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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름기둥과 은나팔 (민 9:15-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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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기둥과 은나팔 (민 9:15-10:10)


어떤 단체가 전체적으로 일사불란하게, 그리고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신호입니다. 
떼를 지어 다니는 짐승이나 새, 혹은 물고기 중에서 한 마리가 어떤 위험을 감지하게 되면 주위의 모든 무리가 거의 동시에 도망치기 시작하는 것도 나름대로의 어떤 신호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야말로 이 신호를 가장 다양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사용해 온 존재입니다. 
  
신호의 사용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단체운동 경기의 경우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야구는 감독이나 코치가 수시로 보내는 싸인(sign)을 따라서 선수가 플레이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경기를 펼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감독이 번트 싸인을 보냈는데도 만일 타자가 이를 어기고 배트를 휘둘렀다면 비록 그 공이 홈런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선수는 감독에게 질책이나 징계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미식축구의 경우에는 공격 팀의 선수들이 정확하게 동시에 플레이를 시작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공격하는 선수들이 두 발과 한 손을 땅에 댄 소위 '스리 포인트'(three-point) 자세를 취하고 엎드리면 쿼터백이 무슨 숫자들을 센다든지 혹은 '헛헛' 하는 따위의 소리를 내는데, 그 숫자나 기합소리 중에 미리 약속된 공격 플레이 시작의 신호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만약 운동선수가 자기편의 신호를 못 듣는다든지 혹은 듣고도 그 신호를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 팀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은 설명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똑같은 원리가 이제 시내산을 출발하여 가나안을 향한 본격적인 진군의 첫발을 내디디려 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적용되었습니다. 
이들은 남녀노소를 다 합하면 무려 이백만 명가량 되는 대집단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민 공동체가 무슨 오합지졸처럼 우왕좌왕하는 무리가 되기를 결코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행군할 때나 정지하고 진을 칠 때나 혹은 전쟁이나 특별 행사를 치를 때를 막론하고, 항상 절도 있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어떤 신호가 꼭 필요했습니다. 
바로 그런 목적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의 신호를 그들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 두 가지 특별신호들을 살펴보면서, 교회설립 40주년째 되는 올 한 해에도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던 것처럼 이 경향교회라는 신앙 공동체의 행군을 절도 있고 일사불란하게 만들기 위해서 항상 예의주시하며 따라가야 할 신호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경향공동체는 '성령께서 감동시켜 주시는 성경'이라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신호만 따라 계속 전진해야 합니다. 

본문 9장 15절과 16절에 "15성막을 세운 날에 구름이 성막 곧 증거막을 덮었고 저녁이 되면 성막 위에 불 모양 같은 것이 나타나서 아침까지 이르렀으되 16항상 그러하여 낮에는 구름이 그것을 덮었고 밤이면 불 모양이 있었는데"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바로 저 유명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입니다. 
이것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혀 새로운 신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을 출발하여 시내산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 역시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 행하사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에게 비취사 주야로 진행하게"(출 13:21)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또한 시내산에서 율법을 내려 주실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빽빽한 구름" 중에 임하시고 "불 가운데서 거기 강림"하셔서 모세와 대화하기도 하셨습니다(출 19:16-18).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구름과 불의 두 가지 의미, 즉 그것들이 곧 하나님의 인도와 임재를 나타내는 것임을 이미 경험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구름과 불기둥이 이제 시내산에서 성막을 완성하고 가나안을 향한 본격적인 행군을 시작하려는 시점에 다시 성막 위에 나타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낮에는 구름기둥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어디로 가야 하고 어디서 서야 할지를 인도해 주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밤에는 불기둥을 보여 주심으로써 그 어둡고 불안한 밤 역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셔서 보호해 주고 계심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항상 안심하도록 해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구름과 불기둥의 신호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9장 17절부터 23절에 기록하기를 "17구름이 성막에서 떠오르는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곧 진행하였고 구름이 머무는 곳에 이스라엘 자손이 진을 쳤으니 18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쳤으며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동안에는 그들이 유진하였고 19구름이 장막 위에 머무는 날이 오랠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지켜 진행치 아니하였으며 20혹시 구름이 장막 위에 머무는 날이 적을 때에도 그들이 다만 여호와의 명을 좇아 유진하고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였으며 

21혹시 구름이 저녁부터 아침까지 있다가 아침에 그 구름이 떠오를 때에는 그들이 진행하였고 구름이 밤낮 있다가 떠오르면 곧 진행하였으며 22이틀이든지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물러 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유진하고 진행치 아니하다가 떠오르면 진행하였으니 23곧 그들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을 치며 여호와의 명을 좇아 진행하고 또 모세로 전하신 여호와의 명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고 했습니다. 

