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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인의 종교와 아벨의 종교 (창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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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의 종교와 아벨의 종교 (창 4:1-8) 

인간은 왜 병들고 죽느냐? 하와가 뱀에게 속아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와의 남편인 아담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선악과를 따먹고 우리를 원죄의 구렁텅이로 빠뜨렸습니다. 죄와 사망이 인류에게 오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 저주만 하신 것이 아니라 위대한 복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장 15절은 '원복음'이라고 불립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 3:15). 

후손이라는 단어는 영어로 복수와 단수 두 가지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먼저 ‘offspring’은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을 다 가리키는 것으로 복수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seed’는 단수를 의미합니다. 즉, 창세기 3장 15절의 앞부분에 나오는 후손은 복수이고 뒷부분의 후손은 단수인 것입니다. 복수를 의미할 때는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대대로 적대감을 가지고 갈등하게 될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단수를 의미할 때는 사단이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말씀의 의미를 얼마나 깊이 깨달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하매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가인이라고 붙였습니다. 가인은 히브리어로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얻었다’는 의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이 아들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여자의 후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가인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루터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처음으로 내가 아들을 얻었다. 이 아들이 여호와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은 본인을 하나님 즉, 여호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어보자 하나님이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 3:14).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여호와는 메시아의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가 아들을 낳고 여호와라고 한 것은 바로 메시아를 얻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가인은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가인을 낳고 또 아들을 낳아 아벨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아벨이 가인의 아우인 것은 틀림없지만 둘째 아들인지는 확실치가 않습니다. 가인과 아벨 사이에 자녀를 또 낳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 4절에 보니까 아담이 셋을 낳은 후 800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다고 나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90살이 되어 경수가 끊어져 출산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이 기적을 베풀어 이삭을 낳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그런 기적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냥 800년 동안 계속해서 낳은 것입니다. 하지만 아벨이 둘째 아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아벨이 죽고 나서 하나님이 셋을 주시고, 셋 다음에 800년 동안 자녀를 낳았다고 했으니 둘째 아들일 가능성은 매우 높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하는 방식은 구원역사에 중요한 인물들만 기록하고 중요하지 않은 사람을 빼버리기 때문에 둘째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아벨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허무’입니다. 아벨을 낳을 때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헛되다는 것을 깨달아서 아벨이라고 이름을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담과 하와는 가인이 메시아일 것이고 아벨은 별로 의미 없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습니다. 성경을 보면 자식 중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쓰지 않으시고 그냥 마지막에 어쩔 수 없이 낳았다고 생각했던 자녀를 쓰시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다윗을 보십시오. 사무엘이 이새와 그 아들들을 초청했는데 이새가 다윗은 부르지도 않습니다. 다윗은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여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신 것처럼 우리가 볼 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되는 사람을 하나님이 크게 쓰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가인은 메시아가 아니고 마귀에게 속한 뱀의 후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벨은 하나님에게 속한 여자의 후손이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말씀하신대로 이 둘 사이에 적대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간에 적대감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결국 둘 사이의 적대감은 인류 최초로 살인을 저지르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가인과 아벨 두 사람의 유사점이 무엇이고 차이점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Ⅰ. 가인과 아벨의 유사점 

먼저 가인과 아벨은 세 가지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다. 첫째, 두 사람은 모두 종교적인 존재였습니다. 사람은 뱀의 후손이든 여자의 후손이든 모두 종교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 3절에 보면 세월이 지난 후 가인과 아벨은 각각 여호와께 제물을 드렸다고 나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성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라는 말은 공동번역을 보면 ‘때가 되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제물을 드려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왔을 수도 있고 추수할 때가 왔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사회에서 아무리 종교를 외면하고 없애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학교는 없어져도 종교는 없어지지 않습니다. 종교는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종교가 싫다고 하는 그 사람도 종교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의 종교를 갖고 있는 종교인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종교냐 하나님이 열납하시지 않는 종교냐 그 차이 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에게 제물을 드렸습니다. 제물을 드리는 것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유화’(宥和, propitiation)라고 부릅니다. 야곱과 에서 사이에서도 유화를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에게 사기를 쳐서 에서가 받을 축복을 모두 가로챘습니다. 그 뒤 형이 무서워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갔습니다. 밧단아람이라고도 불리우는 하란에서 20년 동안 살면서 아내를 넷씩이나 얻고 자녀를 열두 명이나 얻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제물을 얻어서 돌아오는데 에서가 군사를 거느리고 오는 것입니다. 

20년 전에 자신의 축복을 빼앗은 아우를 그냥 두지 않겠다며 진노의 진군을 해오는 것입니다. 그러자 야곱이 어떻게 합니까? 자기의 양떼와 소떼 중에서 일부를 먼저 앞으로 보냅니다. 그것을 받고 형의 진노가 누그러지길 바랬던 것입니다. 사람이 성질을 내다가도 누가 좋은 선물을 주면 진노가 풀리지 않겠습니까? 야곱이 쓴 정책이 바로 유화정책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양심 속에 죄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제물을 드렸다는 점이 두 번째 공통점입니다. 

