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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 (롬 14: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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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섬기는 자 (롬 14:17-20)


해방 이후 미국 유학 1호를 기록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는데 한국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신문 기사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논문 쓰는 것을 중단하고 지도교수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교수님, 조국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박사학위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며 전쟁터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아니 여보게, 잠시 후면 학위가 나올텐데 조금만 참지” “교수님, 박사 학위가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조국으로 돌아가렵니다.” 그는 귀국하여 자원입대를 요청했지만 나이가 많아 거절을 당했습니다. 

그는 그 후 전쟁터에서 버려진 아이들을 모아 고아원을 만들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숭실대학교에서 소문을 듣고 그를 부총장으로 청빙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기도하고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부총장으로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평생 고무신을 신고 골덴 바지를 입고 버려진 아이들을 모아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고 그들을 공부시키는 것이 나의 사명이다.” 확실한 지위와 평탄한 미래를 버리고 폐교직전에 있는 거창고등학교에 부임을 하였습니다. 

교장 취임식에 참석한 학생은 모두 8명, 재정이 열악하기에 자신이 먼저 학교를 위하여 월급을 반으로 줄이겠다고 선언을 하자 교사들도 동조하였습니다. 그때부터 흩어진 학생들을 모으고 거창 땅에 전인교육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전영창 교장이십니다. 그의 모습이야말로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섬기는 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본서가 기록될 당시 로마 교회에서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계 기독교인들과, 율법에 매이지 않은 비유대계 기독교인들 사이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가르는 율법 규정을 지켜야 하는가의 문제를 두고 서로 힘겨루기를 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음식 규정이 신앙의 본질적 문제가 될 수 없다며 교회 안에서 추구해야 할 더 높은 가치를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17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교회에서 정한 음식을 먹어도 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들이 본질적인 사안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보다 높은 가치를 가지려면 성령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의로운 삶을 살고 서로 화평하며 다 같이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한 태도로 교회 생활을 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를 바르게 섬기는 자가 될 것입니다. 

교회는 공동체입니다. 공동체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공동체를 뜻하는 단어 ‘community’는 서로를 뜻하는 ‘com’ 과 선물의 뜻인 ‘munus’의 합성어로 서로 선물을 나누는 관계에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물질적인 선물만이 선물이 아닙니다. 존재 자체가 선물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들이 공동체를 굳게 세웁니다. 탓하고 불퉁거리고 잘잘못을 가리는 것을 역사적 사명으로 여긴다면 공동체의 기초를 허무는 행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설사 그리스도를 섬긴다고는 하지만 잘못 섬기고 있음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은,  

첫째로 기쁘게 하나니 

가네보 제약회사의 CEO 미타니 야스토(三谷康人)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원에서 시작하여 회장이 되고 회사를 일본의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킨 신화적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이 있었습니다. 뛰어난 능력 때문에 왕따를 당하기도 하였고 좌천과 실직의 위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기를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부인의 독실한 신앙에 의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습니다. “여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세요. 그러다가 실직이 되더라도 괜찮아요. 저와 둘이 전도하러 다니면 되니까요” 그는 부인의 말에 힘을 얻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이 되자’ 를 삶의 기준으로 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면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그는 가네보 제약회사의 최고경영자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신앙으로 50여개국의 3천여 비즈니스맨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회사의 일을 모범적으로 수행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며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이 되고자 하였을 때 그는 존귀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큰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누구를 기쁘게 하며 살고 있습니까? 삶의 수준을 결정하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마귀를 기쁘게 하는 삶은 최악의 수준입니다. 자신뿐 아니라 주변의 사람을 망치는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최고의 수준입니다. 축복의 통로가 됩니다. 성도들은 모름지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희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에 힘쓰다 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믿음도 성숙해지고 신앙생활이 즐겁게 됩니다. 인격이 다듬어져 존경받는 인물이 됩니다. 무엇보다 저절로 복음이 전파되기에 그리스도를 바로 섬기는 자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둘째로 칭찬을 받나니 

성 프란체스코(San Francesco d'Assisi)가 제자들과 함께 마을로 전도하러 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제자들을 모으고 전도에 대해 말을 하고 수도원 문밖으로 나갔습니다. 마을을 지나가는 동안 여러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마을 사람들도 프란체스코와 제자들을 알고 있었기에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프란체스코는 만나는 사람들한테 가볍게 인사만 했지 전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습니다. 제자들이 답답해서 물었습니다. “왜 전도를 하지 않으십니까?” 제자들이 물었지만 그는 대답도 않고 그냥 걷기만 했습니다. 

