 핵심은, 어떻게 하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가의 문제일 것입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는 것, 그것이 우리가 인간관계를 맺으면서 늘 고려하는 사항인 것을 보면 말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기 위해 고민합니다. 부부가 잘 사는 비결도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얻고, 아내는 남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면 그 부부는 행복할 것입니다. 치열한 직장 생활에서도 상사와 동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합니다. 마음을 얻기 위한 노력은 이렇듯 눈에 보이는 관계에서만이 아닙니다. 대기업들이 TV와 신문에 광고를 내는 이유도 자신들의 제품을 소개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기 위함입니다. 

스스로 깨닫기 전에는 돌아가지 않는 것이 인간입니다. 

오늘은 대림절 네 번째 주일입니다. 하나님은 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을까요? 여러 가지 대답이 있겠습니다만, 오늘은 이렇게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고, 우리와 인격적인 만남을 갖기 위해서라고 말입니다. “너희들이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너희들의 마음을 받기 원한다.” 이렇게 이야기해 주고 싶으셔서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꾸만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떠나갑니다. 창세기부터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 뜻대로, 내 욕심대로 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나 혼자 살아도 괜찮게 살 수 있다. 이제 하나님의 도움은 필요 없다”고 선언한 것이 인간 죄악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나타난 탕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버지, 내게 재산만 주시면 당신의 아버지로서의 역할은 끝납니다. 아버지 없이도 나는 내 인생을 멋지게 꾸려 나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아들의 모습을 아버지는 지켜보았습니다. “얘야, 돌아오너라. 네가 아직 철부지라 그렇지 본래는 나쁜 아이가 아니지. 너는 착한 아들이야. 그러니 이 아버지의 마음을 좀 알아다오.” 아버지는 절규하면서 기다립니다. 

그런데 탕자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아버지가 없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아버지의 잔소리가 없고, 간섭이 없는 것이 좋았습니다. 모든 것이 뜻대로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순간이었습니다. 곧 인생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졌던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돈도 떨어지고 건강도 잃고, 찬란한 줄로만 알았던 인생의 허무함을 경험했을 때 비로소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한순간도 아들을 잊은 적 없습니다. 아들이 떠나는 그 순간부터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그저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아들이 돈을 달라고 했을 때, 아버지는 돈을 주었습니다. 아들이 집을 나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말리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버지의 마음에 아들에 대한 사랑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아들이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스스로 마음을 결정하지 않으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스스로 알지 못하면 결코 그의 마음이 돌아오지 않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본래 그러합니다. 스스로 잘나간다고 생각될 때 하나님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인생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는 젊은 시절에는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일들을 겪어 인생의 깊이를 알게 되면,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높고 낮음과 인생의 한계를 알게 되면, 아버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돌아온 탕자처럼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돌아오지 않는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움직이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스스로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직접 움직이기 시작하심을 알 수 있습니다. 집 나간 아들이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 통에 자신의 입을 갖다 댈 만큼 낮아졌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낮아지고 비참해졌습니다.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거대한 제국에 억눌린 채 살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종살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애굽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앗수르의 침략으로 북이스라엘이 파멸당하고, 바벨론에 의해서 남유다도 붕괴되었습니다. 남은 백성들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습니다. 다시 거대한 로마제국의 억압 밑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그 세월들이 길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랜 고통의 세월을 지내온 이스라엘을 보시고 이제 새로운 구원의 역사를 시작할 때가 왔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의 모형입니다. 이스라엘은 별 볼일 없는 작은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들을 택하셔서 “내가 네 하나님이 될 것이다. 너희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내 백성, 내 사랑’이라고 부르실 만큼 사랑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모형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렇게 큰 사랑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자주 거역하고 자주 배반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적대한 모형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큰 사랑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거부하는 모습이 우리의 모습과도 같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하나님의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시려고 합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이 필요로 하신 것은 돈도, 능력도, 세상의 권력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 하나님은 그 사람이 필요하셨습니다.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열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과 마리아에게 찾아가셨습니다. 

두 사람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보통 인물들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기 아내가 아이를 낳는데 여관방이 없다고 마구간에 들어가는 남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만큼 가진 것이 없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이겨내는 강한 정신력과 영적인 건강함이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로부터 “처녀가 임신하리라”는 충격적인 말을 듣고 처음에 거절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이며, 성령으로 임하는 것이라는 말에 그 특별한 말씀을 받을 준비를 합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약혼한 여자가 자기와는 상관없이 아이를 낳게 되었다는 이야기에 처음에는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더 이상 만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의 음성을 듣게 되었을 때, 요셉은 마음으로부터 그 일을 용납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믿음의 사람들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의 마음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려고 했던 하나님의 소원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을 얻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사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우리를 지배하고 억누르고 벌주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려주고 싶어서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연애를 해 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뜁니다. 같이 있는 것이 좋고, 헤어지면 금방 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함께 있기 위해서 결혼을 합니다. 결혼하신 분들은 결혼식 날이 기억나십니까? 신랑이, 사랑하는 신부가 너무 예쁘고 좋아서, 보고 또 보던 그 마음. 그것이 바로 신랑의 마음입니다. 