셋째, 두 사람 모두 제물이 하나님에게 열납되기를 원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선물을 가져갔는데 받지 않고 물리치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가인과 아벨도 하나님이 제물을 열납해주시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피가 없는 곡물로 제사를 드린 가인의 제물은 열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양을 죽여서 피로 제사를 드린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열납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가인은 자기 제물은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열납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가인은 심히 분노하고 안색이 변했습니다. 자기가 잘못해놓고 왜 분노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가인은 아벨을 향해서 분노했고 자기 제물을 열납하지 않으신 하나님을 향해서도 분노했습니다. 가인의 종교는 하나님이 거절하셨고 아벨의 종교는 하나님이 열납하신 것입니다.
 

Ⅱ. 가인과 아벨의 차이점 

가인의 종교와 아벨의 종교의 차이점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두 사람은 내면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히 11:4). 

아벨은 믿음이 있었지만 가인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고 무엇을 믿지 않았던 것입니까? 아벨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메시지를 믿었고 가인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메시지를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이제부터 하나님에게 오려면 짐승을 죽여서 피를 흘려야 올 수 있다는 것을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므로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을 아벨은 믿었고 가인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둘의 내면이 달랐던 것입니다. 

둘째, 내면만 달랐던 것이 아니라 외면적으로 제물의 차이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제가 존경하는 미국의 대 신학자인 프린스턴의 신학교수 벤자민 워필드(B. B. Warfield)가 한 사람의 내면과 외면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벨은 내면의 믿음이 있었으므로 피의 제물을 드린 것이고 가인은 내면에 믿음이 없었으므로 피가 없는 제물을 드린 것입니다.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 4:5). 하나님은 가인이란 사람도 열납하지 않으셨고 그 제물도 열납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셋째, 두 사람은 속한 자가 달랐습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계시를 거부하고 아벨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요일 3:12). 

가인은 마귀에게 속한 자였습니다. 마귀에게 속하여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벨은 하나님에게 속한 여자의 후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속했습니까? 마귀에게 속했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을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누구에게 속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은 마귀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중간은 없는 것입니다. 가인은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피가 없는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피의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Ⅲ. 갈등의 결과 

하나님이 가인의 종교를 물리치시고 아벨의 종교를 열납하시니 가인이 성질을 내고 안색이 변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 

가인이 분노하자 하나님이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느냐며 악을 행하였으니까 낯을 들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자녀들 중에도 부모 앞에서 도망가고 부모 얼굴을 안 보려는 사람은 틀림없이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선을 행치 않고 악을 행했기 때문에 낯을 들지 못하는 것이라며 선을 행한다면 낯을 들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이 가인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데 왜 계속 그 종교를 고집하느냐며 종교를 바꾸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시지 않는 종교는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종교로 바꿔야 합니다. 종교를 바꾸지 않고 믿음 없이 살면 죄가 맹수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그 사람을 사로잡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납하시지 않는 종교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결국 죄에 사로잡혀서 죄를 짓고 살다가 죗값을 치르게 되는 것입니다. 

가인은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음에도 종교를 바꾸지 않았고 결국 죄에 사로 잡혔습니다. “그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 4:8). 

가인과 아벨은 갈등을 겪지만 두 사람이 서로 미워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일방적으로 아벨을 미워해서 갈등이 생긴 것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벨이 가인을 미워했다는 이야기는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을 미워합니다. 하지만 여자의 후손들의 마음속에는 분노나 미움이 있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분노와 미움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누군가를 미워하고 분노하고 있다면 그것은 뱀이 준 마음인 것을 알고 갖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고 도리어 축복해야 합니다. 


결론 

인간이 살아가면서 종교는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 사회에 존재하는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정치와 경제적인 갈등 같아보여도 사실은 종교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종교를 삶의 변두리에 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쫓아내려고 해도 종교는 삶의 변두리로 쫓겨나지 않습니다. 종교는 액세서리가 아닙니다.

종교는 우리 삶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열납하지 않는 종교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종교로 바꿔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낯을 들 수 없고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의 종이 되어 살다가 스스로 죗값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영원히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믿음은 자기의 사사로운 생각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생각을 글로 적어보면 첫 페이지와 끝 페이지의 내용이 모순되고 다 틀립니다. 읽어볼 가치가 없는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자기의 사사로운 생각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구원의 길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죗값을 갚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몸을 제물로 바쳐도 하나님이 죄 있는 제물은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만 제물로 받으시지 흠 있는 제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는다고 해도 우리의 죗값을 갚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이신데 인간이 되셨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리는 제사를 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받으시고 이제부터는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자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악한 마귀에게 속하여 악한 마음을 품고 살다가 저주의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인의 종교를 따라서는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아벨의 종교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에게 속한 자가 되어 사시기 바랍니다. 

불신자들은 우리 신자들을 미워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신자를 미워하면 안 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증거입니다.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으면 그것이 하늘의 상급이 되는 것입니다. 천국의 상은 예수님을 믿고 고생한 것이 무엇인지, 예수님을 믿고 핍박받은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서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항상 복음 앞에 살아야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교만해지려고 할 때, 이 땅에 육신을 입고 낮은 자로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면 교만이 겸손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에게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생기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때, 하나님이 우리가 죄인이고 하나님과 원수 노릇할 때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셨던 것을 생각하면 용서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복음은 우리 삶에 끊임없이 적용될 수 있는 원리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열납하시는 종교를 믿고, 그 종교를 귀중히 여기시는 성도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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