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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야바의 잔머리 (요 11:4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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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바의 잔머리 (요 11:45-57)


어느 교수 한 분은 모태신앙인이었습니다. 이론에도 밝고 성경도 깊이 알았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 집 가정부는 열성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주인은 꼭 그렇게 믿어야 하느냐며 늘 비웃었습니다. 그때마다 가정부는 “예수 믿으세요” 하며 전도했습니다. 주인은 “믿어도 너같이 믿지는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의 외동딸이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가정부는 주인에게 “기도해 보세요. 하나님이 반드시 고쳐주실 거예요”라며 강권했습니다. 주인은 다급하니까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외동딸은 그만 숨지고 말았습니다. 
가정부는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 분은 영원히 하나님을 떠나겠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랬더니 의외로 이런 대답이 나왔습니다. 
“이번 일로 딸은 잃었지만 대신 잃었던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난 사건은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방금 죽었다가 예수님을 통해 다시 살아난 것은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 아니었다고 우겨볼 수나 있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아들 역시 장사 지내는 도중 주님을 만나 다시 살아났으니 같은 말로 우겨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사로는 다릅니다. 자그마치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습니다. 이미 무덤에 장사지냈습니다. 무덤도 돌로 막았습니다. 무덤을 막아놓은 돌을 옮겨놓으라고 했을 때 마르다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 돌을 옮겨놓았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기도하십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그리고는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덤을 막았던 돌을 옮겨놓으니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죽은 자가 장사 지낼 때의 모습 그대로 다시 살아나 무덤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얼마나 놀라고 또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무덤까지 따라갔던 많은 유대인들이 그 광경을 생생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그들로서는 죽은 자도 살리시는 예수를 믿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실을 전해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믿는 유대인들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수임에 대해서 들려오는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어도 직접 보지 못한 입장에서는 그냥 농담처럼 여겨버렸을 수도 있고 에이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하라고 핀잔하며 흘려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늘 예수가 지나갈 때마다 예수와 제자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대접하기를 즐기던 가정이라는 것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런 예수가 어째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텐데도 오시지 않는가 의아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가 도착하였지만 이미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장사를 지내고 난 다음입니다. 마치 원님 행차한 다음 나팔 분다고 이미 모든 것은 다 끝나고 말았습니다. 예수가 못 고치는 병이 없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미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무덤까지 찾아가서 우는 예수를 보면서 그렇게 사랑했는데 맹인의 눈도 고치신 이가 어찌해서 사랑하는 자를 죽지 않도록 할 수 없었던가 의아해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단순히 육신을 고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죽은 자도 다시 살리시는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이야 말로 메시야요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자기들의 보는 눈앞에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무덤에 장사지냈다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보면서 그들은 더 이상 예수를 안 믿을 재간이 없습니다. 누가 죽은 자를 살릴 수가 있겠습니까? 죽어가는 자를 목숨을 조금 더 연장시킬 수 있는지는 몰라도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역사상 있기는 있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 그들은 각각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렸고 또 수넴 여인의 아들을 다시 살렸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죽은 날 다시 살아났기에 말쟁이들이 얼마든지 말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죽었던 거냐? 사실은 죽은 것처럼 보였던 것이지 실제로 죽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마든지 억지를 부릴 수도 있습니다. 그건 예수님의 앞선 두 건 회당장 야이로의 12살 난 딸을 다시 살리신 일과 나인 성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리신 일들 역시 얼마든지 실제로 살려낸 것이 아니라 마치 죽은 자처럼 되었던 것을 사람들이 잘못 알고 죽은 것으로 여겼는데 그런 그들이 깨어날 때 예수가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라고 우겨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나사로의 경우는 완전히 다릅니다. 누구도 그의 죽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미 무덤에 장사도 지냈습니다. 썩는 냄새가 풀풀 납니다. 그런데 그런 시체가 다시 살아난 것이니 누구라서 믿지 못하겠다고 발버둥을 칠 수가 있겠습니까?  

