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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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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자 (히 12:1-3)


히브리서 중에 특징이 나타납니다. 과거 하나님께 훌륭하게 살았던 신앙의 위인들을 많이 소개합니다. 특별히 11장에서는 믿음으로 살았던 아브라함, 사라, 에녹, 노아, 아벨 등을 차례로 소개하면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나그네 같이 살았다고 소개합니다. 이 성경 저자의 생각은 확실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우리도 그렇게 살자.” 그러다가 오늘 12장에 와서는 한층 더 높여서 우리의 바라보는 대상을 예수님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바라보며 살아가는 일은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이나 문화화 되어 있습니다. 

즉,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것이 일반 대중의 중심 역할의 행복을 창조하는 힘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 세계는 ‘멘토’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또 실제로 그런 일을 합니다. 자신이 본받고 싶은 대상을 정하고 그에게 다소 학습을 받는 관계를 말합니다. 절대 도움이 됩니다. 과거에 저는 클린턴 대통령의 초대를 받아서 백악관을 다녀온 일이 있는데 그분이 우리들 앞에서 그렇게 말했습니다. 자기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케네디 대통령을 멘토로 정하고 살았다고 합니다. 

자신이 다니는 고등학교를 케네디 대통령이 방문했을 때 학생 대표로 만나보고 악수를 한 것이 동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는 케네디 대통령이 몸담고 있는 그 당에 자기도 당적을 두고 그분을 바라보면서 살다가 자기도 대통령이 되어서 8년 동안 이렇게 미국의 대통령을 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라보는 나라가 있어야 합니다. 영국 민주주의를 바라보면서 온 세계 나라들이 지금까지 달려왔지 않습니까? 미국의 시장 경제를 바라보며 온 세계가 달려왔습니다.

지금도 TV나 신문에 늘 말합니다. 어떤 국가적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이럴 때 다른 나라들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취급했나 살펴봅니다. 그러면서 아주 잘 나가는 선진국의 예를 설명합니다. 그때 바라보는 나라들은 다 앞서가는 나라들입니다. ‘아! 이런 문제를 가까운 일본에서는 과거에 어떻게 처리했는가? 아니면 서구의 나라들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나?’ 그러니까 앞서가는 나라의 예를 바라보면서 이런 문제를 처리하자는 뜻입니다. 그때 후진국을 예로 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에 문제가 일어났는데 이 해결을 위해서 북한 정부에서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하고 있나 들여다본다든지 에티오피아나 우간다나 미얀마 같은 나라들을 거론하는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라볼 것이 없다는 판단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와 투쟁을 거쳤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선진국과 같은 정치제도를 갖고자 그렇게 오랫동안 수없이 민주화 운동을 우리가 해왔지 않습니까? 선진국과 같은 경제 원리를 갖고자 그렇게 오랫동안 공부를 해왔고 선진국과 같은 복지혜택을 만들고자 정부가 저렇게 애를 쓰고 과학기술이나 교육제도 등도 모두 앞서가는 나라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도 그렇게 하기 위해 이런 철학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 이런 관행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선거에서 패배하면 의례히 어떤 선진국으로 갑니다. 가서 어느 학교에 가든지 어디 가든지 일 년 동안 정치 학습을 하고 오겠다 하고 떠나갔다가 오는 관행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손학규 씨도 독일에 가서 복지제도를 연구하고 6개월 후에 오겠다 하고 갔지 않습니까? 후진국을 찾아가는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훌륭한 교회는 어떻게 하고 있나 배우게 되는데 이때도 똑같은 상황입니다. 

어느 교회에 가서 우리가 어떤 것을 배울까 앞서가는 교회를 찾아가서 “이 교회에서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하고 배우게 되지 않습니까? 그때에도 저 시골 어촌 교회를 찾아간다든지 농촌 교회를 찾아가서 무엇을 배우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는 교회를 소개하는 어느 책자에 굉장히 잘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그 책자를 보는 많은 교회들이 갈보리 교회를 수없이 와서 이 책자에 난 것을 보고 왔다면서 저를 만나보고 간 적이 있습니다. 옛날 유대인들은 예언자를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예언자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가에 따라서 국민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출애굽 시절에는 모세를 바라보며 40년을 살았습니다. 

