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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받은 성도 (골 1: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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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받은 성도 (골 1:13-14) 
 

오늘날 인류는 급격한 변화의 물결에 휘말려 있습니다. 마치 거대한 쓰나미에 떠밀려가듯이 이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소위 세계화 시대가 되어서 사람들은 개인적인 취향보다는 유행을 따라서 살아갑니다. 얼마나 유행을 민감하게 따라 잡느냐에 따라서 남보다 앞서 가느냐 경쟁에 뒤지느냐가 결정됩니다. 이 같은 변화는 단순히 패션의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정치, 경제, 교육 등 우리의 모든 생활 영역에 걸쳐서 폭넓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 젊은 세대는 과거 세대와 달리 경제적인 어려움을 모르고 자랐기 때문에 욕구를 과감하게 표출하고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거부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보고 기성세대와는 다른 종류의 인류라고 해서 신인류(新人類)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아무리 물질문명이 발달한 21세기를 살지라도, 더구나 기성세대와 확연히 구별되는 가치관과 취향을 갖고 살아가는 신인류에 속하는 젊은 세대라고 할지라도, 한 가지 불변하는 공통 영역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불변하는 본질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첫째로, 인간은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인간이 우주의 주인이라는 생각에서 나온 인본주의사상입니다. 이는 무신론적 사상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 아니며 하나님의 지음 받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절대자 하나님처럼 될 수 없으며 어디까지나 유한한 존재일 따름입니다. 예로부터 사람들은 신이 되려는 욕망을 지녀 왔습니다. 고대의 제왕들 가운데는 자기를 신으로 내세우고 자기를 위해 신전을 짓고 자기의 상을 만들어 세우고 숭배를 강요한 자들이 많습니다. 그뿐 아니라, 제왕이나 영웅이 죽으면 그들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 신으로 추앙했습니다. 그러나 신이 죽는다는 사실 자체가 모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은 그 사람이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말하기를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고 하였으며, 지혜자 솔로몬은 말하기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니라“(전 5:2)고 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그 생명의 덧없음이 안개와 같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사람은 골백번 죽었다 깨어날지라도 흙을 밟고 흙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살다가 죽어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사람은 타락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인류의 조상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그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이 죄인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인간의 본질이 근원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아담의 죄성이 그의 후손들에게 유전되었으므로 사람은 날 때부터 타락한 본성 곧 죄성(罪性)을 갖고 태어납니다. 흑인을 부모로 둔 사람이 검은 피부를 갖고 태어나듯이, 얼룩말이 얼룩무늬를 갖고 태어나듯이, 타락한 아담의 후손은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에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하신 대로 인생은 누구나 다 죄인에 불과합니다. 

수양을 많이 한 사람은 수양을 많이 한 죄인이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은 학식이 많은 죄인이고, 자선을 많이 하는 사람은 자선을 많이 하는 죄인일 뿐입니다. 요즘은 성형술이 발달해서 뼈를 깎아 얼굴 윤곽을 성형하고, 눈, 코, 입 할 것 없이 다 성형이 가능합니다. 콘텍트 렌즈로 눈동자의 색깔도 바꿀 수 있고, 성대 수술로 목소리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성형 수술로써 모습을 바꾸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낳은 자식을 보면 이전의 그 사람의 모습을 닮았지 성형한 이후의 모습을 닮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본질을 바꿀 수 없는 없습니다. 수양을 많이 하고 도를 깨쳐도 죄인은 죄인이지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셋째로,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범죄와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불변의 법칙이 있는데, 그것은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는 것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 죄입니다.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것이 어째서 죄입니까? 그것은 과일을 하나 따먹은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것이므로 죄입니다.

왜, 아담이 그 과실을 따먹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아담에게 명하시기를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따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지만, 아담은 뱀이 한 말 곧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이것을 따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 그 과실을 따먹었습니다. 뱀 곧 마귀를 신뢰하고 하나님을 불신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피조물이 감히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교만한 마음을 품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하나님처럼 된 것이 아니라 자기의 벌거벗은 것을 알고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동산나무 사이에 숨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하신 대로 아담은 정녕 죽게 되었습니다. 

타락으로 인한 죽음은 세 단계로 인간에게 임하였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영적인 죽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단절된 것을 영적 죽음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이미 영적으로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대하여 캄캄절벽입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박사가 되어도 영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말해 주어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단절되었다 함은 하나님과 불화한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 원수지간이 되어 있습니다. 창조주시며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니 이처럼 불행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부모와 불화한 자식의 마음이 편할 리 없듯이,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의 심령에는 평안이 없으며, 하나님의 진노가 항상 그 사람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육신의 죽음입니다. 

본디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원히 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생명나무의 실과를 따먹었더라면 죽지 않고 영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타락하였고,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신 대로, 사람은 누구나 죽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 것입니다. 

현대는 공중보건과 의술의 발전으로 인해 사람의 수명이 많이 연장되었습니다. 소련의 권위 있는 의학자였던 보고모레테스는 생물은 성숙기가 빠를수록 일찍 사망하며 수명은 질병사하지 않을 경우 성장기의 5배 내지 6배 정도 산다는 학설을 내놓았습니다. 사람의 성장기를 25세로 본다면 그 다섯 배인 125세까지 살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우리나라에도 백세를 넘긴 노인분이 약 2천 명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사람이 백세를 살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125세를 산들 결국 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이 끝이 아니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유물론자들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은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죄인은 최후의 심판을 거쳐 영벌(永罰)에 처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하신 대로 육신의 죽음 이후에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보면 최후의 심판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합니다.

