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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 (롬 10:14-21)


사람은 인체의 여러 부위들을 두고 각각 그 아름다움을 추구하기도 하고 칭송하기도 합니다. 
대표적인 것은 역시 얼굴로서 눈, 코, 입, 귀 등이 적당한 크기와 조화를 갖추고 있을 때 미남이라든지 혹은 미녀라고 부릅니다. 
그 외에도 남자의 떡 벌어진 가슴이나 소위 '식스 팩'이 있는 복부를 보고 황홀해 하기도 하며, 여성의 경우에는 무슨 볼륨감이 있는 몸매라든지 날씬한 각선미를 자랑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 볼 때 가장 관심이 적고 푸대접을 받는 부위는 '발'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손'만 해도 무슨 섬섬옥수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발'을 두고서 아름답다고 묘사하는 말은 거의 없고 그 대신에 무슨 '도둑놈의 발' 따위의 부정적인 수식어만 있는 것입니다. 
여성들도 자신의 발은 그대로 노출시키지 않고 그 대신에 '하이힐을 신은 발' 즉 원래의 모양과는 전혀 달리 왜곡된 발의 모습을 훨씬 더 예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역시 '발'이란 신체의 부위들 중에 '아름다움'과는 가장 거리가 먼 것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유독 그 '발'을 두고 '아름답다'고 말씀하는 구절이 있는데, 바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극찬하고 있는 구절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아름다움'과는 거의 상관이 없어 보이는 발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에 사용될 때에는 신체의 다른 그 어느 부위에 못지않게 그 미적 매력을 발산하게 된다고 성령께서 선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발'이라는 신체 부위 자체를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그처럼 자신의 발을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에 사용할 줄 아는 전도자를 칭찬하는 내용입니다. 

이제 2013년에도 '좋은 소식' 즉 복음을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해 내기 위하여 지난 주일부터 상반기 '태신자 갖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주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 각자가 올 한 해 동안에도 과연 어떤 자세로 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할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복음을 '아직 듣지 못한 사람'에게 꼭 전도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14절과 15절에 "14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본문 바로 앞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복음의 진수, 복음의 결정체, 복음의 제1명제가 될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신의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얻게 된다.'라는 사실이야말로 사람에게 주어진 최고의 '좋은 소식'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복음이 택자의 심령 속에 도달하기까지는 필연적으로 '전도'라는 과정이 필요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 14절과 15절이 설명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우선 여기서 "저희"라는 말은 앞서 12절에 나오듯이 예수님께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 없이 구원으로 초청해 주는 모든 사람'을 가리킵니다.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라는 말씀은 앞서 13절에서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했는데, 그처럼 예수님을 구주로서 입으로 시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라는 말씀은 그처럼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의 복음을 '들을' 수 있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그런 '인과의 과정'은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는 사실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 바로 복음을 '전파하는' 소리가 있어야만 그것을 들을 기회도 생기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게 됩니까?
바로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다. 
즉 전도의 이와 같은 '필연적 인과관계'의 전 과정에 있어서 그 근본적인 시발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열한 제자들을 갈릴리에서 만나신 자리에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상)고 '지상명령' 즉 가장 중요한 명령을 내려 주셨습니다. 
또한 승천하시기 직전에 당신의 제자들에게 마지막 유언처럼 남기신 말씀에서도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그 명령을 다시 한 번 당부하셨던 것입니다. 