다윗을 바라보고 40년을 살았고, 솔로몬을 바라보고 40년을 살았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광화문에 우리 국민이 바라보는 두 분의 동상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입니다. 그 의미는 그분들의 인물을 선전한다든지 그분들의 체격을 선전한다든지 하는 것이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훌륭한 분들을 바라보고 우리도 그렇게 살자.” 이런 뜻입니다. 온 세계 가톨릭 교인들은 교황청을 바라보고 어느 나라나 대통령이나 왕을 바라보고 가정에서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기업에서는 기업주를 바라보고 이 바라본다는 문화는 피차 행복 관계입니다. 국제간에 협약이라고 하는데 피차 관계에서 서로 유익한 점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판단 안에 그런 협약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살 것인가에 대해서 히브리 기자의 추천 말씀이 “예수를 바라보자.” 그 바라보아야 할 이유를 몇 가지로 설정했습니다.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나름대로 무엇을 바라본다는 의미는 희망 부분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멘토로 정하고 닮아가고자 하는 것도 나도 그분과 같이 되고자 하는 희망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후진국이 선진국을 따라가고자 하는 것은 그 나라와 같이 되고 싶은 희망 때문에 그렇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사람들을 추천할 때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를 추천했는데 “그분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순종하여 장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갔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래, 앞에 있는 희망을 보고 나아갔으며” 이런 말이 됩니다. 유대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더욱 확실합니다. 미래 이스라엘의 모습을 지금 보았기 때문입니다. 애굽을 객관성 있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밝힌 모세 때 애굽 왕조는 라암셋 2세 때입니다. 

출애굽기 1장에 그가 고센 땅에 국고성을 건축하고 라암셋이라 이름을 지은 것만 봐도 역사적으로 넉넉히 입증이 됩니다. 이 애굽 형제들은 모두 다 일찍 죽었습니다. 그런데 라암셋 2세는 90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부인을 두고 108명의 자녀를 낳았으며 66년 동안 강대국 통치를 한 사람입니다. 피라미드가 건설되던 B.C 2686년에서 2613년 이때부터 바로 왕조를 태양신이라고 불렀습니다. 바로 왕조는 가장 강력한 왕조라는 것을 상징화해서 어떤 짐승보다도 무서운 독을 가진 코브라 뱀을 표현해서 이마에 코브라 뱀을 붙여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막강한 세력에 비해서 이스라엘 민족은 비교도 되지 아니하는 노예 민족입니다. 어떻게 모세가 이 바로 앞에 나설 수가 있었겠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상식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세를 따라나섰는가? 미래에 젖과 꿀이 흐르는 자유의 땅, 즉 미래 이스라엘을 믿었기 때문에 나설 수가 있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예수를 바라보자는 것은 미래를 바라보자는 것입니다. 자녀가 하나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미래를 주시지 않습니까? “내가 장래는 너의 씨를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해주리라.” 이 약속 즉, 장래에 있는 자기 모습을 미리 보았기 때문에 따라나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지금 있는 십자가를 참으사” 이것이 우리 기독교의 성격입니다. 기독교는 미래 지향적입니다. 오늘은 무거운 십자가를 졌지만 장래에는 이런 것이 있다고 보상 종교와 같은 문화를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참은 결과가 어떻게 났느냐? 

오늘 말씀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험악한 십자가를 지고 있지만 미래는 하나님의 보좌 우편 권세를 갖게 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똑같이 미래를 바라보자.” 우리가 세상에서 미신과 참신을 가려내는 신학적 방법이 있습니다. 미신이란 뭐냐? 개인의 욕구 충족을 위해서 종교적 행위를 가게 하는 것입니다. 참신이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서 개인의 욕구는 절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이 모습을 오늘 성경말씀에 운동경기장에 비유했습니다. 운동 경기자는 운동경기에 장애요소가 있는 모든 얽매이기 쉬운 것을 벗어버려야 된다고 했습니다. 요즘 운동 경기자들을 보십시오. 어떤 때는 쳐다보기 민망할 만큼 간단한 옷을 입습니다. 과학적으로 만들어서 절대 경기에 저항을 받지 않고 오히려 옷을 안 입는 것보다도 입는 것이 더 효과적인 과학적 옷을 입고 경기를 하지 않습니까? 문명국가가 되면 문화적 영웅들이 생기게 마련인데 가장 빨리 그리고 크게 나타나는 종류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영웅이 되고 하나는 운동을 잘하는 사람이 영웅이 됩니다. 