놀랍게도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하신 다음 제자들에게 다시 살아나신 몸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도마는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다른 제자들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면 그 손과 발에 못 자국이 있고 옆구리에 창 자국이 있을 터이니 그것을 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손과 발의 못 자국을 보여주십니다. 옆구리의 창 자국을 보여주십니다. 그러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는다 하지만 나를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된 자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정말 귀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우리들이야말로 다시 살아나신 주님은 우리의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겠고 죽었다 해도 다시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 이 아름다운 믿음을 지켜 주님 앞에서 영원히 사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염려하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금실이 좋은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퇴근을 하던 남편이 버스 정류장에 승용차를 세웠습니다.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같은 회사의 여직원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러시아워라 정류장은 사람들로 매우 붐볐습니다. 그 여성은 벌써 몇 대를 그냥 보내고 다음 차를 기다리고 있던 차였습니다. 그래 차를 세워 행선지를 물으니, 자신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는 그 여성을 집 근처까지 태워다 주었습니다.

남편이 귀가할 무렵, 부인에게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남편이 그 여성을 태워다주는 모습을 우연히 본 친구였습니다. 친구가 잘못 전해준 얘기 때문에 부인은 남편을 의심하며 그날 저녁 남편과 다퉜습니다. 결혼 후 처음이었습니다.
그날 밤, 부부는 끝내 화해하지 않고 몸과 마음을 멀리한 채 긴 밤을 지냈습니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었습니다. 남편은 아침식사도 하지 않고 집을 나섰습니다. 아내는 늘 하던 배웅도 하지 않았습니다. 둘은 처음으로 아무 말 없이 그냥 헤어졌습니다. 그로부터 한 시간 후, 부인에게로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기가 막힌 소식이었습니다.

의심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간사해서 한번 마음에 의심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면 거기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의심이란 또 다른 믿음입니다. 내가 의심한다는 것은 의심하는 그것을 믿는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믿는다면 의심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이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리신 일을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알렸습니다. 그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비상이 걸렸습니다. 그들은 곧바로 공회를 모이도록 합니다. 그들이 모여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예수가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그를 믿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생각은 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꾸만 큰 기적을 행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은 그의 편을 들고 있으니 큰일이 난 것입니다. 옳고 그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네들이 이겨야 되겠다는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인간이란 마음에 어떤 욕심이 있으면, 그 욕심을 위해서 좌우를 보지 않고 오로지 목적 달성을 위하여 고집만 피우고 앉아 있는 죄인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적이 나타난다고 하여서 고집이 꺾이고 사태가 호전될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얼마나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어떤 어려움이 생기면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 일만 해결해 주시면 내가 무얼 하겠나이다.” “이 일만 해결해 주시면 내가 믿겠나이다” 하면서 약속을 합니다. 하지만 막상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던 일이 이루어지고 난 다음에는 어떻습니까? 그 약속을 지키십니까? 믿지 않던 사람들이 믿게 되던가요? 물론 믿음 안으로 들어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앞에서 보았던 예화에서 오히려 딸이 죽어 가는데 그 딸을 살려달라고 그러면 믿겠다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는데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사실은 자신의 불신이 문제였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이건 정말 기적입니다. 놀라운 은혜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그 반대로 갑니다. 설사 하나님 앞에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면 뭐든지 새로운 핑계거리를 만들어서라도 믿지 않으려 하고 따르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셔야 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그 엄청난 역사들을 보면서도 이들이 이럴 수가 있는가 하고 간단히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대제사장이요 바리새인입니다. 그 시대에 종교적으로나 애국심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무엇으로도 초일류급들이었습니다. 우리들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우린 종종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이런 자리에 감히 나아올 만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즉, 이 큰 기적에 대하여 쉽게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의 요구들을 해댑니다. 말하자면 쓸데없는 요구를 하는 것입니다. 못난 자식일수록 부모에게 불만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잘난 아들일수록 이렇게 얘기하는 법입니다. 부모님이 “얘야, 나는 너에게 따뜻한 밥 한 번 못해 먹였구나” 하셔도 “아니요, 저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이 잘난 자식들입니다. 부모님이 계셔서 자기 존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근원적이고 대단한 것입니다. 그 다음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책임인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믿기만 하라고 하시면서 나를 불러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가 믿게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그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우리가 깨달아 날마다 감사해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이런 감사와 감격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하지만 이런 감사와 감격도 잠시 뿐이요 “하나님, 왜 이것을 주지 않고 저것을 해결해 주지 않습니까?”라며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자꾸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사로를 살리실 수 있으신 하나님께서 왜 오늘 내 자식을 안 일으켜 주십니까?” “왜 내 아내를 빼앗아갑니까? 왜 우리 아버님을 중풍으로 누워 계시게 합니까? 날 사랑하신다면서요? 그러면 제발 그 사랑을 보여줘 봐요! 하나님은 뭐든지 하실 수 있으시지 않습니까? 제발 빨리 좀 어떻게 해줘 봐요!” 

