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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 안에서 벗겨지는 수건 (고후 3: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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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 벗겨지는 수건 (고후 3:13-18)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과 기능은 성삼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에 있습니다. 예배의 3요소는 찬송과 기도와 말씀입니다. 셋 중에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은 물론 말씀, 즉 설교입니다. 

설교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설교는 성경 본문을 해석하여 작성하고 이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본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하기 위해 우리는 필연적으로 해석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성경 해석은 성경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와 연결됩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핵심은 단언컨대 ‘예수 그리스도’ 입니다. 성경은 매장 매절이 다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신구약 1,189장 31,175절 하나도 예외없이 모두 예수님 이야기, 즉 예수님의 초림, 예수님의 재림, 그리고 예수님 신앙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의 강단들은 어떠합니까? 성경이라는 무궁무진한 영적 보화가 담긴 광산에서 거기 담긴 귀한 보배인 예수님 메시지를 제대로 캐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보화가 담긴 금광에서 기껏 석탄이나 캐다가 지쳐 스스로 폐광을 만들고 있지나 않습니까? 예수님 아닌 세상 지식, 도덕, 윤리 이야기 등으로 강단을 채우므로 강단과 교회를 스스로 황폐화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잃어버린 성경을 다시 찾는 것이 16세기 종교개혁의 핵심이라면, 교회 갱신과 회복이 절실한 이 시대에 성경에서 예수님을 다시 발견하고 예수님 선포를 되찾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 교회 개혁의 핵심이 될 것입니다.  

신약 성경의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 바울, 요한은 모두 예수님으로 구약을 해석하였습니다. 모든 성경, 특히 구약은 예수님을 알리는 시청각 교재입니다. 구약의 모든 인명, 지명, 사건, 제도, 동식물, 사물 등은 예수님을 말하는 수단입니다. 구약의 율법, 역사, 시가, 예언 모두 예수님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드러냅니다.  

물론 신약은 사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그리고 계시록까지 모두 예수님을 직접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 세계 강단은 가톨릭의 다원주의 배교 설교, 유럽의 자유주의 설교, 미국의 세속주의 설교 등으로 처참하게 허물어져 가고 있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거기에 성경 해석의 대원리인 문자적, 문법적, 역사적 해석에 정체되어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 안에서 벗겨지는 수건에 관한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앞 단락에서 새언약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사도로서의 확신과 긍지에 대하여 기술하고, 이제 본문에서 사도로서의 자신의 사역의 명백성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 전파의 개방성을 출 34:29-35에 언급되어 있는 사건, 곧 모세가 얼굴에 수건을 쓴 것과 대조하여 설명합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과 오래 대면하고 하산할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발했습니다. 그 영광 때문에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 보기를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출 34:40). 모세는 백성에게 율법 선포를 마치자마자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웠습니다(출 34:33,35). 

왜 수건을 얼굴을 가리웠습니까? 표면적인 이유로는 광채나는 모세의 얼굴을 백성들이 개인적으로 응시할 때 갖는 두려움을 제거해주고자 했겠지만, 보다 깊은 이유로는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는”(고후 3:13) 목적에서였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수건이라는 매개체를 모세로부터 분리하여 이제 구약 성경을 읽는 이스라엘에게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모든 성경은 예수님으로 보아야 한다’는 표어를 좀더 확실히, 그리고 논리적으로 생각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받으면서 아직까지 우리에게 덮여져 있는 수건이 벗겨지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1. 구약은 예수님 안에서 수건이 벗겨짐 (= 예수님으로 해석, 예수님 유일 해석) 

14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6절=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여기 ‘수건’(칼륌마)은 ‘덮다, 숨기다’란 의미를 지닌 동사(칼륍토)에서 유래한 표현입니다. 단어의 의미, 그리고 문맥을 감안하면 ‘수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율법주의입니다. 사람들이 율법주의 때문에 구약의 본질을 보지 못합니다. 둘째는 문자주의입니다. 사람들이 문자주의의 틀로 인해 문자 속에 있는 본질적 의미를 깨닫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본질적 의미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이 지시하는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수건이 없어진다(14절)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을 알려면 구약성경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눅 24: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자신에 대해 기록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모세 오경과 선지서들 그리고 모든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을 읽을 때 철저히 예수님의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그래야 수건으로 덮인 것처럼 모호한 모든 의미가 뚜렷해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수건이 없어짐’의 의미입니다.

16절에서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는 말씀도 14절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 두 절을 비교하면 ’주께로 돌아가면‘과 ’그리스도 안에서‘가 대응되고, ’벗겨지리라‘와 ’없어질 것이라‘가 대응됩니다.  

