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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 이레 (창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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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이레 (창 22:1-14)

할렐루야. 우리 옆에 분들과 한 번 인사하기 바랍니다. 힘찬 새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몽골에 들어가서 선교사로 사역하는 이용규 선교사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처음에 지은 책이 ‘내려놓음’이라는 책이고 그 다음에 ‘더 내려놓음’ 그 다음에 ‘같이 걷기’ 요즘엔 떠남이라는 책을 내셨는데 사실 선교사님은 지금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그분이 초창기에 내려놓음이라는 책에 아주 귀한 간증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개척하신 교회가 몽골 이레교회인데 그 이레교회가 또 다른 교회를 하나 개척하게 되었습니다. 베르지역에 한 교회를 개척하고 그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을에 그 교회 교인인 벌르르라는 소녀가 예배시간이 되었는데 땀이 범벅이 되어서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고 선교사님이 물었더니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는데 오늘 아침 자기 집에 유일한 재산인 소가 집을 나갔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소를 찾지를 못해서 지금까지 막 찾다가 예배시간이 다 되어서 소를 계속 찾을 것인가 예배를 드릴 것인가 고민 하다가 소 대신 예배를 선택했다는 거예요. 그리고는 예배당에 땀범벅이 되어서 온 거예요. 선교사님은 그 이야기를 들으니 얼마나 감동이 되던지 예배를 드리며 속으로 기도했어요. 하나님 소 대신 예배를 선택한 저 소녀의 결단이 부끄럽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잃어버린 소를 꼭 찾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세요. 라고 기도하면서 예배를 인도했어요. 

그런데 밖에서 웅성웅성 대요. 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안내위원들이 들어오면서 밖에 소 한 마리가 와 있다고. 그래서 나가봤더니 바로 볼레르라는 아이가 잊어 버린 바로 그 소였어요. 참 놀라운 일이었죠. 그 소녀는 예배를 선택함으로써 잃어버린 소도 얻고 예배도 드리고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 매우 중요하죠. 여러분 한 해 동안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를 올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을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 인생을 준비하시는 분이고 예비하시는 분이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앞날을 늘 걱정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황에 맞게 우리의 때에 맞게 적절히 우리 인생의 앞길을 준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은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내게 번제로 바치라” 아주 청천벽력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여러분 아들 이삭이 어떤 아들입니까? 25년 만에 얻은 아들 아닙니까? 더구나 아브라함과 이 사라가 거의 생식기능을 상실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선물주신 아이가 바로 이 이삭입니다. 더구나 이삭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축복의 조상이 될 아이요 이스라엘 민족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번성케 할 씨앗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를 달라니까요. 이건 이해가 되질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마 그날 밤을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고민했을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이 내게 이런 요구를 하실 수 있나. 그런데 역시 아브라함 이예요. 어찌 보면 무모해 보이는 그 하나님의 명령 앞에 아브라함은 순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요구를 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아니 하나님이 이러실 수 있습니까? 주실 때는 언제고, 이제는 또 달라고 빼앗아 가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마 욥의 신앙을 가졌었을지 모릅니다. 주신 분도 여호와시오 가져가시는 분도 여호와신데 제가 오직 순종할 뿐입니다. 

자 오늘 성경 1,2,3절을 읽어봅니다.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아멘.

자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어찌보면 무모한 명령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3절에 보니까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모리아 산을 향해서 가게 돕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아들을 바친다 생각해도 말입니다. 그래도 아들과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서 좀 늦잠을 더 잘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고민하고 번뇌하다가 마음이 결심됐을 때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납니다. 일찍 일어났다는 의미는 뭐예요. 그가 하나님 앞에 불평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즉시 순종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합니다.

그리고 이제 모리아 산으로 가는데 이 아브라함이 거주하는 브엘세바로 부터 모리아산까지는 약 3일 길이 걸립니다. 이 모리아산은 바로 예루살렘 산 근처에 있습니다. 그래서 모리아산이 어디냐? 지금의 예루살렘 성전터 입니다. 그게 바로 모리아산 이예요. 이삭이 드려지던 바로 그 자리에 예루살렘 성전이 세워지게 되는 거예요.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거죠. 아브라함 이제 가까이에 이르러서 모리아산을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두 종들을 여기에 남게 합니다. 너희들은 여기 있어라. 내가 내 아들과 함께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그리고 우리가 함께 돌아올 것이다. 

자 오늘 성경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니다. 4절, 5절 말씀. “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멘. 

여기 재미있는 표현이 있어요.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이 예배라는 표현은 사실은 창세기에 이 22장에서 처음 나오는 거예요. 그 앞에는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다. 뭐 단을 쌓았다는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우리가 드리는 예배라는 표현이 소개되어집니다. 

