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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행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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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행 1:8)
 
짧은 시간에도 상황은 바뀔 수 있습니다. 

계사년 새해도 어느 덧, 한 달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마음으로 새해를 보내고 계십니까? 요사이 저의 가장 큰 관심은 대한민국의 미래입니다.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에 특별히 신학교의 미래와 우리 교회의 미래가 참으로 궁금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염려가 되기도 합니다. 과연 30년, 40년, 50년이 지난 후에 우리 조국은 어떠한 모습일까요? 우리 교회는 어떠한 모습일까요? 

이러한 마음을 품고 북한과 중국의 접경 지역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습니다. 수풍댐을 뒤로 하고 압록강을 내려오는 마지막 여정에서 저는 큰 도전을 받았습니다. 왼편으로는 북한 땅이고 오른편으로는 중국 땅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한쪽은 울울창창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었고 반대쪽은 ‘이 땅의 황무함을 보소서’라는 찬양이 절로 나올 정도의 황무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자란 조선족의 말에 따르면, 40여 년 전만 해도 압록강 지역과 중국의 동북 삼성지역에 살던 조선족 동포들에게 북한은 동경의 땅 이었다고 합니다. 북한을 한 번 다녀오는 것이 꿈과도 같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전에 외국에 살던 친지들이 좋은 것을 가져다주면 부러워하고 좋아했던 우리의 모습과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당시에는 북한이 중국보다 상황이 나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세대 만에 형편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지도자와 국민들의 선택이, 한 세대 만에 한 나라를 이렇게 온전히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새삼 두려운 마음으로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누군가의 희망이 되었던 나라입니다. 

사실 한 세대 만에 나라의 모습이 완전히 바뀐 가장 대표적인 나라는 바로 대한민국입니다. 수년 전, 출장 여정 중에 매우 인상적인 경험을 했습니다. 한 자선단체를 방문 중이었는데, 복도에서 일단의 흑인 청년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저 간단한 인사를 하고 세미나장에 들어왔는데 그 단체의 대표가 말하기를 복도에서 만난 청년들이 한국에서 온 신학교수와 목회자인 우리를 꼭 만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수년 전에 큰 지진으로 나라가 폐허가 되었던 아이티에서 온 대학생들이었습니다. 

그들과의 만남에서 그들이 우리에게 건넨 첫 마디는, “한국은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특별히 한국 교회는 우리의 희망입니다.”였습니다. 제게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를 부러워하고 다른 교회를 부러워한 적은 있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이,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이국의 청년들이 와서 우리가 자기들의 희망이라니 말입니다. 

