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훈련하는 교회가 건강합니다 (딤전 4:6-10)

첨부 1


훈련하는 교회가 건강합니다 (딤전 4:6-10)

: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여러분! 행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행복한 사람들이 모인 우리교회가 또한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요즘, 우리 모두를 뿌듯하게 하는 뉴스는 나로호 발사의 성공일 것입니다. 2번의 실패와 3번의 연기 끝에 성공한 것이기에 더욱 감격스럽습니다. 지난 2002년 8월, 우리나라가 본격적인 우주개발 사업을 시작한 지 10년 5개월 만의 일입니다. 2007년 전라남도 고흥군 나로도에 우주센터를 완공했습니다. 2009년 8월 25일, 나로호 1차 발사를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이륙 후 216초, 첫 번째 실패의 쓴 맛을 보아야 했습니다. 2010년 6월10일, 2차 발사 역시 발사 137.3초에 내부 폭발로 실패했습니다. 3차 발사 역시 순탄치 않은 과정을 거쳤습니다. 2012년 10월26일, 발사체와 발사대 연결 부위의 고무링 파손으로 발사일을 연기하였습니다. 11월29일, 이번에는 전기박스의 과전류 문제로 발사를 중단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2013년 1월30일 오후 4시, 나로호가 발사됐습니다. 많은 실패를 통하여 비로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번에 발사된 나로호는 전체 무게가 140톤에 이릅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130톤은 연료라고 합니다. 연료를 뺀 나로호의 무게는 10톤 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나로호를 쏘아 올리는 목적인 인공위성은 0.1톤, 100Kg에 불과합니다. 즉 100Kg의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기 위하여 130톤의 연료와 10톤에 이르는 발사체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10년이라는 시간과 수많은 인원과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와 같은 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우리는 축구선수들이 골을 넣는 장면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골을 넣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야구선수들이 홈런을 치는 장면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 홈런을 치기 위하여 얼마나 삼진을 당하였는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박수 받는 순간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밤을 지세우고, 눈물과 땀을 흘렸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보이는 결과를 위하여 보이지 않는 수많은 과정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인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도록 하기 위하여 예배하게 하셨습니다. 교제하게 하셨습니다. 영성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배하고, 교제하고, 영성을 가지는 것이 1박 2일의 행사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행복을 위한 과정을 잊고 있습니다. 과정을 밟지 않으면 그 행복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훈련되지 않은 신앙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도 같습니다. 훈련이 없는 신앙은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면 넘어지는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씀에 이어서 ‘건강한 교회’에 대하여 생각하려고 합니다.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건강한 교회가 필수적입니다. 개인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건강하여야 합니다. 성도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교회가 건강하여야 합니다. 건강하지 못하면 행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건강하지 않은 교회에서 행복을 누린다는 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건강한 교회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먼저 생각하려는 것이 훈련입니다. 훈련은 ‘교회 교육’입니다. 교육이 없는 신앙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먼저 하셨던 일은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는 일이었습니다(마 4:23). 그러니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하여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반드시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하여 교육이라는 말 대신 훈련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배워서 아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배워서 아는 교육이 아니라, 따라서 사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I. 훈련  

행복한 사람,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한 훈련이란 무엇입니까? 
6절 말씀입니다.

: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목회자로써 필요한 것을 지도하였습니다. 교회를 담임하여 성도들을 목양하는 목회자로서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지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 내용 중에서 오늘 본문 말씀은 첫 번째로 ‘형제를 깨우쳐 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깨우치다[uJpotivqhmi/휘포티데미]’는 말은 ‘아래에’라는 말과 ‘서있다’는 말이 합하여 된 말입니다. 깨우치는 것은 아래에 서는 것입니다. 영어로 ‘이해하다’는 말을 ‘understand’라고 하는 것과 통합니다. 깨우치는 것은 좋은 교훈을 듣고 따르도록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좋은 교훈이 그들을 지배하고 다스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듣고 아는 것은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듣고 그 말씀을 따르는 것을 깨닫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배워서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깨닫고 따르게 하는 훈련도 필요합니다. 배우는 것으로는 사람이 변하지 않지만, 깨닫게 되면 사람이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1. 훈련은 깨우치는 것입니다.

