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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십계명의 재해석 (출 2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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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의 재해석 (출 20:1-17)

오늘은 2012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1년의 마지막 주일이기 때문에 1년을 마무리하는 말씀이 뭐가 좋을까 하고 기도를 하는데 주님께서 십계명에 대한 감동을 주셔서 ‘십계명 재해석’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지침 즉 신앙생활의 가이드라인으로 율법이 주어졌습니다. 율법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십계명입니다. 이 십계명은 예수님 안에서 재해석 되었지만 여전히 신약교회 성도들의 삶의 지침이며 신앙생활의 가이드라인입니다.

십계명에 대한 오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십계명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 다는 생각입니다. 이 오해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의 오해인 것 같습니다. 십계명은 믿는 사람들의 생활의 지침은 되지만 구원의 조건은 되지 못합니다. 사람이 부모의 자녀가 되는 것은 그가 어떤 생활을 하는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가 되는 것은 행위와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의 반응으로 받는 것이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롬 3:28에서 하나님의 의를 가르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오해는 십계명은 율법이니 은혜시대에 사는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다는 오해입니다. 이 오해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분명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마 5:17,18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신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율법은 천지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 받은 우리들에게도 십계명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목회자에 대해서 말할 때 큰 목회자 작은 목회자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목회를 얼마나 크게 하느냐 작게 하느냐에 대한 판단일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는 목회자는 교회가 크고 성도수가 많은 목회자라고 말하지 않고 율법을 지키면서 가르치는 목회자라고 말씀합니다. 

마 5:19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목회자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계명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계명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럼 오늘 설교에서 주는 메시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구원 받은 백성들에게 계명이 필요하다.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백성들에게 삶의 지침으로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사건이다. 거듭나는 것이 너무나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거듭난 날짜와 시간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일단 거듭났으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이단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양의 탈을 쓴 이리입니다. 그들은 지옥 불못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무리들도 함께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과 반대로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래서 1년에 한 번씩 생일을 챙깁니다. 하지만 자기가 태어난 날짜와 시간을 경험적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모가 그날 그 시간에 태어났다고 하니까 생일을 챙기는 것이지 자기가 엄마 배속에서 나오던 것을 기억해서 생일을 챙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거듭나는 것도 그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았다고 막살면 안 됩니다. 구원 받기 전에는 마귀의 종이었기 때문에 마귀가 이끄는 대로 살았더라도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더욱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소속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면 그 때부터 법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때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법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의 백성이 되면 그 때부터는 대한민국의 법이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한민국의 법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법이 없고 백성들이 법 없이 마음대로 산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까요? 제가 볼 때는 인간의 악한 속성 때문에 나라꼴이 엉망이 됩니다. 안 봐도 훤하지 않습니까?

법이 없다면 힘이 좋은 사람은 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힘이 약한 사람들을 잡아서 자기 일을 대신 시킬 것입니다. 만약 힘이 약한 사람이 말을 듣지 않으면 가차 없이 폭력을 행사할 것입니다. 힘이 좋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아무 가게나 가서 자기가 필요한 것을 그냥가지고 갈 것입니다. 법이 없다면 사회가 엉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도 무너질 것입니다. 

가정생활을 하면서 배우자가 맘에 들지 않을 때 법이 없다면 쉽게 가정을 깨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강제적으로 데리고 살려고 할 것입니다. 법이 없다면 도로도 엉망이 될 것입니다. 거리마다 자동차가 뒤엉켜서 주차장을 방불케 할 것이고 사고도 많이 날 것이고 운전자들끼리 싸움도 많은 것입니다. 법은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도 우리를 구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켜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는 분명한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이고 그것이 십계명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의 가이드라인이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가이드라인이 잘못되면 기도를 하고 환상을 보고 음성을 들어도 신앙생활 잘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제 마음대로 응답을 받고 제 마음대로 해석을 합니다. 마귀는 그것을 이용해서 엉뚱한 응답을 줍니다. 성경은 아니라고 하는데 자기는 보고 들었다는데 어떻게 합니까? 

신앙생활의 가이드라인이 분명한 사람이 볼 때는 분명히 아닌데 자기는 하나님께 응답 받았다고 확신하고 그 잘못된 확신대로 행합니다. 사실은 마귀에게 속고 있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의 가이드라인이 잘못된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응답을 받고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는 것이 신앙생활의 독이 될 수 있습니다.