이 둘 중에 하나만 잘하면 금방 영웅이 됩니다. 마이클 잭슨,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김연아, 싸이…. 두 가지 중에 한 가지만 잘하면 됩니다. 그래서 모두 그 길로 가는 것입니다. WBC 챔피언 권투 선수 한 사람은 링 위에서 10분 경기했습니다. 상금은 100억을 받았습니다. 올림픽에서 메달 따면 죽을 때까지 연금을 받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그 자리에 갈 수 있었는가? 오늘 말씀은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마라톤에서 금메달 딴 선수가 말하는 것을 내가 들었습니다. “연습 하다가 하도 힘들고 죽을 거 같아서 지나가는 자동차에 뛰어들어 죽고 싶었습니다.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참고 견딘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 약속이 주어진 것입니다. 사실 어떤 종목에 우승한 선수들은 알아주어야 합니다. 이 선수들은 먹고 싶다고 아무거나 먹으면 안 됩니다. 자고 싶다고 아무 때나 자는 것이 아닙니다. 하기 싫다고 그만 둘 수도 없습니다. 집에 가고 싶다고 집에도 못갑니다. 가족도 제안해서 만납니다. 뼈를 깎는 훈련을 이겨내야 합니다. 

제가 휴스턴에서 목회를 할 때 그 당시 서울 대학교 총장 동생이 저희 교회에 나오는 집사님이셨습니다. 저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미국에 유학 오셨는데 체격도 크고 기운이 세셨다고 합니다. 풋볼 선수가 되고 싶어서 코치한데 가서 선수 좀 하게 해달라고 날마다 졸랐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코치가 하는 말이 “그래, 네 뜻은 좋지만 이 운동은 동양 사람들의 체격 구조로 하는 운동이 아니다. 이것은 골격이나 근육의 모든 DNA가 아예 맞게 된 사람이 하는 운동이지 동양 사람은 안 된다.” 그렇게 말을 하셨다고 합니다. 

“왜 동양 사람을 무시하십니까? 내 체격을 보십시오. 넉넉히 할 수 있습니다.” 하도 졸라대니까 “그러면 할 수 없다. 네 성의가 대단해서 그러면 한번 시켜주겠다.” 그래서 좋아서 연습하러 나간 것입니다. 다른 선수들과 똑같이 운동복 입고 부딪히며 연습을 하는데 하루 연습하고 일주일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합니다. 코치가 웃으면서 “내가 말했지 않느냐? 이것은 동양 사람의 근육 조직이나 골격 구조로 되는 운동이 아니다.” 그래서 자기는 그 후로 풋볼 선수들을 얼마나 존경했는지 ‘저게 보통 힘든 운동이 아니구나. 까딱하면 죽는다.’ 그래도 하지 않습니까? 신앙생활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 그 각고의 노력과 인내심이 아니면 성공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장래에 있는 영원한 영생을 누리는 하나님 보좌 우편의 권세를, 그리고 영광의 면류관을 우리가 얻는 거 아니냐? 신앙생활도 똑같다.” 어떤 때는 우리가 올림픽 경기를 볼 때 가슴이 조마조마 합니다. 체조 경기를 하는 거 나무를 가로질러 놓고 그 위에서 180도 회전을 하니 그게 됩니까? 10년을 연습했어도 0.1초만 실수해도 굴러 떨어져서 점수가 깎이고 안 됩니다. 김연아 선수도 공중으로 뱅뱅 돌다가 그 얼음판에 엉덩방아 찧고 나가떨어지면 우리 모두 안타깝고 점수는 팍 깎이게 되는데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 잘하다가 한 발자국만 곁길로 나아가도 온갖 심판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그게 어려운 것입니다. 

여기 3절 말씀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하기를 참으신 예수를 생각하라.” 이것은 “온갖 모욕과 배반과 아픔과 고통을 다 참고 하늘 보좌 우편의 영광을 기어코 얻어내신 예수를 바라보라.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미래 기쁨이 주어져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금 아무리 어려워도 주님이 필요로 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내가 일부러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십자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아무 것도 안한다고 누가 뭐라고 합니까? 안 해도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안 한다고 국가가 나한테 벌을 줍니까? 세금 더 내라고 합니까? 사회적 불이익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사역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누가 시킨 게 아닙니다. 자신이 주님을 생각하면서 ‘아! 주님이 그렇게 십자가를 지셨으니 나도 이렇게 해야지.’ 자원함으로 자원봉사 하는 것입니다.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라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 기독교 2천년 역사에 하나님의 나라 확장은 모두 이 십자가의 의미를 바로 바라본 자원 봉사자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했습니다. 

