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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주름살이 활짝 펴지다 (행 27:2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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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주름살이 활짝 펴지다 (행 27:27-37)


• 인생의 아픔과 주름살

어떤 목사님이 쓰신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주일 오후예배 직전 긴 문자 한통을 받았습니다. 한 권사님이 보낸 메일이었는데 뜻밖의 내용이라 몹시 당황스러웠습니다. 크게 부부싸움을 한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많이 무거웠습니다. 예배를 드리다가 권사님 쪽을 둘러보니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평안하게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갈라서기로 완전히 마음을 결정한 모양이구나... 생각하니 어떻게 권면할지로 머리가 복잡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교우들을 배웅하다가 그 권사님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더니 그냥 씩 웃기만 하더랍니다. 좀 만나고 가라고 했습니다. 권사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은 후 문자를 다시 꺼내서 보았더니 자세히 보아 생긴 해프닝이었습니다. 그날 받은 문자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남편 팝니다... 사정상 급매합니다. 1982년 5월 10일 예식장에서 구입했습니다. 구청에 정품 등록은 했지만 명의양도 해드리겠습니다. 시어머니는 덤으로 끼워 드리겠습니다. 아끼던 물건인데 유지비도 많이 들고 성격장애가 와서 급매하려고 합니다. 상태를 아주 좋습니다. 구입 당시 A급 인줄 알고 착각해서 구입했습니다. 마음이 바다 같은 줄 알았는데 잔소리가 심하고 사용 시 만족감이 떨어집니다. 음식물 소비는 동급의 두 배입니다. 하지만 외관은 아직 쓸 만합니다. 사용 설명서는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읽어봐도 도움이 안 됩니다. A/S 안되고 변심에 의한 반품은 절대 안 됩니다.” 

점심시간 친구한테 온 문자를 여전도회 식구들과 돌려 보면서 웃다가, 교회 모든 남자 성도들에게 보내자고 했답니다. 서로 돌려가면서 보냈는데 목사님께도 보내자고 해서 그 권사님이 나선 것인데 자기 번호가 목사님 핸드폰에 입력되어 있을텐데 싶어 들켰구나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예배 직전이라 자세히 보지 않아 부부 싸움을 크게 한 것으로 오해한 것이지요.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조금 억울한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목사님도 그 메시지를 몇몇 사람들에게 보냈답니다. 그랬더니 “아내도 급매해야 될 것 같아요.” “목사님! 너무 웃겨요. 저희 남편도 급매해야겠어요.” “목사님! 남편 파는 거 나도 심각하게 재고해 볼게요.” 그런 답이 왔답니다. 

사랑해서 시작했는데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올까요? 저 남자 아니면, 저 여자 아니면 죽을 것 같고, 사는 의미가 없다고 해서 내 인생 맡기면서 결혼한 것 아닙니까? 실제로는 그리 못해도 차라리 팔아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누구나 처음에는 맑은 마음으로 산골짝을 나서는 여린 물줄기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먼 길을 가면서 흐린 물줄기가 되고 때도 묻게 되고 마음의 주름살도 생겨났기 때문이겠지요. 감격의 마음도 사라지고, 가슴의 두근거림도 사라지고, 마음의 울림도 사라지면서 마음의 주름살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하게 시작했는데 살아가면서 부부 사이에 갈등도 생기고 세상사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힘들어 하면서 주름살도 생깁니다. 주름살은 얼굴에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생기고, 가정에도 생기고, 인생길에도 생기는 것 같습니다. 살면 살수록 얼굴의 주름살뿐만 아니라 인생의 주름살도 생겨납니다. 가정에, 일터에, 자녀들에게, 건강에 생기는 문제로 인해 답답해하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요즘에는 곧 전쟁이라도 터질 것 같은 한반도 상황에 마음에 근심도 있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가 성도들의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생겼을 때입니다. 그 가정을 위해 작정 기도도 하고 때론 금식을 하기도 하지만 기도 외에는 별로 해 드릴 것이 없을 때 마음이 무거울 때가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 말한대로 사역자로 산다는 것은 언제나 이러한 고통의 문제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나의 인생길에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삶은 상실로부터 오는 아픔을 포함해서 수많은 고통과 상처들로 얼룩져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정으로부터 받은 상처도 있고, 일터에서 받은 상처도 있으며,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와 환경으로부터 받은 상처도 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도 있습니다. 인생길에는 그렇게 힘들게 하는 일들이 쉼 없이 몰려오기 때문에 마음에는 행복감에 사로잡히기 보다는 깊은 드리운 주름살에 사로잡혀 가게 됩니다. 