우리는 이런 소리를 겁 없이 막 합니다. 그러나 바로 우리가 어디서 일어났는지를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저 시궁창 같은 삶속에서, 죽음의 시체더미 속에서, 주님의 피 묻은 손으로 씻겨지고 움켜잡아져서 이 자리에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나 놓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저 사소한 문제 때문에 넘어지기 일수 입니다. 누가 어디서 하나님의 그림자를 보고 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만 그때부터 펄펄 뛰면서 “아니 하나님 왜 저에게는 안보여 주십니까?” 하면서 쓸데없는 싸움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가서 우리가 정작 갖고 있던 소중한 은혜들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속이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너 방언 받아 보았니? 너 아플 때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서 아프냐? 하시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신 적이 있니? 없지, 넌 아니야” 그러면서 그 속삭임에 스스로 자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는 거의 대부분이 방언의 은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또 다른 불만이 있습니다. “너 네가 기도하는 그 방언의 내용이 무슨 뜻인지 알기나 하니? 너 통역의 은사가 있어?” 하지만 사실 우리가 깨닫지를 못해서 그렇지 이미 우리 가운데 대부분은 통역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단지 그 수준이 아직은 어린 아이와 같아서 바로 깨닫지를 못할 뿐입니다. 

보십시오. 예수가 메시야라면 그 표적을 보여 달라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막상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보고 난 다음 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예수님께서 기적을 나타내시자 이에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모여서 궁리하더니 마침내 죽이기로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고후4:7~10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성도들에게는 이중의 인격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모두 이중의 생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 속에 있는 보배입니다. 또 하나는 그것을 싸고 있는 질그릇입니다. 우리가 온전케 되는 것은 부활의 몸을 입을 때입니다. 분명히 우리의 영은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 몸은 더럽습니다. 정신은 깨끗한데 육체가 더럽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가 옛날에 우리를 지배하던 그 원리에 너무 젖어 있어서 주인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경 쓰고 긴장하지 않으면 저절로 옛날 일을 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긴장하여 조심스럽게 말하지 않으면 속으로부터 나오는 말이 더러운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냥 내버려 두면 죄를 짓습니다. 우리의 정신과 육체가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깜짝 놀라는 것은 나도 모르게 우리의 정신과 육체가 하나가 되어 악한 일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은 우리의 거듭난 영혼에 우리의 육체가 꼼짝달싹 못할 만큼 우리 육신이 약하지 않습니다.  

