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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장수할까? 영생할까? (요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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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할까? 영생할까?(요17:1~3)

설날 같은 명절에는 오랜 만에 가족 친지들이 모여 정담 나누게 됩니다. 그런데 모여서 음식만 먹고 왁자지껄 웃다가 끝나면 반쪽짜리 명절이 되고 말 겁니다. 조상들을 생각하며 성묘도 하고 추모예배도 드리면서 인생 공부를 해야 됩니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들의 일상이 얼마나 분주합니까? 그나마 명절이나 돼야 잠시 멈추어 주위도 돌아보면서 세월이 신속함도 느끼고 인생을 생각하게 됩니다. 특히 죽음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기회를 갖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명절이 주는 큰 유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경도 분명히 증거합니다. 죽음을 생각할 줄 알아야 참 인생을 아는 지혜자라고 말입니다. 

전7:2,4 “2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 4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

그런데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음을 맞이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죽음을 싫어합니다. 심지어 죽음을 생각조차 하기 싫어합니다. 오죽하면 죽을 4자라고 빌딩에 4층을 없애 버립니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죽고 싶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너무 힘들다는 뜻이지 정말 죽고 싶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들도 죽음이 뭔지 잘 모르면서도 본능적으로 싫어하고 무서워합니다. 한번은 어린 아이들이 하나님께 편지 형식으로 쓴 기도문 모음을 읽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글이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하나님,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학교에 못 갔던 날 있잖아요. 기억하시죠? 한 번만 더 그렇게 해 주시면 안 돼요?” 땡땡이 치고 싶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중에 죽음과 관련된 것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착한 사람은 빨리 죽는다면서요? 엄마가 말하는 걸 들었어요. 저는요, 항상 착하지는 않아요. 잊지 마세요!” 또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하나님, 사람을 죽게 하고 또 사람을 만드는 대신, 지금 있는 사람들을 그대로 놔두는 건 어떻겠어요?” 자기는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영원히 살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전3:11(상) “ ...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 ”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란 영생의 본능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누구나 장수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조차 막연하게라도 내세를 소망하며 영원히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장수하며 오래 오래 사는 게 좋기는 한데, 문제가 있습니다. 행복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아야지 질병과 우환에 시달리면서 고통 속에 살면 어쩌나 하는 겁니다. 요즘 고령화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장수가 기본적으로 좋기는 한데 어쩐지 겁이 납니다. 오래 살면서 혹시 중병에 걸려 비참해지는 것은 아닌가, 심각한 치매에 걸려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신문에 보니까, 우리나라에 올해 100세 이상 어르신이 1,201명이라고 합니다. 10년 후에는 1만 명이 넘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그분들 중에 건강하신 분도 있지만 병환  중에 계신 분들도 많고 특히 치매환자가 34%나 된다고 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장수해도 걱정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장수하는 게 아니라,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도록 관리도 잘 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건강 장수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영생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이겁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을 얻으면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고 내세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오늘 말씀을 잘 들으시고 이 귀중한 영생을 꼭 받으시고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날 밤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인류를 대신하여 드린 이른바 대제사장적 기도입니다. 그 중에서 1절~2절을 보면 예수님이 오신 것이 영생을 주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여기서 ‘때’는 십자가 지실 때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를 지고 그 후에 부활 승천하십니다. 그럼으로써 이 세상에 인간으로 오시기 위해 포기했던 하늘 영광을 다시 회복하실 겁니다. 그것을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십자가 죽음으로 택한 백성들에게 영생을 주실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인간은 본래 영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죽음을 경험하게 된 겁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대속으로 죄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에게 다시 영생을 주십니다. 그래서 롬6:23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인간이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 때문에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1] 영생의 본질 : 삶의 길이가 아닌 삶의 질의 문제 

영생에 대해 언급할 때 먼저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습니다. 영생에 대해 오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생의 본질이 길이인 것으로 오해합니다. ‘영생’(永生 Eternal Life)이란 말 자체가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는 합니다. 한자로나 영어로나 오해하기 딱 알맞습니다. ‘永’ 자가 ‘길 永’이니까 영생은 길게 오래 사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영어도 eternal이란 단어 때문에 영원히 사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물론 전적으로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생의 본질은 삶의 길이가 아니라, 삶의 질이라는 사실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고통 중에 오래 오래 영원히 사는 것도 영생이냐 이겁니다. 아니죠. 그렇다면 영생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더욱이 어떤 사람은 영원히 살고 어떤 이들은 그렇지 못한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신자든 불신자든, 의인이든 악인이든 모든 사람이 영원히 삽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삶’을 사느냐 이겁니다.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모든 사람이 현세에서 살다가 육체의 죽음 이후 내세에서 영원히 산다! 그런데 내세는 두 군데 천국과 지옥이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를 보면, 나사로는 사후에 천국에 들어가 살고 있고 부자는 음부 곧 지옥에 들어가 살고 있습니다. 둘 다 계속 영원히 살고 있는데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겁니다. 기쁨으로 영원히 사는 게 ‘영생’이고, 고통으로 영원히 사는 것은 영생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입니다. 