• 풍랑으로 배가 깨어지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바울은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이후 걸어가야 했던 길은 많이 힘들었고 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참 달렸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부분에 서 있습니다. 그는 지금 인생의 마지막 여정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여정에 대해 잘 알았던 사람들은 누구나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생명을 바쳐서라도 세계의 심장부인 로마가 복음을 듣게 하겠다는 그의 결심은 확고했습니다. 그 길에서 죽는다 해도 그리하겠다고 기도 가운데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죄수가 되어 예루살렘을 경유하여 로마로 호송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만났습니다. 기도를 깊이 하던 그들은 그것이 죽음의 여정인 것을 알고 바울을 만류합니다. 그때 그가 했던 고백이 사도행전 2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3-24).

죽기를 결심하고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러나 그렇게 죽기를 결심하고 시작한 그의 인생 마지막 여정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지중해 지역을 항해해 가는 중에 큰 풍랑을 만나 지금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배가 파선할 지경에 놓이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일생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하여 달렸습니다. 지금껏 주님을 위해서 그렇게 수고하고 수많은 고난과 아픔을 당했다면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좀 평탄하게 해주시면 안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죄수가 되어 묶였고, 생명을 위협하는 풍랑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때 마음이 상하지 않았겠습니까? 아무리 죽음을 각오하고 가는 길이지만 바다에서 생죽음을 당하게 된 상황에서 그의 마음이 답답하지 않았겠습니까? 생명을 걸고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는 길이었지만 정작 지중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있으니 그도 분명히 힘들었을 것입니다. 답답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날 허덕이며 그의 인생 마지막 부분을 그렇게 달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는 전혀 나타나고 있지만 비하인드 라인에 나타나 있는 분위기는 침울했을 것입니다. 답답했을 것입니다. 

죽으러 가는 길목에서 생명을 위협하고 들어오는 거대한 풍랑 앞에서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혼자서 가는 길이 외롭기도 했을 것입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 서있었습니다. 풍랑으로 인해 심히 애쓰다가 배에 실고 있던 화물들을 바다에 던지기 시작합니다. 배의 기구들을 버립니다. 이 상황을 20절은 그렇게 묘사합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풍랑이 그대로 있으며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소중한 화물들을 내려놓고, 항해에 필요한 기구들도 던져내고 있다는 말은 그 만큼 암담했다는 말이지요. “살 여망이 없어졌다.” 그만큼 암담했다는 사실이지요.

이런 상황에서 오늘 말씀은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우리가 아드리아 바다에서 이리저리 쫓겨가다가...”(27절)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생사의 기로에서 죽음의 공포로 몸을 떨어야 했던 시간이 벌써 14일째였다는 것입니다. 먹지도 못하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 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밤이 왔습니다. 밤은 물리적인 시간을 말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을 말합니다. 풍랑에 흔들리면서 하염없이 떠내려가는데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드리아 바다에서 그렇게 이리저리 풍랑에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리저리 쫓겨가고 있었다”라고 전합니다. 

그렇게 파도에 배가 하염없이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사공들은 바다 한 가운데서 혹 육지에 가까워 오는가 해서 계속 깊이를 재고 있습니다. 희망을 가늠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염없이 파도에 떠내려가는데 수심이 얕아진다는 것은 바위에 걸려 좌초되거나 파선 될 수 있습니다. 앞뒤를 구분할 수 없는 한밤중의 어두움은 육지가 다가오는 것이 오히려 공포로 바뀌고 있습니다. 떠내려가는 것을 제어할 수 없는 상황이라 선원들은 자신들만 살려고 무엇을 하는 척하면서 구조선을 내려 도망가려고 합니다. 배의 사공들이 없으면 그 배는 파선할 수밖에 없는데 그 사람들도 도망을 가려고 합니다. 군인들이 그 구조선의 줄을 끊어 떼어버렸습니다. 이제 구조선도 없습니다. 더 절망적인 상황이 된 것이지요. 

