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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가르침의 시작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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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가르침의 시작 (마 5:1-12)

 
비신자들은 예수님을 부담스러워하지만 설교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부담스러워합니다. 그 이유는 실천하기 어렵고 가르치기도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예수님에 대해서는 말을 많이 하는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많이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건너뛰고 예수님을 말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6:46절에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가 그 당시에 그런 말씀을 기록했다는 말은 이미 그 문제가 그 당시에 존재했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문제가 이미 그 당시에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함께 공부해 나가고자 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있는데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행적부터 기록했고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말씀부터 기록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5장부터 7장까지 장장 석 장 동안 예수님의 말씀이 수록돼 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행적을 소개합니다. 반대로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행적부터 말하다가 이후에야 예수님의 말씀을 소개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우연한 것이 아니에요. 마가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았느냐.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하신 행적부터 소개한 것이고 반면에 마태는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보았느냐.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전하시는 메시야로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예수님의 말씀부터 기록한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난 사건이 있지요. 제자들이 두려워서 예수님을 깨웁니다. 

마가복음의 그 기사를 보면 예수님이 먼저 바람을 꾸짖으시고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그리고 돌이켜 제자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두려워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순서가 돼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깨셔서 먼저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믿음이 없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꾸짖으시고 그리고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우연한 것이 아니고 의도적인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행적부터 강조하려고 했고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에 우선순위를 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차이점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훨씬 더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치고 소위 역사적인 예수라는 말을 안 들어 본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 그 말은 이후의 사람들에 의하여 부풀려지지 않은 거품이 없는 진짜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진짜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그 예수님을 역사적인 예수라고 부릅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이 다 역사적이라고 보지만 그걸 믿기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세상에는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 예수님의 진짜 역사적인 말씀을 찾는 방법 중에 비유사성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독특한 말씀일수록 진짜 예수님의 말씀일 가능성이 많다는 설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한 말, 다른 시대에도 접할 수 있는 말이라면 이후 사람들이 추가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독특한 말씀,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다른 시대에 찾아볼 수 없는 예수님에게만 있는 독특한 말씀일 경우에는 그게 진짜 예수님의 말씀일 가능성이 많다는 설인데 그런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보면 예수님만이 하시는 독특한 말씀이 많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면 첫째로 ‘아무개는 뭐라고 말했지만 나는 너에게 뭐라고 말한다’ 이런 어법은 애수님에게만 찾아볼 수 있는 어법인데 예수님의 독특한 스타일로써 당신의 권위를 다른 사람의 권위보다 위에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로 ‘누가 너희에게 뭐라고 요구하면 너희는 이렇게 하라’ 이런 식으로 남들이 요구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주라는 식으로 말씀하신 어법이 있습니다.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고,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고,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 escalation(에스컬레이션)이지요. 점점 올라가는 것이지요. 일반인의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말씀, 이것이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그들의 입을 막는 결과를 가져오지요. 

그리고 오늘 본문의 아홉 가지 복, 흔히 팔복이라고 하는데 팔복이라고 하는 사람은 셀 줄 모르는 사람이에요. 세 보면 여덟 가지가 아니고 아홉 가지입니다. 아홉 가지 복, 이것도 예수님에게만 발견할 수 있는 독특한 말씀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 아홉 가지 복은 평소에 복이라고 여길만한 것이 아니에요. 누가 심령이 가난한 것을 복이라고 여기겠습니까. 누가 애통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누가 요즘 시대에 온유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하겠습니까. 누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을 환영하려고 하겠습니까. 누가 의를 위하여 핍박받으려고 하겠습니까. 누가 예수님 때문에 욕을 먹고 핍박을 받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기에 등장하는 아홉 가지 복은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유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생각하고 평소에 행복한 사람이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온유하기 보다는 강한 사람을 더 부러워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보다는 처세술이 있고 적당히 세상을 따라가는 사람을 유능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이 세상의 나라를 선호하고 이 세상에서 잘 살기를 원하고 이 세상에서 권력을 누리기를 원하고 이 세상이 더 편하고 익숙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 너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느니라’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친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잘 나가기만 한다면 굳이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젊은이들이 영원히 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교회에 진지하게 발을 들여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유한 사람이 자기의 부를 즐기면서 살려고 하는 한,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따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만족한 사람은 굳이 신앙을 가질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일수록 전도하기가 어려워요. 건강한 사람,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일수록 전도하기가 어려워요. 교회 나오려고 하지 않아요. 회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 누가 신앙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느냐.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이 열거하신 부류의 사람들이에요. 심령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심령이 가난하다든가 애통한다든가 이런 것 자체는 괴로울 수 있지만 그런 사람들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역설적인 것이지만 사실이에요. 인생의 괴로움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든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정말로 복이 되는 것입니다. 