[2] 영생의 정의 : 하나님과 예수님을 아는 것 

그래서 영생이 무엇인지는 길이가 아닌 전혀 다른 차원에서 설명해야 합니다. 성경 곳곳에 영생에 관한 구절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구절은 본문 3절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여기서 ‘알다’(know) 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성경원어 헬라어로 ‘ 기노스코’(ginwvskw)인데, 특별한 뉘앙스를 갖고 있습니다. 단순히 지식적으로 관념적으로 아는 게 아닙니다. ‘관계’를 전제한 ‘체험적 지식’입니다. 우리 말로 아무개를 안다고 할 때 그 의미가 천차만별이죠. 이름으로 혹은 얼굴로 아는 것도 아는 것이고, 깊은 관계를 맺은 가운데 아는 것도 아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한 첫 단계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개인적 관계를 맺고 사는 것이 영생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런 믿음의 지식이 영생인데, 인생에서 가장 귀한 최고의 가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빌3:8~9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 ” 바울은 당대의 박사였지만 그 모든 지식이나 명예가 영생을 위해서는 백해무익하다는 겁니다. 오직 예수 믿고 아는 체험적 지식이 영생을 주기 때문에 가장 귀하다는 겁니다.

세상의 지식은 나름대로 부분적으로 유용하지만 영생을 주지 못합니다. 여러분, 정근모 장로님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세계적인 핵물리학자로 과학기술처 장관을 2번 역임했고, 세계원자력 기구 의장을 지냈으며, 대학 총장과 해비타트 이사장 등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입니다. 그러나 본인은 신실한 크리스천으로 복음 전도자로 인정받는 것을 가장 귀히 여깁니다. 이렇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그는 경기고 입학 4개월 만에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습니다. 졸업 후 미국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24세에 플로리다 주립대 교수가 됩니다. 그 당시 별명이 보이 프로페서(Boy Professor)였다고 합니다. 머리도 좋고 잘 나가고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인생이니 하나님 없이도 아쉬운 게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우환이 닥쳤습니다. 어린 아들이 만성 신부전증을 앓게 됩니다. 명의를 찾아다녀도 고칠 수 없어 나중에는 자신의 신장을 떼어줍니다. 그런데도 치유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세계적인 과학자라고 해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감을 느낍니다. 그런 고통 가운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 아들이 결국 임종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 때 아들의 최후 고백이 그분을 변화시킵니다. “아버지, 내 죽음을 축복해 주세요. 힘들고 고통스런 여행은 모두 끝났어요. 이젠 그분 곁으로 가게 됐으니 얼마나 행복한가요. 저 때문에 절대 눈물을 흘리지 마세요. 천국에서 만나요.” 예수님을 아는 믿음의 지식이 얼마나 위대합니까! 

여러분, 참 하나님을 알고 계십니까? 그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계십니까? 
이 지식이 영생을 얻는 가장 큰 축복인 줄로 믿습니다. 


[3] 영생의 확신 :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 영생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죠. 우리가 믿음의 지식으로 얻은 영생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염려입니다. 그런 걱정은 전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생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습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이미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져서 완전히 다른 세계를 살게 됐다고 확언하십니다. 절대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또 마10:28~29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붙잡고 있는 게 아닙니다. 붙잡혀 있는 겁니다. 

