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예수, 하늘 문을 여신 분 (마 3:13-16)

첨부 1


예수, 하늘 문을 여신 분 (마 3:13-16)
 
우리는 때로 인생의 밑바닥을 경험합니다. 

지난 주간에 우리 목사님들과 함께 뮤지컬 영화인 ‘레미제라블’을 보았습니다. Les Miserables. 영어로는 The Miserable입니다. 제목 그대로 불쌍하고 비참한 자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배고픈 조카를 위해서 빵 한 조각을 훔쳤다가 19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고 풀려난 ‘장발장’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프랑스 혁명 시대의 사회적인 상황이 함께 보여집니다. 

영화는 약자의 인권과 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마구 짓밟는 사회적 불의와 제도적인 모순을 지적합니다. 때로는 법의 이름으로, 때로는 질서라는 이름으로 권력을 가진 자들이 어떻게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했는가도 보여줍니다. 

영화를 보면서 부조리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의 애환과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피어나는 남녀 간의 사랑에 가슴이 따뜻해지기도 했습니다. 또한 격동하는 사회의 위기 속에서 어떻게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을 수 있을지 간접적으로, 직접적으로 깨닫게 되기도 했습니다. 

우리 중 누군가는 ‘밑바닥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사회적 밑바닥이었을 수도 있고, 어떤 경우는 삶의 실존적 밑바닥, 즉 영혼의 밑바닥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밑바닥 경험은 개인 성숙의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인류사의 거대한 발전의 시작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두에게 늘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밑바닥에서 신음하며 역사의 뒤안길에서 이름도, 소리도 없이 사라진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면 말입니다. 

우리 사회는 어떠합니까? 잊혀진 사람들은 없습니까? 버려진 사람들은 없습니까? 저는 특별히 북녘의 백성들을 생각할 때면 가슴이 너무 아립니다. 이 추위를 어떻게 견딜까? 극심한 배고픔을 어떻게 감당할 수가 있을까? 그저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인생의 밑바닥이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바닥을 친 인생은 결코 축복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바닥을 친 인생이 축복의 시작이 될 수는 있습니다. 누가 이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을까요?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시작 자체가 밑바닥이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비참함의 자리에서 출발하셨기에, 이 땅에서 고통 받고, 밑바닥 인생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불어넣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일하심을 보시더니 (마태복음 3:16)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늘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닫혀있던 하늘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열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과 허물, 반역이 커지고, 하나님에 대한 적대로 우상숭배를 했을 때 하나님은 인간에게 주시던 축복의 역사를 멈추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은 닫혀졌습니다. 더 이상 인간은 하늘과 통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어렵고 힘든 역사 속에서 예수님이 새로운 하늘의 문을 여신 것입니다. 구원의 역사를 베푸신 것입니다. 언제 그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경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예수님께서 낮아지셨다는 뜻입니다. 인간인 나와 비슷한 처지가 되셨다는 뜻입니다. 마치 죄인처럼 당신 자신을 내려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바닥을 치면 인간은 절망합니다. 뒷걸음치며 낙심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절망에서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절망한다’는 것은, 아직도 가슴에 희망을 품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절망 속에서 희망을 낚아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인생에서 바닥을 쳤다고 다 올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 그냥 주저앉아서 자기의 삶을 끝내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바닥 친 삶의 자리에서 실존적으로, 경제·사회적으로 다시 일어서는 역전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신앙적으로 말하자면, 예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처럼 인생의 바닥을 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예수님은 바닥을 치셨습니다. 바닥을 친 우리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기독교 신앙은 죄와 죽음을 말하고, 가난과 절망을 이야기할까요? 그것이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진면목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우리가 현실의 삶에서 탈출하고 해방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은, 인생의 끝자락에서부터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시작은 밑바닥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아기로 오신 성탄의 자리는 빛나는 궁궐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가축의 똥, 오줌 냄새가 나는 마구간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음을 맞이하신 십자가도 모든 죄수들이 저렇게 죽기는 싫다고 발버둥치는 죽음의 형틀이었습니다. 가장 비천한 자리, 가장 비참한 자리였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화려하게 등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인의 모습으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으로 자신을 낮추심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희망이 됩니다. “너희들 바닥 인생들아, 하늘을 바라보는 자가 되라. 아무것도 없다고 낙심하는 자들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품으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친히 죄인 된 자들처럼 세례를 받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바닥 인생을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바닥은 차디차고, 아픈 곳이기 때문입니다. 빈털터리가 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다고 느껴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에서 바닥을 치면 새로운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자기의 삶을 돌아보는 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여기까지 추락했을까? 왜 이런 고통의 자리에서 신음하게 된 걸까? 나의 문제는 무엇일까?’ 하고 되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돌아봄을 통해 소망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잘나가는 사람들의 문제는, 바로 자신을 향한 “왜”라는 질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현재가 편안하기에, 현재와 미래는 모두 다 내 소유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들도 바닥 인생의 쓰라림을 경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요셉은, 철부지 시절에 자신이 꾼 꿈을 형들에게 자랑합니다. 그리고 그 자랑 때문에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는 바닥 인생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결국 그 밑바닥 경험이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요셉은 그로 인해 인생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광야에서 40년간의 유랑생활을 했던 모세도 비슷했습니다. 그는 양치는 목동으로서 40년을 허송세월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의 마음속에 자기 자신을 넘어서 민족을 향한 소원을 품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인생을 맡기게 됩니다. 그리고 민족의 지도자로 세움 받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을 깨닫게 되었을 때, 바닥을 치던 그의 삶은 불쌍하고 비참한 민족의 아픔을 함께 경험하기 위한 축복의 사건으로 변화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바로 전날 밤, 물고기를 잡기 위해 잠도 자지 않고 그물을 내렸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일까? 이렇게 살다가 끝나는 것일까?’ 그는 실존적 한계를 경험합니다. 그때 그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인생의 목적을 변화시켰습니다. 

