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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갈 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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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주일이요 이번 주는 고난 주간이다. 다음 주일은 부활절이다. 이번 주는 부활절을 맞이하기 전에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묵상하면서 다른 때보다는 근신하고 절제하고 차분한 한 주간을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사회 지도층에서 일반 국민들까지 도덕적 해이와 부패가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박근혜 정부에서 장관과 고위직 후보자 가운데 11명이 일도 시작해보지도 못하고 사퇴를 하였다. 국방 장관 후보자는 여러 가지 문제로 질타를 받다가 주식을 갖고 있던 것을 신고하지 않고 누락시킨 것 때문에 물러났다. 

한 건축업자가 사업권을 따 내려고 고위 공직자들과 정치인들을 자기 별장으로 초대해서 향응을 대접한 일 때문에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여기에 연루된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되는지 앞으로 사회적인 파장이 매우 클 전망이다. 법무차관으로 임명된 사람은 그 별장에 초대받아 간 사실을 인정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최근 우리 사회에 도덕적 해이와 불감증에는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니다. 사회적인 부정, 부패, 비리 사건에는 기독교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별장에서의 향응 사건도 마을 사람들은 교회 사람들이 와서 놀다가 간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건축업자 부부가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었다는 말이 아닌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서울의 유명한 몇 교회는 지금 교인들이 패가 갈려서 소송을 진행 중이다. 어떤 저명한 목사님은 몇 년 전 목회학 박사 학위 논문을 취득했는데 그 때 작성했던 박사 학위논문이 남의 것을 베껴 썼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렇다 아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해서 혼란스러웠다. 결론은 논문이 표절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결국 본인은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를 구하였다. 교회 당회에서는 담임목사에게 6개월 간 설교를 금지하고 근신하도록 하였다. 
 
우리 사회 전반은 그렇다 할지라도 기독교인은 달라야 하지 않을까? 기독교 초기에 로마에서 기독교가 핍박을 받을 때 기독교인들은 달랐다. 그 당시 로마는 매우 부패하고 타락한 사회상을 보이고 있었으나 기독교인은 거룩하고 신실하고 진실하였다. 그래서 로마의 귀족들은 자기 아들의 신부를 고를 때에는 카타콤 지하 무덤에서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기독교인 처녀 가운데서 며느리 감을 골랐을 정도라고 한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과연 우리 사회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것일까?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거룩하고 신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 예수 믿으면 복을 받는다. 어떤 병도 고침 받는다. 이런 달콤한 말씀만 주로 들은 것은 아닐까? 예수님의 제자로서 지켜야 할 십자가의 도, 제자의 도, 책임과 희생에 대해서는 잘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종려주일을 맞이하고, 고난주간을 앞둔 때에 나는 이런 고민을 하면서 꼭 이 말씀을 오늘 전해야겠다는 마음의 감동을 받았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라고 자처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처럼 똑같이 욕심을 내고 죄를 짓고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이 말씀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육체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은 과거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내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육체의 욕심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정욕과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말씀을 너무나 망각하고 살아왔다.  

원래 유대인들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을 때 머리에 물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뒤로 누우면서 물속에 쑥 들어갔다가 나왔다. 세례의 참된 의미는 예수님과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가 예수님과 함께 의에 대하여 살았다는 뜻이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옛 사람은 죽고,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사는 새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는가?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살면서 내 마음대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다가 주일에만 교회에 와서 종교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조금 받고 예배를 마치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세상으로 나가서 또 내 마음대로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사는 것은 아닌가? 

얼마 전 책에서 기독교 초기의 로마에 있던 교회들의 생활상에 대해서 읽었다. 그 당시 세례를 줄 때는 입으로 예수를 믿겠다고 시인하는 것으로 세례를 주지 않았다고 한다. 약 3년 동안 그 사람이 열심히 예배를 참석하는지 보았다고 한다. 또한 교회 바깥에서 지낼 때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세심하게 관찰을 하고 심사를 한 후에 세례를 주고 교회의 일원이 되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그렇게 까다롭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믿는 사람들의 숫자는 급격히 증가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말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과는 분명히 다른 무언가 신비롭고 생명이 넘치는 삶이 있었던 것이다. 정말 소금과 빛이었던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초대 로마 교회 성도들과 같이 이 사회의 소망이 되고 도전이 되고 소금과 빛의 존재가 되지 않아야 할까?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 사람들이 예수 잘 믿는 청년, 예수 잘 믿는 처녀를 사위 삼고, 며느리 삼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이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나의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가 있을까? 그 방법은 무엇일까? 성경을 통해서 길을 찾아보자.


