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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3차원 (에 4: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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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3차원 (에 4:6-17)
  
인생은 누구에게나 단 한번 뿐입니다. 그러기에 인생을 정말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인생을 잘 사는 것은 과연 어떤 것일까요? 한 마디로 후회 없는 인생입니다. 인생을 사노라면 잠시 잠깐 후회할 때가 있죠. 그런 것은 만회할 수 있으니까 괜찮은데, 인생을 마칠 때 후회하는 인생이 되면 큰일입니다. 더 이상 만회할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야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인생이 흘러가도 뿌듯하고 영원히 기뻐할 수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3차원(3S)이 있다고 합니다. 생존 지향적 인생(Survival Level), 성공 지향적 인생(Success Level), 그리고 의미 지향적 인생(Significance Level)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고상하고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인생이 바로 의미 지향적 인생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스더와 모르드개 같은 인물들이 의미 지향적 인생을 살았습니다. 에스더는 그 이름 뜻이 ‘별’입니다. 그녀는 의미 지향적 인생으로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저 천국에 들어가 별처럼 영원히 빛나는 인생이 됐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그런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1] 생존 지향적 인생 : 먹고 살기에 급급한 인생 

흔히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죠. 먹기 위해 사나? 살기 위해 먹나? 살기 위해 먹는 게 맞죠. 먹기 위해 사는 것은 동물의 수준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먹기 위해 사는 것 같습니다. 물론 우선 생존해야 인생을 고상하게 살든 말든 할 게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 사는 것을 인생의 제1 목표로 삼는 것은 너무 비참한 일입니다. 영어에서 흔히 직업을 물어볼 때 쓰는 말이 있죠. “What do you do for a living?” 직역하면 “먹고 살기 위해(생계를 위해) 무슨 일을 합니까?” 이런 뜻이죠. 아주 자존심 상하는 표현입니다. 

우리는 더 고상한 인생의 목표를 위해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먹는 겁니다. 고상한 목표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그래서 직업이란 말이 영어로 vocation 혹은 calling 아닙니까?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 각자의 재능과 형편에 따라 직업을 소명으로 주셨습니다. 바로 이 소명에 충실하면 하나님께서 생존을 책임져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산상수훈 가운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공중의 새들은 농사를 짓지 않아도 먹고 살고, 들의 백합화는 길쌈을 하지 않아도 입고 산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은 얼마나 더 잘 챙겨주시겠느냐 이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6:31~32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 염려 안 해도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살면 다 공급해 주시니까 걱정 없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곳곳에서 식량난이다 뭐다 하지만 사실은 인간의 죄악과 사회 구조악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미 충분히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면 넉넉히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생존 지향적 인생을 살면 곤란합니다. 오히려 인생이 꼬이기 쉽습니다. 어느 신학생의 이야기입니다. 가정을 이룬 가장인데 뒤늦게 신학을 결심하고 입학했습니다. 한 학기를 공부하는데 너무 힘이 듭니다. 학비도 비싸고, 생활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불현듯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식구들과 함께 먹고 살지 걱정이 태산 같았습니다.  궁리 끝에 휴학을 하고 1년만 열심히 돈을 벌기로 했습니다. 친척들에게 돈을 빌려 작은 가게를 인수했습니다. 막상 가게를 오픈하고 보니까 주일이 문제였습니다. 주일 장사를 하지 않으면 도저히 수지를 맞추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주일에 가게를 열고 잠깐 교회에 갔다 올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교회에 못 가는 날이 많아졌고 결국은 주일을 빼먹게 됐습니다. 그런 식으로 1년이 흘렀습니다. 그렇게 하고라도 돈을 벌면 다행인데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열석적인 이야기인데 생존을 위해 살면 생존하기도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생존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2] 성공 지향적 인생 : 출세하기에 급급한 인생