세리 마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을 억압하는 로마제국의 앞잡이로 동족에게 세금을 걷어 로마에 바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는데, 돈이 인생의 전부는 아닌데, 이렇게 사는 것이 괜찮을까?’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낙담하고 절망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새 삶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고통받는 자들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세례 요한 앞에는 수많은 무리들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민중들이었습니다. 배고픈 자들, 스스로 살기 힘든 자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비아냥거리고,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었던 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킬 수가 없었기에 율법주의자들에게 ‘무지한 자, 버림받은 자’로 조롱받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들이 지금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세례요한 앞에 다가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려고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한 가지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존재가 될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사람들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저 고난 속에 있는 백성들, 밑바닥을 치며 죄와 어둠 속에서 사는 백성들을 사랑스러운 나의 자녀들로 만들고 싶구나. 네가 어떻게 저들을 내 앞으로 이끌 수 있겠느냐?’ 

하나님의 마음을 읽은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 제가 저들의 모습으로 저들 속에 들어가겠습니다. 저들의 죄인 됨 속에 들어가겠습니다. 저들의 무거운 짐, 저들의 허물을 제가 짊어지겠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해야 할 일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확인을 한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요단강으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세례를 통해서 낮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 사람들의 처지에 동참하셨습니다. 민족의 죄악을 자기의 삶에 함께 나누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의 허물 속에 당신 자신을 빠뜨리셨습니다. 바로 이 바닥으로 내려가신 예수님을 통해서 복음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소설 “해리포터”를 쓴 영국의 작가, 조엔 롤링(Joan K. Rowling)이 하버드 대학교에서 명예문학 박사학위를 받게 됩니다. 그녀는 2008년 하버드대학교 졸업식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합니다. 

“저는 대학을 졸업하고 7년 동안 엄청난 실패를 겪었습니다. 결혼에 금세 실패했고, 실업자가 됐고, 싱글맘..... 더 이상 가난하기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누가 봐도 전 실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저는 정말 힘들었고, 그 긴 터널이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럼 제가 왜 실패의 미덕에 대해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실패가 제 삶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 줬기 때문입니다. 

