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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능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 엘로힘 (사 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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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 엘로힘 (사 43:1-7)

여러분,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긴 이름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황금독수리 하늘을 날며 세상을 놀라게 하다"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견줄만한 이름이 있습니다. 박하늘별님구름햇님보다사랑스러우리'입니다. 17자죠 

그렇다면 세계에서 가장 긴 이름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요? 피카소입니다. 
보통 우리가 피카소의 이름을 표기할때는 파블로 루이즈 피카소라고 합니다만 사실 이것은 그의 이름 첫 단어와 마지막 단어만 표기한 것이고 실제로 그의 이름은 파블로-딩고-호세-프란시스코-드파우라-호안-드로스-레메디오스-크리스피노-드라산티스마- 트리니나드-루이즈-피카소입니다. 

또 사람들은 이렇게 긴 이름뿐만 아니라 좋은 이름을 짓기 위해 애를 씁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은 이름을 잘 짓기 위해 예쁘게 짓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쓸까요? 이름은 그 사람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제 이름은 어떻습니까? 사실 저는 제 이름에 대해 크게 불만이 없습니다. 단 오랜 시간이 지나도 제 이름을 정확하게 쓰지 못하는 분들이 계셔서 그것이 아주 조금 아쉬울때가 있죠. 홍제영인데 홍재영 홍제형 홍재형 이라고들 많이 쓰시죠.. 심지어 오래된 친구들도 가끔 햇갈려 합니다. 
그런 제 마음을 아셨는지 하나님이 우리 교회 앞의 다리를 제 이름 비슷하게 지어주셨습니다. 홍재교인거 아시나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름이라는 것이 그 사람을 대표하여 표현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름은 아무렇게나 막 함부로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40일 캠페인 기간중 제5일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읽고 계시나요? 이번 40일 캠페인의 주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사람에게 이름이 중요하듯 우리 하나님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이름 역시 우리에게는 중요합니다. 따라서 이번 40일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대변하고 대표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이름을 하루에 하나씩 묵상하면서 깊은 은혜를 누리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이름은 제6과 따라해봅시다 엘로힘 하나님 
엘로힘 하나님입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 엘로힘이란 어떤 뜻을 가지고 있을까요?
여러분, 엘로힘은 엘이라는 단어의 복수형입니다. 엘이라는 단어는 말 그대로 하나님을 가장 대변하여 설명하는 가장 보편적인 이름입니다. 
그 단어의 본래의 의미는 영어로 스트롱, 더 파워풀 이란 뜻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로힘은 바로 이 전능하신 능력의 하나님의 복수형의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이 엘로힘의 하나님이 처음 쓰여진 곳은 어디일까요? 네 성경 맨 처음 창세기 1장1절에서부터 기록된 이름이었습니다 창1:1절 기억하시나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거기에 쓰인 그 하나님이 바로 엘로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즉 엘로힘의 하나님은 성경의 처음, 아니 인류 역사의 처음을 있게 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43:1절에서도 이 하나님은 먼저 창조주 하나님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창1장에는 이 엘로힘 창조의 하나님의 이름이 자그만치 31번이나 나옵니다. 그토록 엘로힘 창조의 하나님은 이 온 우주 만물을 세밀하고 정확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은 왜 누구를 위해서 이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신 것일까요? 하나님을 위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창1:26-28절입니다. 
누구를 위해서였습니까? 누구를 위해서 이 크고 광할하고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온 우주 만물을 만드신 것입니까? 바로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기 위해서 저와 여러분이 누릴 수 있도록 이 온 우주 만물을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즉 사람을 맨 마지막 6일째 창조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사람을 첫날에나 둘째 날에 만들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대로 살 수 없었겠죠. 왜 사람을 가장 마지막 날 모든 것을 다 만드신 후 만드셨을까요? 
하나님에게 있어 가장 귀하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은 해도 별도 달도 아닙니다. 아름다운 바다와 하늘도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건 사람 다시 말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이 온 천하보다 소중한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43:4절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보배롭고 존귀한 자가 누구인가?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는 것입니다. 서로를 축복하며 인사해봅시다. . 
당신은 보배롭고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 뭐라고 하든, 상황과 환경이 어떠하든 여러분이 하나님의 눈에 보석과 같은 사람들임을 절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 뭐 그렇게 대단하고 화려하고 엄청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치는 나 자신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데서 빛을 발하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옛날 스코틀랜드의 한 숲 속에서 아주 더럽고 지저분한 개가 발견되었습니다. 몹시 굶주려있었고,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저 개가 누구 집 개냐고 쳐다보면서 지나갔습니다. 한 경찰관이 지나가다가 그 개를 봤는데 목덜미에 이름표가 달려있습니다. 그 이름표를 유심히 봤더니 그 이름은 밥스라는 개인데 그 밑에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이 강아지는 왕궁에 속한 강아지입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 강아지를 데리고 경찰서에 가서 목욕을 시켜주고, 잘 보호해주고, 약을 발라주고, 그리고 먹여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찰관은 그 강아지를 잘 데리고 있다가 국왕에게 왕궁으로 전달해 주었습니다. 알고보니 얼마 전 국왕부처가 에든버러에 휴가를 왔다가 강아지를 잃어버리고 귀가하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국왕이 기뻐했는지. 