신앙은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위하여 고행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깨달음은 결과적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굴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권위를 인정하고 그 권위 아래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옛날 시골에서 쥐를 잡기 위해 쥐약을 놓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쥐약 먹고 죽은 쥐를 개가 먹고 죽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 주인이 개를 훈련시키기 위해 개 앞에 죽은 쥐를 두고서 개가 먹으려고 하면 매질을 하였습니다. 개가 입맛만 다셔도 회초리질을 했습니다. 이러기를 수십 번 반복하니까 그제야 개가 쥐를 먹지 않습니다. 죽은 쥐를 개 앞에 두면 주인의 얼굴을 먼저 바라봅니다. 먹을 것을 앞에 두고 주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개가 훈련된 개입니다. 결국 마을의 개들이 쥐약 먹고 죽은 쥐를 먹고 다 죽었지만, 주인에게 매질을 당하며 매정하게 훈련받은 개는 살았습니다.

우리는 개가 아닙니다. 더욱이 매질을 통하여 훈련을 받아야 되는 노예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도 훈련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혹독하게 훈련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지배 아래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훈련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권위 아래 우리 자신을 놓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을 읽으실 뿐만 아니라 그 말씀 아래에 자신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순종하는 것이 깨닫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먼저 말씀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깨달음이 있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또,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한 훈련은 무엇입니까?
7절 말씀입니다.

: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사도 바울은 계속하여 디모데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디모데가 선한 일꾼이 되기 위하여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들을 물리쳐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건함에 이르도록 몸을 훈련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속된 이야기들을 물리치고, 경건한 생활에 힘을 기울이는 훈련을 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버리다[paraitevomai/파라이테오마이]’는 ‘거절하다’, ‘물리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두 번 거절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빌고 애원하며 간청하여 물리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연단하다[gumnavzw/귐나조]’는 ‘벌거벗고 운동하다’는 뜻입니다.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것을 벗어버리기 위하여 완전히 벌거벗고 전념하는 것입니다.


2. 훈련은 연단하는 것입니다.

흔히, 모든 것이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 수준에 올라가면 다른 사람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경쟁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일의 성패를 가름하는 것이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하여야 할 일을 방해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주일을 지키는 것은 천국 가는 훈련”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을 지키는 것은 복된 생활입니다. 주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며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주일을 꼬박꼬박 지킨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직장에 다니는 주부들은 주일에 할 일이 쌓여 있습니다. 직장인들은 1주일 동안 일하고 몸이 피곤해서 쉬고도 싶습니다. 주일을 지키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방해꾼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벌거벗어야 합니다. 옷을 벗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얽매고 있는 것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텔레비전 앞에서 뭉그적거리는 것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좀 더 자자는 이불을 걷어차야 합니다. 이것이 연단하는 훈련입니다. 이것이 잘 훈련되어야 나머지 신앙 활동도 수월해집니다. 

끈적거리는 것을 벗어던지는 훈련으로 신앙의 우선순위를 세워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자신이 건강한 교회가 되기 위한 훈련은 또 무엇입니까?
10절 말씀입니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사도 바울은 신앙의 과정을 ‘수고하는 힘쓰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수고하다[kopiavw/코피아오]’는 말은 ‘피로를 느끼다’, ‘열심히 일하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로 ‘코피아오’라는 말인데 ‘코피 나오게 열심히 힘쓰다’는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열심히 일하지 않는 훈련은 전혀 없습니다. 


3. 훈련은 수고하는 것입니다.

‘훈련에서 땀을 흘리면 전쟁에서 피를 흘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미군을 지휘한 조지 패튼 장군이 있습니다. 노르망디 상륙 적전에서 큰 활약을 하였습니다. 패튼은 “훈련으로 1 파운드의 땀을 흘리면, 전쟁에서 1 갤런의 피 흘림을 막을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땀을 흘리면 그 열 배 만큼의 피를 흘리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만치 땀을 흘리는 훈련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런 준비 없이 일에 뛰어 들었다가 실패하는 경우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이 허약한 이유는 훈련의 수고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읽기 위하여 수고하고, 기도하기 위하여 수고하고, 은사를 활용하기 위하여 수고하여야 합니다. 신앙도 어느 단계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단단히 각오하고 코피를 쏟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고된 훈련에 적응하도록 계속하여 훈련해야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이를 헤치고 나올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땀을 쏟는 수고로 훈련하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렇게 훈련이 깨우치는 것이고, 연단하는 것이고, 수고하는 것이라면 이를 통하여 누리는 행복은 무엇입니까?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세워가는 교회의 건강한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신앙의 훈련과 관련하여 어떤 건강을 누리게 되는지를 생각하려고 합니다. 
  

II. 건강 

훈련하는 사람은 어떤 건강한 삶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까? 
6절 말씀입니다.