일곱 절에 이르는 긴 구절이지만 사실 잘 살펴보면 그 요점은 17절에서 18절 상반절까지만 보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이 떠오르면 진행하고 머물면 진을 침으로써 여호와의 명을 따라 진행했다.'는 내용입니다. 
나머지 18절 하반절로부터 23절까지의 내용은 이 요점을 더 자세하게, 거의 비슷한 내용을 반복하다시피 하면서 길게 나열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 말씀은 왜 이처럼 불필요하게 보이는 내용까지 길게 기록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구름기둥의 인도를 철저하게 절대 순종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 머무는 때에는 그 날이 많든지 적든지 그들은 무조건 "유진" 즉 그 자리에 진치고 머물렀습니다. 
구름이 성막 위로 떠오르는 때가 어느 때이든지 간에 그들은 무조건 그 즉시 출발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런 '토의'도 필요 없었고 무슨 '질문'이나 '이의'가 있을 수 없었으며 오직 즉각적이고도 완전한 '순종'과 '행동'만 있을 따름이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본문 말씀에 보니 '구름이 떠오르는 때', '구름이 머무는 동안'이라는 말과 병행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명을 좇아, 여호와의 명을 지켜, 여호와의 명을 따라'라는 표현들이 여기서 무려 여덟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제일 마지막 23절에는 "그들이 여호와의 명을 따라 여호와의 직임을 지켰더라"고 되어 있는데, 그 '직임'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도 사실은 '지시(order)'라고 번역해야 할 단어입니다. 
다시 말해서 구름 신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 직접 내리시는 명령 그 자체나 마찬가지였다는 말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것은 무슨 선택사양 종목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생각에는 언제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면 좋을 것 같은데 최종 결정은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는 식으로, 무슨 카운슬링식의 지도를 해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구름기둥의 신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바로 이 길이다. 그러니 이 길로 가라.'고 명령을 내리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길을 따라 행진하는 것 외에는 다른 그 어떤 선택도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처럼 구름 기둥만 따라가면 결국 어디로 가게 되어 있었습니까?
바로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 곳은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 모세도 처음 가보는 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지리를 모른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저 그 구름 기둥만 무조건 따라가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머지는 바로 그 구름 신호를 통하여 출발명령과 방향지시를 내리시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구름과 불기둥의 신호,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인도와 임재의 신호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감화감동시켜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구름기둥, 불기둥보다도 훨씬 더 뚜렷하고도 명백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 기독신자가 가야 할 길로 이끌어 주시고 교회가 지켜야 할 자리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고 성경을 그처럼 '신앙과 행위의 유일무이한 법칙'으로 받아 순종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은 오직 '성령의 감동'인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지시해 주지 않는 것이 단 하나라도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의 온갖 진로 결정과 상황 판단과 행동 원칙에 대하여 성경 말씀은 빠짐없이 정확무오하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신자라 해도 만약 이 가장 뚜렷하고도 확실한 성경의 신호를 읽고 듣고 깨닫지 못한다면 그 신앙 행로란 것은 늘 불안하고 위태로운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또한 신자가 그처럼 성경 중심으로 살고자 할 때에 보혜사 성령님께서 임재하시며 동행해 주십니다. 
그처럼 늘 성령의 감화감동 가운데 사는 신자는 그 '행진'이 늘 안전하고 그 '유진' 또한 평안하게 됩니다. 
반면에 이런 성령의 신호를 받지 못하는 교인은 그 인생이 항상 좌불안석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성경 말씀의 신호를 받게 될 때마다 그것을 무슨 '상담'이나 '조언'이 아니라 오직 '명령'으로 받을 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보여 주시는 신호는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운동선수나 병사가 그 받은 신호에 대하여 무슨 질문을 하거나 이의를 제기하고 어쩌고 할 여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호란 그것을 듣는 선수나 병사가 일초도 지체하지 않고 즉각 반사적으로 따라야 할 절대적 명령이요 시급한 명령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그대로 하면 좋기야 좋겠지.'라는 식으로 슬쩍 넘어가 버리는 것은 곧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인 동시에 그 자신의 신앙 행보에 치명적인 함정이 되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의 신호만 따라가면 그 끝은 어디가 되겠습니까?
바로 천당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이 생소한 곳이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천당이란 곳에 아무도 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천당이란 곳은 다 미지의 세계이며 처음 가보는 길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무 걱정할 필요도 없고 다른 어떤 안내자나 이정표나 내비게이션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도 당신의 택자들이 방황하거나 곁길로 빠지지 않고 저 영광스러운 하늘의 집 문 앞까지 정확하게 도달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바로 성령의 감화감동을 통한 성경 말씀의 신호를 우리에게 부단히 보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저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만 가면, 교회가 오직 성경중심으로 행군하기만 하면 그 종착점은 어김없이 저 '열두 진주문'이 되고야 마는 것을 확신하면서, 바로 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신호를 따라 단 한 명도 낙오하지 않고 가나안 복지에까지 꼭 도착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경향공동체는 '교회의 관할과 치리'라는 나팔신호를 따라서 예배와 봉사 생활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10장 1절과 2절에 "1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은나팔 둘을 만들되 쳐서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을 진행케 할 것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구름 신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진행과 유진 즉 가장 기본적인 행동을 지시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이제 보다 더 구체적인 동작들을 위하여 나팔 신호를 제정해 주셨습니다. 
이 나팔은 우선 "은"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동물의 뿔로 만든 것보다 더 청아하고도 높은 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똑바르고 길쭉한 관으로 되어 있었으며 그 끄트머리가 넓게 퍼져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오늘날의 금관악기들과는 달리 이 은나팔은 따로 음높이를 조절하는 장치는 없었기 때문에 보통 네 개 정도의 음을 낼 수 있었습니다. 
"은나팔 둘"을 만들게 하신 것은 그 당시 아론의 아들로서 제사장으로 섬기고 있던 사람이 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나팔 소리 역시 하나님 자신의 음성을 상징할 때 자주 등장하고 있습니다. 
아까 언급했던 시내산에서 율법을 내려 주실 때에도 "나팔 소리"와 함께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으며(출 19:19), 예수님께서 밧모섬의 사도 요한에게 계시의 말씀을 주실 때에도 "나팔 소리와 같은 음성"으로 말씀하셨으며(계 1:10),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역시 "나팔 소리"가 먼저 울려 퍼질 것이라는 말씀이 성경 여러 군데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입니다(마 24:31, 고전 15:52, 살전 4:16).
하지만 여기서는 그 나팔을 제사장들이 불도록 하셨습니다. 
즉 나팔은 제사장이 부는 것이었지만 이것 역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내려진 신호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팔 신호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이었습니까? 
이어지는 10장 3절부터 10절에 보면 "3두 나팔을 불 때에는 온 회중이 회막 문 앞에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요 4하나만 불 때에는 이스라엘 천부장 된 족장들이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며 5너희가 그것을 울려 불 때에는 동편 진들이 진행할 것이고 6제 이차로 울려 불 때에는 남편 진들이 진행할 것이라 무릇 진행하려 할 때에는 나팔소리를 울려 불 것이며 7또 회중을 모을 때에도 나팔을 불 것이나 소리를 울려 불지 말 것이며 

