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요 7:25-36)

첨부 1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요 7:25-36)


'심플리 레드'(Simply Red)라는 영국의 소울밴드(soul band)가 부른 유명한 팝송이 있습니다. 
"If you don't know me by now, you will never never never know me."(지금까지도 당신이 나를 모른다면, 앞으로도 절대로 나를 알 수 없을 거예요.)라는 가사의 노래입니다. 
여기서 '알다'라는 말의 의미는 그냥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알다'라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를 깊이 알다'라는 뜻입니다. 
  
즉 두 사람이 오랫동안 연인으로서 사귀어 왔거나 혹은 부부로서 같이 살아 왔다면 서로의 성격을 완전히 알고 서로의 심정을 깊이 이해해 줄 수 있는 단계에까지 도달해야 할 것인데,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 관계의 미래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가사에서 "All the things that we've been through. You should understand me like I understand you." 즉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 했던 모든 일들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내가 당신을 아는 만큼 당신도 나를 알아야만 해요.'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신자 사이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원칙입니다. 
교인 생활을 오래 했다고 해서 '예수님을 알게 된 정도' 역시 자동적으로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교회에 출석은 하고 있으니까 남들 보기에는 으레 예수님도 잘 알고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직까지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는' 못하고 있는 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실로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나온 모든 일들을 두고 생각해 본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할 텐데 만약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고' 있다면, 그 교인은 앞으로도 절대로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끝내 그 외면적으로 유지되었던 관계 역시 완전히 끊기고 말 날이 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예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기회인데, 그 관계가 그처럼 허무한 파경으로 끝난다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과연 이 예수님을 어떻게 '완전히 알고' '깊게 사귀어야' 합니까?
이 시간 바로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친히 들려주시는 대답을 본문을 통해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예수님이 '허황한 신화적 기원'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확실한 신적 기원'을 가지고 계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 25절부터 29절에 "25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혹이 말하되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6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7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28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가라사대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하신대"라고 기록했습니다. 