사실 이것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말이에요 아브라함이 그 때 예배드릴 상황이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은 아들을 바쳐야 되는 상황. 아들을 불태울 그 나무를 그가 쪼개었다고 그랬어요. 나무를 쪼개 가지고 떠났다. 어떤 주석가는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나무를 쪼갤 때 아마 마치 그것은 나무를 쪼게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가슴을 쪼개는 것과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다고 공공연하게 설명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배가 감정에 치우칠 때가 많지 않습니까? 예배 드립시다 하면 내가 지금 예배드릴 기분이 아니라고. 그렇죠? 우리는 기분이 좋아야 예배드리지 기분 나쁘면 예배도 안 드린다구요. 

우리는 기분이 좋아야 예배드리지! 기분 나쁘면 예배도 안 드린다구요! 내가 기분 나쁜데 지금 예배드릴 상황이냐구?! 아브라함은 지금 아들을 불 태워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할 상황 속에서 ‘내가 하나님 앞에 가서 예배하리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린 힘들어도 기뻐도 즐거워도 질병이 와도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일만은 중단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예배는 우리의 본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예배 받으시기 위해서. 예배 받으시기 위해서.. 

이사야 43장 21절에 말씀합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백성을 지으신 목적은 나를 찬양하고 내게 예배하기 위함이다. 여러분 올 한 해 동안 예배의 성공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옆의 분에게 한 번 인사하세요. “예배에 성공하면 인생의 성공자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되는 비결은 먼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잘 드리는 인생, 이것이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좋은 모델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우리가 너희에게 돌아온다. 이것이 왜 이럴까요? 

여러분들 분명히 가서 제물로 바치고 오면 이삭은 없을 거예요. 아브라함 혼자 돌아올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돌아온다.’ 복수를 사용하고 있어요. 그것은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이삭을 데려 가시더라도 다시 이삭을 부활시키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히브리서에 증언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보니까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또 계속해서 히브리서 11장 19절, 우리 자막으로 한 번 읽어볼까요?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멘. 

어찌 보면 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참 훌륭한 거예요. 하나님 앞에 내어 드리지만 하나님이 우리 아들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을 그는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그 믿음이 참 훌륭한거죠. 그리고 그 믿음 그대로 된거죠. 어찌 보면 죽었어야만 할 자리에서 그는 다시 건짐 받게 된 것입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결코 쇼한 게 아닙니다. 왜 두 종을 기다리라고 했을까요? 

간단해요. 아들이삭을 제단 위에 올려놓고 그를 묶어서 그리고 그를 향해서 칼을 찌른다고 하면 이 종들이 그냥 있겠어요. 아니 우리 주인이 미쳤다고, 왜 아들을 죽이려고 하느냐고, 아마 달려들어서 그 일을 제어하면 그 일이 쉽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방해자를 다 뒤로 남겨뒀어요. 그리고 아들이삭만을 데리고 가는 거예요. 아들이삭은 묻습니다. “아버지여 여기 칼도 있고 그리고 불과 나무도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아마 그것을 대답할 때 아브라함은 참 마음이 아팠을 거예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다.’ 어찌 보면 참 믿음의 표현이죠. 아브라함은 버젓이 아들이삭이 죽을 줄 알면서도 제물이 될 줄 알면서도 제물은 하나님이 준비 하실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그대로 되었단 말입니다. 

자 성경 7절과 8절 말씀 다시 한 번 읽습니다.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아멘 

오늘 아브라함의 이 말은 사실 예언이 되었어요. 하나님이 친히 준비해주셨어요. 그 이후에 보면 아브라함은 아들을 큰 바위에 묶어 놓고 그를 꽁꽁 묶습니다. 그리고 그를 향해서 칼로 찌르려고 하는 순간입니다. 아마 이 모든 참으로 이 소리가 숨죽인 듯한 이제 아들을 죽여야 되는 절박한 순간에 아브라함은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사실 가장 다급한 분은 누구였던가? 하나님이셨어요. 하나님이 가장 다급했어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향해서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제가 여기 있나이다.” “너는 절대로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말라. 너가 아들 이삭보다 나를 더 경외하는 줄 내가 이제 알았음이니이다.” 