성공 지향적 인생은 세상에서 출세하기에 급급한 인생입니다. 먹고 살기에 급급한 인생보다 조금 나아 보이지만 거기서 거기입니다. 세상에서 재물, 권세, 명예 등을 얻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이 좋아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성공을 위해 정신없이 달려가다 보면 정말 중요하고 영원한 가치들을 놓치기 일쑤입니다. 많은 부작용도 있습니다. 성공을 위해 살다 보면 엄청난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죠. 성공을 얻기도 힘들지만, 성공을 성취한 이후에도 후유증이 많습니다.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달려가다 보니까 이미 거둔 성공의 열매를 누리지도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죠. 캘리포니아 베버리힐즈에 엄청난 대저택들이 있습니다. 풀장은 기본이고 어마어마한 위락 시설들이 갖춰져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것들을 가장 많이 누리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히스패닉 가정부들이라고 합니다. 주인들은 아침 일찍 나갔다 밤늦게 들어오니까 누릴 여유도 없습니다. 대저택에서 하루 종일 있으면서 일도 하지만 누리는 것은 가정부들이라는 겁니다.  

또 전력질주하며 살다 보니까 병을 얻기 쉽습니다. 이제는 병을 고치느라 성공한 열매를 다 털어 넣습니다. 이렇게 되면 성공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설사 성공도 얻고 건강도 지키고 모든 것을 갖추어도 성공 후에 인생을 돌아보면 놓친 게 너무 많았음을 느끼고 허무감이 밀려옵니다. 
  
영국의 작가 버나드 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의 절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실패했을 때 오는 절망이고, 다른 하나는 성공했을 때 오는 절망이다. 참으로 무서운 것은 전자가 아니고 후자다.” 성공 후의 절망은 성공했는데도 별게 아님을 알았을 때 느끼는 허무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인생을 가리켜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누가복음 12장을 보면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가 나오죠. 어떤 부자가 농사를 크게 지고 성공했습니다. 소출이 많아 창고를 확장합니다. 요즘 말로 대박이죠. 그 후에 어떻게 하나요? 이제 노후를 편안히 즐기며 살리라 노후를 설계합니다. 그러나 그게 과연 자기 마음대로 될까? 인생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겁니다. 

눅12:19~21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오늘 밤이라도 하나님이 그 영혼을 부르시면 성공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아요. 살만 하면 죽는다! 성공을 위해 달려가느라 하나님도 잊고 내세도 생각하지 않고 살았는데, 성공을 거두고 이제 살만 한데 하나님이 불러 가시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겁니다. 

약4:13~14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성공을 꿈꾸고 계획하고 열심히 살아도 안개 같은 인생이기에 허사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챙겨야 합니다. 그게 뭐죠? 영혼입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육적인 죽음도 비참하지만, 그 이전에 영적인 죽음도 문제요, 내세에 지옥의 영원한 형벌을 받는 영원한 사망이 가장 비참한 일입니다. 그 근본 원인인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에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의 십자가 대속입니다. 그것을 믿는 자가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 세상 살 동안에도 영혼 가운데 영생의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님께서 지친 모습으로 우물가에 나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4:13~14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성공보다 중요한 게 있는데, 그것은 영생의 기쁨이라는 겁니다. 그 여인은 남자를 갈아치우는 게 성공의 방편이며 행복의 지름길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성공을 거두면 행복할 줄 아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믿고 영생을 얻어야 행복합니다. 그게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입니다. 영혼에서 솟아나는 샘물입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은 성공보다 예수 안에 있는 영생으로 참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고 또 하나 중요한 게 있습니다. 영생을 얻은 후 영원히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영원히 후회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인생은 하나님이 인정하고, 영원한 천국에서도 기억되는 인생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성공보다 영생으로 인한 행복이 중요하고, 그 후에는 의미가 중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3] 의미 지향적 인생 : 영원한 가치에 헌신하는 인생 

인생에서 가장 차원이 높은 것은 의미 지향적 인생입니다. 영원을 위해 헌신하는 인생입니다. 본문을 보면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이런 인생에 대해 도전합니다. 그리고 에스더는 그런 인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 성공은 물론이고 목숨까지 겁니다. 

에스더서의 배경은 B.C. 5세기 바사(페르시아) 왕국입니다. 에스더와 사촌 오빠 모르드개는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게 멸망되어 포로로 끌려 온 사람들입니다. 세월이 흘러 바벨론도 멸망하고 페르시아가 들어섭니다. 

