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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족장들의 언약 신앙 (창 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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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장들의 언약 신앙 (창세기 28:1-5)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대를 이어 가문을 세웠던 시기를 가리켜 이스라엘의 족장시대라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하신 약속은 땅과 자손의 복이었고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이 복을 전달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전에 불렀던 축복송 ‘당신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축복의 통로 당신을 통하여서 열방이 주께 돌아오게 되리’라는 가사는 이런 배경을 담고 있습니다.  맨 처음에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도 주신 은혜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라는 사람을 택하여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고 그의 후손들을 통해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유다 지파 다윗의 후손으로 세상을 구원하실 구원자가 나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땅과 큰 민족과 창대한 이름,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약속은 이렇게 그의 혈통을 따라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이 놀라운 언약이 이루어질 그날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았던 족장들의 신앙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족장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방식에 서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신앙의 가문을 시작한 개척자라고 한다면 이삭과 야곱은 부모의 신앙을 이어받은 모태신앙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서로 다른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가족 중에 나 홀로 예수를 믿는 사람도 있고 몇대를 걸쳐 예수를 믿는 모태신앙인도 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세 족장들이 모든 신앙인들을 대표할 수 없지만 크게 아브라함 형, 이삭 형, 야곱 형으로 나눌 때 나는 어떤 유형의 신앙인에 해당할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의 첫 세대 아브라함은 다분히 저돌적이며 우직한 유형의 신앙인입니다.  조카 롯이 포로가 되었을 때 즉시 사병을 동원하여 기습작전을 펼쳐 조카의 가족들을 구출하였습니다.   롯이 살고 있는 소돔 성이 멸망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 즉시 항의하듯 간절히 매달리며 그 성을 멸하지 말아달라 간청합니다. 어쩌면 아브라함의 이런 저돌적인 성품 때문에 하나님의 부르심에도 즉각 반응하였고 아버지와 가족들을 적극 설득하여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추진력을 발휘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도전과 모험심 없이 개척자의 길을 걷기 쉽지 않고 우상숭배로 가득한 가문에서 개종의 첫 주자로 나서기 쉽지 않습니다.  불신 집안에서 제일 먼저 예수를 믿기 시작한 분들은 아브라함의 심정을 더 잘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결단과 어떤 결정적인 계기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은 확실한 은혜 체험과 뜨거운 열정이 있는데 아직 설익은 신앙 때문에 시행착오를 자주 겪는 약점도 있습니다.  목표를 향해 돌진하다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불분명할 때 자신의 판단을 앞세워 우선 일을 저지릅니다.   

아브라함도 처음부터 완숙한 신앙인은 아니었습니다.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다 아내를 누이라 거짓말로 속인 일은 좋은 예입니다.   물론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약속의 땅을 아주 떠나는 것이 아니고 기근을 피해 잠간 다녀오려는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사람의 생각을 앞세워 ‘이런 것 쯤이야’하는 방심에서 나왔고 이것 때문에 아내를 누이라 속이는 거짓말을 했다가 정말로 아내를 잃을 뻔한 큰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와 10년을 기다려도 아들 소식이 없을 때 하갈을 취하여 아들을 얻으려 한 것은 아브라함의 실수 중에 가장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 역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떤 식으로든 대를 이으면 된다는 생각을 앞세운 결과였습니다.  그것 때문에 발생한 심각한 가정불화는 두고두고 아브라함의 마음을 힘들게 하였으며 비싼 값을 치르고 배운 교훈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은 것은 그 믿음 때문입니다.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지만 그때마다 찾아오셔서 약속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치 않고 믿었습니다.  조카 롯에게 좋은 땅 선택할 권리를 양보하는 일이나 소돔 왕이 제시한 동맹을 깨끗하게 거절한 일 등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뒷배경이 되어주신다는 믿음에서 나온 배짱이었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명령은 제정신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무리한 요구였습니다.  이 아들을 통해 후손의 복을 주시겠다 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행동으로 옮긴 아브라함의 위대한 신앙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고 아브라함의 신앙은 그 어느 때보다 무르익은 성숙함이 드러났습니다.

그의 인생은 마치 굵직하고 뚜렷한 선과 같습니다.  굵은 붓으로 힘차게 쓴 휘호처럼 그의 인생걸음은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목표를 향해 거침 없이 걸어간 대장부의 삶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함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 비유에서 예수님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으로 묘사하십니다.  세리장 삭개오를 가리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칭찬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혈통과 상관 없이 구원 받은 모든 성도를 가리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부르게 되었으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 이름이 창대하게 된 믿음의 조상입니다.