구원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신앙생활의 지침이 되는 십계명을 붙잡으십시오. 십계명을 여러분의 삶의 
가이드라인으로 삼고 사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것입니다.


2. 십계명은 예수님 안에서 재해석 되어야 한다. 

마 5:17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은 율법을 폐하신 일이 없습니다. 오히려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계명 중에서 몇 가지를 재해석해주셨습니다. 

마 5:21,22은 십계명 중에서 제6계명의 재해석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구약에서는 사람을 죽여야만 살인이었는데 주님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것도 살인죄이고 형제에게 함부로 말하는 것도 살인죄라고 재해석 해주셨습니다. 여기서 ‘라가’라는 말은 ‘멍텅구리, 바보’라는 말입니다. 형제를 보고 ‘미련한 놈, 멍텅구리, 바보’라고 말해도 살인죄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마 5:27, 28에서는 간음죄인 제7계명에 대해서 재해석해 주셨습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간음은 행동까지 가야 간음이 아닙니다. 음란한 생각만 해도 간음한 것입니다. 주님이 완전하게 하신 계명은 우리의 행동만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도 지켜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의 행위만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까지도 지키시기를 원하시는데 많은 성도들이 은혜라는 미명 아래서 너무나 쉽게 십계명을 무시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혜 받았다고 하면서 아주 쉽게 거짓말을 합니다. 잠시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아주 쉽게 거짓말을 합니다. 그래놓고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합니다. 그 거짓말에 대한 회개도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계명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신약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십계명은 불필요한 족쇄가 아닙니다. 오히려 구약시대 사람들보다 더욱 힘써 지켜야 할 삶의 지침입니다.
 

3. 계명에도 우선순위가 있다. 

십계명에서 1-4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관련된 계명이고, 5-10계명은 이웃과의 관계에 관련된 계명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은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관계도 중요하고 이웃과의 관계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도 중요하고 이웃과의 관계도 중요하지만 분명한 우선순위는 있는 것입니다. 
마 22:37-40을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한 계명이 제일이고 사람을 향한 계명이 제이라고 정리해 주셨습니다.

세상 법을 봐도 법마다 비중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서 교통법규를 어긴 것과 살인한 것은 처벌이 다릅니다. 교통법규를 어기면 몇 만원 과태료를 내면 끝이지만 살인죄는 몇 년 동안 감옥생활을 해야 합니다. 죄질이 나쁘면 무기 징역 혹은 사형도 당하는 것입니다.

비중이 큰 죄를 범하면 그 사람이 다른 죄를 범한 일이 없고 좋은 일을 많이 했어도 큰 벌을 받는 것입니다. 교통법규를 어긴 일이 한 번도 없고, 날마다 골목 청소도 했고, 사회적 약자들을 잘 도와주었던 사람이라도 살인죄를 범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행한 선한 일과는 상관없이 살인죄에 대한 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법칙이 신앙생활에도 적용이 됩니다.

1-4계명이 5-10계명 보다 큰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과 관련된 
5-10계명을 잘 지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관련된 1-4계명을 지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들이 볼 때는 참 좋은 사람 같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악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1-4계명은 잘 지키는데 5-10계명은 잘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사람이 볼 때는 앞 사람보다 악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앞 사람보다 선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계명의 우선순위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계명과 사람을 향한 계명 모두를 잘 지켜야 하지만 우선순위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4. 복을 받느냐 심판을 받느냐는 계명대로 사느냐 살지 않느냐로 결정되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에서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다보니 놓치고 있는 것이 바로 행함입니다. 구원은 은혜와 믿음으로 받지만 축복은 행함으로 받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믿음 안에 들어오면 축복 안에 들어오는 것이지만 계명을 어기는 것은 그 축복을 발로 차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계명은 목장의 울타리와 같습니다. 양이 울타리 안에 있으면 주인이 주는 꼴을 먹으며 안전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양이 울타리를 넘어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가버리면 어떻게 될까요? 그 양은 주인의 보호도 받을 수 없고 주인이 공급하는 꼴을 먹을 수도 없습니다. 그 양은 결국 다른 짐승의 밥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계명 안에 있으면 복이 되는 것이고 계명을 버리면 저주를 받는 것이 이런 이치입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신약교회를 예표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 많은 영적인 진리를 발견하게 되고 신약시대의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됩니다.
출애굽은 우리의 구원을 예표합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복을 누린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죽었고 가나안에 들어갔어도 저주 받아서 망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광야에서 죽거나 가나안에서 저주 받아 망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계명을 버리면 저주를 받는 이유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는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렘 16:11을 보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는 저주를 받는 이유 중에 하나가 율법을 버렸기 때문이고 율법을 버린 것이 곧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 
조상들이...나를 버려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음이라” 계명을 버리면 하나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삼상 15:26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받는 이유를 말합니다.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선지자를 통해서 사울이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그 계명을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도 사울을 버린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생명과 사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명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말씀을 선택하는 것 즉 주의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생명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망은 하나님과 단절되는 것을 말하고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생명이 무엇입니까? 요 6:63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영이 무엇입니까? 생명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주님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주님의 말씀,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생명을 선택하는 것이고 영적인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계명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계명대로 살려고 애를 쓰십시오. 그래야 저주를 받지 않습니다. 그래야 복을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 28장은 앞부분에서는 복을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하고 뒷부분에서는 저주를 받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해줍니다. 복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고 저주를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계명에 순종하면 복이고 불순종하면 저주입니다.