초막절은 유대인의 3대 명절 중에 하나로서 전국 각지에서 오는 순례자들로 예루살렘이 가득 차게 되는 때였습니다. 
그 큰 절기 중에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시니"(14절) 자연히 많은 여파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 본문에서는 "예루살렘 사람"들의 반응을 중점적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들은 오늘날로 치자면 '서울 사람'들로서 자연히 '갈릴리 촌사람' 출신인 예수님을 갈릴리 사람들보다는 잘 알지 못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 예루살렘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후에 나타낸 첫 반응은 "이는 저희가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도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을 뿐 아니라, "저희" 즉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 할 정도로 싫어하는 것까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저희가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비판과 책망의 말씀을 공공연히 선포하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저들이 아직까지는 어떤 공식적인 반응을 하지 않고 있었음을 가리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무반응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한 이유는 이어지는 그들의 말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라는 질문에서 나타납니다. 
여기서 "당국자"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다스리는 자'(ruler)로서 유대 종교지도자들 중에서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가리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어떤 사람이 스스로를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며 특히 '당국자'로서 가만히 둘 수가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아직도 "아무 말도 아니하고" 있는 이유가 그들이 예수님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인가 하고 조소하는 투로 말한 것인데, 물론 그런 말 속에는 '예수가 그리스도일 리가 없다.'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루살렘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온 백성이 고대하며 기다리던 메시아일 리가 없다고 확신을 했습니까?
이어지는 27절에서 그들은 그 이유를 스스로 밝히기를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이라면 적어도 무슨 신비적인 과정을 통하여 일어나야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당시 메시아에 대한 엉뚱한 기대가 증폭되는 것과 비례하여 그 메시아의 도래 방법에 대해서도 온갖 상상과 설화들이 난무했는데, 그 결과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일부 위경에서 오도하는 대로 '메시아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 갑자기 출현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출생은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동네에서 요셉과 마리아라는 평민 부부의 사이에서 아주 평범하게, 아니 아주 비천하게 태어나셨습니다. 
그 아기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피난하셨다가 다시 돌아와서 자라게 되신 실제적인 고향은 바로 갈릴리의 나사렛이라는 작은 동네였으며, 예루살렘 사람들 역시 예수님의 그런 출신배경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지극히 흔할 뿐 아니라 오히려 예루살렘의 '서울 사람'들이 보기에는 평균 이하에 해당되는 '촌구석'의 출생 배경을 가진 예수님이었으니, 그런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들에게 전혀 말도 안 되는 일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매우 중대한 '자기선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그 대중들이 알고 있던 사실에 대하여 일단 인정해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육신적 혈통과 출생지가 있는 '인성' 또한 소유하고 계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전혀 몰랐던 당신의 근본적인 출신지에 대하여 아주 명백한 자의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로라"는 말씀은 당신께서는 원하지 않으셨는데 어쩔 수 없이 오셨다는 뜻이 아니라 '성부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여 이 세상에 오셨음을 강조합니다. 
즉 예수님의 화육강세의 원인과 출발점은 결코 '인간'이나 '세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인 것이며, 이것은 곧 예수님의 근본적인 본성은 '인성'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성'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선포하신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는 참이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나는 아노니"라는 말씀은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계시는 성자이심을 천명합니다. 
사람은 스스로 하나님을 볼 수도, 알 수도 없지만, 예수님은 본성 자체가 성자 하나님이신 까닭에 성부 하나님을 지극히 잘 아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라는 말씀은 성자 예수님의 근본적인 '출처'가 바로 하나님인 것을 뜻하며,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는 말씀은 성자 예수님을 세상에 '파송'하신 분 역시 하나님이심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고 제멋대로 예상하고 있던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의 '신적 기원'을 명백하게 밝혀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의 설화에도 보면 단군왕검이나 김수로왕이나 박혁거세 등이 태어난 과정들이 아주 신비롭게 꾸며져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야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뭔가 따를만한 지도자로 받들게 되기 때문에 그런 신화적인 이야기들을 지어낸 것입니다. 
마치 '예루살렘 사람'들이 메시아의 도래는 하늘에서 무슨 '불말과 불수레'가 내려오면서 한 아기를 주고 가더라는 따위의 탄생 설화와 함께 시작되어야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산이나 바다에 신비한 빛이 비취어서 사람들이 가보니 거기에 있던 '알'이 깨어지면서 태어나는 식이 되어야 자기네 민족을 이끌 군주로서 의지하고 따를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메시아라면 자신이 어디서 온 누구인지를 명백히 밝히고 시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찰서에서 왔다고 하면서도 신분증조차 보여 주지 않는 사람에게 함부로 문을 열어 줄 수는 없으며, 의사 가운은 걸치고 있지만 병원 사무실에 무슨 의과대학을 나왔는지 졸업장 한 장도 붙여 놓지 않고 있는 사람에게 자기 목숨이 걸린 수술을 맡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자신의 신분을 스스로 밝히지도 않고 어디서 왔는지 말조차 해 주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우리 자신의 금세와 내세의 생명을 의탁할 메시아로 믿고 영접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당신의 신분과 출신을 명백히 밝혀 주신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로서 태어나셨지만 그 근본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십니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고 '나사렛'에서 자라셨지만 원래는 저 '하늘보좌'를 떠나 이 세상에 화육강세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제대로, 바로 알기 위해서는 바로 이 예수님의 '신성' 즉 '신적 기원'을 믿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을 그저 한 '위인'으로,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무슨 '수퍼스타'로 아는 것은 여전히 '그를 알지 못하는 자'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하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예수님을 알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는' 신화적 인물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알고 믿고 확실히 고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예수님과 '애매모호한 추상적 만남'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교통하는 사귐'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30절 이하 36절의 말씀에 "30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31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32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하속들을 보내니 3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4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신대 35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 36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를 잡고자" 했던 "저희"란 '당국자' 즉 산헤드린 공회에서 파송한 자들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저희'란 아마 앞서 나왔던 '예루살렘 사람'들 중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충동적인 반감과 적대감을 느끼게 된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했던 것은 그저 그런 '심적 충동'으로 끝났으며 직접 "손을 대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된 현실적인 상황은 어떠했던지 간에 하여튼 진짜 이유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시고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게 되실 '때'로 하나님께서 예정해 놓으신 날은 아직 6개월이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된 동기는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의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처럼 '표적' 즉 이적만 보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직 근거가 불안한 믿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단의 사주를 받은 거짓 선지자도 역시 때로는 표적을 행하기 때문입니다. 
진짜 믿음은 그처럼 자기 눈을 놀라게 하는 기적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신적 기원'에 기초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처럼 예수님에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리게" 되자 그들은 민감하게 반응을 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즉 '당국자'들은 즉시 "하속들을 보내어" 예수님을 "잡으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들 역시 예수님을 그 자리에서는 체포하지 못했는데 그 이유 역시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아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의 '신적 기원'에 대하여 그처럼 반감을 품고 적대적인 위협을 가하는 자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또 하나의 기상천외한 선포를 하셨습니다. 
바로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에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만, 이것은 바로 6개월 후에 있을 당신의 '수난과 부활과 승천'에 대한 예언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 사역을 끝내시고 나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다 완수하게 되시기 때문에 이제 '당신을 보내신 이' 즉 성부 하나님께로 다시 돌아가시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는 상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나면 사람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찾아도 만날 수 없게' 될 것이 당연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적 의미이고 더 중요한 근본적 의미는 지금 예수님 앞에 있던 예루살렘 사람들처럼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결국 예수님과 영원히 갈라서게 되고 만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오로지 죄인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하늘 보좌까지 떠나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성자 하나님으로 믿고 영접하지 않는 자들은 결국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며 살 수 있는 저 축복의 천당에 절대로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은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메시아로 알지 못하고 있던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무슨 퍼즐이나 수수께끼 같은 말로 들릴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라고 코웃음을 쳤습니다.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란 바로 당시 로마제국 산하의 전 지역에 흩어져서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런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가르치려 멀리 떠나신다 해도 '절대로 만날 수 없는'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라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고개를 갸웃거렸던 것이었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깨달을 수 없었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택자'가 아니라 '유기된 자'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세상에 속한 자'들일 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과의 만남'을 전혀 모르고 오로지 '지구상에서 인간끼리의 만남'만을 생각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그런 놀라운 말씀을 그야말로 '들어도 듣지 못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와는 정반대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여기서는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지만 나중에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라고 하셨으며, 여기서는 '너희가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지만 거기서는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요 14:3).
즉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자들과 금세에서뿐 아니라 내세에까지 이르는 '영원한 교제'를 나누시는 메시아이심을 확증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의 현주소를 숨기거나 애매모호한 말로 얼버무리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간다.'라고 당신께서 승천하신 이후 지금 이 순간 어디에 계시는지를 아주 명백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와 영원한 이별을 선언하시거나 '너희들이 알아서 나를 찾아오너라.'고 떠넘기지도 않으셨습니다. 
'내가 다시 재림해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내가 사는 천당에서 너희들도 영생하게 해 주겠다.'라고 실로 엄청나게 놀랍고도 고마운 약속까지 분명히 해 주신 분이셨습니다.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 중에 이런 멋진 약속을 남긴 사람이 예수님 외에 누가 있었습니까?