물론 그들은 우리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보다 훨씬 더 부유한 나라, 훨씬 더 잘 사는 나라들이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나라들은 한국보다 더 많이 아이티를 도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들이 자기들을 도와주는 건, 고마운 마음과 함께 한편으로는 좌절감을 느끼게 했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나는, 우리는, 이런 나라에 태어나서 이렇게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되나’하는 생각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 그들이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대해서 알게 된 것입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자기들과 비슷했던 나라,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던 나라, 바로 그 나라가 한 세대 만에 저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건, 곧 그들에게는 희망이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신앙인으로서, 국가 발전의 길에 교회와 신앙인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희망이 되어주었다며 그들은 저희에게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한국과 한국교회, 그리고 한국의 신앙인들을 보고 희망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외국으로 떠나지 않고 아이티에 남아서 우리나라를 부흥시켜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것이 바로 20C 중반 이후 한국의 역사였으며 한국교회의 역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21C 한국교회는 어떠한 역할과 어떠한 모습으로 우리 사회를 섬기고 있습니까? 오늘날 우리의 역할과 우리의 모습이 이대로 지속된다면 30년, 40년 후 우리 교회,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과연 우리는 우리의 미래인 청년들로부터 “교회는 우리의 희망입니다.”라는 고백을 받고 있습니까? 우리가 그들에게, 또 사회로부터 “교회가 희망입니다.”라는 인정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신앙인다운 삶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희망과 소망이 되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신앙인으로서의 길을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보다 앞서 걸었던 신앙 선배들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 특별히 개혁 신앙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종교 개혁자들, 그 중에서도 프랑스의 종교 개혁자들이었던 위그노(Huguenot)의 역사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위그노의 역사를 보면서 참 신앙인답게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여정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마리 뒤랑(Marie Durand)이라는 여성의 이야기는 큰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마리 뒤랑은 오직 말씀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개혁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타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의 타락한 교회 권력과 왕권은 세상과 타협하는 신앙을 가지라고 유혹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그것을 거절했고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나이 10대 중반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된 것은 38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10대 중반의 소녀가 50대 여인이 되어서야 세상으로 다시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녀를 38년 동안 인내하게 하였을까요? 그녀가 갇혀있던 감옥에 서 다음과 같은 글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저항하라(REGISTER)" 그녀는 돌판에 머리핀으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resistance)의 근원이 된 '저항하라'는 글귀를 수십 년 동안 새기며 견뎌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극심한 고난 중에도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받은바 사랑 안에 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믿음을 가능케 했습니다. 믿음은 억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 안에 거하여야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그로 인해 생기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그래서 가지게 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굳건한 개혁 신앙은, ‘이 세상의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뿐이다’라는 하나님에 대한 주권을 인정하게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신앙의 기본을 일깨워 줍니다. 바로 이러한 신앙이 교황과 왕권의 불의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저항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불의와 세상의 유혹에 대하여 저항할 수 있는 힘과 참을 수 있는 인내를 줍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결코 그들 자신의 자기 확신과 철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사랑, 하늘로부터 오는 능력으로부터 기인합니다. 마리 뒤랑이 38년을 감옥에서 살면서도 유혹에 꺾이지 않고 저항할 수 있었던 것, 일생을 통하여 전인격적으로 신앙인답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하늘로부터 온 능력 때문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은, 바로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롯된다는 산 증거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도행전 1:8) 

신앙인다운 삶, 믿음과 저항, 인내와 희생은 결코 인간의 의지와 힘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함께하셔야, 성령님께서 능력을 주셔야 이룰 수 있습니다. 

박해는 복음과 교회의 확산을 이루었습니다. 

신앙 선배들의 놀라운 삶의 역사와 삶의 현장을 보면서 감격하고 도전받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백 년 전에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을 지킨 신앙의 선배들이 있던 프랑스에 지금은 개혁교회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전 인구의 0.4%만이 개혁교인이라고 한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오늘날 교회는 왜 저러한 형편에 놓이게 된 것일까? 그들의 열정과 헌신에 비하면 오늘 우리의 열정과 헌신은 매우 부족한데 앞으로 우리 교회는 어떠한 형편에 있게 된다는 말일까?’ 

