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설날] 넣고 빼는 이유 (레 2:11-16)

첨부 1


본문/레위기 2장 11-16절 
제목/넣고 빼는 이유 

음력설입니다. 올해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품은 꿈을 이루고, 다짐을 실천하여 하나님 앞에서 성숙한 성도로 살게 되길 다시 한 번 기원합니다. 

오늘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어른들에게 세배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을 구정보다 주일로 더 소중하게 여겨 하나님께 예배하러 모였습니다. 가정의 소중한 행사까지도 뒤로 하고 나와서 드리는 이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되길 소원합니다. 

요즘 제 아내에게는 큰 숙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친정어머니께서 식사를 잘 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연세가 92세이신 장모님은 때때로 식사를 하지 않겠다고 하셔서 아내의 속을 태우곤 하십니다. 식사를 거부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약해지신 정신 탓일 수도 있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식사를 준비해 드렸는데 잡수시지 않으면 속이 상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무엇인가를 드렸지만 거부당하는 문제>는 인류의 두 번째 범죄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아담의 두 아들인 가인과 아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가인과 그의 제사는 거부하셨습니다. 이로 인해 가인은 마음이 무척 상했고, 결국에는 동생 아벨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람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대단한 규모의 제사라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레위기는 <제사의 책>입니다. 레위기 1장부터 제사의 종류와 제사를 드리는 방식, 제사를 맡아서 진행할 제사장들을 세우는 법과 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례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에 대해 말씀하시는 이유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이스라엘은 비로소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아무 것도 갖춘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시내산 아래 도착했을 때, 그들을 조금씩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시는 작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분명한 <정체성>을 심어 주셨습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때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란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노예백성이 아니었습니다. 위대하고 고귀하신 창조주 하나님, 참 생명과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백성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핵심이 십계명이었고, 그 외에도 사회생활, 경제생활, 가정생활 규례 등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타락한 주변 나라 백성들의 삶과는 다르게 살아야 했습니다. 다른 나라 백성들이 하지 않는 일들을 해야 했고, 그들이 하는 일을 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달라야 한다>는 것은 <거룩>을 요구하신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거룩>이란 구별이란 의미를 가지는 단어로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다르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변의 다른 나라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백성임을 확인하는 기본은 <제사>였습니다. 주변 나라의 제사가 우상을 향한 것이라면, 이스라엘의 제사는 전능하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제사가 방탕과 타락과 쾌락과 음란함으로 이끄는 축제였다면, 이스라엘의 제사는 그들을 정결하게 하고, 축복의 백성이 되게 하는 엄숙한 예식이었습니다. 다른 나라의 제사가 인간 자신의 욕망을 위한 것이었다면, 이스라엘의 제사는 자신들을 지으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드릴 때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임을 확인하곤 했습니다. 제사는 그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사는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었고, 한편으로는 이스라엘을 건강하게 세워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제사처럼 중요한 일은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의 제사가 오늘 우리와 어떤 연관성을 가집니까?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 사이에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똑같은 구조가 존재합니다. 그 몇 가지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는 죄와 사망과 사단의 손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분이 하나님이셨던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언약의 자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을 잡수시면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주셨는데, 그 때 예수님은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 거룩해야 했듯이, 오늘 우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성도, 聖徒>라고 부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주변 나라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사회생활, 경제생활, 가정생활을 해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 사람과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인 것을 확인했던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릴 때마다, 그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인시켜 주는 데 있어서 예배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릴 때마다 축복을 받은 것처럼 우리는 예배를 드림으로써 복을 얻습니다. 제사장인 아론과 그 아들들은 백성들이 제사하고 돌아갈 때 민수기 6장 24절 이하의 말씀으로 축복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얻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우리 사이에는 영적으로 닮음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제사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간 것처럼, 우리도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제사가 중요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예배가 중요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제사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도록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사에 대해 말씀을 시작한 첫 부분부터 이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장 3절을 보면 <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입니다. 새번역성경은 이 부분을 <나 주가 그것을 기꺼이 받게 하라>고 번역했고, 예전에 사용하던 개역성경에서는 <열납하시도록>이라고 했습니다. 영어성경 NIV에서는 <be acceptable>이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많은 제물을 드린다고 해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지 않으신다면 그 제사는 헛것입니다. 밥상을 거절당하지 않듯이, 선물을 거절당하지 않듯이, 사랑의 고백을 거절당하지 않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제사가 거절당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제사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가 되어야 했던 것처럼,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를 받으시거나 거절하시는 것이 심각한 이유는 받으시거나 거절하시는 것이 단지 제물이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이것을 잘 보여줍니다. 