8그 나팔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불지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원한 율례니라 9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울려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 10또 너희 희락의 날과 너희 정한 절기와 월삭에는 번제물의 위에와 화목제물의 위에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 은나팔은 소리낼 수 있는 음의 수가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신 그 부는 방법을 다양하게 함으로써 여러 가지 종류의 신호를 만들었습니다. 
나팔 둘을 같이 불거나 혹은 하나만 불거나 함으로써 그 소리의 크기를 다양하게 했으며, 또는 평범하게 불거나 혹은 울려서 즉 짧은 스타카토가 반복되는 식으로 불어서 그 소리의 음색을 다양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 종류의 신호를 만들었는데, 그 구별되는 나팔 소리에 따라서 백성 전체 집합, 대표자 집합, 각 지파별 전진, 전투를 위한 진격, 그리고 각 절기의 제사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경우를 위한 신호로 사용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팔 신호는 구름 신호보다도 훨씬 더 다양하게 세분되어 있으며 보다 더 구체적인 신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구름 신호는 가나안을 향해 전진하는 데 필요한 신호였지만, 그 과정에서 절기 때에는 예배도 드리고 나가서 전쟁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모여 회의하기 위해서 나팔 신호는 꼭 필요한 것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제사장들에게 그 신호를 가르쳐 주시고 시행하도록 명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나팔 소리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동할 때 그에 따른 축복이 약속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여호와께서 기억"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팔 소리를 듣고 집합하여 전투에 나갈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 전투 중에 그들을 기억하시고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 나팔 소리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물이 절기 때마다 바쳐질 때에도 역시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억해 주시고 그 제사를 받아 주실 것이 마치 나팔 신호에 따라오는 보증수표와 같이 약속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이런 '나팔 소리'에 따라 행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신자들이 함께 모이고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봉사하는 이 모든 '교회중심의 생활'이 다 거기에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그 나팔 신호 자체는 바로 강단에서 선포되는 목사의 '설교'와 당회의 공식 결정이나 지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관할과 치리'가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지만, 보다 더 구체적인 신앙 활동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나팔 신호'들인 것입니다. 