자 오늘 성경 말씀을 12절을 다시 읽습니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아멘 

하나님이 이제 깨달으셨어요. 사실 1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랬습니다. 이 시험한다는 것이 어떤 뜻일까?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험의 뜻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 째는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믿는 자들을 유혹해서 그들을 넘어뜨리려고 하고 파멸로 이끌어 가려고 합니다. 이 마귀의 시험입니다. 이 마귀의 시험을 우리는 믿음으로 말씀으로 기도로 대적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험은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연단이라는 의미, 테스트라는 의미가 사실은 더 적합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을 측정하시기 위해서 테스트하기 위해서 우리를 연단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더 놀라운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종종 시험하실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아브라함이 나를 사랑하는 줄 이제 내가 25년 만에 준 아들이삭 보다 나를 더 귀히 여기는지 하나님은 알고 싶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겠습니까? 25년 만에 아들이 생기니까 얼마나 좋았겠어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이삭만 바라보고 살았을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혹 아브라함에게 아들이삭이 우상이 될 까봐 걱정이 되셨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에게는 시험을 주신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은 정말 믿음으로 순종해서 그 아들 이삭마져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본심을 알게 되었어요. 

오늘 12절에 보니까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네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달라고 하면 너는 무엇이든지 아끼지 않고 내게 가지고 오는 구나. 심지어 너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까지도 내게 데리고 오는구나. 아끼지 아니했다. 여기에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십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 네 아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고 나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높이는 줄로 내가 이제 알았노라. 중요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은 우상이 될 수 있습니다. 

정말 새해에는 하나님만을 사랑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일을 우선적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내가 세상의 다른 시간을 소모하지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시간을 가장 존귀하게 성별하고 구별 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제 아브라함을 위해서 참으로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데 그것이 한 마리의 숫양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우리 오늘 13절, 14절 말씀을 같이 읽습니다. 시작.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아멘.

여기 여호와 이레가 나오네요.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라. 놀라운 사실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을 보았더니 거기에 숫양이 하나 수풀에 걸려있어요. 그때서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숫양을 데려다가 잡아서 하나님께 번제해 드리지요. 표현이 재미있어요.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뭐하여.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이삭이 죽어야 할 자리에 누가 대신 죽었어요? 숫양이 대신 죽었어요. 그래서 구약에서는 인간의 죄를 씻기 위한 방법으로 숫양이 또 소가 대신 죽는 거예요. 

우리는 그것을 죄의 전가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재물을 잡기 전에 그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는 데, 그것은 뭐에요. 인간의 모든 죄가 그 안수기도를 통해서 이 짐승에게 전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죄가 용서 받게 되는 거예요. 바로 이삭이 죽어야 될 그 자리에 대신해서 숫양이 죽었다. 오늘 이삭의 이 사건은 갈보리사건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 인간들이 범죄를 해서 죽어야 할 그 자리에 누가 대신 죽으셨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죽으셨어요. 

바로 모리아산과 비교되는 것은 바로 갈보리 산입니다. 골고다 언덕. 그래서 이 모리아산과 갈보리는 거의 같은 산 속에 있습니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장차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독자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를 왜 십자가의 재난 앞에 재물이 될 것을 아브라함의 아들이삭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예표하고 계십니다. 예고하고 있는 거예요. 계시하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때가 되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대신 희생의 재물이 되셨어요. 이게 중요해요. 그래서 이삭은 아버지에게 저항 할 수 있었지만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18세 이삭이 120세가 되는 아브라함에게 대항하려면 얼마든지 대항할 수 있지만 그는 그대로 묶이고 그대로 재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예수님도 마찬가지 오직 아버지 은혜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우리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길을 자발적인 순종으로 걸어가십니다. 하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서 온 인류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재물로 드리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정말 놀라운 섭리가 있습니다. 계속 재물을 통한 희생제사가 이삭과 예수그리스도 이 두 분을 동시에 바라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재물은 흠 없는 수컷으로 만이 가능했기 때문에 오늘 이삭이 그러했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희생의 양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예수님을 가리키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은 전적인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순종한아들 이삭을 통해서 이제 하나님께서 놀라운 축복을 예고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 그리고 아들이삭의 순종을 통해서 놀라운 복을 예고하시죠. 우리는 이것을 여호와이레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숫양을 준비하신 하나님께서 이제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준비해 주셨고 그리고 일류를 위한 놀라운 축복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남은 성격을 다시 읽어 볼까요? 16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 다시 한 번 읽습니다. 시작.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아멘. 