: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성도들을 깨우치게 되면, 디모데 자신이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주목하여야 할 것은 디모데에게서 배운 사람들이 좋은 일꾼이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디모데가 다른 사람을 깨우치면 디모데 자신이 좋은 일꾼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의 가장 큰 장점은 가르치는 자신이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잘 가르치는 사람은 자신이 그 분야에서 탁월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1. 좋은 일꾼의 삶입니다.

자신은 운동을 못하면서 선수들을 잘 지도하는 훌륭한 코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은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그렇게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 곤란합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오늘의 문제는 이 불가능한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건강하지 못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렇다고 자신이 완벽하여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자신이 배워가야 합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을 가르침으로 자신이 배우는 훈련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전도는 자신이 가장 확실하게 배우는 과정입니다. 전도하면 자신이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전도함으로 확실하게 서십시오.

우리는 다른 사람을 깨우침으로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경험하는 행복한 사람, 건강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훈련할 때 어떤 결과를 건강으로 누리게 되는 것입니까?
8절 말씀입니다.

: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훈련에는 반드시 유익이 있습니다. 몸을 훈련하는데도 유익이 있습니다. 몸을 훈련하는 사람은 몸이 더욱 건강해 지는 유익이 있습니다. 땀을 흘리며 훈련하는 사람은 기록을 단축한다든지, 경기에서 이기게 되는 유익이 있습니다. 그런데 경건을 훈련하는 사람에게도 유익이 있습니다. 경건을 훈련하는 사람은 현세의 생명을 약속받을 뿐만 아니라 내세의 생명까지도 약속받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금생과 내생이라는 양면에 유의하려고 합니다. 신앙을 훈련하면 이 세상에서도 형통하고 저 세상에서도 상급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기 위한 것만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죽어서 영원히 잘 되기 위해서만도 아닙니다. 금생에서도 내생에서도 잘 되는 것입니다. 건강한 신앙은 금생과 내생이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2. 조화로운 삶입니다.

우리가 달리기를 하여보면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마음은 저기에 가 있는데 몸은 여기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것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따로 노는 것은 물론 나이 탓도 있겠지만, 운동을 하지 않은 탓도 있습니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이 더욱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몸과 마음이 함께 움직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신앙과 생활이 따로 노는 것은 신앙 훈련의 부족에서 오는 것입니다. 신앙훈련을 많이 받았는데도 신앙과 생활이 따로 노는 것은 배우기만 하고 훈련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끈적끈적하게 달라붙는 것을 벗어버리기 위하여 싸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칭찬 듣는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상급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의 신앙만이 아니라, 교회 밖의 생활도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저 세상만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만 잘 되기 위하여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금생과 내생에 유익이 있는 조화로운 삶이 되어야 합니다.

삶의 변화를 이루는 신앙 훈련으로 금생과 내생의 조화, 교회 안과 밖의 조화를 이루는 건강한 신앙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신앙 훈련 결과로 어떤 건강한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까?
10절 말씀입니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여기에 우리가 수고하며 싸우는 훈련의 목적이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싸우며 훈련하는 것은 하나님께 소망을 걸고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소망하다[ejlpivzw/엘피조]’는 말은 ‘기대하다’, ‘희망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훈련하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3. 소망스러운 삶입니다.

운동선수들은 기록을 갱신할 소망을 가지고 계속해서 훈련합니다. 소망이 사라지면 운동을 포기합니다. 절망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는 다시 소망의 불을 지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희망이 없다면 그것은 곧 정신적인 죽음입니다. “삶의 열악함과 어려움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삶은 소망과 기대로 활력이 넘치는 삶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훈련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세상에서 전혀 소망이 없어보여도 그래도 희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포기하게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절망에 대항하여 희망을 가지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훈련을 통하여 이 희망을 더욱 굳게 세워가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시는 소망의 은혜를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은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자라나는 것과 같은 과정이 신앙의 성장에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는 것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셨을 때 그들이 곧 바로 성숙한 제자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삼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배워야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직접 말씀을 듣고 그들의 눈으로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믿음이 쉽게 자라지 않았습니다. 결국 베드로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을 받고 나서 복음을 위하여 생명도 아끼지 않은 제자가 비로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건강하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성도들이 세상에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조화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소망을 품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깨우치고, 연단하고, 수고하는 훈련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건강한 교회이어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신앙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하고, 은사를 활용하는 것이 모두 훈련입니다. 주일을 지키는 것도, 헌금을 드리는 것도, 부흥성회에 참여하는 것도 훈련입니다. 신앙의 훈련을 통하여 참으로 행복한 사람,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