요한일서에는 의외로 계명에 관한 말씀이 많습니다. 요한일서를 잘 읽어보면 계명을 알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분의 계명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일 2:3,4입니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4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계명을 무시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요일 3:22을 보면 무엇이든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받게 되는 비밀을 말해줍니다.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주의 계명대로 사는 사람이 기도 응답을 받는 것입니다.

요일 3:24을 보면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성의 최고의 단계는 주님과 하나 되는 합일의 단계입니다. 그런데 그 합일에 들어가는 길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요일 5:3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만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떠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무시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깁니다. 계명을 버린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계명을 버린 사람은 기도 응답을 받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없습니다.주의 계명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시 112:1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를 찬송하라” 어떤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사람에게 어떤 복이 임합니까? 시 112:2,3입니다.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3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후손이 땅에서 잘 됩니다. 후손이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공의가 영원합니다. 특히 대환난 시대에 승리하려면 믿음뿐만 아니라 계명도 지켜야 하는 것이다. 

계 14:12에 보면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계명도 지키는 사람이 대환난 시대에 승리합니다.


5. 하나님의 계명은 한 마디로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율법을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완전하게 하신 율법은 사랑입니다. 롬 13:10입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요 13:34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율법을 요약한 
것이 십계명입니다. 그리고 십계명을 요약하면 첫째는 하나님 사랑이고 둘째는 이웃 사랑입니다(마 22:37-40).

사랑하면 다 해결 되고 다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볼 때 신앙생활의 비밀번호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다 열립니다. 어느 교회에는 매주일 일본에서 오는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본에서 오려면 경비가 얼마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요? 충분히 교회에 오는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사랑하니까!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목회자를 사랑하니 거리도 문제가 되지 않고 시간도 

문제가 되지 않고 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이 다 극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밑에서 왕자처럼 채색옷을 입고 살다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서 종살이를 했습니다. 종살이 중에 주인마님의 유혹이 있었는데 그 유혹을 물리쳐서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에게는 종살이도 그리고 억울한 옥살이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왜요?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다른 이유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니까 종살이의 고난도 옥살이의 억울함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상대를 사랑하지 못하면 문제가 되지만 사랑해버리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못하느냐지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시험이 찾아올 때가 많습니다.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사람도 진리에서 떠나게 만들고 멸망시키려고 시험을 줍니다. 시험은 크게 3가지로 옵니다. 사람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그리고 육체의 질병을 통해서 옵니다. 이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충만하면 어떤 시험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무너지는 것입니다.

왜 시험에 드는지 아십니까?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에 시험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어떤 시험도 이길 수 있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 때문에 사자 굴에 들어가야 하는 시험을 받았지만 사랑으로 이겼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 자기를 감시하는 대적들의 눈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사자 굴에 들어가서 사자의 밥이 되는 것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시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니엘을 무너뜨릴 수 없었습니다.

주님에게도 십자가는 시험이었습니다. 주님께서도 할 수만 있다면 십자가를 지고 싶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아버지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뜻을 받아드리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또 우리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들을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사랑하시니 십자가도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합시다. 그리고 사랑의 부족함 때문에 애통합시다. 사랑이 해답입니다. 사랑하면 다 해결됩니다. 사랑하면 승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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