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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충만한 섬김 (행 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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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한 섬김 (행 4:5-12) 
 
 
우물과 샘물은 물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우물과 샘물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물은 사람이 물길을 중심으로 물 웅덩이를 만들고 그곳에 고인 물을 두레박으로 끌어 올립니다. 사람의 힘으로 끌어 올리는 물입니다. 인위적인 것이 가미된 것입니다. 반면에 샘물은 깊은 곳에서 솟아나 흘러내리는 물입니다. 인위적인 것이 가미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자연이라는 말은 그 단어 안에 참으로 귀한 교훈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연을 한자로 보면 ‘스스로자’ 자에 ‘그러할 연’ 자입니다. ! 그 뜻을 그대로 풀이하면 ‘스스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자연을 그대로 두며 자연 그 자체가 스스로를 조절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들어갑니다. 스스로가 그러한 것이 바로 자연입니다.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스스로 그러한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이고, 인위적으로 꾸며져 자연스러움을 잃어버린 것을 말합니다. 같은 물의 원천이지만 우물과 샘물의 차이는 자연과 부자연스러움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패턴을 모면 우물형과 샘물형이 있습니다. 우물형은 우물에서 물을 퍼 올려야 하는 것처럼 자기힘으로 신앙생활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과 의지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만들고 가꿉니다. 이 우물형의 신앙은 신앙의 기쁨이 크지를 못합니다. 구원의 감격, 예배와 기도의 기쁨도, 봉사의 감사도 별로 없습니다. 왜냐하면 스스로에게서 우러나 오는 신앙적인 삶이 아니라 의무감과 체면, 그리고 남들을 의식하면서 하는 신앙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스러운 신앙생활이 아닌 부자연스러움의 신앙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자동차를 세워 놓고 기아를 뺀 상태에서 밀면 차가 앞으로 나갑니다. 자동차 자체의 힘이 아닌 그 차를 미는 사람의 힘으로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미는 힘으로도 어느 정도까지는 차가 앞으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힘으로 밀어 앞으로 가는데는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아마 1km도 못갈 겁니다. 사람의 노력과 한계, 그리고 결심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만들어 보려고 하면 얼마가지 못해 그 한계에 부딪히고 맙니다.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우리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내용들을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쉬지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환란 중에서도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봉사자들은 죽기까지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명령들 앞에서 우리들의 의지와 노력과 결단만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신앙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작심삼일의 신앙 모습이 되고 맙니다. 이런 신앙은 자신의 힘으로 물을 길어 올리는 우? 건活?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이 부자연스럽습니다. 빌려 입은 옷처럼 어딘가 모르게 어색합니다. 

샘물형의 신앙은 다릅니다. 우물은 내 힘으로 물을 끌어 올리는 것이라면 샘물은 자연스럽게 안에서부터 솟아 오르는 것입니다. 깊은 곳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솟아 올라 밖으로 흘러 내리는 것입니다. 샘물은 다른 것으로 막으면 그 막은 틈새로 물이 솟아 오릅니다. 우물 형의 신앙의 힘이 나에게 있다면 샘물 형의 신앙의 힘은 성령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힘을 주실 때만이 가능합니다.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기아를 넣고 엑세레다를 밟으면 연료의 폭발하는 힘으로 자동차가 힘있게 나갑니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힘을 공급받아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길 때 내 힘의 한계를 뛰어 넘어 하나님은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너의 마음과 몸과 생명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만이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에베소서5장18절에 보면 ‘오직 성령충만함을 받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빌립보서 3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그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힘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충만함을 받으라고 수 없이 강조하십니다.  

성령 충만한 신앙생활은 땅에서 자연히 솟는 샘물처럼 자연스로움이 있습니다. 여러가지 어려운 환경에서든지, 아니면 남들이 부러워하는 환경에서든지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있으면 있는 대로 봉사하고 없으면 없는 대로 봉사합니다. 억지로, 의무적으로 하는 봉사가 아니라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과 모습으로 봉사합니다. 