이때 바울은 전혀 괜찮았을까요? 대단한 존재여서,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죽으러 가도, 풍랑을 만나도, 배가 부셔져 죽을 지경이 되어도 그는 마음에 아무런 동요가 없었을까요? 우리도 어떤 환난 역경 속에서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그런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성경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일까요? 바울은 전혀 낙담하지 않았고 흔들리지 않았다면 재미가 없잖아요. 그렇다면 성경이 전해 주는 그의 이야기는 우리와 별로 연관성이 없게 되잖아요. 성경은 영웅담을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의 스토리에는 때론 자기 자신에게도 낙담하고, 사람들에게도 낙담하는 모습이 담겨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다가 외치는 탄식의 소리가 로마서 7장에서는 그렇게 들려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누가 이 사망의 늪에서 나를 구해주리요...” 

유난히 굴곡 많은 인생을 살았던 도종환 시인은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에서 그렇게 노래하지 않습니까?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어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도 흔들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흔들리면서도 믿음의 꽃대를 세우고 있습니다. 그의 승리의 비결은 자기 자신의 강함에 있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강인했기 때문에 배가 파선 당할 상황에서도 괜찮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강함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 모두 절망하고 있을 때 바울은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갑니다. 말씀을 받은 후 그 말씀을 신뢰합니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5절). 어려울 때 주님은 그의 힘이었습니다. 말씀은 그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나는 그대로 되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 아픔의 시간에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말씀을 붙잡고 나아갔을 때, 그리고 믿음으로 받은 말씀을 나누었을 때 사람들은 함께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풍랑을 끝나지 않습니다. 

20절은 “여러 날 해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이 없는 상황에 서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먹구름 너머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여정에서는 여정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 계속 바뀝니다. 겨울에 항해하는 어려웠지만 그것을 강행한 사람은 선주였습니다. 나중에 선장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위기 상황에서는 백부장이 주도권을 쥡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들어서면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사람이 또 바뀌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계속해서 “바울이, 바울이, 바울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는 누가 일어설 수 있습니까?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늘을 보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사람입니다. “날이 새어 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를 시작하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으니 배에 있는 우리의 수는 전부 이백칠십육 명이더라.”(27:33-37) 

그곳에 말씀이 들어가자, 그곳에서 말씀의 사람이 우뚝 서있자 죽음의 공포로 덮여있던 자리에 희망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말씀이 역사하는 곳에는 아무리 어두워도 희망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아무리 답답해도 일어설 수 있는 힘이 공급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붙들린 사람이 있고,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있을 때 희망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창조적인 소수.... 그들이 있는 그곳에 희망의 역사가 새로 시작됩니다. 말씀을 전한 다음에 바울을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 먹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성만찬을 연상하게 합니다. 성경에서 함께 모여 떡을 떼는 행위는 성만찬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흔들리는 배안에서 그들은 하나님께 마음을 향하고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풍랑 이는 바다 위에서는 미미한 것처럼 보여도 그 예배 후에 결과가 무엇이었습니다. “그들도 다 안심하고 받아 먹었다.” 예배를 드리면서 그들은 말씀을 받습니다. 성찬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놀라운 하늘의 위로와 주시는 힘을 공급받습니다. 

아주 오래 전 읽은 알퐁스 도데의 <별>이라는 책에서 읽은 아름다운 글귀가 기억납니다. “만일 한번만이라도 한데서 밤을 세워본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인간이 모두 잠든 깊은 밤중에는 또 다른 신비의 세계가 고독과 적막 속에 눈뜬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그는 지금 차가운 밤에 무엇인가를 위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을 지세우고 있습니다. 일을 하기 위해서든지, 아니면 고민이 있이든지, 인생이 너무 힘들어서든지.... 인생의 그 깊고 깊은 밤중에 또 다른 신비의 세계가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환경만 바라보고, 자신만 바라보다가 그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기 시작할 때 하나님이 일하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모든 시선을 주님께 드리고 살아계신 주님을 느낄 때 

세상은 주의 나라가 되고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네...

