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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겸손에는 보상이 있습니다 (잠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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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에는 보상이 있습니다 (잠 22:4) 

어거스틴이 하루는 제자들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훌륭한 크리스천이 되는 길이 무엇입니까? 잘 믿는 비결을 가르쳐 주십시오” ,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겸손이다”, “그러면 두 번째로는 무엇입니까?”, “둘째도 겸손이다”, “셋째는 무엇입니까?”, “셋째도 겸손이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천사가 마귀가 된 것은 교만 때문이고, 사람이 천사가 될 수 있는 길은 겸손하면 되느니라”
   
기독교 신앙은 은혜를 받아야 가능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누가 받습니까? 겸손한 사람이 받는 것입니다. 잠 3:34에 보니 “진실로 그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하나님은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설교는 겸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시고 겸손해지기를 축원합니다. 
 
1. 왜 겸손해야 하는가? 
   
1) 하나님이 겸손을 원하시기 때문에 겸손해야 한다. 
   
성도가 겸손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겸손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미 6:8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선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시고 사람들에게 구하시는 것이 세 가지 나옵니다. 첫째,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좋아하십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2) 예수님께서 겸손의 본을 보이셨기 때문에 겸손해야 한다. 
   
기독교 영성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그 중심에 주님이 가득해서 그의 언행심사를 통해서 주님이 나타나셔야 합니다.
   
기독교인이 닮아야 할 주님의 성품 중에 가장 두드러진 성품은 겸손함입니다. 빌 2:5에 보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빌 2:6-8을 보면 거기서 가르치는 주님의 마음은 자기를 낮추는 겸손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근본 하나님과 본체이시지만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자기를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님에게서 온유하고 겸손함을 배워야 합니다. 마 11:29에 보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겸손의 본을 보이셨기 때문에 우리도 겸손해야 합니다. 
   
3) 성경이 겸손을 명하고 있기 때문에 겸손해야 한다. 
   
성도가 겸손해야 할 세 번째 이유는 성경이 겸손을 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겸손에 관한 명령이 많습니다. 그 중에 골 3:12에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이 입어야 할 옷 5가지를 말씀합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옷입니다.
   
우리는 항상 옷을 입고 다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언제나 겸손해야 합니다. 옷은 우리의 수치를 가려줍니다. 마찬가지로 겸손은 우리의 수치를 가려줍니다. 옷은 우리를 보호합니다. 마찬가지로 겸손은 우리를 보호해줍니다. 겸손 합시다. 
 

2. 겸손의 대상 
   
1) 하나님께 겸손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화목해야 할 상대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욥 22:21에 보면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강한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십니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것이며 모든 것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대전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 가문은 할아버지 때부터 도교에 정통한 집안입니다. 도교 책을 읽고 한자로 공부해서 도통했습니다. 이 사람이 계룡산 신을 부릅니다. 그러면 계룡산 신이 찾아와 신하고 대화를 하는 신접한 경지까지 이르렀습니다. 

물론 이 신이 성경적으로 보면 귀신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가만히 보니까 계룡산 신보다 더 센 신은 없는가 했더니 한라산 신이 더 세더랍니다. 그래서 한라산 신을 불러서 접신해 보니까 한라산 신보다 더 센 신이 있더랍니다. 백두산 신입니다. 그래서 백두산 신과 접신해 보니 백두산 신보다 더 센 히말라야 신이 있더랍니다. 

이 사람이 히말라야 신보다 더 높은 신은 누군가를 찾다가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교회에 가서 말씀을 듣는 중에 ‘여호와 하나님이 지존무상하시다’는 말씀을 들은 겁니다. 그의 맘속에 ‘여호와 하나님은 그보다 더 높은 분이 없는 제일 높은 분이로구나 그런데 인간은 이 여호와 하나님과 분리되어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으니 예수 믿고 죄 사함 받아 예수님만이 중보자 되시어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으면 지존무상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되는 거로구나’는 생각이 들었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복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침례신학대학원에 입학해서 공부하고 지금 목사가 됐습니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 이외에 더 높은 신은 없구나. 여호와 하나님만이 지존무상 하신 분이시구나’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여러분 낮은 존재, 악한 존재를 섬기지 마시고 지존무상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온 우주에서 가장 센 분이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 하나님과 평안하고 화목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물론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드려서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 할 수 있는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 바탕이 무엇입니까? 겸손입니다. 그래서 약 4:6에서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사람에게 겸손해야 한다. 
   