이때 예일대학의 선교학자인 라민 사네(Lamin Sanneh)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선교자의 피 위에 교회가 서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 서 있다’고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잠비아 출신의 흑인 선교학자인 라민 사네는 역사적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초대 순교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곳 중 하나는 북아프리카입니다. 알렉산드리아, 이집트 등의 지역도 기독교가 번성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곳에 교회가 별로 없습니다. 지금의 아랍권, 이슬람 지역의 대부분은 예전 기독교 지역인 곳이 많습니다. 그렇게 따져보면 일본도 우리 한국교회 보다 훨씬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오늘 일본의 교회는 매우 연약한 상태에 있습니다. 프랑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보다 더한 열정을 가지고 순교의 피를 흘린 나라가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과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라민 사네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역사적 진실을 일깨워 줍니다. 극심한 박해로 말미암아 북아프리카에 있던 교인들이 전 세계로 흩어지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복음이 사하라 사막을 넘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남부로 전파되었습니다. 그래서 본인도 복음을 받게 되었고, 지금은 예일대학의 교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위그노들은 엄청난 박해로 말미암아 결국 고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국을 떠난 위그노들이 독일과 네덜란드, 영국으로 가서 그곳에서 산업의 부흥을 일으켰습니다. 산업혁명의 원동력은 바로 위그노들이었습니다. 또한 그와 함께 복음이 전 세계로 뻗게 되는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영국으로 갔던 복음은 대서양을 넘어 미국까지 갔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의 각별한 참모였던 사람은 위그노의 후손이었습니다. 이 위그노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미국은 프랑스와 동맹하게 되고, 나중에는 영국과의 독립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자유의 여신상이 미국에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복음이 태평양을 넘어 저와 여러분에게까지 전해졌고, 우리 교회 또한 그 복음의 터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복음을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신묘막측한 복음의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고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신앙인답게 산다는 것, 교회다운 교회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신앙인다운 삶, 교회다운 교회됨은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즉 고난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의 복음보다 물질적 번영을 강조하고, 십자가의 고난 없이 부활과 복 받기만을 강조하는 신앙과 신학은 우리 교회에 독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는 ‘값비싼 은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은혜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의 도구로 이용하려고 하면 그 은혜는 ‘값싼 은혜’가 되고 맙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값싼 은혜의 유혹에 너무 쉽게 넘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의 복음을 값비싼 은혜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값싼 은혜에서 벗어나는 회개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신앙인답게 살아가고, 교회다운 교회를 세워가는 여정은 필수적으로 고난을 동반합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견디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그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받고 힘을 얻어 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한 심성과 육체, 의지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의 위협과 유혹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로지 성령님의 도우심과 권능 주심을 간구해야 합니다. 

세 번째, 우리가 성령 충만을 위해 노력하고 증인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결과는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뜻대로, 나의 때가 아니라 주님의 때에, 내 방법이 아니라 주님의 방법으로,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나의 때에, 내 생각과 내 방법대로,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열린 신앙,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박해를 통해 온 세계로 흩어진 복음의 역사를 돌아보며,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가족을 넘어서는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교회를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지역 교회를 넘어서는 사랑임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우주적인 교회를 향하는 것임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을 누구보다 사랑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한 민족을 넘어서는, 모든 열방을 향한 사랑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오늘보다 나은 미래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까? 사회와 교회의 위기 속에서도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소망을 갖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과 한국 교회가 다음 세대와 세상을 향한 이 사회의 희망이 되려면, 무엇보다 먼저 우리가 신앙인다워져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인다워지는 것만큼 교회가 교회다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인다운 신앙인 됨, 교회다운 교회 됨은, 우리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곧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함으로 세상의 소망이 되는 길입니다.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성령의 능력을 받고 증인이 되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이 우리의 생각과 뜻대로, 우리가 원하는 때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더욱 더 겸손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 그리고 하나님의 모양을 분별하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열정으로, 그러나 겸손한 삶의 태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한 나라도 한 세대 만에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지금 내가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분명히 바뀔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아들, 우리의 딸, 우리의 손자와 손녀들, 형제와 자매들로부터 당신은 희망이고 소망입니다. 

그 소망은 ‘예루살렘과 유대’, 즉 내가 몸담고 있는 나의 가정, 나의 직장, 내 교회에서부터 증인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즉 나를 적대하는 북한 사람들, 우리를 경계하는 주변 나라들도 품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열방을 품는, 세계 선교를 꿈꾸는 삶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2013년 새해에 우리 모두가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아’ 내가 있는 바로 지금, 바로 여기에서부터 신앙인다운 삶을 살아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더불어 우리 교회와 우리 자신들이 가정의 희망, 직장의 희망, 다음 세대의 희망, 사회의 희망, 북한 동포의 희망, 세계 열방의 희망이라는 고백을 체험하는 복된 2013년 되시기를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임성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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