특히 이 당시는 아직 신약성경도 기록되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복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전도자가 자기 발로 찾아가서 자기 입으로 전해 주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그처럼 예수님께로부터 '전도자로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하여 사명감을 가지고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가 될 때에 그 사람의 "발"은 실로 "아름답게" 된다고 한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좋은 소식"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구약에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될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뜻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포로' 된 자에게 '해방'이란 다른 그 무엇과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가장 '좋은 소식'임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을 영원히 지옥 형벌에 떨어질 저주로부터 해방시켜 천당 구원을 얻게 해 주는 것이니, 실로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모든 세상 사람에게 최고의 '기쁜 소식'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자신의 남은 전 인생을 바로 이 복음 전파에 전력투구하면서 선한 싸움을 위해 충성스럽게 달려가는 것이야말로 신자로서 가장 멋지고 영광스러운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일단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고 나면 나머지 전 생애의 의미와 목적을 바로 여기에 집중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 주님께서 아직 우리 목숨을 연장시켜 주고 계시는 이유가 바로 이 전도의 사명 수행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꾸어 말하자면, 전도하지 않는 신자는 '살아 있는 값어치를 다하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땅 끝까지 이르는 선교'를 위해서는 '보내는 전도자'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 가족, 내 학교 친구, 내 직장 동료, 내 집 근처의 이웃들 중에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에게 전도하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바로 나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내가 전도하지 않으면 그들은 영원히 복음을 들을 기회조차 가지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보내심을 받고 전하는 자'가 없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주로 부르는 자'도 결코 생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인생 최고의 '아름다운 사명'은 오직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일'인 줄 깨닫는 가운데, 자신이 먼저 영접한 예수님을 간증하고 교회생활의 은혜를 자랑하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늘 전도에 힘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복음을 '전해 듣고도 믿지 아니하는 사람'은 우리의 책임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16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에 "16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18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전도자가 파송을 받아 복음을 전파하고 듣게 함으로써 '저희'가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부르게 되는 일련의 과정들이 항상 끝까지 이어지게 되면 참 좋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전도를 받은 사람이 믿음으로 '반응'하는 순서에 가서 그 흐름이 그만 뚝 끊겨 버리는 경우가 자주 생기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특히 자기 동족 이스라엘 백성을 전도할 때에 나타난 현상으로서 여기 16절에서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라고 통감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처럼 자신이 전한 복음에 대한 거부반응을 두고 크게 낙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전의 선지자들 역시 그와 똑같은 일을 당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이사야" 선지자가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사 53:1상)라고 외쳤던 사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바울처럼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가운데 '자기 백성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찔리고 상하고 고통당하실 종으로서의 메시아'를 선포해 주었지만 그가 "전하는 바"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의 마음이 답답할 정도로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오히려 거부반응을 보였고,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는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라고 한탄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현상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그 예언을 성취하신 이후에도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옛적에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 주셨고 마지막 날에는 당신의 독생자까지 이 땅에 보내어 주셨지만, 사람들은 그 성자 예수님께서 친히 전해 주시는 '좋은 소식'조차 순종치 아니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들린 복음의 소리가 너무 약해서 그들이 믿음을 가지지 못했거나, 그들의 귀에 '좋은 소식'을 전해 주는 사람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예 들을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었습니까?
결코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로 그 점을 두고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은 자연이라는 일반계시를 통하여 온 땅에 충만히 퍼져 있었으며, 그런 가운데서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모세 오경으로부터 시작하여 역사서, 시가서, 선지서 등을 통한 특별계시들까지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약 시대에 와서는 성자 하나님의 화육강세를 인하여 하나님의 계시는 이제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을 만큼 최고 절정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복음을 순종치' 아니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이제 그 어떤 변명이나 핑계를 댈 길이 없는 처지였습니다. 
복음이 이처럼 풍성하고도 왕성하게 선포된 이후에도 그것을 듣지 않는 것은 100퍼센트 이스라엘 백성들 본인의 책임일 뿐, 사도 바울 같은 전도자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는 일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전도하기를 어려워하게 되는 대표적인 이유 중에 하나가 자기가 전도한 사람을 반드시 예수님을 믿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이 전도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는 하지만 최소한 그것은 전도자의 책임은 아닙니다. 
전도자의 책임은 빌립이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 했던 것처럼 일단 '와 보라'(come and see)고 교회로,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신자가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것은 오직 성령께서 친히 행하시는 일입니다. 
만약 그가 택자라면 반드시 온전한 신앙고백을 하게 될 것이고, 반면에 불택자라면 아무리 인도해 온 성도와 교역자가 힘을 합해서 애를 써도 결국 믿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처럼 성령께서 알아서 하실 일을 두고 전도자가 스스로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월권하거나 쓸데없는 걱정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전도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거부하는 사람이 항상 훨씬 더 많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이상한 현상도 아니며 놀랄 일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전도를 한 후에 그 자리에서 거절당하거나 교회까지 인도는 했지만 끝내 신앙인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그것 때문에 낙심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물론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일도 아니며 또한 우리의 책임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도자는 복음을 전해 주어도 받아들이지 않거나 듣고도 믿지 않는 자들을 훨씬 더 많이 만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지 말고 그저 만나는 사람마다 '와 보라'고 부지런히 교회로 이끌고 예배에 출석하도록 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복음을 '알고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아직 기다리고 계시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19절 이하 21절에 기록하기를 "19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20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21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19절은 사도 바울이 신명기 32장 21절에 기록된 말씀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라고 사도 바울이 반어법적으로 질문하고 있는 대로 이스라엘은 분명히 하나님을 잘 알고 있는 백성이었습니다. 
아니, 이스라엘만큼 하나님을 가까이 알 기회가 주어진 민족이 다시없었습니다. 
  