아직도 어제까지 펄펄 뛰던 그 몸뚱이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성도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꾸어 가시기 위해 세상에서 모든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기적으로 쉽게 해결하시기 보다는 그 문제들에 정면으로 부딪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겉 사람이 낡아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겉 사람이 낡아지므로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겉 사람이 낡아짐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는 우리가 원래 어떠한 죄인이었는가 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죄인이므로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원래 있었던 어느 부분의 부속품을 갈아 끼우듯이 갈아치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독특한 점입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다른 종교들의 목표는 인간의 자기완성입니다. 따라서 진화론적이며, 희망적입니다. 부족한 것에 무엇을 채워서 인간의 어떤 완성품을 만들어 나가는 노력으로서 도를 깨우치는 싸움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완전히 현재의 것이 죽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고장 난 자동차를 수리해 내듯이 고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용광로에 넣어서 현재의 모습을 없애고 새 차를 만들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꾸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어떤 것에다 하나님의 좋은 것을 갖다 붙여서 새롭게 만들어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옛 성품과 옛 습관들을 그대로 놔둔 채 다른 것을 하나씩 갖다 붙인다고 해서 새로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히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다음에도 옛날의 못된 습관을 좇는 몸뚱이를 그대로 놔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옛 성품과 옛 사람과 새 사람과 새 성품의 차이를 뼈저리게 느끼고 우리 자신이 얼마나 변화되고 바뀌어져야 할 존재인가 하는 사실을 날마다 확인케 하시며, 이 문제로 싸우고 죽어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옛 사람과 옛 성품을 그냥 덮어 놓고 뛰어 넘어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과거의 처절함과 그 망막함을 모르기를 원치 않으시며 우리가 바뀌어져야 하는 그 정도가 어느 정도인가를 모르기를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하나님의 자녀와 성도라는 고귀한 신분으로 깨어나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에게 참다운 감격과 감사가 있으며, 은혜의 은혜 되심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옛날 예수님을 모르고 지내던 때와 거의 다르지 않게 삽니다. 달라져야 된다는 생각은 저 뒤에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도 많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의 생활이 전체적으로는 승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종점은 언제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실제의 삶은 매 맞기도 하고 연단받기도 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자기 고집대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언제나 잘 하는 줄로 알고 힘껏 뛰어나가 보면 그것이 바로 자기의 육체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내 생각대로요 내 욕심대로 내가 달려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그렇게 넘어지고 쓰러질 때마다 내가 하나씩 변화되어 가더라는 것입니다. 실패를 통해서 성공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실패만 하며 살아가는 인생이요 좌절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었는데 그런 내가 어느 사이엔가 달라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새롭게 빚어가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뛰어나가는 것이 아닌 주님이 나로 하여금 뛰어나가도록 만들어 가시는 삶으로 바뀌어져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실망을 합니까? “나는 왜 이렇게만 살아야 할까? 나는 언제까지 이런 절망적인 삶을 살아야 할까?” 이처럼 몸도 마음도 다 망가지고 그렇다고 어떤 길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자녀들도 여전히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절망하기 쉽습니다. 

차라리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때가 희망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절망일 때가 주님에게는 희망입니다.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노라고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라고 “주님 도와주세요” 하고 주님의 손을 붙잡을 때 그때가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리는 때입니다. 그래서 실패와 좌절 속에서 승리가 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로 하여금 승리하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사로를 고치시지 않았습니다. 다시 살리셨습니다. 새로운 삶으로 만드셨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모든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만일 주님이 나사로를 고치셨다면 주님에게 사람을 보낸 마르다와 마리아가 자기 공을 내세웠을 것입니다. 주님에게 심부름을 한 사람들이 자기 공을 내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더 이상 주님 앞에 내세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원망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믿으라고 하십니다. 내가 믿나이다 고백할 때 주님의 역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돌을 옮겨놓으라는 것은 너희 불신을 버리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돌을 옮겨 놓았을 때 다시 말해서 그들이 믿고 순종했을 때 놀랍게도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납니다. 그것도 주님의 능력으로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렇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죽고 오직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온전해지도록 되는 것입니다. 죽은 자의 다시 살아남은 죽은 자가 될 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살았으나 죽은 자로 살아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의는 다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오의 의가 나를 사로잡아야 합니다. 즉 주님의 은혜로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이요 그래서 온전한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 그런 삶을 우리는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의 의가 너무 강했습니다. 자기들의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자기를 죽이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나사로가 다시 살아남으로 모든 증거가 확실해졌습니다. 예수 그분은 메시야라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도 그분을 믿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고 오히려 염려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를 이대로 둘 것이 아니라 우리부터가 믿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로마 사람들로부터 우리 땅과 민족을 지켜 주시리라고 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한 번도 로마에 대적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왕국을 만들 수 있겠는가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 생각입니까? 자기들의 생각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런 말들을 합니다. “이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와 달라서 마치 건축자의 버린 돌을 가져다 모퉁잇돌로 만드시는 데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이 절망입니까? 그렇다면 소망이 되시는 주님을 붙드십시오. 주님만을 의지하십시오. 더 이상 내 생각을 다 내려놓으십시오. 빨리 포기하십시오. 더 이상 주저하지 마시고 “주님이 나를 죽이시든지 살리시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나는 주님의 하시는 대로 따라가겠습니다. 주님만을 바라보겠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하겠습니다.” 고백하십시오. 그래서 나사로를 살리듯 나를 살리시는 귀한 역사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 나타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야바의 잔꾀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 도다.”  