캄캄한 밤하늘에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에 아름답게 수놓은 별을 두셨습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 거기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일어설 수 있습니다. 깊은 인생의 밤을 보내고 있다면 지금 고개를 들어 하늘의 별을 보세요.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 내 인생의 배경이 되어주신 분

그렇습니다. 절망할 것 밖에 없는 자리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환경을 보고 낙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육지에 가까웠기 때문에 낙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목장주가 자기 가축에 낙인을 찍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인을 쳐 주셨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확신했던 것이지요. “나는 여기에서 풍랑에 휩싸여 세상을 떠날 사람이 아니다.” 흘러가다가 인생의 난관에 부딪혀 멈춰버린 물도 있고, 길을 잃고 방황하는 물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멀리 가는 물은 다릅니다. 그래서 박재삼 시인은 그렇게 노래합니다. 

멀리 가는 물 있으니
흐린 물줄기를 만나도
때 묻은 물줄기와 뒤엉켜도
다시 맑아지며
멀리 가는 물 있으니
보아라 보아라 저기 멀리 가는 물을. 

절망할 수 있습니다. 좌절할 수 있습니다. 힘들어 할 수 있습니다. 암담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말씀 붙잡고 다시 일어섭니다. 자신이 대단해서가 아니고 온전히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시킬 때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사랑을 신뢰할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바울이 벌떡 일어섭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라.” 이 담대함이 어디에서 옵니까? 이 여유가 어디에서 옵니까? 그도 똑같이 풍랑 이는 바다 가운데 서있고, 똑같이 위협을 당하고 있는데 이 당당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 풍랑이 이는 인생길의 배후에 함께 계시는 분을 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노라”(27:24).

여러분도 알고 계십니까? 내 인생에 수많은 크고 작은 배경이 있었지만 가장 큰 배경으로 나와 함께 가고 계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분을 만났던 사람들은 어떤 자리에서도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거대한 풍랑이 탄배를 위협하고 오고 있지만 그가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을 뵈었기 때문이고, 그분에 대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로 향해 가는 그 항해길에서는 죄수가 선장 같고, 죄수가 인도자 같습니다. 내 인생의 배후에 함께 계시는 바로 그분을 만났기 때문이고, 그분과 함께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사랑을 받았는데 고난이 있고, 아픔이 있다고 잊을 수 있습니까? 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을 잊지 않으면 우리도 일어설 수 있습니다. 

고두현 시인은 “한여름”이란 제목의 시에서 그렇게 노래합니다. 

남녘 장마 진다 소리에
습관처럼 안부 전화 누르다가
아 이젠 안 계시지...

부모님 돌아가셨다고 잊어집니까? 시간이 많이 지났다고 잊어집니까? 나이가 들어갈수록 새록새록 생각이 더 나는 분이 부모님입니다. 살아계시면 계신대로, 돌아가셨으면 돌아가신 대로 늘 마음속에 생각나는 분이 부모님입니다. 지난 6월 초, 자전거를 타고 한강변을 달리는데 거기에는 넓게 보리밭이 조성되어 있었고, 보리가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곳을 지나가는데 어릴 적 자랐던 고향 생각이 났습니다. 이때쯤이면 보리 추수에 구슬땀을 흘리시던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나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훔쳐야 했습니다. “만세반석 열린 곳에 내가 숨어 있으니 원수 마귀 손 못 대고 환난 풍파 없도다....” 그 찬송만 부르면 눈물이 고이는 것은 험한 세월 살아오시면서 제 어머니가 가장 즐겨 부르시던 찬송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비 내리는 고모령”이란 옛 노래만 들으면 울게 됩니다.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 아내는 너무 청승맞다고 하지만 저에게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어서 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1994년 위로 한분 있는 형이 46살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남을 마음의 기둥으로 삼고 사시던 어머니는 그 장남을 잃고 둘째인 저를 그렇게 기다리셨습니다. 박사과정 코스웍 중이어서 장례식도 참석을 못했는데 코스웍 마치고 2년 후에야 한국에 나왔습니다. 애타게 저희를 기다리시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일정 마치고 미국으로 출국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던 날 어머니는 제 손을 놓지 못하며 “너를 이제 언제 볼 것이냐...?” 한없이 우셨습니다. 제 갈 길이 멀어서 저는 어머니의 손을 내려놓고 돌아선 것이 이 땅에서 어머니를 뵈었던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년 후 쓰러지셨다는 말씀 듣고 가까스로 비행기표 구해 한국 나갔더니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렇게 아들을 기다리셨던 어머니는 6시간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그 노래만 나오면 울게 됩니다. 어머니 돌아가신 지 16년이 되어가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생각이 더 납니다. 잊을 수 있습니까? 나이가 들어간다고, 시간이 지나간다고 잊을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 생각이 납니다. 계절이 바뀌면 계절이 바뀐대로, 명절이 다가오면 다가오는 대로 생각은 더 간절해집니다. 