에스더는 초년에 고아가 되어 사촌 오빠 모르드개의 슬하에서 자랍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로 왕후가 됩니다. 본래 왕후는 귀족 가운데 나오는 법인데, 신기하게도 포로 출신인 에스더가 됩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요즘으로 말하면 미인대회 같은 게 있었습니다. 각 지방에서 미인을 선발하고 그 중에서 왕이 간택을 한 겁니다. 에스더는 요란하게 치장하지도 않았지만 왕의 마음에 꼭 들었고 마침내 왕후가 됩니다. 신데렐라 같이 된 겁니다. 

그러나 신데렐라 이야기는 어떤가요? 왕자님과 결혼해서 행복하게 오래 오래 살았다 ... 이렇게 끝나죠. 이건 리얼한 인생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후에 병들고 늙고 죽었을 겁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의미입니다. 신데렐라가 성공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떤 의미를 남겼는가가 중요합니다. 에스더의 이야기가 신데렐라 이야기와 다른 점이 바로 이겁니다. 성공 이전이든 이후든 중요한 것은 의미 지향적 인생입니다. 

에스더나 모르드개나 생존 자체도 힘든 상황에서 살았습니다. 약소국가의 포로민이었으니 그 형편이 오죽했겠습니까?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살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는 것을 인생의 최고 가치로 알고 살았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생존 문제는 물론이고 그들의 인생 전체를 책임져 주셨습니다. 심지어 성공까지 주셨고, 또 그 성공을 하나님의 가치를 위해 드리고 헌신할 때 더 큰 성공을 거두는 연속적인 승리의 인생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에스더가 왕후가 된 후 대형 사건이 터졌습니다. 에스더는 왕궁에 있고, 모르드개는 왕궁의 문지기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악한 하만이 왕궁을 드나들었습니다. 그는 왕 다음의 실세 총리여서 모든 사람들이 굽실거리며 절을 합니다. 그런데 유독 모르드개만은 절을 하지 않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 외에 인간에게는 절대로 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하만이 모르드개는 물론이고, 그의 동족인 유대인 전체를 학살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모르드개와 유대인은 수도 수산은 물론이고 각 지방에서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에4:3 보면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왕의 명령과 조서가 각 지방에 이르매 유다인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울며 부르짖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에 누운 자가 무수하더라”

이 소식이 왕궁의 에스더에게 전해졌고 그녀는 오빠를 생각해서 내시를 시켜 옷을 보냅니다. 그러자 모르드개가 어떻게 하죠?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호의호식 하겠는가? 왕에게 나아가 이 사실을 알려 유대 민족을 구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에스더는 고민에 빠집니다. 왜 그랬을까요?

11절. “왕의 신하들과 왕의 각 지방 백성이 다 알거니와 남녀를 막론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 규(=금홀,  gold scepter)를 내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가지 못한 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하니라” 

당시 왕은 신격화되어 있죠. 동시에 독살 위험도 있어 왕실 경호법이 특이했습니다. 왕이 부르지 않으면 왕후조차 마음대로 왕을 찾아올 수 없습니다.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왕의 심사가 뒤틀리면 큰일 납니다. 이미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켰던 왕이 무슨 짓은 못합니까? 다만 예외가 있죠. 왕이 판단해서 금규(왕권 상징하는 지휘봉)를 들면 가까이 가서 알현할 수 있습니다. 

에스더의 그 말을 전해들은 모르드개가 이번에는 뭐라고 말합니까? 14절.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이 일을 회피하지 말라는 겁니다. 만일 그러면 하나님이 다른 방법으로 유대 민족을 구원할 것이지만, 에스더와 그 가문은 영원히 패가망신하게 될 거라는  경고입니다. 