여러분! 그 강아지는 국왕의 소유이기 때문에 아무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비록 더럽고 지저분해보이고 겉보기에는 별 다른 강아지와 큰 차이가 없어보여도 그 개는 왕의 개이기에 그 개는 아무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개였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우리의 외적인 모습이나 우리의 드러나는 성품이나 우리의 삶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뭐 그렇게 대단하고 화려하고 엄청난 것이 없을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예수 안 믿고 떵떵거리고 사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못한 것 같기도 하고 이렇게 사는 게 과연 예수 믿는 건가 싶을 정도로 솔직히 낙심이 될 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의 여러분의 모습이 여러분의 전부가 아님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진품은 언젠가 진품으로서의 가치를 분명히 발하게 되며 모조품은 언젠가 모조품으로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우리의 인생이 우리의 삶이 세상 사람들보다 못한 것 같고 뒤처지는 것 같고 왜 그렇게 가난한지 왜 그렇게 못 따라가는지 왜 그렇게 안 풀리는지 답답하고 한숨이 난다 할지라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왕자는 왕좌에 있지 않아도 거지의 복장을 하고 시장 한 구석에 쳐 박혀 있어도 왕자이고 거지는 왕자의 자리에 앉아 왕자의 옷을 입고 있어도 거지입니다. 
가치라고 하는 것은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가치는 반드시 그 가치를 되찾게 되어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자 여기 만원이 있습니다. 이 만원이 아무리 구겨지고 밟혀지고 침뱉음을 당해도 그 가치를 잃어버릴 수 없습니다. 만원은 만원입니다. 

무엇입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찢기고 상하고 구겨지고 밟히고 침뱉음을 당했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왕자와 공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리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 우리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 그것을 우리가 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을 우리가 붙든다면 그것을 우리가 포기하 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분명 반드시 우리의 가치가 세상을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하나님의 유일한 단 사람이라는 그 가치임을 분명히 드러내주시는 보석인생, 명품인생으로 인도하여주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입니다. 1절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것이라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닌 자로 살아가려한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이 볼펜이 홀로 서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최고급 볼펜이라 하더라도 볼펜은 스스로는 서 있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는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도 멋진 문장을 만들어 낼수도 없습니다. 볼펜은 그것을 사용하는 누군가가 있을 때 의미가 있고 그 누군가 때문에 아름다운 그림도 멋진 문장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테레사 수녀가 고백했듯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몽당연필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쥐어지지 않으면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너무나 작고 부족한 존재일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쥐어지는 한 우리는 결코 작고 부족한 몽당연필이 아닙니다. 피카소에 손에 들렸던 작은 연필로 데생된 그 평범한 그림 한 장은 지금 유럽에서 대저택을 살 수 있을만큼의 가치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물며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그 엘로힘 하나님의 손에 들린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운 인생의 작품을 얼마나 가치있는 인생의 그림을 그려갈 지 그것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전능하신 하나님 엘로힘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시길 바랍니다. 그 분이 그리는 대로 그 분이 쓰는 대로 여러분의 인생을 써나가고 그려나가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때로 받아들이기 힘들만큼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그리는 것보다 이렇게 그리는 것이 더 좋을 것같아 보여도 아니, 전능하신 하나님 엘로힘 하나님의 이끄심을 믿고 그대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인생은 결국 아름다운 명품 인생, 보석 인생의 빛을 발하게 될 줄 믿습니다. 
 