얼마나 큰 사랑 받고 이날까지 살았는데, 얼마나 놀라운 은혜를 입고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그 하나님을 잊을 수 있습니까?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더 생각이 나야 그것이 진짜 신앙이지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간이 지나가면서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먹이시고, 어떻게 인도하셨는데 하나님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까? 풍랑이는 바다 위에서 바울이 우뚝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사랑의 주님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 마음의 주름이 펴지다

어느 사람이 몸이 이상하여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를 가지고 이리저리 진찰도 하던 의사가 진료기록지에 이런 저런 내용을 영어로 쓰더니 밑에 “정근암”이라고 쓰는 것을 보았습니다. 얼핏 “암”이라는 단어를 본 환자는 눈앞이 캄캄해 졌습니다. 암에 걸렸구나... 그리고 병실은 나가게 하더니 가족을 불러서 뭐라고 말을 합니다. 내게는 숨기고 가족들에게 암에 걸린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다... 생각하면서 앞이 캄캄해 지면서 절망감에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처방전을 써 주면서 건강관리를 잘 하라고 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이 환자는 걱정되어 매일 밤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며칠을 걱정하다가 예약을 하고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솔직히 저에게 말해 주시지요. 괜찮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다 했습니다. 정근암'이 어떤 암입니까? 몇 기이지요? 아니 수술하면 살 수 있습니까?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그러자 의사가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면서 말합니다. “선생님, 정 근암은 제 이름입니다.”

의사의 글씨 하나에도 마음의 주름살이 생겨나고 작은 일에도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가 있습니다.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생명의 여망마저 없는 그 상황에서 누구를 바라봅니까? 무엇에서 평안의 이유를 찾습니까?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예배였습니다. 우리 삶에는 나이가 주름살을 만들고, 수많은 환경과 사건들, 사람들이 마음의 주름살을 만듭니다. 그러나 주님은 마음을 상한 자를 고치시는 분이시며, 인생의 주름살도 펴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그분 앞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믿음의 지수를 좀 높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모 직업에 따라 자식들 성적 올리는 방법이 있다고 하지요. “채소가게 자식은 쑥쑥 올린다. 점쟁이 자식은 점점 올린다, 한의사 자식은 한방에 올린다, 성형외과 자식은 몰라보게 올린다, 구두닦이 자식은 반짝하고 올린다, 자동차 영업사원 자식은 차차 올린다, 백화점 사장 자식은 파격적으로 올린다, 목욕탕집 자식은 때를 기다리면서 올린다, 건설회사 사장 아들은 탄탄하게 올린다, 도선생의 자식은 슬그머니 올린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녀들은 어떻게 믿음의 지수를 올릴 수 있을까요? 주님을 바라봄으로... 말씀을 신뢰함으로... 믿음의 선배들을 모두가 그렇게 믿음의 지수를 높였습니다. 풍랑이는 바다 위에서도,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인생의 한밤중에도, 배가 깨져버린 그 순간에도 그는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바라볼 때 였습니다. 말씀을 신뢰할 때 였습니다. 그때 인생의 주름살이 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아픔과 고난의 바다에서 표류하고 있었으나 마음의 주름살이 다 펴졌습니다. 