사람이 성공하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이기적이 되기 쉽습니다. 에스더가 잠시 자신의 입장만 생각한 것도 그런 본능 때문이었는지 모릅니다. 오빠의 그 말을 듣고 잘 생각해 보니까 왕후가 된 것도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고, 지금까지 살아온 게 하나님의 영광과  유대 민족을 위해서였는데 몸을 사려서 되겠나 싶었습니다. 결국 마음을 정리하고 결단합니다. 16절.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금식기도 하고 왕에게 나아갈 테니까 함께 기도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그리고 목숨을 걸었다는 결연의 의지를 밝힙니다. 

에스더는 영원한 가치를 위해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생존도 성공도 아니라 영원한 가치 즉 의미를 인생의 최우선순위에 두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가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랑을 실천하며,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마22:37~40, 마28:19~20 참조) 이것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에 목숨을 거니까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갔는데. 왕이 그녀를 사랑스럽게 맞이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만의 흉계가 폭로됩니다. 에스더는 더욱 더 총애를 받고, 하만이 처형된 후 모르드개가 대신 총리가 됩니다. 유대인들은 학살을 모면할 뿐만 아니라, 왕의 특별대우까지 받게 됩니다. 유대인을 국경일(부림절)까지 제정됩니다. 

에8:15~17 “15 모르드개가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 왕 앞에서 나오니 수산 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 16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 17 왕의 어명이 이르는 각 지방, 각 읍에서 유다인들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을 명절로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모르드개와 유대인이 이렇게 존귀케 되니까 본토인들이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경쟁적으로 유대인이 됩니다. 믿음을 고백하고 할례 받으면 인종에 상관없이 그 날부터 유대인이 되는 겁니다. 

엄청난 역사가 벌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나고 에스더와 모르드개 자신도 크게 성공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생존을 위해 발버둥을 치면 생존하기도 어렵고, 성공을 위해 살면 성공하기도 어렵고 설사 성공해도 허무하게 됩니다. 그러나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위해 살면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마6:33~34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먹고 사는 것 염려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복음 전파에 헌신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인생 만사를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국에서까지 영원히 빛나는 인생은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겁니다. 에스더의 헌신으로 유대인들을 구할 뿐만 아니라. 많은 이방인들조차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단12: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에스더는 이 말씀대로 이 세상에서 의미 지향적 인생을 살다가 하늘나라의 별이 됐습니다.
  
여러분, 혹시 브라질 축구 선수 카카를 아십니까? 베컴 못지않은 꽃미남에다 프로 축구 선수 중에서 세계 최고의 연봉 기록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꿈이 국가대표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18세에 다이빙대에서 미끄러져 척추가 부러집니다. 축구는 물론이고 걷기고 힘들어졌습니다. 의사는 수술해도 회복 가능성이 2%밖에 안 된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는데,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대수술이 성공했고 재활 훈련도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이게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꿈대로 국가 대표 선수가 됐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달라졌습니다. 

그는 국가대표로, 더 나아가 유럽 프로축구팀에서 뛰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는 당당하게 공개 석상에서, 기자회견 석상에서 밝힙니다. “나는 예수님을 위해서 축구합니다. 나는 진정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골을 넣을 때마다 기도 세레머니를 합니다. 유니폼 속에 셔츠를 끼어 입고 있다가 유니폼을 벗고 셔츠 속의 글귀를 보이며 하늘을 향해 두 손 들고 기도하는 세레머니입니다. 그 셔츠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습니다. “I belong to Jesus!” 그가 이렇게 세레머니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예수님께로 인도된다고 합니다. 빌리 그레이엄 전도 집회에 버금가는 효과가 나타나는데, 이를 가리켜 ‘카카 효과’하고 부릅니다. 축구를 하든 무엇을 하든 우리 인생도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사랑의 실천과 복음 전파를 지향하면 됩니다. 이게 바로 의미 지향적 인생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일상의 분주함 가운데  정신없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존을 위해, 혹은 성공을 위해? 그러면 반드시 나중에 가서 후회하게 됩니다. 인생의 방향을 재조정하시기 바랍니다. 가장 높은 차원의 인생인 의미 지향적 인생으로! 그래서 에스더처럼 이 세상에서도 승리하고, 저 천국에 가서도 영원토록 별처럼 빛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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