우리 갈보리교회 선교 활동을 그렇게 많이 하고 있는데 안하면 누가 뭐라고 합니까? 안 해도 괜찮습니다. 누가 뭐라고 그러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자원해서 하는 거뿐입니다. 1950년도 미국 국민들은 한반도에 대해서 제일 소식을 많이 들었습니다. 6·25 전쟁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병사들이 3만 6천명이나 전투에 참가해서 죽었기 때문에 ‘야! 이 한반도라는 나라가 도대체 어떤 나라인데 우리 아들들이 3만 6천명이나 죽고 이렇게 큰 야단인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농촌마을에서 종교 영화를 상영했습니다. 

한국 전쟁에서 미국 병사들과 한국 여인들 사이에 생겨진 고아를 현실적으로 그린 영화였습니다. 거리를 헤매는 수많은 어린 고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지금 대한민국이 이렇게 되었다.” 그날 그 영화를 본 농부 부부가 안타까움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런 일에 쓰임을 받는 사역을 하고 싶은데 무슨 방법이 없겠나이까? 이 고아들을 위해서 일을 하려면 반드시 막대한 자금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의 농장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 경비를 가지고 한국에 와서 혼혈 전쟁고아 8명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들이 오레곤 비행기에서 내리는 모습은 지금도 역사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이런 고아들이 지금 수없이 많이 생기는데 이 사람이 지금 8명을 자기 자녀로 데리고 와서 입양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8명을 데리고 내렸습니다. 

그 뉴스를 본 미국 사람들이 각처에서 “참으로 당신 좋은 일을 했습니다. 나도 여기 동참할 테니 그 일을 그치지 말고 계속 하십시오.” 그래서 그분들은 지금까지 약 12만3천명의 돌볼 수 없는 어린이들을 입양시켰습니다. 그 이름이 헤리 홀드 씨라서 ‘홀드 양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딸 말리 홀드 여사는 지금도 한국에서 ‘홀드 아동복지회’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저와 관계가 되어서 말리 홀드 여사와 저는 같은 대학에서 같은 날 같은 자리에서 같이 박사 학위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사회사업 분야에서, 저는 목회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우리나라 말 가운데 성경 구절 같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자원해서 하는 사람을 돕는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여러 가지 모든 사역을 내가 열심히 바라보면서 멘토로 예수 그리스도를 정하고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러시아의 반체제 작가 중에 ‘솔제니친’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러시아에 실망해서 조국을 버리고 미국으로 망명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미국에 가서 살다가 미국에도 실망해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가 쓴 “서방세계에 대한 경고”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의 말은 “나는 러시아의 혁명사만 50년 연구한 사람이다. 6천만 명의 희생자를 낸 러시아 혁명의 원인이 무엇이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분명하다. 러시아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온 비극이었다.” 잊어버렸다는 것은 과거에는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예수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길을 가는 것이, 즉 목표가 없는 길을 갔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이것이 나의 대답인데 그래서 내가 실망해서 조국을 버리고 미국으로 왔는데 이 미국을 보니까 러시아가 과거에 갔던 길을 지금 열심히 따라가고 있다. 그러면 미국도 러시아같이 될 것이다.” 여러분! 요즘에 기독교 문화 속에서 발전한 유럽이 가라앉는 모습을 보시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유럽은 이미 사명을 버렸습니다. 깃발을 내렸습니다. 교회마다 텅텅 비어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깃발을 내리신 겁니다.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 그 결과 하늘 보좌 우편에 영광을 얻으신 예수를 바라보라.” 지금 온 세상은 어느 나라나 똑같이 바라보는 대상이 똑같습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있느냐? GNP입니다. 거기에만 몰두합니다. GNP 성장이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차선의 축복 조건입니다. 

이 문제는 벌써 2천 년 전에 인류의 갈 길을 예수님이 높이 설정해주신 것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먹고 사는 문제가 힘들어서 굶주리는 유대 백성들을 모아놓고 설교하실 때 군중들은 오병이어 때가 제일 즐거웠습니다. 실제로 먹는 음식을 만들어서 배불리 먹었다고 했지 않습니까? 음식이 남아서 12바구니에 거둘 만큼 그 기적을 바라보면서 예수를 바라본 것입니다. “예수는 GNP 성장의 중심인물이다. 이 분이 왕이 되시면 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리고 떡을 바라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계속 따라다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뭐라고 설교하십니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하지 말라. 그것은 인간의 최선의 목표가 아니다. 최선의 것과 차선의 것이 있는데 최선의 것은 그 나라의 그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다. 그리하면 차선의 요구는 하나님이 다 들어주실 것이다. 그렇게 방향을 설정하라.” 그렇게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렇게 산 나라들은 다 훌륭한 고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배들이 불러서 그 길을 안 간단 말입니다.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의 역사에 대해서 모든 설교자들은 똑같은 평가를 합니다. “금덩어리를 찾아서 남아메리카를 찾아간 그룹은 결과적으로 빈민굴을 만들었다. 신앙을 찾아 북아메리카를 찾아간 그룹은 오늘의 세계 중심에 서있다.” 

