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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최후의 심판 (마 25:3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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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심판 (마 25:31-46)

주님이 언제 재림하실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또한 알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이 있는데 주님이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는 날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세상에서 작은 자 하나에게 주님을 섬기듯이 봉사하며 살아간다면 천국에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것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세상에 대한 자세입니다. 

그리고 심판 이후에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심판 주로 오시는 날에 신자와 불신자 모두가 부활하여 그리스도 앞에 서서 이 세상에서 행한 일에 대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7-29). 

인자의 날에 우리 주님께서 영광중에 오셔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오른편에는 양을 두고, 그 왼편에는 염소를 두겠다고 하셨습니다. 인자의 심판 때에 그 오른편에 두는 사람을 양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양은 유대인들이 가장 귀히 여기는 재산 중의 일부입니다. 그런데 성서에 보면 양이 비유적으로 쓰여진 곳이 많습니다. 가령 마 9:26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양으로 비유했으며, 마 25:23절에서는 의인을 가리켜 양이라 했으며, 요 21:16절에서는 성도들을 양으로 비유했습니다. 과연 누가 양이고 누가 염소일까요?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재림하신 주님께서 보좌에 앉아서 어떤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셨는지 마태복음 25:35-36을 주의해서 보십시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았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 말씀에 이들은 "우리가 언제 그러한 일을 하였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25:40)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 자신에게 행한 일과 동일시하면서 연관시키는 "지극히 작은 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여기에서 문맥적으로 볼 때 그들은 주린 자, 목마른 자, 나그네된 자, 벗은 자, 병든 자 그리고 옥에 갇힌 자들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초대교회 교부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터툴리안(Tertullian)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는 "너희가 너희 형제들을 볼 때 그것은 주님을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본문에서 예수님과 동일시되고 있는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할 때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모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두고 말한다고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른 편에 서 있던 사람들은 바로 이들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마지막 날 심판 때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왼편에 있는 염소들에게는 주님께서 심판을 선고하시면서 "마귀들과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마25:41)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그곳에 들어가야 할 합당한 이유를 말씀하시기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 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입히지 아니 하였고 병들었을 때에 지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마25:42-43)라고 하였습니다. 

이때에 지옥에 들어가기로 판정을 받았던 자들이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25:44)라고 항변하였습니다. 여기서 "공양하다"는 말의 헬라어는 디아코네오(ՄՉՁՊՏՍՅՙ)라는 말인데 "봉사한다," "섬긴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지옥에 들어간 이유는 이웃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가, 아니면 지옥에서 영원한 벌을 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문제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심판 주로 오시는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심판하시는 판단 기준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행위로 결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행위의 내용에 관하여서는 이미 앞에서 생각한 바가 있습니다만 지극히 작은 자에게 봉사하는 행위, 즉 주님의 이름으로 섬기는 행위입니다. 

여기에 우리 그리스도인이 소외된 자들을 위해 봉사해야 할 중요성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봉사생활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느냐 아니면 지옥에서 영원한 벌을 받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세상에서의 봉사생활로 심판의 기준을 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의롭게 사는 봉사행위가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인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봉사생활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제시된 것은 사실입니다만 인간의 선행자체가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만 에베소서 2:8-9을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마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기 때문에 인간의 행위 자체가 천국에 들어가는 방편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제시된 봉사생활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라기보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삶의 내용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15-21에서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야고보서에서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14-17)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씀들을 고려할 때 여기에서 천국에서 영생하는 축복을 누리는 조건으로 제시된 세상에서의 봉사생활은 신자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봉사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봉사가 있을 때 천국에서 영생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을 누리게 되는 문제는 믿음뿐만 아니라 그 믿음에 합당한 행실이 따라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마지막 한 가지 더 생각해야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지옥에 들어간 사람들도 말하기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마 25:44)라고 말하는 것을 볼 때 이들도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봉사생활을 하였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25:45).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봉사생활은 주님을 섬기듯이 행한 봉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봉사였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날에 주님이 판단하시는 것은 봉사행위 자체가 아니라 봉사의 태도를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받고 이름이 알려지고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이 이익을 위한 봉사라면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즉 주님을 섬기듯이 행한 행동이 아닙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봉사생활은 자신의 이익과 보상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듯이 행하는 사랑의 봉사여야 합니다. 

주님이 언제 재림하실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또한 알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는데 주님이 영광의 보좌에 앉으시는 날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세상에서 작은 자 하나에게 주님을 섬기듯이 봉사하며 살아간다면 천국에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것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세상에 대한 자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심판 이후에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심판 주로 오시는 날에 신자와 불신자 모두가 부활하여 그리스도 앞에 서서 이 세상에서 행한 일에 대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7-29).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하나님 나라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경험하는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 사이에는 간격이 있습니다. 지금은 믿음으로 이 나라를 경험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재림하시면 우리 눈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처음 이 세상에 오실 때에는 겸손함으로 오셨지만, 재림시에는 위엄과 영광중에 심판 주로 오실 것입니다. 이 심판 주 앞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설 수 있겠습니까?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십시오. 

이러한 삶이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분"을 믿는 신자의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봉사하는 생활을 산다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자기 생각대로 산다면 영원한 지옥 형벌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마25:46). 


동일하심. 

(1) 예수님 앞에는 세상의 가난하고 배고프고 집 없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가난하고 집 없는 사람들이라 아니하시고 예수님 스스로가 그러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의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스스로를 어려운 사람들과 동일시하셔서 그들이 겪는 배고픔, 목마름, 헐벗음, 병들음, 그리고 감옥에 갇힘을 자신이 겪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러한 동일시함이 이야기하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즉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과 스스로를 동일시하셔서 그들을 먹인 것이 예수님을 먹인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의 이름을 부르며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였느냐?" 하시자 바울은 대단히 놀랐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이에 대해 "주님이시여, 어찌하여 내가 당신을 박해하였다고 하십니까? 저는 당신을 만나 본 적도 없습니다."라고 반박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4-5)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는 자들을 박해하였고 "네가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은 것은 나를 감옥에 집어넣은 것과 같다. 그들에게 아픔을 주는 것은 곧 나에게 아픔을 주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통해 볼 때 아시시 지방의 성 프란체스코 대단한 성인중에 하나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프란체스코가 어느 날 문둥병이 걸린 거지를 만났답니다. 이때 그에게 힘있는 충동이 생겼고 그리하여 말에서 내려서 그 거지에게 다가가 그를 안았답니다. 그때에 그 거지의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로 변하였답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혼자서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가십니다. 그리고 혼자서 고통 받는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고통 받으십니다.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주님께 하지 않은 것입니다. 인생 최후의 심판을 기억하여 서로 좋게 잘 살다가 심판을 통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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