여러분,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붙잡는 게 안전합니까? 주님께 붙잡힌 게 안전합니까? 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가 양쪽에서 붙잡고 갔습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서 내가 고사리 같은 손을 놓치는 순간에도 아버지 어머니는 큰 손으로 꽉 붙잡고 있어서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오해해서 포기하려 하면 했지 절대로 주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놓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생에 대해 절대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4] 영생의 향유 : 지금부터 영원토록 누리는 영생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이 주신 영생을 적극 누리고 향유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 시작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난 직후, 예수님을 알게 된 직후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영원토록 누릴 수 있습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영생은 미래가 아닙니다. 현재와 미래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와 같은 영생의 기쁨을 누리도록 예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계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믿음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사는 것 자체가 영생입니다. 내세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현세에서도 누리는 ‘천국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식지 않습니다. 갈수록 뜨거워집니다. 그리고 내세 천국에 들어갈 때 극대화됩니다. 현세에 살 때는 육체의 한계도 있고 죄성 때문에 제한적이지만 내세 천국에 들어가면 아무런 제한이 없습니다. 영생의 기쁨을 만끽하게 됩니다. 어쨌든 예수님을 만난 후 시작된 영생의 기쁨은 현재진행형이고 갈수록 풍성해집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국(영생)은 날마다 만나도 가슴 설레는 첫 사랑의 향연이다.”(C. S. 루이스) 연인들이 몇 시간 동안 실컷 만나고도 헤어질 때 어떤가요? 아쉽죠. 그래서 결혼하고 부부가 됩니다. 10년쯤 살면 이야기 거리가 떨어지나요? 수십 년이 되어도 이야기 거리가 늘면 늘었지 줄지 않습니다. 사람끼리도 이럴진대 무한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게 얼마나 무궁무진하고 풍성하겠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많은 영혼들이 죽어 있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존재가 끝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영생의 기쁨이 없고 영적인 갈증으로 늘 공허합니다. 세상의 어느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마치 밑 빠진 독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으면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으로 샘물이 솟아나는 것처럼 심령에 만족과 기쁨이 넘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요4:13~14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외부에서 주어지는 물리적인 것은 아무리 좋아도 시들해집니다. 그러나 내면에서 솟아나는 영생은 시들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은 지루한 게 아닙니다. 갈수록 신선해집니다. 만일 아니라면 신앙이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기도, 찬송, 성도의 교제 가운데 주님을 만나고 체험하면서 영생의 기쁨 즉 천국의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세상 현세에서 그렇게 살다가 우리는 각각 내세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천국에 대해 언급하면 이런 질문을 하는 분들이 가끔 있어요.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 텐데 혹시 지루하지 않을까요? 그런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죄인들이 이 세상에서 요란한 유흥에 익숙해져서 그게 기쁨인 줄 아는데 사실은 그런 유흥 뒤끝은 항상 씁쓸하고 공허합니다. 하지만 천국은 갈수록 새롭고 무궁무진한 곳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지구만 해도 얼마나 큽니까? 지구촌이라는 말도 쓰지만, 세계 구석구석 다니며 문화도 체험하고 음식도 체험하고 사람들도 만나고 이야기하고 ... 무궁무진합니다. 그냥 패키지여행 몇 코스 다녀온 게 세계 일주가 아니잖아요. 

성경에 묘사해 놓은 천국의 모습은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천국은 광대무변한 곳입니다. 천국 일주를 하며 향유하는 데에는 ‘영원’이 걸리고도 남을 겁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영원히 살아도 지루함이나 권태를 느낄 틈이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순간마다 도처에 하나님께서 써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해 놓으셨을 겁니다. 하나씩 하나씩 영원히 맛보게 해 주실 겁니다. 지금은 아쉽지만 성경에 묘사된 것만 갖고 장차 들어갈 내세 천국을 한껏 상상하고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계21:3~4 보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영생입니다.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내세 천국에서는 현세에서 나쁜 것은 다 사라지고 오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기쁨만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천국의 풍경은 어떨지 간단히 묘사한 계22:1~2 보면 이런 말씀이 있죠.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생명강수가 흐르고 각종 실과가 있고 ... 절대 만족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기쁨을 가리켜 지복(至福 bliss)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생을 놓치는 것은 인생 최대의 불행입니다. 그것은 또한 정반대 영원한 지옥의 고통(영원한 사망)을 당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오죽 하면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셨겠습니까? 마18: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과장법으로 표현하신 것인데, 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장애의 고통을 안고 사는 한이 있더라도 예수 믿고 천국에는 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장수하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건강 장수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게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이 세상 현세에서 오래 살든 잠시 살든,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 살든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은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내세 천국 들어가기까지, 아니 영원무궁하도록 천국 영생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부디 이번 설 연휴에 이 진리를 다시 한번 마음속에 새겨보시고, 가족과 친지들에게 꼭 전파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는 영적인 이산가족 하나 없이 모두 영생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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