민족의 시조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가나안으로 왔으며, 민족의 최대 구원 역사인 출애굽도 하나님의 기적적 능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십계명을 비롯한 하나님의 율법을 직접 받았으며, 최초의 성막과 성전을 지었던 민족 역시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실로 외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더 이상 자세히 알려 해야 알 수 없을 만큼 하나님과 가까이 지낸 민족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아닌 자, 허무한 것' 즉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하나님을 '시기나게 하며 노엽게' 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그처럼 하나님을 잘 알면서도 바로 제1계명과 제2계명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배반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편에서는 그런 이스라엘에 대하여 어떤 반응을 보여 주셨습니까?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20절에서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인용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구하지 아니하는 자'와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란 바로 '하나님을 찾지 아니하던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자발적인 의지나 노력을 전혀 보여 주지 않던 이방인들에게조차 하나님 편에서 먼저 친히 '찾아 주셨으며 나타나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이방인에 대해서도 그 정도이신 하나님이셨으니 당신의 선민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더욱 인애와 자비를 베풀어 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어지는 21절에서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고 하나님께서 선포하고 계시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토록 '불순종'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손을 벌리면서까지' 기다려 주셨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돌아서는 정도가 아니라 '거스려 말하기까지' 하는 그 배은망덕한 이스라엘이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들이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기만을 '종일토록' 기다려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역시 '알고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그냥 생짜배기 불신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특권적인 기회를 누린 후에 그만 실족하고 배교하게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 안에 살고 있었으면서도 온전한 신앙은 가지지 못했던 자들처럼, 교회에 등록을 하고 일정 기간 동안 출석까지 했지만 끝내 완전한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하고 도중하차해 버린 '장결자'들이 바로 여기에 해당될 것입니다. 
'전해 듣고도 믿지 않는 사람' 즉 전도를 받는 그 자리에서 일언지하에 거절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처럼 '알고도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도 꽤 많이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아예 전도를 받지 않은 사람보다 이처럼 일단 '은혜의 맛을 본 후에 타락한 사람'들이 더 어려운 대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런 사람들 역시 포기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향하여 여전히 '종일 손을 벌리고' 기다려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직 포기하지 않으신 생명을 어떻게 우리가 감히 '나는 일단 한 번 전도해 보았으니 아무 책임이 없다.'라고 제멋대로 일찌감치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 아버지께서는 아직도 비록 '집을 떠난 탕자'라 할지라도 당신께로 다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려 주고 계시는데 우리가 뭐라고 '이렇게 오랫동안 장결자가 된 사람은 더 이상 아무 가망이 없다.'라고 함부로 단정 지을 수가 있겠습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을 완전히 '알게' 되는 것은 결코 사람 쪽의 '찾음'이나 '구함'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편에서 먼저 찾아와 주시고 여전히 기다려 주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을 명심하면서, 그 어떤 전도 대상자나 장결 교인에 대해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전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수석 발레리나가 된 강수진 씨의 발 사진이 언론에 공개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정상적으로, 아니 거의 기형적으로 뒤틀린 모습의 발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두고 못 생겼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발은 그녀가 최고의 발레리나가 되기 위하여 그 얼마나 뼈를 깎는 듯한 노력을 다 기울였는지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발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발레 팬들은 바로 그녀의 발을 보고 강수진이라는 발레리나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고 하실 때에도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그 발은 다른 일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전도의 사명을 위해서 죽도록 충성하고 있는 발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발'만 아름답게 보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의 '발'이란 '부분으로써 전체를 표현하는' 일종의 제유법입니다. 
즉 하나님의 눈에는 '전도에 부지런한 발'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 전체가 정말 아름답게, 사랑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전도를 잘하는 교인이야말로 그 어떤 '완소남'보다도 더 매력적인, 그 어떤 '팔등신 미녀'보다도 훨씬 더 아름다운 존재인 것입니다. 
교구 담당 교역자의 눈에는 새신자 환영 시간에 '해산신자'를 가장 자주 데리고 오는 성도가 그 어떤 사람보다도 가장 아름답게 보입니다. 
분기 평가회를 할 때에 전도한 숫자가 많은 전도사들이 담임목사의 눈에는 문자 그대로 '미스 목양실 진선미(眞善美)'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처럼 전도를 열심히 하는 신자야말로 지금 이 순간에도 '14만 4천인의 수'를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의 구속사 완성을 총지휘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눈에도 최고로 아름답게 보일 것이 틀림없지 않겠습니까? 

우리 경향교회 역시 바로 이런 전도자들을 통하여 '남은 자'의 수가 채워지는 역사들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매달 한 번씩 모이는 '심방장 사역 보고회'에서 저는 그런 간증들을 수없이 듣게 됩니다. 
새로 이사를 와서 출석할 교회를 찾으려 하던 중에 자기 자녀가 경향교회 주일학교가 좋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온 가족이 등록하게 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어린이 새소식반을 통해 먼저 전도를 받고 우리 교회에 나오게 된 아이가 집에 가서 자기 부모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하고 나중에는 교회까지 인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태신자'로 작정한 대상이 천주교나 불교 신자여서 처음에는 거의 가망성이 없다고 여겨졌지만 끈질기게 기도하고 전도한 결과 끝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일도 벌어집니다. 
외로운 독거노인을 그저 틈만 나면 찾아가서 위로하고 도와드리고 하다가 결국에는 교회로 인도해 내는 심방장들도 많습니다. 
그야말로 '나가면 있고 안 나가면 없다.'라는 것이 전도의 철칙인 것입니다. 

이 '좋은 소식'을 '아직 듣지 못한 자'들에게 반드시 전해 주어야 할 사명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졌습니다. 
전해 준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무 책임의식을 가질 필요도, 그 때문에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알고도 순종치 아니한 자'들을 아직도 기다려 주고 계심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그저 끝까지 전도하고 전도하고 또 전도해야 할 따름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축복을 먼저 누리게 된 신자 모두에게 주어진 최고의 '지상명령'을 따라 아직도 내 집안과 이웃에 많이 남아 있는 '구원받을 생명'을 오직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 이 '세계를 받은 교회'로 부지런히 불러 모으는 '아름다운 전도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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