두번째 세대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에 비해 상당히 조용한 사람입니다.  모태신앙이며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하였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을 끔찍하게 여기는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늦둥이로 자란 탓에 부모의 과보호 속에 자랄 가능성이 컸습니다.  어머니 사라는 이스마엘에게 이삭의 분깃을 빼앗길까 두려워 15살 정도 밖에 안된 이스마엘을 엄마 하갈과 함께 광야로 내쫓을 정도로 철저한 아들 보호주의자였습니다.  이삭은 이런 환경에서 성장하여 아버지의 가업과 가문을 이을 준비를 하였으니 다른 이들보다는 쉽게 기반을 마련하고 출발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이삭의 신앙은 어땠을까요?   아버지의 삶을 곁에서 지켜 본 이삭은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여러 차례 목격했을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척척 해결하였고 가나안 지역에서 괜찮은 가문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직간접 체험과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이삭은 신앙적인 면에서도 특별한 갈등의식이 없이 아버지가 믿는 하나님을 믿고 섬겼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버지가 아들을 결박하여 제단에 올리고 칼을 들어 치려는 순간에도 자신을 순순히 내맡기는 이삭의 태도는 아버지의 믿음 이상으로 특별하지 않고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삭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뿌리 깊은 신앙인입니다.  보통 모태신앙인들이 미지근한 신앙 때문에 고민을 많이 하지만 어려서부터 다져온 뿌리가 든든한 신앙은 위기 속에 이렇게 빛이 나는 때가 있습니다. 

이삭은 평탄한 성장과정을 겪어서 그런지 성격도 차분하고 여유가 있으며 평화를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돌로 막아 버리고 못쓰게 할 때 맞서 싸우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겨 새 우물을 팠습니다.  그런데 또 그 우물을 빼앗을 때 다투지 않고 다른 장소로 옮겨 우물을 파면서 그들과 정면충돌하지 않고 계속 양보하고 맙니다.  그제서야 블레셋의 왕 아비멜렉이 이삭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제 발로 찾아와 평화조약을 맺습니다.  이삭은 피흘리며 싸우는 것보다는 양보하여 평화를 얻고 후에 더 좋은 결과를 얻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보호를 신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분쟁의 요소가 생겼을 때 이삭의 평화주의를 본받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보처럼 무조건 양보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불필요한 다툼을 피하고 온유한 마음으로 평화를 도모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복을 얻기 바랍니다.  작은 이익과 자존심을 지키려고 다투다 쌍방이 더 큰 손해를 입는 불필요한 소모전을 벌이는 것보다는 이삭의 양보가 더 지혜롭습니다.  이삭은 온유한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딱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삭의 마음에는 14살 더 많은 이복 형 이스마엘에 대한 두려움이 늘 있었습니다.   칼을 잘 쓰는 형이 언젠가 장남의 권리를 되찾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입니다.   이스마엘에 대한 경계심을 늦출 수 없었던 이삭은 혹시라도 닥칠 위기에 가문을 지키는 길은 활을 잘 쏘고 사냥을 즐겨하는 에서의 남성다운 힘에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평소에도 사냥감으로 별미를 만들어 주는 에서를 야곱보다 더 좋아했던 아버지 이삭은 나이 많아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에서에게 마음이 더 끌려 장자의 축복을 그에게 주려고 했었다.   

그러나 야곱이 속임수로 그 축복을 가로챈 다음에 에서가 왔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심히 크게 떨었습니다.  에서가 제공하는 맛있는 사냥고기를 먹고픈 마음과 인간적인 생각으로 하나님의 뜻을 어길 뻔한 어리석음을 깨닫고 깜짝 놀란 것입니다.  정신을 차린 이삭은 동생에게 축복을 빼앗긴 억울함에 통곡하며 매달리는 에서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야곱에게 선언한 복을 번복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외삼촌 집으로 피난 갈 때 다시 한번 아들을 축복하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재확인시켰습니다.   이삭은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을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었고 그 복을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이어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의 일생을 선으로 표시한다면 굴곡이 없이 가늘고 곧은 직선이 아닐까요?   아버지 아브라함처럼 굵직한 업적을 남긴 것도 없고 파란만장한 인생을 산 것도 아니라 크게 부각되지 않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이삭의 온유한 성품과 곧은 믿음은 위대한 신앙을 계승하는 족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 의심이 없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제물이 되기까지 절대적인 순종을 보였던 이삭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조용하지만 강직한 믿음을 소유한 모태신앙이었습다.   

셋째 세대 야곱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야곱도 삼대째 믿는 모태신앙인이었지만 이삭과는 다른 유형의 모태신앙인입니다.   쌍둥이 형제 에서도 모태신앙인었이지만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세상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 일찍부터 야곱과는 다른 길을 걸었던 불신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의 집안에서 자랐지만 에서처럼 도중에 믿음을 버리고 세상을 향해 떠나가버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오늘 우리 교우들은 신앙의 스타일은 서로 다르지만 최소한 에서의 길을 걷는 분들이 아님을 감사합니다.   