물론 '구름 신호'가 더욱 더 근본적인 신호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성령께서 감동하시는 성경 말씀이야말로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모든 신자와 교회에게 최고의 표준이요 신호인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보다 자세한 신호 또한 필요합니다. 
제직회가 모여야 할 때도 있고 공동의회로 온 교인이 다 모여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예배드리기 위해서 정해진 시간도 있고 혹은 봉사하기 위해서 따로 모이는 시간 역시 있습니다. 
이처럼 여러 경우, 여러 목적을 위해 모이는 시간들을 정하고 알리는 것이 바로 우리가 듣는 나팔 신호인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8대 예수세계화운동'이나 '10대 생활강령' 역시 우리 교회 고유의 '은나팔 신호'입니다. 
'교육관 헌관'을 목표로 전개되고 있는 '보리떡 헌금' 운동 역시 바로 이 순간 우리 교회 안에 울려 퍼지고 있는 '나팔 소리'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당회의 결정과 목사의 설교와 교회의 광고를 통해 전해지고 있지만 이것 역시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나팔 소리'를 따라 선포되고 있는 까닭에 우리 모두가 당연히 따라가야만 하는 신호인 것입니다. 

성경 말씀만 각자가 알아서 순종하면 되는데 교회가 왜 필요하냐고 주장하는 무교회주의자들의 말은 이런 나팔 신호를 완전히 무시하는 소리입니다. 
성령께서 감동해 주시는 대로 아무나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설교할 수 있는 것이지 왜 목사와 같은 특별한 교역자 직분이 있어야 하느냐고 말하는 퀘이커 교도들 역시 나팔 신호를 전혀 모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구름 신호만 주시지 않고 나팔 신호까지 그처럼 상세하게 지시하신 뜻을 사람이 도대체 뭐가 그리 잘났다고 감히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신자가 바로 이 '교회의 관할과 치리'를 통한 나팔 신호를 들을 줄 알고 그 신호에 따라 갖가지 구체적인 전투에 출전하고 절기를 지킬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와 같은 교회와 성도를 '기억'하시고 그 추진하는 일을 이루도록 도와주시며 그 섬기는 모든 것들을 기쁘게 받아 주십니다. 
반면에 소위 민주적 교회를 운영한다고 하면서 '당회'를 통한 나팔 신호 자체가 아예 없는 교회는 악과의 전투에서 무력한 교회가 될 수밖에 없고, '강단의 설교'를 통한 나팔 신호를 무시하는 교인은 자연히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의 사자의 입술을 통해 선포되는 설교 말씀을 잘 받아들이고 당회의 결의와 지시를 한마음으로 따르고 장로교의 헌법을 순종하는 가운데 모든 예배생활과 봉사생활과 헌금생활을 신실하고 충성스럽게 준행함으로써 오늘날의 '제사장의 은나팔 소리'를 따라 일사불란하게 교회중심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신호에 맞추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단체는 역시 군대입니다. 
신호에 따라 경기할 줄 모르는 선수는 자기 팀의 플레이를 오히려 망치게 만들 수밖에 없는 것처럼, 신호에 따라 싸울 줄 모르는 병사는 결국 낙오병이 되고 적군에게 잡히든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옛날 전투에서는 실제로 나팔이 아주 중요한 '신호 전달'의 역할을 했는데, 각 병사들은 그 나팔의 신호를 따라서 어떤 식으로 집결하며 어떤 대형을 갖추고 어떤 방향으로 진격해야 하는지를 평소에 철저히 훈련받았습니다. 
그래서 실전 상황에서 아무리 치열한 전투의 와중이라 하더라도 바로 그 나팔 신호에 따라 각개 병사들이 거의 본능적으로 움직일 정도가 되어야 그 군대는 제대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중심'이라는 이 '구름의 신호'를 못 보는 교인이 결국 그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파선하는' 낙오병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교회중심'이라는 이 '나팔의 신호'에 따라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으면 그 마지막은 '악하고 게으른 종'으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꼴을 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그 옛날 시내산에서 구름 가운데 임재하시고 나팔 소리와 함께 나타나셔서 율법의 말씀을 내려 주셨습니다. 
장차 우리 주 예수님께서도 구름을 타시고 나팔 소리와 함께 재림하실 것입니다. 
구름과 나팔은 이처럼 '하나님'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특별한 상징이며 신호인 것입니다. 
경향의 지난 40년은 실로 모든 경향인들이 오로지 '하나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신호, 그리고 '제사장의 은나팔 소리'의 신호에 따라 줄기차게, 일사불란하게 달려온 행군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경향의 미래 역시 오직 '성경중심', 오직 '교회중심'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오직 '하나님중심'의 영광스럽고도 강력한 신앙공동체로 계속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성령의 감화감동을 통하여 선포되는 '성경 말씀'에 무조건 순종하며 당회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교회의 관할과 치리'에 기꺼이 복종함으로써 이 '구름 기둥'과 '은나팔 소리'를 따라 경향의 앞날에 약속되어 있는 더 큰 축복의 땅을 향해 힘차게 행군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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