첫 번째 엘로힘 하나님이 창조의 하나님이라면 두 번째 엘로힘 하나님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절-3절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여러분, 엘로힘 하나님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이제 할 일 다 끝났다고 뒷짐지고 마실 나가시지 않았습니다. 
엘로힘 전능하신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상속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창3장에서 그들이 범죄함으로 타락하게 되었을 때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나쁜 자식들, 내가 너희들을 위해 온 세상을 주었건만 너희들은 이 따위로 밖에 행동 못해! 하면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어떻게 하셨나요?  창3:21절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고 하였습니다. 
아니 짐승들이 얼마나 많은데 한 마리 잡아서 거 가죽옷 하나 해서 입거라 하실 수도 있을텐데 왜 하나님께서 친히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려 가죽옷을 지어서 입혀주셨을까요? 

여러분, 가죽옷을 입히려면 짐승을 잡아야 하고 또 피를 흘려야 합니다. 
여기서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입히셨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아담과 하와 그리고 그 후손으로 태어날 모든 인류를 위하여 구원의 계획을 준비하고 이끄실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 세상과 사람을 지으시고 그것으로 당신의 할 일을 다하였다고 뒷짐지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창조한 세상과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며 돌보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범죄는 사람이 했어도 하나님은 그 범죄한 사람을 버리지 않고 구원하셨습니다. 
끝까지 함께하시고 지켜주시고 책임지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사는 것이 중요할까요? 하나님만 우리를 끝까지 책임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좋지만 끝까지 좋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서로의 실수와 허물과 잘못 때문에 관계가 깨질수도 있고 신뢰가 깨질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책임지시고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책임지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2절 물 가운데서든 불가운데서든 지키고 보호하며 함께 하며 책임지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가장 무서운 것이 있다면 불이고 또 물일 것입니다. 
오죽하면 물불을 안 가리고 뛰어든다라는 말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이 엘로힘의 하나님이 나를 위해 물불을 안 가리고 뛰어들 것을 약속하고 계시니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은혜가 아닙니까?
아니 하나님이 뭐가 부족해서 말씀 한 마디로 온 우주를 창조하신 세상에서 가장 크신 하나님이 그렇게도 하나님 속 썩이고 불순종하고 곁길로 나아가는 아담이후 나를 위해서까지 그렇게 죽을 각오로 사랑하시는 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며 은혜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하나님이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들만큼 사랑하는 그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중년부부가 살았는데 부인이 언젠가부터 시력이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큰 글씨도 잘 읽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출근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남편이 며칠 동안 아내를 데리고 출근을 시켜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여보! 이제 당신 혼자 한번 출근해 봐요.”하고 말하였습니다. 아내는 너무 낙심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 우리 남편이 이럴 수가 있나?’ 너무 서러웠습니다. 그래서 혼자 출근을 하는데 너무 힘들었습니다. 전봇대에 부딪힐 뻔도 하고, 버스를 잘못 타기도 하고 너무 힘들었습니다. 매일 매일 힘든 투쟁과 싸움을 이겨나갔습니다. 무려 2년이 지났습니다. 그랬더니 이제 익숙해졌습니다. 버스도 지혜롭게 잘 타게 되었고, 길도 잘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버스를 내리는데 버스 기사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참 행복하시겠습니까?” “아니 뭐가 행복합니까? 앞도 잘 안 보이는데...” “아니, 남편분이 늘 이렇게 동행해주시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니? 우리 남편이 언제 나와 함께 동행합니까?” “제가 보니까요, 아주머니가 버스타면 뒷자리에 남편이 타시구요 내리면 남편이 따라 내리고요 늘 뒤에서 남편이 아주머니를 따라 가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들으니 얼마나 감사하고 얼마나 울컥하고 기쁨이 솟는지. ‘아! 우리 남편이 말은 그렇게 해도 내가 넘어질까 봐 나를 뒤에서 늘 지켜보고 있었구나.’ 남편은 아내를 따라갑니다. 아내가 잘 가서 직장에 출근하면 자기는 그제야 자기 직장으로 출근합니다. 그 일은 2년 동안이나 해 낸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남편을 원망한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왜 나의 이러한 어려운 일에 대하여 아무 음성도 들려주지 않는다고 왜 하나님이 당신을 나에게 보여주지 않는다고 왜 내게 기적과 같은 역사를 보여주지 않느냐고 묻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여러분 곁을 떠나셨던 적이 없었습니다. 내가 다른 것쳐다보느라 바빠서 하나님 못 보았던 것이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시선을 놓치셨던 적은 없었습니다. 내가 다른 것 듣느라 정신없어 못 들은 것이지 하나님은 늘 우리를 향하여 세미한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내가 다른 것에서 기적을 찾아 바빴을 뿐이지 하나님은 늘 우리를 위한 기적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나와 늘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과 내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귀를 열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손을 펼쳐 하나님의 강한 손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인생의 깊은 절망의 강물에서도 어떤 인생의 죽음과 같은 불꽃속에서도 머리카락 하나 상치않고 돌보시고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과 함께 하심속에 승리할 줄 믿습니다. 