“11)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12)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지금까지 우리는 범죄한 인간의 본질과 운명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아무리 최첨단 시대를 살지라도 인간의 본질과 운명은 조상들에 비하여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이집트의 미라를 보신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파라오들의 미라를 보면 관 뚜껑에 죽은 자의 생전의 모습을 조각해서 황금빛으로 칠해 놓았는데,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붕대에 감긴 채 바싹 말라버린 미라가 들어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풍요롭고 화려한 현대 문명의 포장 이면에는 죽음 앞에서 떨고 있는 가련한 인간의 모습이 감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다 구원이 필요합니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 하나님은 죽었다”고 외쳤던 니체는 결국 미쳐서 죽고 말았습니다. 세계적인 대 제국인 바벨론을 건설했던 느부갓네살은 두라 평지에 높이가 30미터나 되는 금 신상을 세웠습니다. 이 신상은 곧 느부갓네살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교만했으면 자기를 신이라고 하였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낮추시니 느부갓네살은 그만 자기를 짐승이라고 생각하며 행동하는 정신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숲속에서 지내면서 짐승처럼 울부짖고 소처럼 풀을 뜯어먹고 손톱과 발톱이 독수리처럼 자라났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강한 척해도 실은 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입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죄와 죽음에 처한 인간을 건져내실 수 있으십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실 뿐입니다(고전 8:5,6). 믿으시면 “아멘”하십시다. 구원은 이 사실을 믿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정하신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하신 말씀처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독생자가 사람이 되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율법에 의하면,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기 때문입니다(히 9:22). 

사람의 죄는 사람의 피로써만 사할 수 있습니다. 피는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대속자는 죄가 없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런데 아담의 자손 가운데서는 죄 없는 사람을 찾을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2천 년 전에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피로써 속죄 제사를 드리는 의식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죄를 지은 자는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은 범죄한 것이 생각날 때 양이나 염소를 가지고 성막으로 제사장을 찾아가서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사람이 짐승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기 죄를 자백하면 짐승을 잡아 속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차례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온 백성을 위한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로써 드린 구약의 제사로는 사람들의 죄를 본질적으로 없앨 수는 없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히브리서 10장 1절로 5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1)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2)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3)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4)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5)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황소와 염소 대신에 하나님께서 손수 우리 인생들을 위하여 제물을 준비하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로 삼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르기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고 하였습니다.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구속 곧 죄 사함을 이루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골로새서 1장 20절에 보니, ‘그의 피 곧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셨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더러운 죄악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를 청산하고 화목한 관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고 은혜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마귀의 종 되었던 자였지만, 이제는 마귀에게서 놓여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사도 베드로는 성도들을 일컬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벧전 1:2)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곧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불교처럼 관념의 종교가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고요하게 앉아서 명상과 참선을 통해서 도를 깨우쳐서 해탈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불교에는 구세주가 없기 때문에 각자가 도를 깨우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석가모니를 믿으면 극락 간다는 교리는 후대에 만들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석가모니는 먼저 도를 깨우친 선각자에 불과하지 구세주가 아닙니다. 각자가 도를 깨닫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불교의 가르침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죄는 도덕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게 때문에 불교에서는 죄의 심각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죄는 본질상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실제적인 종교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죄인 된 인간들의 비참한 실상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구세주가 죄인들을 위하여 피 흘려 죽으셨으나 타종교에는 피 흘림이 없습니다. 피 흘림이 없으니 죄 사함도 없습니다.

세상 종교는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 힘을 내서 물 밖으로 헤엄쳐 나오라고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물에 빠진 사람을 보는 즉시 물속으로 뛰어들어 건져내는 사람과 같습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신 기독교만이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인이 영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골로새서 1장 21-22절에 이르기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전에 거듭나지 못했을 적에 우리의 실상은 악한 행실을 하며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상태였습니다. 

선을 행할 능력이 아예 없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한 우리가 예수의 피 뿌림을 받음으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되었고 이로 인해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움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새 사람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고 하셨습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은 본질이 선하기 때문이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본질이 악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수양의 문제가 아니라 출생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아 거듭난 성도는 선한 사람으로서 선을 행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악한 사람으로 자연스럽게 악을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겉과 속이 아울러 진실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아서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을 변화시키는 길은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경찰서와 교도소를 많이 세워도 그것 가지고 이 사회를 개선할 수는 없습니다. 교도소에 가면 악한 성품이 교화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을 더 배워서 전보다 더 악한 사람이 되어서 나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오직 예수의 피만이 죄악에 물든 인간의 심령을 깨끗하게 씻어 새 사람이 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왕에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는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소용이 없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들이야말로 예수님의 피가 더욱 절실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죄의 유혹과 마귀의 시험을 능히 이겨내려면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권세를 의지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악한 시대입니다. 마귀는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는 할 수 있는 대로 믿는 자라도 넘어뜨리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의지하다가는 영락없이 마귀에게 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고 나아가면 능히 마귀의 궤계를 파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천년 전에 골고다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달려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말라 없어진 것이 아니라, 아직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생수의 강이 되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의 피의 권세를 의지하고 나아갈 때 언제나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에게 죄 사함의 은총과 위대한 구원을 가져다줍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속하시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대신하여 친히 고귀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세상에 이처럼 놀랍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내가 주님을 알지도 못했던 그 때에, 주님께서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다니 이같이 큰 사랑을 달리 어디서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믿음이 연약해 질 때,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갈 때 우리 자신을 위해 대속의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낙심이 될 때에, 나를 사랑해서 목숨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의지하여 살아가십시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친히 성도님들의 믿음을 굳게 붙들어주셔서 세상 유혹과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도 남게 해 주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가 세상 끝 날까지 성도님들과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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