즉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님께로 돌아가 예수님 안에서 성경을 볼 때 구약이 온전히 해석된다고 역설하는 것입니다.

성경 해석에 대해 사도 바울이 강조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의 해석입니다. 문자주의 해석, 문법적, 역사적 해석이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성경적 해석이란 ‘예수님으로 모든 성경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의 강조점은 구약성경이 예수님을 담고 있으며 예수님 사건을 예표한다는 데 있습니다. 구약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입증해주는 내용이라는 것, 예수님 안에서 구약의 참 의미가 발견된다는 것이 바울의 강조점입니다. 

성경은 모두 예수님으로 보아야 합니다. 문자주의의 수건을 벗어버리고, 성경 속에 가득한 예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 초림의 영광, 예수님 재림의 영광, 그리고 예수님 신앙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특히 구약을 읽을 때 모든 본문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형상을 더욱 닮아가는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2. 완고한 자는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함 (= 예수님으로 보지 못한 유대인 심판) 

14절=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 

15절=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여기 ‘마음이 완고하여’에서 ‘마음’(노에마타)은 주로 인지(認知), 사고 등 지적 기능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그리고 ‘완고하여’라는 말은 피부에 각질이 생기고 뻣뻣해지고 딱딱해지는 것과 같은 모습, 딱딱한 돌의 모습을 나타낼 때 쓰입니다. 이상의 표현을 통해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의 어리석음을 부각시킵니다.  

구약성경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예수님으로 가득 채워져 있지만 유대인들은 이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구약성경에서 문자적 내용과 역사만 볼 뿐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돌처럼 딱딱하고 완고합니다. 그리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정말 딱한 노릇입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의 의미가 전달되어 옵니까? 출애굽 당시 호렙산 위에서 하나님과 대면했던 모세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광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광채는 일시적인 것이었기에 점점 사라져 가는 광채였습니다. 모세는 그 광채가 사라져가는 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 백성들에게 말씀을 전한 후에는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세의 수건으로부터 놀라운 영적 진리를 발견하고 이를 구약성경 해석의 원리에 적용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하나님의 광채가 나듯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의 광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수건 즉 문자주의, 율법주의로 그 광채를 가려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덮어버리고 문자주의, 율법주의로 구약을 읽은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구약을 보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15절). 그들은 문자주의, 율법주의로 책을 읽었으므로 모세의 글을 알지 못하였다는 말씀입니다. 모세의 글, 즉 구약성경 전체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이를 유대인들은 몰랐습니다. 수건을 책 위에 덮듯이 외면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악행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은 구약에 정통했지만 구약 속에서 예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 구약을 일치시키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그들을 완악한 자가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로인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고 결국 멸망을 당하였습니다.  

우리는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님으로 수건이 벗겨지지 않은 유대인들의 완고함이 얼마나 극악한 것인지를 실감나게 보았습니다. 당시 재판을 집행한 빌라도는 잔인하고 기회주의적인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보기에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태도는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들이 예수님 아닌 바라바를 선택했을 때 악명 높은 빌라도의 반응을 보십시오.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은 이런 빌라도의 물음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무조건 십자가에 못박아야 한다고 소리쳐댔습니다.  

어째서 이런 반응을 보이게 된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으로 구약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마음은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변모되고 만 것입니다. 

마 27: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고도 저주를 자청하는 유대인들의 완악한 모습을 보십시오. 어째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결과 유대인들은 완악한 자가 되었고,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의 침공을 받아 철저히 멸망당하였습니다. 110만명이 학살당했고, 9만7천명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후 근 2천년이 되도록 나라를 잃고 정처없이 떠돌이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때에는 아우슈비츠 형무소에서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당하다가 600만 명이나 학살되는 끔찍한 일을 당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구약 성경을 사랑하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그 안에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유럽의 교회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초기에는 위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전통 위에 서서 예수님을 증거했지만, 점차 예수님과 무관하게 철학적 학문적으로 다시 수건을 덮어버렸습니다.  

유럽 교회는 성경을 믿음으로 받고 구원의 말씀으로 받는 데서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학문적 연구 대상, 철학적 지식 내지 윤리 도덕 정도로 이해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과거 사도 바울의 전도를 처음 받은 아테네의 모습이 그러했는데(행 17:18-20), 이같은 모습이 재현되고 말았습니다. 위대한 종교개혁의 후예들인 유럽교회는 이제 건물만 덩그라니 남아 있습니다. 생명의 산실이어야 할 교회가 공동묘지처럼 되어버린 실정입니다.  