제 두 남동생들이 두살 터울인데 어릴 때 둘째가 막내보다 체력이 달려 몸싸움을 하면 막내가 항상 형을 뒤집어 놓곤 했고 꾀를 부려 형을 이겨먹으려 한 적이 많았습니다.  이런 광경을 눈여겨 보시던 부친이 막내 아들을 두고 ‘저 녀석은 하는 짓이 꼭 야곱이야’ 하셨습니다.   엄마 뱃속에서도 다투었고 태어날 때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나온 야곱은 간발의 차이로 동생이 되어버린 운명을 원망하면서 어떻게든 형을 누르고 장자의 복을 쟁취하려는 집념으로 반평생을 살았습니다.

어쩌면 동생이 형보다 더 큰 사람이 될 것이라 예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작은 아들 야곱에게 귓속말로 소곤소곤 알려준 어머니의 영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의 장자명분을 빼앗은 야곱은 기여코 어머니와 합작하여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는 아버지 이삭을 속여 장자의 축복마저 가로채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리브가와 야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비열한 속임수로 얻으려 했던 행동에 대한 엄청난 댓가를 지불해야만 했습니다.   

목적이 선하면 과정이야 어떠하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며 반칙과 변칙을 일삼는 기독교인들은 야곱의 일생을 통해 꼭 기억해야 할 진리를 배웁니다.  선한 목적은 선한 방법으로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시간이 걸리고 기다리는 고통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그날을 바라보며 순리를 따라 정의와 진리를 따르는 길을 걸어야 옳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로를 벗어난 댓가를 치르게 하신 다음 준비되었을 때 약속하신 복을 허락하십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반칙행동에서도 보았던 진리입니다.  꾀돌이 야곱은 장남이 받을 아버지의 유산이나 권리는 고사하고 에서의 분노가 하늘로 올랐을 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망치듯 빈 몸으로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는 재산은 보나마나 형 에서의 몫이 되지 않았을까요?  야곱은 산전수전 다 겪고 난 인생의 후반전에 가서야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은 그런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야곱을 에서의 칼로부터 구하기 위해 외삼촌이 사는 밧단 아람으로  떠나보내며 빌었던 아버지의 축복입니다.   그리고 야곱은 외삼촌 집을 향해 가던 도중 광야에서 야영하던 어느날 밤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을 뵙고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주셨던 복을 직접 확인했습니다.   야곱은 그 자리를 벧엘이라 불렀으며 이후로부터 벧엘은 야곱의 일생 가운데 대단히 중요한 신앙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외삼촌 집에서 20년을 지내는 과정에 야곱이 겪어야 했던 혹독한 시련은 드라마의 장면처럼 눈물겹습니다.  7년간 상머슴 노릇을 하며 봉사한 댓가로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아내로 맞이했지만 외삼촌의 속임수로 레아를 첫째 아내로 떠맡고 또 다시 7년을 종처럼 일해야만 했습니다.  야곱이 그 집에 들어온 이후 양떼와 소떼가 불어나면서 살림이 피기 시작하자 외삼촌 라반은 사위가 된 야곱을 어떻게든 곁에 붙잡아 놓고 종처럼 부리려 했습니다.   그만큼 야곱은 손재주가 있었고 세속적인 표현으로 재물운이 따르는 복덩이었습니다.  물론 라반은 이것이 야곱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리가 없었고 야곱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중이었습니다.

빈털털이로 처가살이를 시작한 야곱은 자립할 날을 바라보며 추위와 더위를 무릅쓰고 눈 붙일 겨를도 없이 밤낮으로 일했습니다.   야곱은 품삯을 수도 없이 속이며 노동력을 착취하는 비정한 외삼촌과 질투와 경쟁의 눈초리로 감시하는 외사촌들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온갖 꾀를 동원하여 재산을 불려갔습니다.   얼마나 억척스럽게 살았는지 외갓집에 처음 올 때 지팡이 한 자루 가지고 왔던 사람이 20년 만에 거부가 되었고 두 아내와 두 첩들 사이에 열 아들과 딸 하나를 둔 가장이 되었습니다.  산전수전 갖은 고생을 겪으며 자수성가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자수성가한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신앙관은 무엇이었을까요?   그 마음 속에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축복과 벧엘에서 친히 나타나신 하나님이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땅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 약속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고독과 가난 억울함과 속임당하는 시련의 순간에 좌절하지 않고 굳세게 살아가도록 그를 굳게 붙들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과는 달리 외돌톨이에다 가진 것이 없다보니 빨리 성공하여 보란듯이 살고 싶은 욕심이 너무 앞섰습니다.   어릴 때는 이왕 받을 복 하루라도 빨리 얻고 싶어 팥죽 한 그릇으로 형을 속였고 중년이 되어서는 기여코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빼앗았습니다.   그것도 늙어 시력이 약한 아버지를 속여 하나님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자기 목적을 달성했던 야곱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고 항상 자기 생각을 먼저 앞세워 행동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복을 얻기만 하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신앙입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생각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요.   