마음의 주름은 작은 데서도 생기고 큰 데서도 생깁니다. 이민생활을 하다보면 얼마나 인생의 주름살이 생깁니까? 요즘처럼 경기가 안 좋을 때는 더욱더 그러하지 않습니까? 인생의 풍랑이 힘들지만 그 주름은 의외로 간단하게 풀립니다. 우리가 충만해 지면 가능해 집니다. 충만한 한 사람이 서있었을 때 300명 가까운 사람들이 힘을 얻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교부였던 이레니우스는 그렇게 말합니다. “살아있는 충만한 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살아있고 충만한 엄마, 살아있고 충만한 아빠, 살아있고 충만한 목회자, 살아있고 충만한 직분자....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충만한 한 사람이 거기에 있어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들은 함께 말씀을 듣고 일어섭니다. 실망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믿음의 지수를 올렸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어떻게 믿음의 지수를 올릴 수 있을까요? 이원규 시인이 노래한 대로 답은 간단하게 나옵니다. 그는 인생을 “겁나게와 잉 사이”로 규정합니다. 그 사이에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전라도 구례 땅에는
비나 눈이 와도 꼭 겁나게와 잉 사이로 온다
가령 섬진강 변의 마고실이나
용두리의 뒷집 할머니는
날씨가 조금만 추워도, 겁나게 추와불구마잉!
어쩌다 리어카를 살짝만 밀어줘도, 겁나게 욕봤소잉!
강아지가 짖어도, 고놈의 새끼 겁나게 싸납소잉!

조깐 씨알이 백힐 이야글 허씨요
지난봄 잠시 다툰 일을 얘기하면서도
성님, 그라고봉께, 겁나게 세월이 흘렀구마잉!

궂은 일 좋은 일도 겁나게와 잉 사이
여름 모기 잡는 잠자리떼가 낮게 날아도
겁나게와 잉 사이로 날고
텔레비전 인간극장을 보다가도 금세 
새끼들이 짜아내서 우짜까이잉! 눈물 훔치는
너무나 인간적인 과장의 어법

내 인생 마지막 문장
허공에라도 비문을 쓴다면 꼭 이렇게 쓰고 싶다
그라제, 겁나게 좋았지라잉!

사도바울의 가슴에도 지금 그 고백이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겁나게 고맙구마잉...” 풍랑이는 바다 위를 헤쳐가고 있는데, 인생의 캄캄한 한밤중을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거기에 함께 계셨습니다. 세상적으로는 실패한 것 같고, 외로운 노년에 혼자서 가고 있는 것 같은데 거기에 주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죽을 것 같은데 하나님 앞에, 말씀 앞에 무릎 꿇게 하시는 성령님이 거기에 함께 계셨습니다. 그 놀라운 임재와 감격 때문에 그는 그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지요. “겁나게 좋지라잉...” “겁나게 행복해 부러라잉...” 그 고백이 있을 때 인생의 주름살이 다 펴집니다. 

지난 오월 주일 아침, 저는 새벽 일찍 일어나 그날 충주에서 전할 두 편의 설교 말씀을 다시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습관대로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찬양을 켜놓고 있었습니다.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찬양곡이었습니다. 말씀 준비를 마친 후 아침 일찍 출발하려고 하는데 다림질이 된 와이셔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셔츠를 꺼내 다림질을 하다가 듣고 있던 찬양에 그만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그날 아침의 단상을 시로 적어보았습니다. 

오늘 전할 설교 다시 점검하고
아내가 없는 아침
해야 할 일 한 가지 더
셔츠 다림질

많이도 구겨진 셔츠가
꼭 내 얼굴 같다
내 마음 같다
다리미 지나가는 길목마다
모든 주름 
다 펴진다

"우리 모두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안을 누리시라“

눈물로 찬송 따라 부르며
내 인생의 주름도
내 속의 모든 부끄러움도
이렇게 펴주옵소서
눈물의 기도 올린다

기러기 아빠의 일상은 늘 눈물이다
그리워서 울고
부끄러워서 울고
죄송해서 울고
감사해서 울고

이른 아침
구겨진 마음과 영혼
활짝 다 펴진다
그렇게 눈물 머금고
달려가는 오늘
말씀 전하러 가는 길이 행복하다.

그렇습니다. 오늘 삶의 자리가 아무리 어려워도, 아무리 답답해도, 아무리 힘이 들어도... 예수님 만나고 나면 인생의 주름살은 펴집니다.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안을 누리시라. 풍랑과 고난 가운데 서있다 할지라도 전심으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전심으로 그분을 신뢰하게 되면 인생의 주름살은 다 펴집니다. 이 아침 우리도 고백할 일입니다.

이 땅 위의 험한 길 가는 동안 
참된 평화가 어디 있나 
우리 모두 다 예수를 친구 삼아 
참 평화를 누리겠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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