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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불법 재판 (요 18: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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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재판 (요 18:12-14)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러라. (12-14)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하게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그들이 내가 하던 말을 아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언하라 바른 말을 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니라. (요18:19-24)  


안나스와 가야바

오늘 부터는 역사적인 예수님의 재판 장면을 살펴보고자합니다.  예수님은 크게 두 종류의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첫째는 유대인들에게 받은 종교 재판이요, 둘째는 로마 총독에게 받은 시민 재판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유대인들 앞에서 종교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12-14)  

이 때에 예수님을 심문한 인물은 당시 사두개파의 거두였던 아나니아와 그의 사위 요셉 가야바입니다.  먼저 이 두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이 사건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안나스는 아나니아, 혹은 하난 등으로 불려지기도 했던 은퇴한 대제사장입니다.  그는 시리아 총독이었던 Quirinius에 의해 주후 7년에 대제사장이 되었고, 주후 15년 Valerius Gratus에 의해서 면직되기까지 7년간 제사장 노릇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다섯 아들들과 사위 가야바를 거의 중단 없이 대제사장 자리에 이어 앉힘으로써 막강한 실권을 행사하였습니다.  그의 막내 아들 아나누스 2세는 주님의 동생이었던 야고보를 돌로 쳐 죽이도록 만든 장본인입니다.  

성경에 보면 안나스가 대제사장 자리에서 물러났음에도 불구하고 당대 사람들은 항상 그를 대제사장이라고 불렀습니다. (눅3:2, 요18:13,19, 22,24, 행4:6)  안나스는 교만하고, 야심적이고, 교활한 성품의 소유자로 정치적 술수를 동원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의 수입은 주로 성전 제사를 드리는 제물들, 양, 비둘기, 포도주, 기름 따위를 팔아서 챙긴 것입니다.  

당시 감람산에는 안나스의 네 아들들이 제물을 파는 매점이 있었고, 성전 구내에도 한 곳이 있었습니다.  그 장사는 독점적인 것이었고, 큰 절기 때에는 매우 비싼 값에 제물들을 판매하였기 때문에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 내에 이들이 차려 놓은 제물 판매대를 둘러엎으시면서 책망하셨습니다. “너희는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구나!”  안나스 일가는 유대인들에게도 인심을 잃고 있었습니다.  탈무드에 보면 안나스 일가를 향하여 이렇게 저주합니다. “안나스 가족에게 재난이 있으라!  독사같은 자들에게 재난이 있으라!”  
  
안나스는 예수님 재판에서 주동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를 가장 먼저 심문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심문 내용은 그 이후로 가야바나 빌라도가 재판을 하는데 하나의 지표가 되었습니다.  당시에 사형을 요구한 산헤드린 공회 의장은 대제사장 가야바였고, 직접 사형 언도를 내린 사람은 총독 빌라도였지만, 실제로 예수를 죽이도록 유도한 장본인은 바로 안나스였습니다.  그래서 신학자 르낭은 안나스에 대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안나스야말로 가공할 드라마의 주역이다.  그는 가야바 이상으로, 빌라도 이상으로 마땅히 전 인류의 저주를 받아야 될 사람이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군병들이 예수님을 체포한 직후 현직 대제사장인 가야바를 제쳐 놓고, 먼저 안나스에게로 간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아마 안나스는 예수를 체포하면 먼저 자신에게 데려 오도록 지시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안나스의 집은 감란산에서 가까웠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안나스와 가야바가 한 집에 살았던지, 아니면 마당을 함께 사용할 정도로 가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안나스는 예수에 대한 재판의 방향을 보여준 뒤에 가야바에게로 보냈습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로서, 주후 18년에 대제사장이 되어 주후 36년에 Vitelius에 의해 면직되기까지 18년간 대제사장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재판했던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이었습니다.  그는 일찍이 예수 한 사람만 제거하면 만사가 해결된다고 주장했던 사람입니다.  종교든지 윤리든지 상관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예수만 제거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예수님을 재판하는 재판장으로 앉은 것 자체가 벌써 정의로운 재판을 기대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의 유대 사회를 대표하는 집단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였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적이며 서민적이고 반 로마적이었습니다.  사두개파는 성전을 장악하고 부유층을 대변했으며 친 로마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보다 더 앞장 선 사람들은 바리새파보다는 사두개파입니다.  사두개파 입장에서 볼 때에, 성전에서 제물 판매대를 둘러엎는 예수가 위험스럽게 보였습니다.  성전의 이권을 빼앗기고 자기들이 누리는 지위가 약화되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가야바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 때문에 반 로마적인 민중 봉기가 일어나서 로마 정부의 비위를 상하게 한다든지, 자신들의 성전을 잃는 것이 다 염려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리새파 보다도 열성적으로 예수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실제로 바리새파 지도자 중에는 니고데모 같이 예수를 믿는 자가 있었으나, 사두개파 중에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안나스와 가야바는 예수 죽이기 작전을 전격적으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그들은 음모를 꾸미고, 재판 자리에 앉아서, 거짓 증인을 세우고, 사형을 결정하고, 로마 정부에 압력을 넣고 결국은 죽게 만들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과 교훈에 대한 질문