마음이 완고하여 예수님으로 수건이 벗겨지지 않은 결과가 이와 같습니다. 문자주의로 다시 수건을 덮어쓰면 화석처럼 딱딱해지고 생명의 진리를 찾기 힘듭니다.  

골 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을 사는 우리는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깨우쳐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 성경을 예수님으로 보지 못한 결과가 어떠한지 눈을 똑바로 뜨고 똑똑히 봐야 합니다.  

성경에서, 특히 구약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러할 때 사도행전 교회의 위대한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며,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는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3. 성경에서 주의 영광을 볼 때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함 (= 예수님으로 볼 때 변화의 삶--성화를 이룸)  

18절=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여기 ‘수건을 벗은’ 으로 번역된 원문 동사는 분사 완료형으로서, 완전히 수건이 벗겨지게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는 예수님으로 성경을 볼 때 영안을 가리는 어리석음이 벗겨지며 문자 속에 있는 예수님의 진리를 확고하게 깨닫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다’ 라고 했는데 이는 예수님으로 성경을 보는 모든 이들입니다. 과거의 수건을 벗고 주님의 영광을 대면한 이는 모세 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주님의 영광이 어떠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을 사모함으로 거룩해집니다.

‘거울을 보는 것 같이’는 또 무슨 뜻입니까? 수건을 벗고 성경에 나타난 주님의 영광, 예수님의 영광을 밝히 바라보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으로 구약의 모든 구절, 모든 내용을 보면 주님의 영광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라는 말은 수건을 벗기고 성경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되면 우리도 얼마든지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경에서 주의 영광을 볼 때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찬란한 영광의 광채를 목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눈을 여시고 눈의 비늘 같은 것을 벗기셨습니다. 전에는 바울의 그 눈에 예수님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나 이제 구약성경을 펴는 곳곳 마다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쓴 서신서들은 모두 구약에 나타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신령한 눈으로 발견하고 이를 우리가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쉽게 플어 쓴 것입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처 사라에게서 하늘의 예루살렘을 보았고, 하갈에게서 땅의 예루살렘을 보았습니다(갈 4:24-26).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반석을 만나 거기서 생수를 마셨던 사건으로부터 예수님을 보았고,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고 과감하게 선포했습니다.   

마침내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는 삶,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예수님의 찬란한 영광을 보았던 사도 바울로 인해 유럽 땅에는 진리의 태양이 떠 올랐습니다. 

바울의 삶은 그 자체가 태양처럼 찬란한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의 출발점은 바로 구약에서 예수님을 보는 데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이처럼 위대한 결과를 이룩하게 됩니다. 바울은 문자적, 문법적, 역사적인 문자주의의 방식을 따라 구약성경을 보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문자주의의 벽을 뛰어넘어 상징의 세계를 알고 예수님으로 성경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성경에서 예수님을 보면 예수님처럼 거룩함을 입게 됩니다. 

성화는 사람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노력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과거 율법에 그토록 열심내었던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거룩한 자들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 안에 있는 죄성, 그 안에 부패한 본성은 결코 인간의 노력만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스스로 윤리적 도덕적인 노력만으로 거룩해지려 하면 그 결과는 자기 의를 내세우는 교만으로 귀결될 뿐입니다. 교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귀의 속성이 아닙니까? 

성화,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반드시 이루어야 할 영적 과업이며 구원의 자연스런 결과입니다. 이 일은 결코 인간의 자의적인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온 성경을 예수님으로 보기 시작하십시오. 구약에서도, 신약에서도, 그리고 계시록에서도 태양과 같은 광명으로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십시오. 주님의 인도를 따르며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의 빛 가운데 거하십시오. 

그리할 때 비로소 참된 의미의 성화가 이루어집니다. 그토록 원하는 예수님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대 한국교회 강단에 가장 필요한 것은 설교에 예수님이 주인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히 선포되고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 신앙이 온전히 선포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4장 12절의 말씀처럼,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혼과 영,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며 마음의 생각과 뜻이 감찰되어 사람의 밑바닥부터 철저히 바꾸어지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설교자는 예수님으로 성경을 보고 이를 설교하고 선포해야 합니다. 그리고 회중은 설교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생수를 마시고 또 마셔야 합니다.  

그러할 때 말씀이 전하고자 하는 예수님의 생기(활력)로 인해 혼과 영, 관절과 골수까지도 찔러 쪼개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마음의 생각과 뜻이 관찰되어 세속화의 물살은 썰물처럼 물러나버리고 위대한 변화, 성화의 역사가 밀물처럼 밀려들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 회중 가운데, 성도들의 심령과 삶 가운데 거룩한 예수님의 형상이 새겨지고 드러나는 역사가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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