오늘 이 아브라함의 순종에 대해서 하나님은 감동을 받으시고 축복을 하십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한다. 내가 이제 네가 나를 위해서 너 아들도 아끼지 아니했던 즉 내가 너에게 큰 복을 주고 너의 씨가 크게 번성케 하고 어느 정도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번성할 것이다. 그리고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여기서 말하는 네 씨는 바로 이삭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거예요. 대적 바로 마귀의 그 악학 세력의 대적의 성문을 정복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 이죠. 예수님이 오심으로 그래서 그리스도가 오신 것을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너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온 결과인 거예요. 우리가 주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인생을 예비해 주실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게 중요해요. 우리가 주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공급해 주신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마태복음 6장 35절 이하에 보면 너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고 의를 구하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모든 것이란 뭐에요? 먹을 것, 입을 것, 너희의 모든 쓸 것을 내가 공급하고 책임질 것이다. 그런 이야기죠. 하나님은 예비하시는 하나님. 준비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진정 그분에게 순종할 수 만 있다면 주님은 우리의 모든 일생을 책임지실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토니 에반스라고 하는 분이 쓴 책에 재미있는 말이 나옵니다. 제가 한때는 매우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폐차 직전의 잘 굴러가지도 않는 차를 한 대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차를 바꿀 돈도 없고요 그가 한 달에 받는 월급은 한 350불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어느 날 마음의 감동이 와서 내가 이 350불 중에 50불을 떼어서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리겠습니다. 약속을 했어요. 그날도 주일이었습니다. 그는 50불을 약속대로 하나님 앞에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이렇게 드립니다. 하나님이 책임 지셔야 해요. 왜? 그가 나머지 300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아주 빠듯한 삶이었기 때문에 다른 지출이 나오면 그는 정말 곤란한 일을 당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날도 차를 타고 어디론가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이 차의 엔진에서 연기가 솟기 시작했어요. 엔진에 불이 나버렸어요. 그래가지고 멈추고 견인차를 불러서 정비소로 갔습니다. 정비소에 갔더니 보험도 해당되지만 당신도 이차를 고치려면 약 200불 정도를 부담해야 됩니다. 큰일 났어요. 집에 돌아오면서 나는 남은 50불 다 헌금했는데 200불이 나에게 어디 있냐고 이럴 수가 있냐고 마음의 조금 불평이 생겼어요. 그래서 아무래도 그 차를 고치면 내가 200불을 낼 수 없으니깐 안 되겠다 고치지 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다. 라고 생각하고 그 다음날 정비소에 갔어요. 그랬는데 정비공들이 차를 뜯어서 엔진을 바꾸고 있는 거예요. 이거 왜 이러냐고. 내 이야기 좀 들어보라고. 난 200불이 없다고 그랬어요. 

한 정비사가 웃으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우리가 규정을 다시 확인 해 봤더니 이 차가 불이 나서 엔진이 전소되어 버리면 100%보험에서 돈이 나온다고 당신은 부담을 안 해도 괜찮다고, 할렐루야 하면서 거기서 예배를 드렸데요. 내가 50불 하나님께 약속을 드렸더니 200불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거예요. 자기는 미처 몰랐어요. 놀라운 일이였어요. 

자 이게 바로 여호와이레의 의미다.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 될 것이다. 여러분 우리 인생은 내가다 사는 것 같지만 우리 인생을 준비하시는 분이 계세요. 바로 하나님이시다. 어떻게 할 때? 우리가 주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께 말씀에 준행할 때 이게 중요해요. 왜 순종해야 될까요? 하늘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사랑을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칼을 들어 아들이삭의 심장을 찌르려고 할 때 그 절박함이 어땠겠어요. 

여러분 생각을 바꿔 말하면 하늘 아버지가 칼을 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위에 칼을 내리려고 하는 그 마음이 어땠겠습니까? 우리들을 너무나도 사랑했기 때문에 아들마저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그 사람. 바로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고하고 있는 거예요. 예표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참 재미있는 표현인데 오늘 22장 2절에 보면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라. 그랬습니다. 

네 아들 사랑하는 아들이 있잖아요. 이 사랑하다는 표현이 사실은 창세기에 22장에 처음 나와요. 그 앞에는 사랑한다는 말이 없어요. 사랑하는 아들이삭이라고요. 근대 재미있는 것은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요단강에 세례를 받고 나오실 때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시냐면 저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사랑하는 아들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우리는 그분의 사랑 앞에 무릎 꿇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순종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외아들까지 내어주신 그분의 명령이라면 우리가 무엇을 못할 수 있겠어요? 

우리가 진정 순종할 때 그분은 아브라함에게 보여주신 놀라운 축복들을 우리에게도 예비해 줄 줄로 믿습니다. 이 한해의 삶이 저는 순종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에 하나님 우리의 갈 길을 예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지난 한해를 하나님 은혜 가운데 살아왔듯이 우리 한해를 은혜에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공급하심 가운데 살아 갈 거예요. 여호와 이래의 축복이 오늘 여러분들 삶 가운데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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