야곱은 외삼촌 집을 떠나는 날까지 그렇게 해서라도 목적을 달성하면 된다고 굳게 믿고 열심히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의 이기적 신앙이 깨어지기 시작한 계기는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에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마중나온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이었습니다.   어쩌면 20년간 공들였던 이 모든 수고가 한 순간에 형의 칼날에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족들을 먼저 얍복강 건너로 보낸 다음 밤중에 홀로 강가에 엎드려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깨달음이 비로소 생겼습니다.   

그때 야곱은 밤중에 찾아온 하나님의 천사를 붙들고 밤새 씨름하며 나에게 축복하지 않으면  놓지 않겠다며 죽기살기로 매달렸습니다.   그날 이후로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그 이름은 나중에 이스라엘 나라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서 처리하시고 또 뒷처리 하지 않으셨다면 그의 장래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국 야곱이 깨달은 것은 생존하기 위해 갖은 잔꾀를 동원하며 안간힘을 썼지만 그것 때문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약속을 이행하신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야곱의 변칙적인 인생철학을 바로 잡으시려고 몇번이나 고생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남을 속이는 사람이 속임도 잘 당하는 법일까요?   외삼촌에게 수도 없이 속임을 당하고 나중에는 사랑하는 요셉이 죽었다고 알리는 아들들에게도 속임을 당하며 그 빚을 톡톡히 갚아야 했습니다.  그런 야곱이 인생의 황혼기에 도달했을 때 그야말로 인생을 달관한 지혜로운 노인이 되었습니다.  과거의 과도한 욕심도 성급한 성격도 누그러졌고 오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살피며 거기에 시선을 집중하며 살았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아들 덕분에 바로를 만난 자리에서 야곱은 바로에게 나의 나그네 세월이130년인데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했습니다.  성공한 인생을 살아보겠다고 그렇게 욕심 내어 살았었는데 지나고 보니 진정한 행복과 안식이 무엇인지 모르고 험난하게 살아온 나그네 인생이었다는 겸손한 고백이 아니겠습니까?그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야곱은 죽는 순간까지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자기 힘으로 쟁취하려고 동분서주하다 마친 허망한  나그네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에 내려온 야곱은 연세가 많아 기력이 약해졌지만 그의 신앙과 영력은 그 어느 때보다 가장 왕성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할 때 작은 아들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어 장자의 축복을 하는 모습에서 야곱의 밝은 영성을 보게 됩니다.  옛날에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은 영적인 판단력도 흐려져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분별하지 못하였지만 야곱은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요셉의 작은 아들 에브라임에게 더 큰 복을 빌었던 믿음의 족장이었습니다.   

열 두 아들을 불러 하나씩 이름을 부르며 장래에 될 일을 예언했던 야곱은 내가 죽거든 조상들이 묻힌 가나안 땅에 시신을 매장하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자녀들에게 그 약속을 상기시켜키는 장면입니다.   애굽에서 총리의 아버지로 호강하며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 귀하고 소중하다는 신앙고백을 분명하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꾀와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젊은 야곱과 그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뀐 노년의 야곱에게서 보이는 변화된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소개하실 때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실 만큼 야곱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 빠질 수 없는 소중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따라가는 신앙인으로서 나의 자리가 어디인가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을 통해 수 많은 자손들과 민족들이 나왔지만 세상을 구원하고 복주시는 하나님의 언약은 특별히 이삭과 야곱의 계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오늘도 우리를 통해 그 복을 세상에 나누고 계십니다.  

안타깝게도 하나님이 주실 복을 퍼나르며 복되게 살아야 할 믿음의 자녀들이 사람의 욕심으로 세상 나라만 열심히 세우다 넘어지고 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헛된 수고만 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그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군들로 힘써 살아가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족장들의 제각기 다른 성품과 성격, 신앙의 정도와 저마다의 색깔을 선한 방식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불러 복음 증거하는 사명을 맡기실 때도 저마다 다른 은사를 따라 쓰임받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서로 다른 신앙의 배경과 은사를 가졌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 주의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랑을 나누는 통로가 되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의 통로로 힘써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013년 한 해 동안, 지금부터 주님 부르실 그때까지 여러분의 가족과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복된 인생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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