잠 16:18에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했습니다. 교만하면 사람들의 적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 패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겸손하려면 사람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사람을 천하게 여기고 사람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절대 겸손해질 수 없습니다.
   
용산의 삼각지 뒷골목엔 ‘옛집’이라는 간판이 걸린 허름한 국수집이 있습니다. 주인 할머니는 25년을 한결 같이 연탄불로 멸치 국물을 우려내 국수를 말아냅니다. 10년이 넘게 국수 값을 2000원에 묶어놓고도 면은 얼마든지 달라는 대로 더 줍니다.
   
한번은 한 노숙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내온 국수를 허겁지겁 먹었습니다. 할머니는 금새 그릇을 빼앗아서는 다시 국물과 국수를 듬뿍 담아서 내놓습니다. 사내는 쉴 새 없이 먹었습니다. 그릇을 비우자마자 사내는 정신없이 도망을 칩니다. 할머니는 도망치는 사내를 향해서 소리를 칩니다. “천천히 가 넘어져 다쳐!” 이 할머니는 비록 노숙자이지만 그 한 사람을 귀하게 본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을 존귀하게 대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사람을 향한 겸손입니다.
   
사람이 귀한데 어떻게 그 앞에서 교만하겠습니까? 사람을 귀하게 보면 사람 앞에서 겸손한 것입니다. 
   
3) 모든 일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큰 일 앞에서는 겸손해지는데 작은 일 앞에서는 교만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잠 11:2에 보면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표준 새번역에서는 “교만한 사람에게는 수치가 따르지만”이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 개정판에서는 “잘난 체하다가는 창피를 당하는 법”이라고 번역 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교만하면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이성 앞에서 교만했었습니다. 작은 성이니 쉽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다가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겸손해야 합니다. 

 
3. 겸손에 따르는 보상 
   
성경에는 겸손에 따르는 다양한 보상이 나오는데 다 언급할 수가 없습니다. 몇 가지로 정리를 해봤습니다. 
   
1) 겸손하면 사랑받는다.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께도 사랑 받고 사람에게도 사랑 받습니다. 반대로 교만하면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도 미움을 받습니다.
   
이스라엘 초대왕은 사울입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선택 받을 때 그는 겸손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겸손을 보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가 왕으로 택함을 받았을 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나이까.”
   
사울이 자신과 자신의 집은 미약하다고 했지만 객관적인 눈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삼상 9:1에 보면 그의 아버지 기스에 대해서 “베냐민 지파에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유력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하일’이라는 말인데 ‘견고하다, 강하다’에서 유래했으며, ‘힘, 능력, 부, 재산, 군대’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결코 그의 집은 작은 집이 아니었습니다. 거기다가 사울 자신은 그 키가 다른 사람의 머리 통 하나만큼 더 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가장 미약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겸손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겸손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던 사울이 왕이 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교만해지기 시작합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립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교만한 그는 결국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겸손하면 사랑 받습니다. 겸손해서 시어머니에게 사랑 받은 며느리 이야기입니다. 말로는 누구에게도 져 본 적이 없다는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말발이 아주 센 할머니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 똑똑한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항상 기도하는 며느리입니다. 항상 성전에 가서 기도하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 며느리였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를 아는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저 며느리는 이제 죽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시어머니가 조용했습니다. 그럴 분이 아닌데 하면서 이상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며느리가 들어올 때 시어머니는 벼르고 별렀습니다. 처음에 꽉 잡아 놓지 않으면 나중에 큰일 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시집살이를 아주 강하게 시켰습니다. 생트집을 잡았습니다. 일부러 모욕도 주었습니다. 그러나 며느리는 전혀 달랐습니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발밑으로 내려갔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시어머니가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친정에서 그런 것도 안 배워 왔냐?” 며느리는 공손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저는 친정에서 배워 온다고 했어도 시집와서 어머니께 배우는 것이 더 많아요. 모르는 것은 자꾸 나무라시고 가르쳐 주세요.” 어느 때는 이렇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 것도 모르면서 대학 나왔다고 하느냐?” 며느리는 도리어 웃으며 말했습니다. “요즘 대학 나왔다고 해봐야 옛날 초등학교 나온 것만도 못해요, 어머니!” 매사에 이런 식이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아무리 찔러도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대꾸라도 해야 큰소리를 치며 나무라겠는데 무슨 말을 하여도 다 겸손히 받았습니다. 나중에 시어머니가 말했습니다. “너에게 졌으니 집안 모든 일은 네가 알아서 해라.” 겸손하면 사랑 받습니다. 
   