성경에 보니 그런 주인공들이 있었습니다. 단3:19-23절입니다. 
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이런 뜨거운 풀무불에 던져져야 했습니까?

13-18절입니다. 
죽으면 죽어도 불꽃에 살라져 타 없어져 한 줌의 재가 되어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각오가 있었던 그들이 과연 어떻게 되었습니까?

19-23절입니다. 그냥 그렇게 그들이 끝나고 말았을까요?  
27절 말씀을 봉독하겠습니다. 머리털도 그을리지 아니하였고 겉옷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탄 냄새도 없었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겁게 되어서 그들을 태워 죽이기 위해 곁으로 갔던 사람들이 태워죽임을 당한 그 뜨거운 풀무불 가운데서도 머리털 하나도 그을리지 않고 불탄 냄새도 없도록 누가 지켜주셨습니까? 누가 함께 하셨습니까? 25절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인생 가운데 당하는 절망의 강물과 죽음의 불꽃은 우리 혼자 마지 못해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의 현장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고 작은 나를 위해 오늘도 그 절망의 수렁텅이 죽음의 불꽃 가운데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윗의 고백과 같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가운데로 지날지라도 해를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왜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인생의 깊은 절망의 강물은 무엇이며 죽음과 같이 고통스럽게 타들어가는 인생의 불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아무리 여러분을 해하려고 달려드고 위협해도 하나님이 그 가운데 함께 하심으로 여러분은 절대 죽지 않을 것입니다.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드시 그 가운데서 살아날 것입니다. 반드시 그 가운데서 일어설 것입니다. 반드시 그 가운데서 승리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그저 그런 째째한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만드시고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크신 전능하신 하나님 엘로힘 하나님이심을 우리 가운데 분명히 보여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밤 나를 온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나를 창조하신 나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는 이 엘로힘 하나님앞에 어떤 위협과 고통속에서도 나를 떠나지 않고 버리지 않고 함께 하시며 지키시고 인도하실 그 엘로힘 하나님앞에 부르짖어 기도하기원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 놀라운 역사와 은혜를 베풀어주시도록 우리의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시도록 그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우리 가운데 보여주시도록 간절히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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