또 몇 시간이 지났습니다. 프란체스코가 드디어 입을 열었습니다. “이제 전도 그만하고 들어가자” 그리고는 제자들을 데리고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제자들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왜 전도하러 가자고 하시더니 한마디 전도도 하지 않고 그냥 오십니까?” 그때 프란체스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길을 걸으면서 이미 전도를 하였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면서 되물었습니다. “언제 전도를 하였단 말입니까?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걸요!” “그래 우리는 말을 하지 않았지!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우리를 보았고 우리가 예수 믿는 수도원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야 그렇지요. 

우리가 수도원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 그러니 우리는 전도를 한 것이다. 말로써 아니라 행동으로 말이야. 만일 우리가 지나다닌 것으로 전도가 안 되었다면 아무리 말을 많이 하였다 해도 소용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 말에 제자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본문 18절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서로 경쟁하고 분쟁을 일으키기 때문에 비난을 받습니다. 서로 판단하지 않고 서로 받아주는 모습을 보인다면 사람에게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을 고집하며 서로 다투는 게 아니라 사랑으로 받아주고 피차에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사람들에게 칭찬 받는 삶이 되어 사람들을 주께 돌아오게 하는 역사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덕을 세우나니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부자가 있었는데 아들을 낳아 잔치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잔치는 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기회에 동네 사람들을 대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큰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이번 잔치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초청해 상석에 앉혀 대접하지요” 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번 잔치에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를 다 초청해 가난한 사람은 골방에서 대접을 하고, 부자는 상석에 자리를 마련하여 대접할 것이다.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들은 잔치에 잘 먹으러 오는 것이다. 그래서 골방에 자리를 마련하여 눈치 보지 말고 마음껏 먹게 해야 하고, 부자가 잔치에 오는 것은 대우 받으러 오는 것이기에 보이는 상석에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돌아 갈 때는 둘 다 만족할 것이다” 이 말은 모두에게 적당하게 대접을 잘했다는 것입니다. 바로 덕을 세우는 모습이었습니다.

본문 19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옳고 그름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을 넘어서 아름다움에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교회의 덕을 세우는 일은 실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덕을 세우기 위하여 스스로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고 양보하기 때문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을 수 있고 포도주도 마실 수 있지만 그런 행동을 보고 혼란과 상처가 생기고 시험에 들 형제들을 배려해서 스스로 삼가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며 덕을 세우는 일이라고 바울은 강조합니다. 이는 교회에 덕을 세우는 일의 아름다움을 말한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서 자유로워진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자유는 좋은 것이나 남을 생각하지 않는 자유라면 공동체에 해로울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합니다. 남을 배려하여 나의 자유를 포기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자유이고 아름다운 것이 될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덕을 세우는 일입니다.

지미 카터 (Jimmy Carter) 전 미국 대통령은 대통령 이후의 삶으로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망치를 들고 헬멧을 쓰고 집을 짓고 있는 그에게 “대통령을 지낸 분으로 이런 일을 하시는 소감이 어떠하십니까?”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대통령 후에 이런 일을 하라고 대통령을 시킨 것 같습니다.” 궁극적인 가치나 소망이 대통령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통령 후에 섬기고 사랑하고 세워주는 일을 더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였습니다. 성도를 섬기고 사랑하고 세워주는 일에 더 가치로 여기는 사람이 바르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교회학교 교사들에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맡은 영혼들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칭찬 받는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공동체에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진정 그리스도를 섬기는 교사와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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