안나스는 예수님께 두 가지를 물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19)  첫째는 주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진술하라는 것이고, 둘째는 주님이 가르친 교훈에 대하여 진술하라는 것입니다.  
 
첫째로, 제자들에 대하여 진술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의 이름을 대라든지, 제자들을 찾아내라든지 하는 뜻의 질문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말하자면 스승인 예수가 하던 일을 다 할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병든 자들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고 죽은 자를 살려 내는 일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안나스에게 있어서는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예수와 똑 같은 일을 할 수 있다면, 예수 한 사람만 제거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염려하던 바는 나중에 사실로 입증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증거 하기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주님이 하시던 일을 계속했습니다.  세상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바로 이점이 안나스가 질문한 의도였습니다.  그는 예수의 제자들이 얼마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제자들의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바로 이것은 오늘날 불신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 한 사람이 믿음으로써 주위 사람들이 걱정할 정도로 큰 영향이 있습니까?  가족들에게는 얼마나 큰 영향이 있습니까?  믿으나 마나 입니까?  내가 믿는 것 때문에 친구들에게, 이웃에게, 직장 동료들에게, 도덕적인 감화를 줄 수 있고, 예수를 믿게 만들 수 있습니까?  

안나스가 비록 예수를 죽이려는 입장에 서 있었지만, 문제의 핵심만은 정확히 보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역량, 바로 그것이 기독교의 앞날을 좌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역량에 따라서 우리가 속한 집단이 불신자가 될 수도 있고, 신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세속 권력자들이 염려할만한 영향력 있는 제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주님의 교훈에 대하여 진술하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  이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훈이 무엇인지 궁금해서 물은 것이 아닙니다.  꼬투리를 잡기 위한 질문입니다.  죄목을 찾으려고 던진 질문입니다.   안나스는 예수님의 교훈이 진리이든 비진리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양심적이든 비양심적이든 상관 않았습니다.  정의냐 불의냐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예수를 정죄할 수 있는지 없는지, 그것만 물었습니다.  

공관 복음서에 보면 이들은 이미 예수의 죄목을 세 가지로 집약했습니다.  
  
첫째 죄목은 성전 모독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면 사흘에 짓겠다고 하신 말씀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에 짓겠다는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을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전의 기본적 의미는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란 뜻인데, 진정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은 바로 주님의 몸이었습니다.  주님의 몸은 사람의 모습을 가지고 오셨지만 그 속에 신성이 계시니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실제로 구약의 성전은 상징과 모형에 불과했습니다.(히8:5, 9:24)  