저는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표현이 너무 실감나서 ‘참,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실까? 내가 하나님께 그렇게 소중한 존재일까?’ 생각하며 감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사야 62장 5절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이사야 62:5) 

참 멋진 표현 아닙니까? 마치 신부 만나기를 고대하는 신랑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에 푹 빠진 신랑이 신부를 넋 놓고 바라보는 모습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바라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스바냐서 3장 17절에는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냐 3:17)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며 기쁨에 충만해져 노래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눈물겹도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절절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마리아와 요셉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주시기 위해 말입니다. 그런데 왜 마리아와 요셉이었을까요? 그리고 왜 낮고 낮은 말구유일까요? 대답은 한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지고 있는 삶의 문제에 동참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절망, 인간의 아픔과 슬픔, 가난과 죽음의 문제에 참여하기를 원하셨습니다. 보통의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탄식하는 문제들에, 보통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에 하나님이 연대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그 경험들을 직접 해보도록 하십니다. 인간의 상처들을 직접 당해보고, 인간의 눈물을 흘려보도록 말입니다. 즉, 예수님이 슬픔과 눈물의 자리를 통과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몸이 필요하셨습니다. 아니 스스로 인간이 되셨습니다. 

스스로 낮아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 있는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때로 내 자유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아니 스스로 자유를 유보하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를 제한시키거나 때로는 아주 축소해 버립니다. 상대방과 같은 눈높이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처녀 때 그렇게도 아름답던 여인이 결혼해서 엄마가 되면, 자기의 아름다움을 돌보기보다 어린 아이를 사랑하고 키우는 일에 모든 관심과 애정을 쏟아 붓습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스스로 자기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가 낮아지는 대신 상대방은 높아지기를 원하는 것, 이것이 사랑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하늘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담아낼 수 없다고 솔로몬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높음을 자주 노래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우주의 우주로도 담아낼 수 없는 하나님께서 이 지구촌에 오셨습니다. 지구촌에서도 팔레스틴, 베들레헴이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 오셨습니다. 소와 양의 똥과 오줌으로 범벅된, 냄새나는 마구간에 오셨습니다. 그것도 장성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어리고 연약한 아기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처럼 된 것입니다. 가장 비천하고 낮은 자리,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 슬퍼하는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쓰레기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 “너는 소중한 존재야”라고 이야기해 주기 위해서 그렇게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을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외로움일 것입니다. 허허벌판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은 외로움을 경험한 적 있으십니까? 아무도 내 곁에 없는 것, 아무도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아무도 나를 위로해 주지 않는 것,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것, 믿었던 모든 것들이 나를 배반하는 것, 인생의 무대에서 엑스트라처럼 여겨지는 것 등으로 외로워본 적 없으십니까? 이러한 외로움이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죽음까지 생각하게 합니다. 

바로 이런 인간의 외로움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 값지고 소중한 존재란다. 너는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고, 사랑스러운 존재란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복음 1:23)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다른 이름은 ‘임마누엘’입니다. 구원자와 임마누엘이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어린 아이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났는데 어머니도 아버지도 죽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아이를 고아라고 합니다. 이보다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사랑해 줄 사람 없이 혼자입니다. 그것은 어린 아이에게 파멸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 옆에 어머니가 있고 아버지가 있으면, 그것은 어린 아이에게 구원이고, 생명입니다.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그것이 곧 파멸이고, 심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그것이 곧 생명이고,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그 이름을 부르며 살아야 합니다.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실 정도로 우리 모두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얘야, 너는 별 볼일 없는 존재가 아니야. 너는 인생의 엑스트라가 아니야. 너는 네 인생에 주인공이란다.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하는 소중한 존재야.”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우리가 반드시 들어야 할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 무엇을 의지하면서 지금까지 살았느냐. 돈이 네 인생의 목표냐? 세상의 명예와 권력이 네 인생의 목표냐? 네가 그동안 사람을 얼마나 많이 의지했느냐? 하지만 그럴 때마다 네가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지 않았느냐. 사람에게 네 인생의 신뢰를 두어 네가 얼마나 많은 슬픔과 고난을 경험했느냐. 이제는 나를 의지하고 나를 신뢰하라. 아들까지 내어 준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믿고 네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라.”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은 우리의 마음을 열어두라는 것입니다. 숙인 고개를 들고, 움츠러든 가슴을 펴고, 이제는 주님과 함께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나가라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 이름,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입니다. 평생 이 예수님과 함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새롭게 열어가는 귀한 믿음의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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