2) 겸손하면 높아진다. 
   
슈바이처 박사가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하여 모금하기 위하여 고향에 가게 되었습니다.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준비한 고향 사람들은 ‘슈바이처 박사 정도 되면 1등 칸을 타고 오겠지’라고 생각하고 기차가 도착하자 1등 칸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슈바이처 박사는 1등 칸에도 2등 칸에도 없었습니다. 두리번거리던 사람들은 3등 칸에서 내리는 슈바이처 박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슈바이처가 3등 칸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는 의아하게 생각하고 물었습니다. “박사님 아니 왜 3등칸에 타셨습니까?” 슈바이처가 대답했습니다. “4등 칸이 있어야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3등 칸을 탔습니다” 겸손한 사람이었던 슈바이처 박사는 스스로를 높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세계 인류가 선망하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세계인들로부터 20세기 성자로 추앙 받고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높아집니다.
   
잠 18:12에 보면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입니다. 겸손하면 높아지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그에게 보내 “네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들이 또 “네가 엘리야냐, 그 선지자냐?”라고 물었을 때에도 “아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너는 누구냐?”라고 묻자, 세례 요한은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이 또 묻습니다.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세례를 주느냐?” 이에 세례 요한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 끈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이처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예수님의 신발 끈도 풀지 못할 만큼 주님의 종노릇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부족한 사람이라며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이렇게 겸손했던 세례 요한을 예수님께서는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세상에서는 겸손하면 사람들은 짓밟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높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높아집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이길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셉을 보세요. 마귀는 형들을 이용하고 보디발의 아내를 이용해서 오셉을 죽이려고 하고 가장 낮은 곳까지 짓밟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셉을 높이시니 요셉이 결국은 높아지지 않습니까? 어디까지 높아졌습니까? 바로가 요셉보다 높은 것은 왕의 자리뿐이라고 할 정 높여주셨습니다. 겸손하면 결국 높아집니다. 
   
3) 겸손하면 축복 받는다. 
   
겸손하면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보상해주십니다.
   
첫째, 재물의 축복을 받는다.
   
본문에 보면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겸손의 첫 번째 보상이 재물입니다.
   
여러분! 물질의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이 재물의 축복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무능해도 됩니다. 무식해도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가능합니다.
   
복음의 능력 중에 하나가 재물의 축복입니다. 고후 8:9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님의 은혜로 부요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겸손하며 열심히 노력 사십시오. 하나님께서 부요케 하실 것입니다.
   
둘째, 영광의 축복을 받는다.
   
본문에 보면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겸손의 두 번째 보상이 영광입니다. 이 부분은 앞에서 하나님이 높이신다는 말씀을 했기 때문에 간단하게 넘어갑니다.
   
셋째, 생명의 축복을 받는다.
   
본문에 보면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겸손의 세 번째 보상이 생명입니다. 건강의 복입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장수’라고 번역했고 공동번역에서는 ‘건강’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인 나아만 장군이 나병에 걸려서 엘리사를 찾아왔을 때 엘리사는 나와서 나아만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사람을 시켜서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 자칫 잘못했으면 나아만은 치료를 받지 못하고 돌아갈 뻔했습니다. 다행히 나아만 장군이 자기 부하의 말을 듣고 겸손하게 옷을 벗고 요단강에 들어갔기 때문에 치료가 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끝까지 교만했다면 그의 나병은 치료되지못했을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은 겸손했기 때문에 치료를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복음 안에서 겸손하여 건강의 축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몸이 아픈 분들은 겸손의 자세를 가지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믿음의 고백을 많이 하십시오. 제가 지난 주에 부흥회를 인도했던 평택 백봉교회 안광회 목사님은 갑상선 기능 항진증이라는 병에 걸려서 하루에도 몇 차례 몸에 마비가 와서 쓰러지기도 했답니다. 설교를 하다가 쓰러지기도 하고 의사는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믿음의 고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의 고백을 시작하고 며칠이 지나도 치료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두주 세주를 고백했지만 치료가 되지 않았는데 1달 쯤 되어서 몸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과 완치가 되었는데 지금은 약도 먹지 않고 마비가 되는 일도 없이 건강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몸을 만지셔서 치료의 광선을 발해주시기를 축원합니다.
   
넷째, 안식의 축복을 받는다.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이 필요합니다. 안식의 복을 받아야 행복합니다. 마음에 늘 염려와 근심, 경쟁심과 분노가 가득 들어있으면 행복하지 못합니다.
   