구약 성전의 실체는 바로 예수 자신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을 헐면 사흘에 짓겠다는 것은, 성전이신 주님의 몸이 죽임을 당할지라도 사흘 만에 부활하시리라는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헐어버린다는 말로 들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 성전(제3성전, 헤롯성전)은 80여년이나 걸려서 완공된 직후,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군대에 의해 산산 조각이 났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성전을 근거로 부를 축적하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전에 대한 발언에 대하여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둘째 죄목은 신성모독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신 것 때문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이 말에 대하여는 바리새인들이 더욱 반발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 말을 예수님과 하나님은 동등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들의 반응에 대하여 주님은 그들의 이해한 바를 조금도 수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주님의 아버지와 동일한 신성을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안에 대하여 유대인의 율법에는 충분히 신성 모독죄를 씌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로마 법상의 사형 죄는 아니었습니다.  
  
셋째 죄목은 왕권에 대한 도전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왕이라고 발언하신 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도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의 뜻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 틀림없으나 자신의 왕국은 지상에 존재하는 나라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로마 황제 가이사에게 반역한 죄인이라고 덮어 씌웠습니다.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는 어떤 말꼬투리라도 잡고 늘어졌습니다.
  
안나스는 예수님께 사형 죄를 씌울만한 구실을 찾으려고 힘썼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예수 자신의 발언 속에서 찾았습니다.


주님의 답변, 재판의 불법성

안나스의 질문에 대하여 주님은 간단히 답변하셨습니다.  

첫째는 제자들에 관한 질의에 대한 답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 관해서는 일체 함구하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도적입니다.  모든 책임은 자기 하나로써 다 질 것이며, 따라서 제자들은 절대로 손대지 못하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나”라는 일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셔서 발언하셨습니다.  이것은 헬라어 어법상 “나”라는 것을 매우 강조한 것입니다.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내가 가르쳤고...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주님이 제자들을 철저히 옹호하신 결과로 제자들은 후일에 마음껏 세상을 누비고 다닐 수가 있었습니다.  책임질 줄 아는 지도자 아래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안전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그러나 책임질 줄 모르는 삯군 목자는 양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이리가 와서 잡아먹든지 말든지 상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양들만 죽습니다.  선한 목자로서 주님은 자신의 제자들을 철저히 보호하셨습니다.
  
둘째는, 주님의 교훈에 대한 답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교훈에 대하여 진술하기 전에 재판의 불법성을 지적하셨습니다.  유대인의 재판 법에는 고소자가 없는데도 피고를 잡아들이는 것은 위법입니다.  더욱이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재판을 한다는 것은 더욱 불법입니다.  

안나스는 예수님께 교훈에 대하여 발언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자신의 말 속에서 증거를 찾겠다는 뜻입니다.  고소자도 없이 재판을 열고, 증거도 수집하지 않은 채로 발언하라고 하니 얼마나 큰 잘못입니까?  그래서 주님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20-21)  

예수님의 교훈은 공개적이었습니다.  여러 회당(복수)에서 가르쳤고, 성전(단수, 예루살렘 성전을 의미함)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은 항상 대중들에게만 가르치고, 개인적으로는 가르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훈의 이중성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즉,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가르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르게 가르친 적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군중들에게나, 제자들에게나, 개인에게나 동일한 교훈이었습니다.  앞에서는 충성을 가르치고, 뒤에서는 반역을 가르치는 공산당 식의 교훈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는 이렇게 해석하고 저기서는 저렇게 해석해도 좋은 애매모호한 교훈도 아니었습니다.  의미가 분명한 교훈이었습니다.  주님의 교훈을 들은 사람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그렇다면 무조건 사람을 잡아다 놓고 진술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당당히 증인들을 세우라는 말입니다.  더욱이 피고의 죄를 입증하기 위해서 증인을 세우는 것은 고소자 측의 책임이지 피고의 책임은 아닙니다.  안나스는 이 재판에서 예수님께 진술을 강요할 처지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점을 예수님은 지적하셨습니다.
  
