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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빚 진자 (시 19:7-10, 롬 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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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빚 진자 (시 19:7-10, 롬 1:15-17)
  

우리나라는 선교를 통해서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복음이 들어온 지 이제 130년이 되었습니다. 전 국민의 1/4 정도가 복음화 되었습니다. 우리 국민 거의 전체가 복음을 들어 알 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복음을 듣지 못했다고 핑계 대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다종교 사회입니다. 국민 절대 다수가 기독교 아니면 불교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천주교 무속에도 소속되어 있습니다. 대부분 명목만 그리고 정서적으로 신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일 년에 한번 정도만 참여하는 신자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기독교는 매주일 예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들이 오랫동안 예수 안에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 들어와 사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삶인지 면역이 되어 잘 모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감격도 사라졌습니다. 좋은 것이 너무 많으면 좋은 줄을 잘 모르게 됩니다. 먹을 것이 너무 많아 감사나 귀함을 모르게 됩니다. 사람이 너무 건강하면 병든 사람이나 노약자의 입장을 잘 모릅니다. 부자 동네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을 잘 모릅니다. 배고픈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려면 가난한 동네에 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건강을 잃은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려면 병원 중환자실에 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려면 불신자들의 생활 속에 들어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 보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오늘의 관심사를 들어 보면 그들의 생각이나 대화수준 그리고 오늘의 관심들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안에 들어와 몇 년씩 살아가면서 그 삶 때문에 얼마나 세련되어지고 관심이 높아졌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며칠 전 남아공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가난한 난민지역에서 선교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술을 먹고 불을 질렀는데 4천세대가 불탔고 여러 명이 죽었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그들의 삶의 모습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들의 비참한 영혼, 가난하고 불행한 삶, 처참한 현실의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이 비관스러움을 느끼며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왜 저런 삶을 보시고 그냥 계시는지 모르겠다고 목사로서 생전 처음 하나님을 원망했노라고 말했습니다. 130년 전 우리나라에 왔던 선교사들도 똑같은 시각으로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선교사들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 가운데 “한국민족은 더럽고 추하고 한심한 민족”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서양인들이 130년 전에 이 나라에 와서 우리 선조들의 가난한 삶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런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민족은 130년 만에 이렇게 깨어났습니다. 오늘같이 발전하였고 눈을 뜨게 되었고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복음에 빚 진자 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꼭 해야 할 것은 전도와 선교입니다. 2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주님 명령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부활 후 승천하실 때 제자들에게 주신 당부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최후 당부의 말씀입니다. 그것이 전도하라는 당부입니다. 세상 만국에 이 복음을 전파하라는 당부입니다. 4복음서를 보면 한 결같이 맨 끝장에서 복음을 전파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첫 장인 1장에서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전도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 가운데 우선순위 1번입니다. 가장 시급한 일입니다. 

이 복음을 누구에게 전파하여야 하는가 하면 “온 천하 만민에게”입니다. 가깝게는 내 가족과 내 이웃과 내 민족입니다. 그리고 멀게는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명령 1호를 발령하셨습니다. 그것이 “세상에 전도하라”는 명령입니다. 모두 명령형으로 당부를 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최대의 사명은 이 전도하는 일입니다. 그 대상이 누구든지 상관없이 이 복음을 전할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우선순위 1번이 전도명령입니다. 

이 명령에 따라 서양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로 오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안한 것이 아니고 생각조차 못 하였습니다. 그들은 당시 조선 땅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대부분은 아시아 하면 중국이나 일본정도만 알고 선교 대상국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땅에 오게 된 것은 순전히 성령께서 깨닫게 하셔서 오게 되었습니다. 언더우드만 해도 중국에 가서 전도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조선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고 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와서 보니 우리민족은 너무 불쌍하고 가난하고 병들고 속수무책으로 운명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와서 제일 먼저 펼친 사역이 병원을 개설하고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운 일입니다. 특히 한국의 여인들이 너무 불쌍하게 집안에 갇혀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스크랜튼 선교사는 이들을 세상으로 끌어내려면 교육부터 시켜야하겠다 해서 세운 학교가 이화대학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섭리 중에 이루어진 사역들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결과 오늘 한국민족이 이렇게까지 눈을 뜨게 되었고 깨어나게 되었고 사람답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 복음의 결과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런 복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고 무역대국이 된 배경에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때 온 선교사들은 참 사도들이었고 진정한 선교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선입견 없이 우리나라에 와서 복음을 전파하고 전도하다가 죽어 이 땅에 묻힌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오늘 우리는 너무 안일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너무 편히 신앙생활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세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우선순위 1번이 전도하는 삶입니다. 

구원받음

두 번째는 구원받음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복음은 이 복음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능력이냐 하면 회복시키는 능력입니다. 구원은 몇 가지 회복을 시킵니다. 하나는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연관 맺어 살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정체성도 상실했습니다. 마치 끈 떨어진 연과 같이 방향도 목적도 없이 날아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방황대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 삶의 이유가 무엇인지, 왜 죽어야 하는지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말은 내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두려움의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정체성을 상실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예수를 알게 되고 예수를 믿게 되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는 예수 안에서 잃어버린 나의 정체성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회복되었다는 말은 내가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은 내게 누구인지 내가 장차 어떤 길을 가야 하는 사람인가를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잃어버린 나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전도가 무엇입니까. 이 사실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가 죄인이었고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 내가 예수를 발견하고 그 예수님이 나의 죄를 사하시고 면제받아 내가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내가 상실한 나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사야 53장5절을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거룩한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마귀의 소속에서 성령의 소속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예수 안에서 참 자유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회복입니다. 또 하나는 자화상의 회복입니다. 구원은 자화상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창세기 1장27절을 보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대신 마귀의 형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의 모습은 얼굴에 살기가 등등하고 죄를 짓고 고뇌하고 불만이 가득하게 살고 시기와 질투로 가득한 얼굴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마귀의 형상입니다. 여러분이 한창 화나고 불만이 있고 원망이 가득할 때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십시오. 그 얼굴이 하나님의 형상과는 거리가 먼 마귀의 형상입니다. 그런 얼굴에 화장을 진하게 한다고 세련되고 선해지겠습니까. 