창세기 4장 4-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고 했습니다. 받으신 것에는 제물만이 아니라 그것을 드린 아벨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거절하신 것에는 제물만이 아니라 그것을 드린 가인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받으신 것도, 거절하신 것도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신다면 그것은 곧 나라는 존재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거절하신다면 그것은 곧 나라는 존재를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거절당하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대학 입시에서 거절당할 때, 취직을 위해 원서를 냈으나 거절당할 때, 선을 보아 상대방으로부터 거절당할 때......거절당했다는 것은 삶의 뿌리가 뽑히는 아픔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상대방이 우리를 받아주었을 때, 그 기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거절당하는 것처럼 비극적인 일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7장 22-23절을 보면 마지막 날 주님께서 거절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저는 요즘 들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사람>이란 문제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새 정부에서 일할 후보자들의 면면이 드러나면서, 그 분들이 청문회를 무사히 통과하여 총리로서, 장관으로서 우리 국민들에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하는 것이 관심사가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와 비슷한 입장에서 저는 제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목사인가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변에 우리를 실망시키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 밭에서 밭을 갈고 있지만, 한 사람은 받으시고 한 사람은 버림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또 두 여인은 맷돌질을 하고 있지만, 한 여인은 받으시고, 한 여인은 버림을 당한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 원리를 오늘 제사에 관한 말씀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본문의 핵심은 제물을 준비할 때, 반드시 빼야 할 것이 있는가 하면, 반드시 넣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넣거나 빼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사람이 되는 비결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물을 준비할 때 반드시 빼야 할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누룩과 꿀, 두 가지였습니다. 1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모든 소제물에는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그런가 하면 반드시 넣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1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소금은 반드시 넣어야 했습니다. 

또 15절을 보세요.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유향을 더할지니 이는 소제니라>고 했습니다. 누룩과 꿀을 빼고, 소금과 유향은 넣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빼기도 하고, 넣기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선 넣어서는 안 될 것부터 살펴봅시다. <누룩>은 가루반죽에 넣어 부풀게 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누룩은 반죽의 모양도 달라지게 하고, 성분도 변하게 만듭니다. 화학적 작용에 의해 반죽을 변하게 합니다. 누룩을 넣지 않게 하심으로써 가르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변질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변질되고, 오직 하나님만 찾던 마음이 변질되고, 감사의 마음이 변질되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변질시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달콤한 유혹입니다. <꿀>이 상징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꿀은 달고 맛있는 것의 상징입니다. 세상에는 꿀처럼 사람을 유혹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 가나안 백성들의 축제는 정말 매력적인 것이었습니다. 반 벌거숭이의 여인들이 음란한 춤을 추고, 남녀가 어울려 돌아가는 축제는 꿀보다 더 달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거룩하고 정결할 것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따분한 반면, 이방의 축제는 꿀 같았을 것입니다. 이런 유혹은 백성의 마음이 변질되게 만들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식고, 감사가 식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끝까지 부패되지 않고 변질되지 않는 믿음과 사랑으로 하나님을 섬기길 원하셨습니다. 변함없는 일관된 믿음과 사랑을 상징하는 것이 <소금>이었습니다. 소금은 변치 않는 것의 상징이었습니다. 썩음을 방지하는 것이 소금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제물에 소금을 넣어 <변치 않음>을 확인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생명이 무엇일까요? 사랑의 생명력은 뜨거움이나 짜릿함이나 감칠맛에 있지 않습니다. 사랑을 참 사랑이 되게 하는 생명력은 변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뜨겁고 짜릿하고 감칠맛이 나도 변질되어 사라지는 사랑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변치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소금이 필요한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사는 <하나님을 향하여 변치 않는 믿음과 사랑을 가진 사람이 드리는 제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지고 나갈 태도의 핵심은 <첫 사랑이 변치 않는 신실함>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으시는 그 분 앞에서 우리도 변치 않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만드는 모든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아무리 달콤해도 끊어야 합니다. 콜라의 짜릿한 맛의 유혹을 떨치지 못해 하루에 8리터나 마신 청년이 불과 25세임에도 이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그 어떤 세상의 유혹도 넘어가면 곤란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떠나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에 소금을 뿌려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 위에 <유향>을 더해야 합니다. 유향은 기쁨과 감사와 자원함을 뜻합니다. 예배는 억지로 하는 게 아닙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자원함으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억지로 오셨습니까? 이 예배가 감사와 기쁨에서 우러나는 예배가 되길 원합니다. 

우리가 넣지 않아야 할 것을 넣고, 넣어야 할 것을 넣지 않는 동안 한국 교회는 너무 많이 변질되었습니다. 세속의 물결이 교회 안에 넘실대고 있고, 많은 성도들이 그것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노력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는 인본주의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궁극적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가 인생의 목저인 것처럼 변질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국 교회와 예배가 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교회는 교회답지 못하고, 성도는 성도답지 못하고, 예배는 예배답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공연처럼 되었습니다. 예배를 통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관람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헌금을 내고 예배를 구경하는 듯한 태도는 마치 돈을 내고 영화를 보는 것과 흡사합니다. 교회마다 자신을 드리려는 간절함보다 더 많은 관람객을 모으려는 듯이 화려하고, 더 볼 게 많은 예배 순서를 만들어 내려고 경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를 드리길 원합니다. 변치 않길 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에베소교회가 첫 사랑을 버린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을 처음 믿을 때 가지셨던 순수한 사랑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형식만 남으면 곤란합니다. 처음 사랑, 처음 마음, 처음 순수함을 지켜야 합니다. 그 어떤 오염된 것들과 손을 잡아도 안 됩니다. 우리의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 받으시는 인생, 받으시는 교회가 되길 원합니다. 올 한 해를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하나님 앞에 서길 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추천인 1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