주님의 진술에 대하여 공회는 불법적인 심리로 일관했습니다.  주님이 답변하실 때에 옆에 서 있던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님을 쳤습니다. 아마 주님의 얼굴을 때린 것 같습니다.  이 사실을 놓고 어떤 학자들은 이 공회가 정식 공회가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만일 그 공회가 정식 공회였다면 피고에게 함부로 손찌검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23)  불법자들은 언제나 궁지에 몰리면 폭력을 행사합니다.  논리도 근거도 없는 재판에서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오직 폭력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대답지 못한 안나스는 예수님을 가야바에게로 보냈습니다.  불법 재판을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보다 모양을 갖춘 재판을 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묶어서 가야바에게로 보낸 것입니다.  

가야바는 대제사장이었으므로 직책상 공회 의장입니다.  그러므로 안나스는 가야바로 하여금 공회의 형식을 빌어 재판을 계속하도록 했습니다.  공회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 밤중에 공회가 제대로 소집되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공관복음을 종합해 볼 때, 가야바가 소집한 공회는 가야바의 뜰에서 이루어진 불법 공회가 틀림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공회는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유대인 사회의 종교적 계율을 정할뿐 아니라, 사법적인 재판도 담당했습니다.  일반 범죄의 재판에서 사형 선고까지도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다만 사형만은 로마 총독의 허락을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그 경우에도 대부분 산헤드린의 결정대로 진행되었습니다.  특히 성전의 이방인의 뜰에서 유대인의 뜰로 넘어 들어간 사람에 한해서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라도 사형을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공회의 절차를 보면 우선 정한 시간에 성전 밖의 지정된 장소에서 모였습니다.  공회원들은 반원형으로 둘러 앉아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의 공증인이 서 있었는데 이들의 책임은 의결 사항을 기록하는 것이었습니다.  죄수는 수의를 입고 공회원들 앞에 서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재판 심리와 판결은 즉시 할 수도 있었으나, 사형에 관한 판결만은 심리한 날에 선고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형 사건은 안식일 전날이나 절기 전날에는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예외 조항이 있었는데 대중들을 잘못 인도한 자는 심문한 날에 선고를 할 수도 있었고, 밤중에도 선고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통상 공회의 소집은 아침 소제를 드리는 시간에 개정하여 저녁 소제 드리는 시간에 마감토록 했습니다.  이러한 공회의 규칙으로 볼 때에 예수님의 재판은 여러 면에서 불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공회의 개정 시간이 불법적입니다.  아침 소제를 드린 후에 개정되어야 되는데 한 밤중에 임의로 개정했습니다.  재판 건으로 모일 경우는 우선 고소자가 증거를 가지고 함께 참여해야 하는데 아무 증거도 준비하지 않은 채로 증인도 없이 재판을 열었습니다.  특히 사형에 관한 판결은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을 세우도록 한 것이 율법입니다.(민35:30,신17:6)  

예수님을 재판한 자들은 아무 증인도 증거물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사형 선고를 내리려면 당일 심리하여 당일 선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일 선고를 내렸습니다.  아나니아는 예수님을 결박한 상태로 심문하고 결박한 상태로 보냈습니다.  고발자도 없고 증거도 없는 피고를 계속 묶어서 끌고 다니고 묶어 놓고 재판한 것도 반 율법적입니다.
 
재판의 불법성으로 따진다면 근본적으로 그 재판은 불법입니다.  도대체 가짜 제사장이 진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한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인류의 재판장이 거짓과 허위에 찬 인간 재판장에게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만 됩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불법 재판을 받으셔야만 되었는가?  그리고 예수님은 왜 불법 자들의 재판을 끝까지 당하셨는가?


모든 것을 순순히 당하신 예수님

예수님의 재판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불법 재판을 받으시고, 사형이 집행되기 까지 단 한 번도 형 집행을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순순히 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무한한 능력을 전혀 사용치 않으셨습니다.  귀신을 쫓아내시는 능력도, 말씀 한마디로 문둥병, 중풍병, 귀머거리, 소경 고치시던 능력도, 바다와 풍랑에게 호령하시던 능력도, 무덤에서 죽은 사람을 일으키시던 능력도 전혀 사용치 않으셨습니다.  순순히 죽음의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피고인석에서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왜 나를 죽이려하느냐 항의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자신의 무죄성과, 자신의 신분만 증거 하려 하셨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유대인의 왕이다.” 

