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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 (벧전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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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다한 죄를 덮는 사랑 (벧전 4:7-8)


영화관에 가는 일이 극히 드물지만 최근에 우리 교역자들과 함께 영화를 한 편을 보러 갔습니다. 정말 감동적인 영화였습니다. 워낙 원작소설이 유명하긴 하지만 지금까지 그 소설의 스토리를 가지고 만든 그 어떤 영화보다도 뛰어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영화는 영화인데 뮤지컬 영화입니다. 모든 대사를 노래로 하는 것이 긴박감과 극적인 효과를 떨어뜨리지 않을까 의심이 있었지만 그 우려를 말끔히 씻어내는 걸작입니다. 이미 무슨 영화인지 다들 짐작을 하셨으리라 봅니다. 

한국에서만 지금 관람객이 600만 명에 육박하고 있는 “레 미제라블”입니다. 프랑스의 문호 빅또르 위고(Victor Hugo)의 대표작인 대하소설을 원제목 그대로 뮤지컬화한 영화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레미 제라블”인 줄로 알고 있고 대부분은 그저 한 단어처럼 “레미제라블”이라고 부르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입니다. 프랑스말로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이 소설의 배경은 1832년 프랑스 빠리에서 있었던 6월 봉기입니다.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제를 이루려는 일련의 투쟁과정 중 1830년의 7월 혁명으로 쫓겨난 샤를(Charles) 10세 대신 프랑스의 왕으로 옹립된 루이 필립(Louis-Philippe)에 대한 일부 공화주의자들의 불만이 학생, 노동자, 부랑아들 주축의 봉기로 표출된 사건입니다. 6월 5일부터 7일까지 3일 만에 끝난 이 봉기에서 바리케이트를 치고 진압군에 대치하던 시위대는 백 명 가까이 죽고 삼백 명 가까이 다쳤으며 진압군에서도 그에 못지않은 숫자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이 소설과 영화에는 제목 그대로 정말 불쌍한 사람들이 무수히 등장합니다. 
먼저 주인공인 쟝 발쟝입니다. 그는 막노동으로 살아가던 사람인데 누이의 일곱 어린아이들을 굶어죽게 할 수 없어서 빵 한 덩어리를 훔쳤다가 감옥에 가야 했고 네 차례나 탈옥했다가 다시 붙잡히기를 거듭하는 사이에 형량이 누적되어 결국 19년 간 옥살이를 해야 한 사람입니다. 불쌍한 사람의 대명사처럼 여겨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빵띠느라는 여인도 있습니다. 이 여인은 직장 감독관의 음흉함과 동료 근로자들의 멸시와 미움의 희생이 되어 직장에서 쫓겨나고 어린 딸을 먹여 살릴 돈을 벌기 위해 긴 머리털을 잘리고 이까지 뽑히며 마침내는 몸까지 팔아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다가 애처럽게 죽는 비련의 여인입니다. 
그녀 외에도 가난 때문에 매춘굴로 들어온 여인들은 수도 없이 나옵니다. 
쟝발쟝이 끔찍이 아끼는 꼬제뜨를 사랑하는 귀족 청년 마리위스를 가슴 아리게 짝사랑하다가 무장궐기한 대학생들과 진압군의 대치 상황에서 목숨을 잃고 마는 에포닌이라는 여자도 있습니다. 이들도 다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어린 나이에 이 봉기에 끼어들었다가 바리케이트에서 총 맞아 죽고 마는 부랑아 소년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혈기왕성해서 궐기했다가 무참해 진압당하고 죽어가는 대학생들도 있습니다. 이들도 불쌍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진압군에 쫓겨 피할 곳을 찾는 대학생들을 향해 냉정하게 문을 닫고 외면하는 비겁한 시민들도 있습니다. 이들도 또 다른 의미에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 있습니다. 쟈베르 경감입니다. 그는 완고한 원칙주의자로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냉혈한입니다. 그는 그늘진 구석에서 어둡게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을 쓰레기 같은 인간들로 경멸하며 엄격한 법의 집행으로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는 강제노역장의 감독관이었을 때 자기 눈으로 직접 쟝발쟝의 괴력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쟝 발쟝이 완전히 변신하여 선량하고 추앙받는 시장이 되었을 때 마차에 깔린 시민을 보고 가만히 잇을 수 없어 마차를 들어 올려 시민을 살려주는 모습을 지켜본 쟈베르 경감은 그가 족적을 놓쳐버린 옛날의 죄수 쟝 발쟝을 머리에 떠올립니다. 

그는 시장이 옛날의 쟝 발쟝이라는 의심을 갖고 그의 정체를 확실히 밝혀 다시 그를 감옥에 쳐 넣고야 말겠다는 집념으로 그를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괴롭힙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정의롭고 공무에 충직한 것이라는 신념에 가득 찬 쟈베르 경감은 6월 봉기를 와해시키기 위해 시위대 사이에 위장 침투했다가 신분이 발각되어 처형당할 위기에 놓입니다. 그때 바로 쟝 발쟝이 나타나 그를 놓아주어 살리는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내면의 혼란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그토록 잡아 가두려고 했던 범죄자의 선처로 생명을 건지게 된 사실 때문에 상처 받은 자존심을 이기지 못하고 번민 끝에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맙니다. 불쌍한 사람들 하고는 상관없는 사람으로 보이던 그가 사실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가 모든 등장인물 가운데 가장 불쌍한 사람 아닌가 생각합니다. 

쟈베르 경감을 불쌍하게 보아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기의 임무를 충실히 완수하려 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 때문이겠습니까? 자기가 경멸하며 파멸시키려고 한 범죄자에 의해 오히려 생명을 건짐 받는 은혜를 입음으로 받은 자존심의 상처 때문이겠습니까? 6월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지략과 용기를 인정 받아 더 출세할 수 있을 사람이 마음이 괴로워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기 때문이겠습니까? 그 답을 찾는 일은 잠시 미루기로 합니다. 