최근에 개봉한 임파서블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2005년 태국의 쓰나미의 실화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이 쓰나미에서 생존한 어느 가족을 그렸습니다. 부모와 어린 네 자녀, 모두 여섯 명이 푸켓에 휴가를 갔다가 쓰나미를 만났어요.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몰라요. 그런데 여섯 명이 다 기적적으로 생존해서 재회합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실화입니다. 모두 칠천 명이나 푸켓에서 죽었는데…. 그래서 이 사람들이 옷은 다 누더기가 됐고 얼굴에는 상처가 있고 그런 상태로 대사관이 마련해 준 비행기를 타고 고국으로 돌아가는데 누가 벨트를 매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애들부터 전부 벨트를 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인생이 거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때달은 것입니다. 이들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가 믿어지지 않고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로 감동하고 인생이 거저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어린 애들로부터. 살아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가족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쓰나미를 큰 재앙을 당해본 후에 이 모든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생의 시련 자체는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정말로 귀중한 것,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만든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축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아홉 가지 복은 역설적이지만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지 않는 곳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유한 사람은 이런 시련을 직접 겪지 않더라도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강퍅한 사람은 이런 시련을 당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도리가 없습니다. 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은 인생에 대하여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세상 문제를 남의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고민하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마지막 복 아홉 번째 복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지난 주일에는 제가 <내게로 오라>는 말씀으로 설교했는데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천국의 윤리만을 말씀하신 게 아니고 당신에 대하여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나’라는 단어가 요한복음에만 등장하는 게 아니고 마태복음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나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다’라고 말씀하셨고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저를 시인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고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고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셨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구절이 마태복음에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의 윤리만을 가르치려고 했지 자신을 믿으라고 말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진지하게 읽지 않은 것입니다. ‘랍비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은 청년에게 예수님이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고만 말씀하신 게 아니고 그 다음에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리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윤리적인 요구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앙적인 요구가 담겨져 있습니다. ‘나를 좇으라 내게로 오라 내게 배우라’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도 가장 마지막으로 말씀하신 것이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안전하게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숨긴다면 안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가 사람 앞에 나를 시인하지 않으면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너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믿음을 숨길 수 없어요. 믿음은 숨기는 것이 아니에요. 숨긴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에요.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행함으로 믿음을 보이리라고 했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일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 때문에 욕을 먹어본 경험이 있어야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아본 경험이 있어야 됩니다. 

오래전에 저희 교회에서 아동부 부흥회를 하기 위하여 선생님들이 주변 초등학교에 가서 하굣길 학생들에게 집회에 대한 안내지를 나눠주는데 저의 아이가 반의 친구와 같이 나오다가 선생님들이 거기서 나눠주는 걸 보고 선생님들을 만난 거예요. 그런데 자기 옆에 있던 친구가 안내지를 받자마자 그것을 땅에 버리더래요. ‘왜 나눠주는 걸 땅에 버리느냐?’ 그랬더니 그때부터 저의 아이를 때리기 시작했어요.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았어요. 어린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에요. 누가 그 아이에게 전도지 나눠주는 것을 땅에 버리라고 가르쳤습니까. 어린 아이라고 순전하게 받아들이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 앞의 인간의 모습을 이런 데에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도 이렇다면 어른은 오죽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나를 인하여’ 우리 때문이 아니고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우리가 천국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공의든 하나님의 심판이든 하나님의 상급이 이 땅에서 다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서 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급을 이 땅에서 다 받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에 주시는 상급을 바라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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