둘째,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이 재판을 받고 죽음에 던져지기까지 전혀 구해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아들이 십자가에 죽도록 계획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재판과 죽음은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의도한 “의도적인 재판이요, 의도적인 죽음”이었습니다.  
  
주님은 재판에 이기려고 재판에 응하신 것이 아닙니다.  재판에 지려고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으시려고, 죽으시려고,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은 계획된 죽음입니다.  십자가는 아버지가 정하신 길입니다.  주님은 이미 자신이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을 세 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시면서도 아버지의 잔을 뜻대로 받겠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재판과 죽음을 의도하셨을까요?
  
첫째로,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기 위함입니다.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기 위함입니다.  죄는 인간 영혼을 죽입니다. 육체도 죽입니다.  삶을 어둡고 불행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 죄를 인간 스스로는 해결하지 못합니다.  요즘 핵폐기물 때문에 골치 아픕니다.  어디에 버릴 곳이 없어요.  버리면 또 다시 어디선가 나타나 인체에 해를 끼칩니다.  이 핵 폐기물보다 더 해로운 것이 인간의 죄악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죽을 때까지 씻어도 씻지 못할 죄악 된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고행으로도 없어지지 않고, 어떤 선행으로도 보상되지 못하고, 어떤 희생으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미움, 시기, 질투, 교만, 탐욕, 정욕으로 가득 찬 본성!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그 악한 본성!  그 더러운 우리의 본성을 대신하여 주님은 죽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도 모든 죄를 아들에게 대신 지우고 처벌 받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재판과 죽음은 이렇게 계획된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위한 죽음입니다.  죄를 해결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진노하신 이유, 인간과 하나님을 갈라놓은 것이 바로 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자녀”로 받아 주시고, 하나님의 영을 우리 마음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을 담은 신령한 성전들이 되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그것은 바로 인간이 바라던 소망이요,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목적입니다.
  
셋째로, 인간의 모든 불행에 종지부를 찍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의 의도된 죽음이 모든 인생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죄로 낙인찍힌 천박한 자들의 자격을 회복시켜 주시고, 병자를 고치고, 굶주린 사람들을 먹이고, 불구자를 일으키고, 무덤에 있는 자를 살려 내는 그런 일들을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주님이 우리 죄를 해결하심으로써 가능한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쇱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여러분, 혹시 세상에서 재판 중이신 분은 없습니까?  재판은 이기려고 합니다.  승소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려고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다 알면서도 사형을 당하기 위해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재판에 이기면 내게는 많은 이익이 따라옵니다.  그러나 남에게는 별 유익이 없습니다.  주님은 재판에 지심으로 인류를 사망에서 건지셨습니다.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  인류에게 축복과 행복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오늘 세상에는 이기려고, 뭔가 챙기려고 무수히 소송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에게는 다소간 이익이 될지 모르지만, 남에게는 백해무익합니다.  
  
다 알면서도 재판에 져 줄 수는 없을까요?  내가 져 줌으로써 남들이 생명을 얻고, 내가 패함으로써 다른 사람과 화해가 이루어지고, 내가 져 줌으로써 다른 사람이 행복하게 만든다면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자녀들이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차례 재판을 받았습니다.  천부장 앞에서, 총독 펠릭스 앞에서, 베스도 앞에서, 헤롯 앞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풀려나려고 재판을 받지 않았습니다.  풀려날 기회가 있었지만 오히려 로마 황제 앞에 상소하여 로마로 갔습니다.  풀려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무죄 입증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오직 로마 황제와 로마 시민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  그래서 로마 제국은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오늘 누구와 시비가 벌어졌거든 주님의 재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재판은 이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패하려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혼을 구원하고, 무수히 더 많은 유익을 만들어 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5,6)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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