로마서 3장23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죄 때문에 하나님과 나 사이에 담이 생기고 벽이 가로막아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자화상을 잃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어느 정도는 꾸미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겉을 꾸민다고 내면까지 고상해 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엇 보다 마음을 가꾸라고 말씀합니다. 내 속 마음은 여전히 공허하고 혼돈하고 흑암과 절망에 빠져 있는데 겉만 번지르르 하게 포장한다고 고상해지는 것입니까. 오늘 대부분 인간상은 속은 텅 빈 인간상입니다. 텅 빈 자화상을 갖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왜 자살을 합니까. 속이 가득 차 있으면 왜 자살을 하겠습니까. 왜 사람들이 허무를 노래하고 왜 슬픔을 고백합니까. 속에 허무와 슬픔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자화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인간이 자화상을 회복하는 길은 예수께 가는 길 뿐입니다. 사람들이 별소리를 다해도 예수 없는 삶은 공허합니다. 혼미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자화상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 자화상이 회복되면 신분이 바뀝니다. 마귀의 자화상에서 천국의 시민으로 신분이 바뀝니다. 베드로전서 2장9절을 보면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 왕 같은 제사장이요” 이라고 했습니다. 신분이 그렇게 바뀌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복음의 소중함을 아는 회복입니다. 사도바울은 여기서 전도자의 중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고백은 아주 의미심장한 고백입니다. 오늘은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것이 당당한 시대입니다. 당당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풍기고 다닙니다. 어느 장소에서나 TV에서도 당당하게 소신 있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이 옛날에는 고상하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사도바울 시대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노니”라고 부정어법을 사용해서 말씀합니다. 

이유 있는 표현입니다. 사도바울은 고전 1장22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막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었도다.” 왜 복음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었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은 복음을 전해 듣고 분개했습니다. 왜냐하면 반역죄로 십자가에서 처형된 죄수가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며 어찌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냐 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눈에는 이 복음이라는 것이 억지 주장처럼 들렸습니다. 고로 유대인들에게 복음은 거리끼는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헬라인들은 복음을 전해 듣고 비웃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왔으며 또 왔다 한들 한사람의 죽음이 어떻게 전체 인간의 구원과 관계가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인의 눈으로 보면 복음은 무지한 천민이나 믿는 것이라고 치부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파했으니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고로 당시에는 전도자들이 멸시와 조롱과 배척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 당시는 대단한 용기 없이는 복음을 증거 하기가 어려웠던 시대입니다. 그때 사도바울이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나를 보고 우러러 보기 때문이 아닙니다. 아직은 잘들 모르고 반대도 하고 비난도 하지만 그러나 언젠가 저들이 이 복음을 깊이 알게 될 때 그래서 모두 구원을 받게 될 때 그리고 구원받고 나서 왜 이 복음을 늦게 알게 되었을까 하고 고백하는 것을 듣게 될 때가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에 사도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노니”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기대합니다.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 에게로다.”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나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 구원의 능력이 되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알고 보면 왜 이 복음을 부끄럽게 여기겠습니까. 

결론입니다. 전도는 이렇게 소중한 것입니다. 전도는 회복시키는 작업입니다. 자화상을 회복시키고 정체성을 회복시키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하고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교회가 가지는 가장 큰 사명은 전도입니다. 이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시키고 자화상을 회복시키는 일 즉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해 주는 이 일이 가장 우선해야 할 일입니다. 이 일에 주님은 가장 먼저 뜻을 두라고 강조하십니다.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신신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이 복음을 전하라”,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이 복음을 전파하라.” 그러면서 바울은 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오늘 교회들이 가장 시급히 할 일은 전도하는 일입니다. 전도는 회복운동이고 잃어버린 정체성과 자화상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작업입니다. 예수님이 승천 시에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이 복음을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나는 빚 진자라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이 복음전하기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전도는 빚을 갚는 일입니다. 전도자에게 상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평안히 살아가는 우리는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하나는 전도자를 위한 기도입니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6장에서 “너희는 기도와 간구를 하되 먼저는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또 나로 담대히 전하기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또 하나는 전도자를 위하여 헌금하는 일입니다. 

물자를 충분히 보내 주어야 잘 싸울 수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선교사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선교지에 가서 전하는 선교사가 있습니다. 몸으로 때우는 선교사입니다. 또 하나는 기도실에서 선교사를 위해 기도하는 선교사입니다. 영적 선교사입니다. 세 번째는 물질로 후원하는 선교사입니다. 이 세 역할이 잘 이루어질 때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우리어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선교사들입니다. 각자 주어진 일터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도 선교하는 일입니다. 열심히 선교하는 일에 재정을 지원하는 일도 선교사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는 이 역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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