1.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져야한다.

(눅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면 예수님의 교훈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교훈하셨다. 

여기서 핵심은 날마다 이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 어제 잘 했다고 해서 오늘 쉬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져야 한다. 자기 부인은 자기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버리는 것이다. 내가 지고 가야 할 십자가란 우리가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신실하게 진실하게 사는 것 때문에 이 땅에서 받게 되는 불편함, 핍박, 괴로움, 대가, 희생들이다.

예수님조차도 이 말씀대로 사셨다. 예수님도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당신의 십자가를 끝까지 짊어지셨다. 마귀는 끊임없이 예수님 주변을 맴돌면서 십자가를 피하라고 유혹했다. 예수님도 다른 것은 괜찮은데 십자가만 생각하면 너무나 힘드셨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으셨다. 지금 내 마음이 죽을 지경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도하시면서 자기를 부인하셨다. “아버지여,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도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짊어지셨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하셨다. 

예수님이 승리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능히 도우신다. 예수님이 미리 다 해보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우리도 능히 승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날마다 하는 것이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다. 날마다 나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날마다 하자. 하루도 빠뜨리지 말고 하자. 그러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승리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을 반드시 쓰게 될 것이다. 


2. 날마다 죽어야 한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길은 ‘날마다’였다. 그런데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동일한 교훈을 주고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고백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 이 말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한다. 날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바울 정도의 신앙이라면 우리와 같은 정욕이나 욕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아니었다. 바울도 날마다 죽지 않으면 안 되는 자기 안에 욕심이 있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 뭐든지 둘째가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항상 최고가 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 가말리엘 밑에서 사사 받고 있던 엘리트였다. 촉망 받는 차세대 리더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탁월함을 증명이라고 하듯이 예수 믿는 자들을 가장 열심히 잡아들였다. 예루살렘에서 이 잡듯이 잡아냈다. 그것으로 부족해서 예루살렘으로부터 250킬로미터나 떨어진 남의 나라 수도인 다메섹까지 원정을 갔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자신이 귀중하게 여겼던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여기며 다 버렸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최고의 보물로 여기며 살기 시작했다. 바울은 이 마음을 지키기 위해서 날마다 죽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과거에 그가 가졌던 야망과 욕심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지난 50년간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룬 우리나라는 아직도 성공신화에 취해 있다. 기독교인들조차도 그렇다. 목사님들도 그렇다. 누가 어디에 개척을 해서 단기간에 부흥을 하고 큰 예배당을 지었다고 하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일반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어디에 땅을 샀더니 부자가 되었다. 아파트를 몇 채 사고 팔았더니 부자가 되었다. 주식에 투자했더니 부자가 되었다. 어떤 학원을 보냈더니 일류대를 갔다. 어떻게 스펙을 쌓았더니 대기업에 취직을 했다. 어떤 사업을 했더니 크게 성공을 했다. 이런 성공 신화에 신경이 곤두서 있다. 

최근에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여자 스타 강사가 있다. 이 분은 한 해 강연 수입만 10억을 번다고 한다. 이 말에 감동을 받고 은혜를 받는가? 그렇다면 나도 성공 신화에 취해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 분이 충청도 시골 출신이다. 눈물겨운 노력 끝에 연세대 음대 작곡과를 수석으로 입학을 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아르바이트를 해야만 했는데 피아노 학원 강사를 했다. 그런데 자기가 맡았던 아이 한 명이 그만 둔다는 것이다. 가슴이 철렁해서 왜 그만 두느냐고 물었더니 개인 레슨을 받기 위해서 그만둔다는 것이다. 그 때 바로 ‘이거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개인 레슨은 큰 돈을 받으니까 부잣집 아이들 열명만 개인 레슨을 시키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시골 출신인 자신이 인맥이 없는데 어떻게 부잣집 아이들을 맡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생각난 것이 강남에 있는 큰 교회를 나가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큰 교회를 다니면서 성가대, 주일학교 봉사를 열심히 했다. 교회 사람들이 젊은 처녀가 열심이라고 칭찬을 했다. 인맥이 쌓이면서 하나 둘씩 부잣집 아이들 피아노 레슨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졸업 후에는 아예 피아노 학원을 차렸다. 큰 성공을 거두었다. 성공신화를 이루었다. 이 일을 계기로 성공 사례 발표를 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피아노 학원을 접고 아예 강사가 되었다. 점점 인기가 높아지더니 유명 스타 강사의 반열에 올랐다. 