저는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을 그만두고, 제 모든 에너지를 가장 중요한 일에 쏟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가장 두려워하던 실패가 현실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저는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실패했지만 저는 살아있었고, 사랑하는 딸이 있고, 낡은 타이프라이터와 엄청난 아이디어가 있었습니다. 가장 밑바닥이, 제가 인생을 새로 세울 수 있는 단단한 기반이 되어 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닥을 친 인생에 내가 무엇을 새로 심고 세우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달라집니다. 바닥에서 출발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자유자가 되는 것을 허락합니다. 더 이상 낮아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남의 눈, 남의 비난에 대해서 연연하지 않을 수 있고, 남보다 더 잘나 보이려는 위선과 교만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자유가, 남보다 더 우월하다고 여기는 헛된 교만에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이, 밑바닥 인생을 경험할 때 생기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의 가장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절망하고 눈물 흘리는 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너희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가라”고 부탁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낮은 죄인의 자리에 오신 예수님을 보시며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늘의 문을 여셨습니다. 하늘의 지혜와 하늘의 생명, 하늘의 능력을 예수님에게 주셨습니다. 하늘의 모든 비밀들을 예수님에게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 우리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하고, 오늘도 주님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은 죄를 회개하는 세례를 받는 것으로부터 새로운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바닥 인생의 사람들을 가슴으로 끌어안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3:17) 

하나님의 기뻐하심은 예수님이 낮아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닥으로 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보통의 어머니, 아버지가 내 아들이 가난하고, 고통 받는 것을 어떻게 원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 반대일 것입니다. “네가 가난한 것, 볼 수가 없구나. 아버지가 가난한데 너까지 가난한 것을 견딜 수가 없구나. 내가 고통당했는데 너까지 고통을 당하면, 내가 바닥 인생을 살았는데 너마저 바닥 인생을 사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구나!” 이것이 우리 부모들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 뒤집으셨습니다. “바닥 인생을 구하라. 네가 진정 그것을 원한다면, 네가 바닥으로 내려가라. 네가 낮아져라. 네가 죄인처럼 되라. 네가 이 모든 아픔을 통째로 짊어지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함으로 응답한 예수님에게 약속의 말씀을 함께 주셨습니다. 첫째는,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러주셨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니 아들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너를 기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는 아들에 대한 감동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뜻을 너에게 맡겨도 되겠다는 확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마치 이렇게 선포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저 바닥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너를 통해서 높여주고 싶다.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진 사람들을 너를 통해서 건져내고 싶다. 목적 없이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네가 진리와 길이 되어서 저들을 참된 자리로 이끌어 오도록 해라. 억압 속에서 노예처럼 사는 사람들에게 너를 통해서 내가 진정한 자유와 해방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겠다. 죄와 허물, 죄책감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너를 통해서 용서받는 기쁨을 주고 싶다.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떠는 사람들을 너를 통해서 영생의 잔치에 초대하려 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더 이상 너희는 죄의 종이 아니다. 너희는 사탄의 종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시려고 예수님을 이 땅, 낮은 자리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늘의 복을 누리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의 문을 열고 싶어서 애를 쓰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명상을 하고, 어떤 사람은 면벽을 하면서 5년, 10년 도를 닦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시크릿’이라는 우주적 힘을 얻기 위해서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훈련을 합니다. 모두 하늘의 문을 열고 싶은 마음에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미 2000천 년 전에 하늘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보화를 이 땅의 우리에게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진리와 평안, 하나님의 용서,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모든 계시와 비밀의 축복을 우리가 누리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이 축복의 역사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처음에 언급한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학생들은 자유의 노래를 부릅니다. “자유의 깃발을 높이 올려라(Every men will be a king).” 새 시대가 오면 모든 사람들이 왕이 될 것이라는 자유와 희망의 노래입니다. 우리는 이것보다 더 큰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의 권한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Every men will be a son of God.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딸인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 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많은 하늘의 것들을 베푸셨습니다. 이 축복의 역사를 가슴으로 안고 우리의 인생을 주님과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올 한해, 하나님의 자녀 됨의 특권을 마음껏 누리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님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