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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의식과 자격지심 (마 5: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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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식과 자격지심 (마 5:13-16)

마태복음이 새신자를 위한 책은 아닙니다. 신약성경 맨 처음에 마태복음이 등장한다는 게 그러므로 무리가 있습니다. 특별히 성경을 처음 읽는 사람이 큰마음을 먹고 성경을 읽으려고 하는데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이것부터 나오니까 재미가 없어서 성경을 내려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구체적으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고 예수께서 메시야라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하여 쓴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이 신앙에 대하여 기본적인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완전 새신자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성경구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니 아직 믿을지 안 믿을지도 결정하지도 못한 사람에게, 아직 자신의 죄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는 말은 별 의미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구절을 어떻게 읽느냐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라는 명령으로 읽든가 아니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사항으로 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셨지만 저희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라는 식으로 기도를 하는데 예수님은 한 번도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된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소금이 아닌 사람이 애를 쓴다고 소금이 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죄인이 노력한다고 의인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이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의미가 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신앙인이 성숙하기 위하여 극복해야 될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죄의식과 자격지심입니다. 죄의식과 자격지심의 문제. 먼저 죄의식에 대해서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죄의식이 어느 정도는 유용가치가 있습니다. 만일 죄의식이 없다면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입니다. 사이코패스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죄의식을 느끼고, 거짓말 탐지기의 원리가 바로 그것을 이용한 것입니다. 사람이 거짓말을 할 때 심장이 두근거리고 긴장하고 진땀을 흘립니다. 죄의식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이란 무엇이냐.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입니다. 

‘나의 모든 것 변하고 그 피로 구속받았네 하나님은 나의 구원되시오니 내게 정죄함 없겠네’ 우리 죄가 많지만 예수님의 은혜가 우리의 죄보다 더 크다는 것을 믿는 그것이 믿음이에요. 검은 종이를 흰 봉투 안에 넣으면 검은 것이 보이지 않고 흰 것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예수님의 의가 우리의 죄를 덮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예수님의 의를 통하여 보시기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에요. 

마귀는 참소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참소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라고 정죄합니다. 마귀는 우리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하는 것뿐만이 아니고 우리가 죄를 지은 다음에는 우리를 정죄하여 절망에 빠뜨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신뢰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이 마귀의 가장 무서운 무기에요. 마귀가 던지는 가장 무서운 말은 ‘죄인인 주제에’ 이 한마디에요. 그럴 때 우리가 마귀의 정죄에 동의하면 안 되고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물리쳐야 됩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받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마귀의 시험을 물리쳐야 됩니다. ‘기록되었으되 인자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려 함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려 함이니라고 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함으로가 아니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했다. 기록되었으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자가 없다고 했다. 기록되었으되 마귀는 거짓말하는 자요 거짓의 아비니라고 했다.’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마귀의 참소를 물리쳐야 되는 것입니다. 

왜 죄의식을 물리쳐야 되느냐. 우리가 죄의식에 눌려있는 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의식에 눌려있는 한 담대하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죄의식에 눌려 있는 한 구원의 즐거움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죄의식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게 아니요 마귀로 말미암는 것이요 거짓이에요. ‘죄 짐에 눌린 사람은 다 주께 나오라 주 말씀 의지할 때 곧 평안 얻으리’

믿음이란 배짱과 같습니다. 탕자가 비록 탕자이지만 아버지 집에 왔을 때 잔치 자리에 앉아 먹을 수 있는 그 배짱, 그것이 믿음이에요. 비록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자기가 의롭다는 사실을 믿는 배짱이에요. 이런 배짱에서 믿음의 담대함이 가능한 것입니다. 담대하게 하나님께 구할 수가 있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마귀의 목적은 우리를 죄의식으로 짓눌러서 무력한 기독교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무력한 기독교인. 

자격지심도 이와 비슷합니다. 자격지심이란 무엇이냐.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아무런 자격이 없다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겸손함처럼 보이기도 하고 옳은 판단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제가 성도님들에게 집사 직분을 맡으시라고, 권사 직분을 맡으시겠냐고, 대표기도를 해 보시라고 권하면 십중팔구 어떤 대답이 돌아오는지 아십니까. ‘저는 자격이 없어서…….’ 

그런데 생각해 보면 자격 있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격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안 됩니다. 여러분은 천국 갈 자격이 있어서 천국 가는 줄 아세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 사랑받는 줄 생각하십니까?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말로 바리새인이에요. 