불교는 아무 반응도 할 수 없는 목석으로 만든 불상 앞에 절만 하는 종교입니다. 
천주교 신자들 역시 자기네의 말을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할 마리아상 앞에서 기도를 올리는 종교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는 지금 이 순간 바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통을 나누는 참된 종교인 것입니다. 

석가모니는 죽으면서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들도 스스로 도를 닦아서 나처럼 불타가 되어라.'고, 아무 구체적인 '길과 진리'도 알려 주지 않은 채 죽었습니다. 
마호메트는 지금도 자신의 무덤 주위를 빙빙 돌고 있는 신도들을 바로 그 무덤 안에서 썩어 문드러진 시체 상태로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얼마나 추상적인 '길'이며 그 얼마나 비참한 '교제'이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들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에 대하여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설레는 소망을 간직함으로써 결국 그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사는 신부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이런 영원한 교제는 오직 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영접한 자에게만 주어졌습니다. 
사람도 자기와 전혀 안면도 없는 사람을 자기 집에 초대할 수가 없듯이,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하늘나라의 집'으로 영접해 주실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아무리 기독교인이라는 명찰은 달고 있어도 예수님을 그저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관념적으로만 '알고' 있으면 그 사람은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불신자와 똑같이 예수님께로부터 '내가 너를 알지 못한다.'라는 추상같은 언도를 받게 될 뿐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 동안 확실한 신앙을 통하여 예수님과 구체적이고도 인격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장차 저 천국에서도 그 주님과 영원한 기쁨과 축복의 교제를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 사람'들은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게 신비하게 오셨다가 가실 때에는 다른 세상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어서 그들이 장례를 성대하게 치르고 화려한 비석이나 꾸며 줄 수 있는 메시아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그와는 정반대의 메시아가 되셨습니다. 
오실 때에는 성부 하나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몸을 입은 '비하의 종'으로 오셨지만 가실 때에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시는 '영광스러운 승리자'의 모습으로 떠나셨습니다. 
신비하게 왔다가 다른 사람들처럼 똑같이 죽는 용두사미의 메시아가 결코 아니라,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마지막에 가서 모든 것을 완성하시고 참으로 멋진 대단원의 막을 내리신, 실로 끝이 좋은 메시아가 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이런 예수님과 깊이 '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그를 알지 못하는 자'는 영원히 그 주님을 알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써 예수님과 '아는 사이'가 되지 못하는 자에게는 오직 예수님과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저주의 '지옥'이 기다리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성경 말씀을 통해 예수님에 대해서 듣고 배운 시간들, 여태껏 교회생활을 통해 그 주님의 지체로서 누리게 된 온갖 축복들을 생각해 본다면, 정말이지 지금쯤은(by now) 예수님을 똑바로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현재라는 이 '은혜 받을 만한 때'에 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나중에는 그야말로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하며' '그 주님 계신 곳으로 영원히 올 수 없는' 때가 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남녀가 서로를 깊이 알고 그 연인의 '관계'가 확실히 맺어지면 그 둘은 필연적으로 평생토록 '동거'하는 부부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 주님과 '아는 사이'가 되면 바로 그 관계가 결국 저 하늘나라에서 그 주님과 영원토록 동거하는 '영생'으로 필연적으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아'로 믿고 교제함으로써 그처럼 당신을 인격적으로 '아는' 성도와 금세뿐 아니라 내세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사귀어' 주시는 주님의 축복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