그 자연스런 성령의 사람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요셉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꿈을 가질 때도 평안했습니다. 그가 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 보디발 장군의 종이 되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도 그랬고, 감옥에서 함께 있었던 왕의 신하들이 요셉 자신이 베푼 은혜를 잊고 있었을 때도,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가 자신을 판 형제들을 다시 만났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를 중심으! 로 일어나는 삶의 변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그의 신앙의 내용을 변화시키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은 신앙의 모습이었습니다. 요동치지 않는 평안의 신앙입니다. 그 힘은  내면에 있는 성령의 힘입니다. 저와 우리 행복한 교회 성도님들의 신앙생활이 우물 형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샘물형의 신앙생활이 되어 성령님과 동행하는 귀한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말하면 대부분 특별한 신앙의 현상들을 생각합니다. 어떤 상황에 따라 성령께서 임하시는 특이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삶은 특이한 삶이 아니라 물이 흐르는 것처럼 생활속에서 신앙생활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전과 15범의 험한 삶을 살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님을 경험하면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간증합니다. 간증집회를 합니다. 15범의 전과를 가졌던 사람은 자신의 험악했던 과거를 나열하면서 자신의 변화를 말합니다. 그에게 성령님 역사하셔서 그를 놀랍게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만 성령께서 임하신 것이 아닙니다. 평생 전과 1범도 되지 못했지만 예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을 아름답게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 더 간증적인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루 아침에 뒤집히는 교인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하루 아침에 변화되어 그 내용을 가지고 간증하러 다니며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변화를 증거했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집혔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도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단 말입니다. 이것은 성령 충만한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계속 뒤집히는 일이 반복되어야 합니다. 그런 신앙은 항상 충격적인 일이 일어나야 하고 항상 무엇인가 새로운 사건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나야 합니다. 일상적인 신앙생활은 너무나 밋밋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잠잠히 사랑하시는 그 상태를 견디지 못합니다. 무엇인가 계속 자극적인 상태에 놓여 있어야 자신이 하나님 안에 있다고 안심을 합니다. 신앙의 자극이 없으면 곧 시들어지고 불안해 합니다. 자연스러움이 없습니다. 믿음의 온전! 함과 여유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생애를 보면 성령은 받지 못한 사람과 성령을 받은 사람의 모습을 확연히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을 경험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매우 불안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항상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독차지 하려고 했습니다.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안정감이 없는 신앙이었습니다. 

변화산에서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말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자신의 만족만을 생각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놀라운 고백을 하지만 순간적으로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수 없습니다’라고 하나님의 사역을 거부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배반해도 나만은 죽임을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당신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위험이 닥치자 한 순간에 돌변해 자신을 저주하며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그런 베드로가 마가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중에 그곳에 임재하신 성령님을 경험합니다. 그 성령님을 경험한 후에 베드로의 신앙생활에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님 안에서 뒤집힘을 경험한 베드로는 뒤집힌 그대로 삶을 살아갑니다. 죽을 때가지 그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불안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베드로전·후서를 통해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증거합니다. 평생 예수님의 사랑을 고백하며 감격해 하며 살았습니다. 그에게서 변하는 상황에 따라 불안해 하는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그가 마지막에 순교를 당할 때 자신의 아내와 함께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순교장에서 베드로가 평안한 얼굴로 아내를 보며 이처럼 말합니다. “여보, 우리 하나님 나라에서 기쁨의 얼굴로 다시 만납시다. 사랑합니다.”였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마음의 평안은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도리어 소망 가운데 그 나라를 바라보는 평안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베드로는 성령의 임재하심을 경험한 후에 복음을 증거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 분을 통해 자신과 믿는 사람들이 구원 받았음을 증거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베드로를 잡아 그를 협박하며 더 이상 예수가 하나님 아들되심을 증거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계속 복음을 증거하며 그를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런 위기 속에서도 베드로는 담담하고 당당한 얼굴로 그들을 향해 말합니다. 본문 8절에 보면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속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받아 담대하고 복음을 증거하는 모습입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저의 행복한 교회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나갈 때 그 신앙의 힘의 원천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나눔의 목회철학을 담아 ' H자 형의 교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 가지의 비전 선언물을 세웠고 이 비전을 이루어 나가는 섬김의 원칙으로 '4H 운동‘을 제시했습니다. 그 가운데 첫 번째가 ' ' Holy spirit '입니다. ‘성령의 힘으로’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웃을 섬기는 힘이 한계성이 있는 우리 힘이 아닌 무한한 성령의 힘이 되기 원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교회를 섬기는 힘의 원천이 성령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령님의 힘으로 봉사하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삶 위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함께 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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