여러분 가정에 가훈을 정하십시오.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 섬기겠노라. 이게 우리 가문의 갈 길이다. 예수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지고 미래를 바라보며 어떤 고난도 이기며 앞으로, 앞으로 모든 삶의 결정을 예수를 푯대로 정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번 이런 믿음의 가훈을 가져보십시오. 찬송가는 믿음 좋은 사람들의 신앙 고백을 곡조화 한 것입니다.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내가 밟겠네 한걸음 한걸음 주 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내 평생소원 이것 뿐 주의 일 하다가 이 세상 이별 하다가 하나님 보좌 우편 주 앞에 가리라!” “어디든지 예수 나를 이끌면 어디든지 예수 함께 가려네!”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 보다 귀하다 나의 다가갈 길 다가도록 나와 동행하소서!” 앞서가신 예수를 바라보면서 그 뒤에 숨어있는 저 미래 영광을 지금 내 마음 속에 청사진으로 그리면서 가라는 것입니다. 

저는 생활 가운데 취미 하나가 있습니다. 다른 취미활동 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심방 마치고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내셔널지오그래픽’이라는 다큐멘터리 채널을 보는데 거기에 나오는 동물을 보면서 설교할 것들이 참 많습니다. 예전에도 제가 한번 보았는데 얼마 전에 ‘브이포메이션’이라는 것을 봤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기러기가 하늘을 날아갈 때 ‘V’자로 날아가잖아요? 그림 같습니다. 설명하는 사람이 저렇게 ‘V’자로 날아가는 이유는 저렇게 날아야 장거리를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까지 그 규칙을 어기면 못 간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앞서가는 기러기가 에너지 소모가 제일 힘듭니다. 그래서 제일 앞에 서있는 기러기와 제일 뒤에 따라가는 기러기의 에너지 소모 차이는 71퍼센트랍니다. 그래서 앞에 있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바람의 방향을 가르면서 길잡이가 되면 뒤의 기러기를 그대로 날갯짓만 하면 따라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인도자가 제일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워엉! 워엉!” 소리를 지르는데 그것은 불평이랍니다. 앞에 가는 기러기들은 “조금 더 빨리 가라. 너무 느리다.” 그런데 앞에는 힘듭니다. 그래서 큰 문제는 그 중의 하나가 행로이탈을 한답니다. 

규칙대로 가지 않고 삐쳐 나와서 자기 마음대로 가고 왔다갔다 전열을 흩트린답니다. 그러면 그 행렬은 못 간답니다. 그래서 일단 다 내려야 한답니다. 내려서 무엇을 하느냐 하면 그렇게 전열을 흩트리고 방해한 그 하나를 집중 공격해서 다시 날지 못하게 하던가 아니면 안 그러겠다는 서약서를 받던가 하고 다시 떠야 목적지까지 무사히 간다고 합니다. 나라도 교회도 다 똑같습니다. 전열을 흩트리고 날았다가는 다 같이 못갑니다. 

바로 예수님은 가장 힘든 앞서가신 예수님이 되었기 때문에 그 예수를 바라보면서 우리가 뒤에 따라가는 것입니다. 71퍼센트의 에너지가 덜 소모되는 자리에서 우리가 따라갑니다. 모든 공동체가 다 똑같습니다. 저는 1월 한 달 동안 방향 제시에 대한 2013년도 설교를 네 번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교역자들 수양회를 가서 1년 동안 우리가 이렇게 목회한다고 각기 구체적 실천신학 부분을 2, 3일 동안 기도회를 하고 올 것입니다. 우리 2013년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목표 설정이 훌륭하게 완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들에게 나를 바라보고 이렇게 따라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앞서가신 주를 따라갈 수 있는 믿음의 용기가 항상 우리에게 주어지고 고난스러운 모든 부분을 인내로서 참고 견디며 미래의 나를 지금 미리 바라보면서 하늘나라 보좌 우편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모든 십자가 사역을 훌륭하게 감당하는, 인내로서 감당하는 하나님의 귀한 자녀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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