쟝 발쟝을 무너뜨리려 한 쟈베르 경감을 쟝 발쟝이 살려주는 대목은 이 작품 속에서 가장 통쾌한 반전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불쌍해야 할 사람이 전혀 안 불쌍해 보이는 사람을 살려주는 것입니다. 가장 불쌍해야 할 사람이 전혀 안 불쌍한 사람이 되고, 전혀 안 불쌍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뒤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쟝 발쟝을 가장 불쌍한 사람에서 전혀 안 불쌍한 사람, 아니 가장 복된 사람으로 바뀌게 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람에게서 가장 귀한 가치의 발견이었다고 봅니다. 그 가치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이 답은 앞서 미루어두었던 답 곧 전혀 안 불쌍해 보이던 사람 쟈베르 경감을 가장 불쌍한 사람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즉 그는 사람에게서 가장 귀한 가치가 사랑이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랑을 모르는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고, 사랑을 아는 사람이 가장 사람다운 사람이며, 따라서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이라는 진리가 이 작품의 주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이 메시지를 깨닫는 순간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누가 정말 불쌍한 사람들인지를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쟝 발쟝을 가장 불쌍한 사람이면서 가장 위험스러운 범죄자에서 사랑으로 가득 찬 복된 인간으로 바꾸어놓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의 죄를 덮어준 한 신부의 사랑이었습니다. 출옥한 쟝 발쟝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먹여주고 재워준 신부에게서 떠나며 쟝 발쟝은 또 어처구니없는 죄를 범합니다. 신부 방에 있던 은식기들을 다 훔쳐가지고 달아났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뒤를 따라다니는 결찰에 의해 그는 의심을 받고 다시 붙잡혀 그 신부 앞에 서게 됩니다. 그가 갖고 있는 은식기들이 그 신부의 교회에서 나온 것이 아닌지를 확인 받으려는 경찰에게 신부는 자기가 쟝 발쟝에게 준 것이라고 말하고 그에게는 왜 은촛대까지 줬는데 그건 안 가지고 갔느냐며 그것마저 싸줍니다. 

여기서 쟝 발쟝은 크나큰 수치와 자기경멸과 회한에 사로잡혀 괴로워합니다. 사랑을 배신으로 갚은 자신의 초라하고 추악한 모습 때문에 통곡의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다짐한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겠다고. 그리고 사라졌던 쟝 발쟝은 새 이름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사랑으로 가득 찬 존경받는 인물이 됩니다. 그는 자기를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며 따라다니는 쟈베르 경감에 의해 자기의 본래 신분이 탄로 날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그의 사랑을 펼치는 일을 피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꼬젯뜨를 위해, 꼬젯뜨와 서로 사랑하는 청년 마리위스를 살리기 위해 그는 죽음을 무릅쓴 행동에 나섭니다. 천신만고 끝에 마리위스를 살려내고 그와 꼬젯뜨의 행복을 위해 그들에게서 사라집니다. 

그리고 감사하며 하나님께로 가기를 소원하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둡니다. 그는 쟈베르에 의해 그가 옛 쟝 발쟝임이 밝혀졌었지만 6월 봉기의 와중에서 우여곡절 끝에 오히려 쟈베르 경감의 목숨이 자기 손에 달리게 되는 상황을 맞았습니다. 눈엣가시 같고 자기를 늘 불안과 긴장 속에 몰아넣던 화근을 확실하게 제거할 절호의 기회였지만 쟝 발쟝이 택한 것은 쟈베르를 살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깨닫고 그를 변화시킨 바로 그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힘껏 실천하고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뮤지컬 영화 <레 미제라블>의 마지막 장면에서의 노래가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일이라”는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노래를 들으며 생각난 말씀이 요한1서 4장의 말씀들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요일4:11-12, 20-21) 

우리가 왜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에 대한 사랑 때문에 그가 사랑하시는 사람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만, 우리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많은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의 저자인 사도 베드로는 같은 편지의 1:18-19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하나님의 흠 없고 점 없이 순결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조상 때부터 헛된 행실에 빠져있던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어린 양 으로 희생제물이 되게 하시는 그런 사랑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같은 편지 2:24-25에서는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했습니다. 우리를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시며 길 잃은 양 같았던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채찍을 맞게 하시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게 하시는 사랑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또 같은 편지 3:18에서는 쓰기를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죄 없으신 아들을 죄 많은 우리 대신 죽게 하심으로써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는 사랑을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덮으셨다면 우리 또한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의 죄를 덮어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를 묵인하고 은폐하라는 말이 아니라 남의 별것 아닌 작은 허물을 캐며 광고하고 과장하며 비난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혹 잘못이 있어도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하나님께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 8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쓰기를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합니다. 

야고보도 쓰기를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약5:20) 했습니다. 잠10:12에서도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합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의 허다한 죄를 덮을 뿐 아니라 그 사람들을 불쌍한 사람에서 사랑의 사람으로, 생명을 살리는 사람으로, 복된 사람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셔서 그 성전 건물들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예언하시고는(마24:1-2)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마24:3) 여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0, 12) 하셨습니다. 서로 미워하고 불법이 성하며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지는 것이 말세의 징조라 하신 것입니다. 

온통 불쌍한 사람들이 들끓는 세상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하며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합니다. 불쌍한 사람들이 허다한 오늘날 사랑으로 그들을 행복한 사람들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의 도구로 쓰임 받는 것이 마지막 때의 가장 귀하고 중요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 그런 삶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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