그 해에 대제사장이 된 가야바는 그 전 해의 대제사장인 안나스의 사위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주신 명령을 통해 아론을 대제사장으로 세우시고 대대로 그들에게 아들을 주어 대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해에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예수께서 대제사장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안나스에게 아들을 주지 아니하셨는데 그러자 안나스는 그의 사위로 대제사장을 세우는 불법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하시는 제자 요한은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고 요 18:15에서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됐든 그 해의 대제사장은 유월절 양을 잡아 그 피로 지성소에서 속죄제를 드릴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 한다”는 것은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그의 본심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왜 그가 이런 말을 합니까? 대제사장들은 사두개파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하고 헬라와 로마로 이어지는 외국의 세력과 손을 잡고 유대의 재력과 정치권을 장악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이 일으키고 있는 이 소란과 유대인들의 기대와 흥분으로 인해 로마가 진압군을 보내 결과적으로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빼앗아 가게 될까봐 지금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차라리 한 사람이 죽어서 평안한 것이 더 낫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은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만 유지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나만 아니면 되고 나만 잘 살면 되고 나만 평안하면 되고 나만 좋으면 되는 것 이것이 오늘날의 사두개인들입니다. 반면 나보다 더 믿음이 좋은 사람이 있으면 말하라고 하는 것이 또 다른 바리새인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남들을 쉽게 정죄합니다. 나쁜 놈이라고 손가락질을 합니다.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보십시오. 여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 모인 공회가 그런 가야바의 말에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킵니다. 그건 무언의 동의입니다. 

하여간 권력을 잡은 사람의 속성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그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누구 뜻이건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 가야바의 말은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인도 악인도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는 도구라는 사실을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가야바가 자기 생각과 자기들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를 죽이려고 하지만 사실 이를 통해서 그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한 뜻을 위한 도구가 되어야지 악한 뜻을 위한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악도 선으로 바꾸어 가십니다. 그렇다면 쓰임 받고 버려지는 그런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계속해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선한 도구입니까?

하나님께 나를 완전히 내어 맡기는 사람입니다. 내가 없는 것 때문에 절망하고 내가 안 되는 것 때문에 몸부림치고 내가 약한 육신 때문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내 모습 그대로 주 받아달라고 나를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여 달라고 나는 그저 감사함으로 주님 앞에 엎드릴 뿐이라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아오십시오. 나를 온전히 주님께 이렇게 내어드리게 되면 주님이 나를 새롭게 빚어 가십니다. 새롭게 만들어 가십니다. 토기장이가 질그릇을 빚듯이 그렇게 나를 빚으시고 내 삶을 빚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삶으로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남자가 사막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었습니다. 목이 말랐지만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비몽사몽간의 상태에서 걸어가던 그의 눈앞에 갑자기 시원한 잎을 드리우고 있는 야자나무 숲이 나타났습니다. 물이 솟아 나오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 보고 듣고 있는 것은 신기루에 불과해. 환상이 현실처럼 나타나서 내 눈을 속이고 있는 거야.”
그는 반쯤 의식을 잃은 채로 쓰러졌습니다. 얼마 후 사막을 유랑하던 두 사람이 야자나무 숲 앞에서 쓰러져 죽은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한 사람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자네 이해할 수 있나? 이렇게 물이 가까운 곳에 있고 야자열매가 즐비한데 어떻게 굶주려 죽을 수 있는 거지?” 
기억하십시오. 불신은 자신의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은 불가능도 가능케 합니다. 

“대저 주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는 아름다운 고백을 우리가 주님 앞에 드려야 할 것입니다.
나를 부르신 주님 나를 보배로운 자녀로 부르시고 택하신 주님의 보배로운 선택 앞에 우리가 감사하며 보배로운 믿음의 사람들 다 되심으로 아름다운 사랑을 실천하며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은혜와 능력 가운데서 날마다 승리하는 복된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소망의 간구가 다 이룸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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