세리와 바리새인의 비유를 보면 바리새인이 성전에 올라가서 뭐라고 기도했느냐면 ‘하나님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내 소득의 십분지 일을 하나님께 드리나이다.’ 하고 당당하게 기도했습니다. 반대로 세리는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말하기를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런데 누가 의롭다 함을 받고 집에 내려갔다고 하셨습니까. 세리가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를 높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늘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으냐. 그건 아니에요. 우리가 비록 죄인이지만 죄의식에 눌리지 않고 죄 사함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져야 되는 것처럼 우리 스스로는 자격이 없지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격을 부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에요. 내가 자격을 스스로 부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에게 자격을 부여하셨습니다. 

여러분 집에서 자녀가 냉장고 문을 열 때 부모 허락받는 집이 있으면 한번 손들어 보세요. 자식이 냉장고 열 때 ‘엄마, 냉장고 좀 열어도 될까요?’ 그건 자기 자식이 아니고 손님이에요. 손님은 허락을 구합니다. 그러나 자식은 하도 냉장고를 열어서 냉장고에 있는 음식이 상할 정도입니다. 그게 자녀에요.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 제가 기도를 해도 될까요?’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에요. 그건 불신이에요. 그건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고,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실 것을 믿지 않는 것이고,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는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격지심인 것뿐만이 아니고 불신이에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고 말씀하셨어요. 

자격지심이 있는 사람은 오늘 본문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자격지심이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라고 대답할 것이고 ‘천만에요.’ 라고 대답합니다. 반대로 믿음의 사람은 ‘아멘’으로 대답해야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제가 그런 존재인줄 몰랐군요. 이제야 알았습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면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독수리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병아리처럼 행동합니다. 자기가 사자인줄 모르기 때문에 도둑고양이처럼 삽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줄 수 있는 분은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이 ‘너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면 내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세상의 소금이라는 것을 알면 세상의 소금답게 살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알려줘야 됩니다. 너는 닭이 아니고 독수리다, 너는 도둑고양이가 아니고 사자다, 누가 얘기해 줘야 됩니다. 

영화 장군의 아들을 보면 젊은 김두한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너는 청산리대첩의 주인공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다.’ 그래서 영화 제목이 장군의 아들인 것입니다. 김두한에게 가장 큰 자부심을 갖게 한 것은 자기가 누구인지를 안 거에요.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자기가 그저 거지, 깡패가 아닌, 자신의 삶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염려해야 될 것은 내가 어떡하면 소금이 될 것이냐가 아니고 내가 어떡하면 소금의 맛을 잃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13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만일 여러분이 근자에 사람들에게 밟히는 것 같다, 사람들이 요즘 들어 나를 밟는 것 같다고 느끼신다면 소금기를 잃어버렸다는 증거입니다. 소금이 소금의 역할을 잃어버리면 아무쓸데 없어서 밖에 버려서 사람들에게 밟힌다고 했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우리의 역할을 제대로 하면 사람들이 저절로 우리를 높입니다. 

15절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 ’ 위에 둔다고 했어요. 비취면 사람들이 저절로 위에 둡니다. 높은 곳에 둡니다.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유명해지려고 노력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빛의 역할만 제대로 하면 사람들이 우리를 높여서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엇이 되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가 무엇인가를 알고 그대로 살기 위하여 애쓰는 사람이에요. 

남아프리카 부족 중에 바벰바 족에 특별한 의식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회에는 범죄행위가 드물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이 사회에서는 누가 잘못을 하면 그 사람을 마을 한복판 광장에 세우고 마을 사람들이 다 둥그렇게 그 사람을 중심으로 원을 이루어서 선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이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큰 소리로 외치는데 그 외치는 말의 내용이 그 죄인이 과거에 했던 좋은 일, 그가 잘하는 일, 착한 일, 부족에게 도움을 준 일, 아주 작은 일까지 칭찬을 한다고 합니다. 몇 시간이고 할 말이 없을 때까지, 바닥이 날 정도로 그렇게 한 다음에는 축제를 벌인다고 합니다.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이 새사람이 되었다고 인정하고 축하하는 잔치를 벌인다고 합니다. 

이러한 의식이 사람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어서 이제는 사회에 보답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늘 본문에 하신 말씀은 칭찬은 아니에요. 다만 예수님이 보시는 우리의 참된 존재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의 말씀이에요. 무대 뒤의 진실을 보여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알 수 없었던 것을 말씀하신 거예요. 주님이 말씀하시기 전까지는 우리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그러나 우리의 삶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진실을 예수님의 입을 통하여 우리가 듣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김영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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