마 11:29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음이 쉼을 얻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자동차가 사막의 모래에 갇혔을 때 빠져 나오는 방법 중의 하나는 타이어에서 바람을 빼는 것입니다. 공기를 빼면 타이어가 평평해져서 바퀴 표면이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차바퀴에 바람이 가득하여 팽팽한 상태에서 차를 움직이면 차는 모래구덩이에 더 깊이 박히게 된답니다.
   
교만의 바람을 빼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모래에서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4. 겸손해지는 방법 
   
1) 실패와 고난입니다. 
   
대하 33:12에서는 악한 왕이었던 므낫세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그가 크게 겸손해 진 것은 환난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고난이 약이 되었습니다.
   
시 107:12에 보면 “그러므로 그가 고통을 주어 그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고통이 교만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는 겸손입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교만할 요소들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고난은 우리를 겸손한 자리에 머물게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어떤 학자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 사도 바울이라고 할 정도입니다. 신약성경의 절반을 그가 기록했을 정도이니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는 겸손했을까요? 자기의 육체의 가시 때문입니다. 그는 불치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체의 가시를 교만의 병에 걸리지 말라고 예방주사로 주신 것입니다.
   
고난은 신비입니다.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 갔을 때 그의 나이가 약 18세 정도였습니다. 그의 나이가 53세 정도 외었을 때 느브갓네살이라는 왕이었습니다. 그 때 왕은 교만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힘으로 대 제국 바벨론을 세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치셨습니다. 정상이 이상해져서 7년 동안 짐승처럼 살았습니다. 풀을 뜯어 먹으며 광인으로 7년을 살았습니다. 7년 만에 하나님께서 그의 정신을 돌아오게 하고 그를 다시 왕의 자리에 앉힙니다. 그때서야 느브갓네살 왕은 천지만물의 주가 여호와 하나님이심과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을 다스린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 앞에 겸손해졌습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서 겸손해진 것입니다. 실패와 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어 줍니다. 겸손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을 대면하면 겸손해진다. 
   
나보다 탁월한 사람을 만나면 겸손해지게 되는데 하나님을 만나면 어떻겠습니까? 베드로는 주님을 만난 후 자기가 죄인이라는 겸손한 고백을 했습니다. 주님이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설교 후에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던지니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혔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보통 랍비라고 생각했는데 그분이 메시아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자 베드로는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님을 만나니 겸손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왜 교만해지는지 아십니까? 주님과 개인적인 친밀한 교제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예배는 드리지만 형식적이 되면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영은 죽어가고 마음은 교만해져 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대면하기를 바랍니다. 
   
3) 자기를 알면 겸손해 진다. 
   
사도 바울이 겸손했던 이유를 앞에서는 육체의 가시 때문이라고 했는데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딤전 1:15에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인데 교만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자기를 알았기 때문에 겸손했던 것입니다.
   
프란시스 사랑하는 제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어느 날 기도를 하다가 자기가 천국에 이끌려 가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천국에 들어간 이 제자가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영광의 보좌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보좌가 비어 있었습니다. 제자가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천사님, 저 자리는 누구를 위해서 예비 된 자리입니까?”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아, 그것은 세상에서 제일 겸손한 프란시스를 위해서 마련된 것이오.” 그 말을 듣는 순간 이 제자에게 시기심이 일어났습니다. ‘아무리 우리 스승이지만 너무 높임을 받는 것이 아닌가? 우리 스승이 그런 대접을 받을 만큼 위대한 스승은 아닌 것 같은데.’ 제자는 질투심에서 혼자 중얼거리다가 환상에서 깨어났습니다. 

그 후 제자가 프란시스를 따라다니면서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서 어느 날 스승과 단 둘이 있을 때에 시험 삼아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프란시스가 서슴지 않고 즉각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야 물론 세상에서 제일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제자가 반박했습니다. “선생님,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위선입니다. 세상에 강도가 많고 살인자도 많은데 어찌 스승님이 제일 악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 때 프란시스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자네가 몰라서 그러는 거야. 나는 본래 악한 사람이었어. 그런데 오늘 내가 이만큼이라도 되어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세. 만약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많은 은혜를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에게 베푸셨다면 그 사람은 나보다 훨씬 더 선한 사람이 되었을 거야.” 프란시스는 주님을 알았고 자기를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잔치에 청함을 받으면 높은 자리에 앉지 말고 낮은 자리에 앉으라고 말씀하시면서 결론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십니다. 겸손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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