나는 이 분의 강의 몇 편을 들으면서 참 배울 점이 많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마음이 걸렸다. 인맥을 넓히기 위해서 큰 교회를 나갔다. 그리고 교회 봉사를 열심히 했다. 그 결과 큰 돈을 벌었다. 과연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이 분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던 사람이다. 그렇다면 돈을 벌 목적으로 인맥을 넓히기 위해서 큰 교회를 나간 것은 잘못이다. 다니게 된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열심히 봉사하다  보니 교회 식구들이 자연스럽게 아이들을 맡겨주었다면 모를까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최근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이 분이 몇 년 전 이화여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그 논문이 남의 것을 불법으로 베꼈다는 의혹을 받았다. 아직 표절 판정은 나지 않았지만 잡음이 발생하자 스스로 방송에서 하차하였다. 어떤 방송국은 그가 출연한 분량을 아예 방송에서 취소하였다. 성공신화의 추락이다. 


3. 성경적인 성공을 좇아가자.

그러면 우리가 꿈꿔야 할 성공신화는 무엇일까? 성경이 말하는 참된 성공신화는 무엇일까? 요즘 창세기를 강해하고 있으니 창세기의 인물 두 사람을 통해서 생각해보자.

첫째, 성경이 말하는 성공신화는 노아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거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창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 

노아는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참 재미없는 사람이요 미련한 사람이요 답답한 사람이요 실패한 사람이다. 한 번도 비가 오지 않았는데 비가 온다면서 산 중턱에도 수 십 년 동안 방주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노아는 끝까지 그 일을 완수했다. 세상의 기준으로 살지 않았다. 노아라고 마음에 갈등이 없었을까? 하지만 노아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면서 방주를 만들어야 하는 십자가를 지고 갔다. 그는 세 아들을 장가보낸 후에 여덟 명의 식구가 세상에 물들지 않고 경건한 가정을 이루었다. 결국 성공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노아의 여덟 식구였다. 나머지는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진정한 성공신화는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거룩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이 꿈을 이루려면 날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 날마다 옛 사람이 죽어야 한다. 이 꿈을 이루시기를 바란다. 


둘째 성경이 말하는 성공신화는 요셉처럼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창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요셉의 인생은 정말 드라마 같다. 실제로 영화로 많이 만들어졌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뮤지컬 공연도 하고 있다. 요셉이 성경적인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그가 애굽에서 종의 신분에서 어느 날 갑자기 애굽의 총리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요셉은 한 번도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손에 얻고자 하는 꿈을 꾼 적이 없다. 요셉은 어디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날마다 거룩하고 신실하게 진실하게 살고자 했다. 그래서 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가 은밀하게 정을 통하자고 했을 때에도 도망을 쳤다. 그것 때문에 억울하게 2년 넘게 종살이까지 했다. 하지만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다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요셉은 총리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행복하지 않았다. 총리의 자리는 행복과는 상관이 없었다. 요셉의 관심은 여전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거룩하고 신실하게 진실하게 사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요셉의 지혜로운 대처 덕분에 중동 지역 일대에 일어난 7년 기근을 너끈히 넘길 수 있었다. 애굽 백성뿐만 아니라 주변 민족들도 요셉 때문에 기근을 넘길 수 있었다. 그리고 양식을 사러온 부모, 형제들까지 살렸다. 그들을 애굽으로 인도해서 70명의 가족이 400년 후에 200만명이 되는 기적을 이루게 되었다.  

요셉은 깨달았다. 하나님이 자신을 애굽에 총리에 오르게 한 것은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려는 데 있었다는 것을. 우리가 가져야 할 성공신화는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회적 지위, 재물, 재능을 통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성공신화를 버리고 이 비전을 따라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날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져야 한다. 날마다 죽어야 한다. 요셉처럼 많은 사람을 살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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